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 - 표트르 대제에서 푸틴까지 러시아 동진의 역사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12
크리스 밀러 지음, 김남섭 옮김 / 너머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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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우리는 머슴이자 노예였지만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주인으로 가게 될 것이다."

(In Europe we were hangers-on and slaves, whereas we shall go to Asia as masters.)

☞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작가의 일기(Writer’s Diary), 1881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느듯 4년째를 앞에 두고 있던 2024년 11월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가 떴다.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한 쿠르스크 전선에 뜬금없이 북한군이 등장했다는 소식이었다. 반년 전인 6월 19일 개전 이후 크렘린 궁전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푸틴이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김정은과 러시아-북한 조약을 맺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로 약속을 얻어낸 결과였다. 실제로 북한은 여태껏 그러했던 것처럼 소수의 군사 고문단으로 생색내는 대신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냈다. 실전으로 단련된 우크라이나군 정예부대들을 상대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결국 쿠르스크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세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째서 푸틴이 벨라루스나 투르크메니스탄같은 구 소련 시절의 속국들이 아니라 굳이 북한의 손을 빌렸는지 복잡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우리로서는 두 나라의 밀월이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답답한 사실은 러시아의 행태를 보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양 손놓고 태평스럽게 강건너 불구경하는 우리네 정치하는 양반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지만 말이다. 만약 요근래 중동에서 크게 사고 친 트럼프가 타이완더러 최신 무기 줄 테니 이란 해협에 군함을 보내라고 했다면 당장 중국이 발끈했을 것이다.

쿠르스크 전역에서 북한군. 어떤 의미에서는 북한판 '나선정벌'이기도.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먼저 북한을 적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의 참전은 러시아의 용병일 뿐 아무런 국제적 명분이 없을 뿐더러, 엄연히 유엔 결의 위반임에도 케이블 TV에서 자칭 전문가들이 해묵은 북한 위협론으로 국민들을 겁주는 것 이외에 러시아에 경고는 커녕 변변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 주소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북한이 7천 km나 떨어진 이역만리의 쿠르스크까지 대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기 때문이다. 쿠르스크가 어디에 붙은 동네인지조차 몰랐을 북한군 병사들은 푸틴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그곳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러시아는 정말 큰 나라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서쪽의 발트해에서 극동의 베링해협까지 동서 길이는 1만km가 넘는다. 비록 넓은 영토 대부분은 사람 살기에 너무 춥고 척박하여 거의 텅 빈 공간이기는 해도 말이다. 손바닥만한 땅에 수천만명의 사람이 부대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와는 천양지차랄까.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가 훨씬 더 큰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 원래 러시아의 뿌리는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공국이다. 키에프 루스국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공국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만 해도 듣보잡의 약소국이었지만 17세기에 오면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표트르 대제가 제국을 선언했을 때 이미 시베리아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베링해를 넘어서 북미 대륙으로 진격했다. 1867년에 단돈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겼다는 알래스카 조약은 유명한 사건이지만 알래스카만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심지어 하와이까지도 러시아 땅이 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명청 시대 해금령을 선언했던 중국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본질을 해양국가가 아니라 대륙국가로 규정했고 바다 너머에서 힘에 부치는 모험을 벌이기보다 시베리아 경영과 서쪽과의 투쟁에 힘을 쏟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무조건 크면 클수록 알흠답다"라고 여기는 오늘날 러시아인들로서는 그 시절 조상님들의 근성이 부족하다 어쩌구 할런지 모르지만.

작년 말 너머북스에서 나온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는 러시아 제국의 창시자였던 표트르 대제가 처음 동쪽으로 눈을 돌린 이래 푸틴에 이르기까지 3세기 반에 걸친 동방을 향한 러시아 불곰의 야심차고 파란만장했던 동방 모험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인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 및 경제 전문가로서 2023년에는 <칩워>라는 책을 출간하여 국내에서도 선풍을 끌었다는데 읽어보지는.

이 학자 풍의 말라깽이 아재가 저자. 대표 저서인 <칩워>는 삼성전자가 있는 우리와도 밀접한 주제다보니 한국에서도 엄청 팔렸다고.

이 책은 1697년 러시아 제국의 동쪽 끝인 캄차카 반도에서 러시아 탐험대가 우연히 정체불명의 남자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은 엉뚱하게도 그리스인이라고 여겼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인이었다. '덴베에'라는 이름의 그는 오사카의 무역상으로 에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머나먼 모스크바까지 압송되어 표트르 대제를 알현하게 된다. 모스크바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일본인이자 러시아와 극동의 섬나라 일본의 첫 접촉이기도 했다. 마치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랄까.

표트르는 유렁 왕실들 및 기독교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과 외교를 수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가적 업무를 잠시 뒤로 미루어 일본인 표류민을 만날 시간을 냈다. 1702년 1월 8일 표트르는 자신의 별장에서 덴베에를 접견했다. 별장 자체는 표트르 대제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서구의 건축 전통을 참조했을 뿐만 아니라 가로등같은 최신 유럽 기술을 접목했고 표트르 개인의 전쟁 게임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작은 성채도 있었다. 유럽 기술에 대한 매료와 전쟁에 대한 사랑이라는 차르의 두 가지 특징이 묻어나는 거처에서 표트르가 덴베에를 맞이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리고 덴베에는 흔히 간과되던 표트르 통치의 세번째 측면, 즉 머나먼 동방 땅에 대한 관심을 의미했다. - p.21

1724년 12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표트르는 평생 질시하며 동경하던 서구가 아닌 아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한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북극해를 통해 중국과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방안을 깊이 고려해왔습니다." -p.22

두 사람의 만남이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건간에 러시아는 영토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숨기지 않으면서 동쪽으로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미국 개척민들이 마차 타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신생 미국의 영토를 넓혀나갈 때 러시아인들 또한 베링해협을 넘어서 알래스카를 지나 캘리포니아로 행진했다. 북미 대륙은 러시아와 미국, 영국령 캐나다로 삼분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세 나라의 운명은 지금과는 완전히 바뀌어졌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먼저 꼬리를 내린 쪽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심장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차르는 스스로를 아시아에서 징기스칸의 후예가 아니라 유럽 군주의 일원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867년 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와 러시아 주미 대사 에두아르드 데 스토클이 알래스카 판매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차르가 알래스카를 헐값에 넘겼다며 분개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가 개척한 영토라기보다 원주민 땅에 깃대만 꽂아놓고 뻔뻔하게 주인 행세를 하면서 멋대로 돈 받고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로서는 어차피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동방 정책은 오락가락하고 원칙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의 땅에 대한 욕심을 순순히 접지도 않았다. 때로는 황금알을 얻기도 했고 뼈저린 댓가를 치르기도 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에 직면한 청조를 압박하여 연해주를 뜯어간 러시아는 만주까지 탐내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한방 먹고 체제가 붕괴될 뻔했다. 볼셰비키들은 중국에서 세계 혁명의 기회를 노렸지만 장제스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1939년 가을 노몬한에서는 숙적 일본과의 리매치전에서 완승을 거두기도 했다. 어지간히 쓴맛을 봤는지 일본은 두번 다시 시베리아를 넘보지 못했다. 스탈린의 관심사는 항상 동쪽보다 서쪽이었지만 일본이 패망했을 때 동쪽에서 자기 몫을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우리의 분단이었다. 저자는 500여 페이지에 걸쳐 성공과 실패의 파란만장했던 러시아 동진 350년사를 흥미롭게 다룬다.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러시아 선박은 레자노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세계 일주 항해 중에 타고 있던 나데즈다호와 네바호였다. 1802년 6월 두 배는 하와이 해안에 정박했고 이 섬들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식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러시아 방문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곳에서는 돼지고기, 빵나무 열매, 바나나, 코코넛, 타로 토란, 얌, 바타타, 소금, 나무, 물, 그리고 배에 비축하기에 특히 좋은 여러가지 물품을 풍부하게 구할 수 있다." - p.83

포트 로스와 알래스카 정착지는 몇 십년 동안 더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거의 무시당했다. 러시아인들은 왜 그것들을 신경써야 하는지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더 이상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공간을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1830년대 후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이사들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해달이 거의 멸종했다. 로스 정착지는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1841년 회사는 이 요새를 3만 달러에 매각했다. - p.101

무라비요프는 "잉글랜드인들이 그 금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사할린과 아무르 강 하구를 차지하고 말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염려했던 이유는 자문관인 발라소글로가 아무르강 삼각주와 북태평양 연안이 이집트에게 나일강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만큼이나 러시아의 미래에 핵심적인 지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무라비요프는 이 지역이 유럽 제국들의 팽창에 알맞은 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문제는 어느 제국이 그 지역을 차지하는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아무르강 하구에 영국 요새 대신 러시아 요새가 서 있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지배는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 p.127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러시아 지도자들의 주된 관심은 극동 지역이 러시아의 나머지 부분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국경 너머의 지역들 - 중국 만주와 청의 보호를 받지만 독립국인 조선 -은 러시아에게 더욱더 관심 밖의 존재였다. 러시아는 1880년대 중반까지 조선과 거의 무역이 없었다. 1880년대에 영국이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 러시아 관리들은 '불간섭 정책'을 주장했다. 러시아 해군 제독들은 당시에는 조선 해안에 항구가 생긴다 해도 러시아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 p.219

1927년 4월 스탈린이 평가했듯 국민당 우파와 우한의 국민당 좌파,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동맹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그들 우파가 우리의 말을 듣고 있는데 왜 우파를 쫓아내겠는가?" 국민당은 "철저히 이용되고 레몬처럼 즙이 짜인 뒤에 버려져야 한다." - p.309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은 군사적 균형에 대한 냉철한 계산이자 팽창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다. 차르 니콜라이의 제국은 복원되었다. 몰로토프는 한때 알래스카까지 꿈꾸었지만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알래스카가 여전히 크램린의 손이 닿지 않는다손쳐도 얻은 것은 많았다. 세계 지도가 새로 그려지는 가운데 크렘린은 소련의 힘을 아시아에서 확대할 새로운 기회를 감지했고 영토 확장의 가능성도 함께 보았다. "외무장관으로서 나의 임무는 우리 조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것이다."라고 몰로토프는 은퇴 후에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 p.374

두 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흐루쇼프는 아주 유치하다"라고 마오쩌둥은 선언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쉽게 속는다." 한편 소련 지도자들은 미국과의 대립 뿐만 아니라 버마, 인도네시아, 인도를 포함해 모스크바가 구애하고 있는 여러 탈식민지 국가들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베이징을 비난했다. 내부 회의에서 소련 지도자들은 중국의 도발이 사회주의 진영 내에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p.419

남한이 투자 자금의 주요 공급처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계속 있었지만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다. 1992년 옐친이 선언했듯 두 나라는 "이제 서로를 갈라놓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두 나라를 결속시키는 요소 또한 거의 없었다. 옐친은 서울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1983년 소련군이 격추한 대한항공 007 여객기 사건을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가 남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과 거리를 두었음에도 평양의 핵 프로그램은 서울로 하여금 안보의 주요 제공국인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가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 p.500

러시아 통치자들이 왜 거듭하여 아시아에서 기회를 찾으려고 했을까? 그 이유로는 중국과 일본의 거대한 시장, 시베리아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접근, 태평양으로의 출구, 자주 그렇게 여겨져 왔듯이 지정학적인 팽창과 영토 확장을 위한 공간,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오늘날 카라가노프가 러시아의 아시아 전환을 설명하며 말했듯이 "유럽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라시아적 출구"를 찾으려는 희망 등을 들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러시아의 아시아 국경은 온갖 거창한 계획을 펼칠 수 있는 열린 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 p.518


벌써 30여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예전에 불곰사업이라고 러시아제 T-80 전차와 BMP-3 장갑차가 국내에 들어와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 기억난다. 노태우 시절 북방 외교의 일환으로 구소련에 거액의 돈을 빌려줬다가 소련이 망하면서 못 받게 되자 그 대신 일종의 현물 상환으로 무기를 받아낸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가를 떠나서 북한조차 언감생심이었던 러시아제 최신 무기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에 호기심 어린 시선과 더불어 처음으로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우리에게는 놀라운 도약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밀덕들에게는 말이다. 소위 '러빠'들이 PC통신을 중심으로 한창 양성되기도. 우리 사회에서 러시아 붐이 불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로 유학갔다. 그 시절 러시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특히 통일이 된다면 북한을 거쳐서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횡단하는 시대가 열릴 거라는 장밋빛 환상을 품기도 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러시아를 얼마나 아는가. 얼마 전에 JTBC 비정상회담에도 출연한 바 있는 러시아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라는 책을 읽었다. 여기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러시아란 금발 미녀와 보드카, 푸틴이 곰을 붙잡고 헤드락을 거는 나라"라고 하더라. 우리의 대외 무역에서 러시아는 10위권에도 속하지 못한다. 별로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 더욱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폭발과 함께 양국의 경제 협력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그 와중에 푸틴이 우리 대신 북한을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로 선택한 것은 단순히 코드 맞는 독재자들끼리의 야합만이 아니라 30년 북방 외교의 실패이자 여전히 좁은 한반도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우리 외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21년에 씌여졌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푸틴과 김정은의 결탁에 대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서쪽에 집중하다가도 기회가 될 때마다 동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유럽에서 우리는 2류였지만 아시아에는 우리가 1류가 될 것이다."라는 게 러시아인들의 오랜 갈망이라고 강조한다. 설령 기대만큼 큰 재미를 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과 극한 갈등을 빚고 있는 푸틴이 서쪽 대신 동쪽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고 나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미국과 중국이 단단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우리로서는 러시아가 언제 중국, 북한과 손을 잡고 이빨을 들이댈지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여전히 멀고도 먼 나라 러시아의 동방 야심을 경고한다. 한마디로 금발 미녀에만 눈이 돌아가서 안 된다는 것. '올초 글항아리에서 나온 러시아 제국주의 역사를 다룬 <로스트 킹덤>과 함께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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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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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하던 <마지막 황제>를 한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초기 서양인 감독이 자금성을 5주 동안 통째로 빌려서 찍었다는 이 영화는 청나라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눈을 통해서 격동의 중국을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궐앞에 수많은 신료들이 도열해 있는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은 엄청난 비주얼이었다. 당시 투자 유치와 이미지 개선에 진심이던 중국 정부가 열성적으로 지원한 덕분. 심지어 톈안먼에 걸린 마오 수령의 대형 초상화까지 뗐다고. 참고로 톈안먼 사태 터지기 2년 전 영화. 중국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요즘처럼 호주머니 두둑하고 목에 힘주는 시진핑 시대라면 어림없는 소리겠지.


영화에서는 할머니 격인 서태후에 의해 생후 34개월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푸이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며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는 과정을 인간적인 동정심을 섞어서 묘사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본다면 꽤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당장 앞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만 하더라도 푸이가 즉위한 그 자금성을 향해 사방에서 성난 농민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또한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는 청군에 투항한 항장 오삼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원래 망국의 황제들이란 최후가 썩 좋지 않은 법이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는 길로틴에서 목이 잘렸으며 청조가 망한 지 6년 뒤 러시아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어쨌든 푸이는 옥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럭저럭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다. 하물며 그 시절 가축과 다를 바 없었던 대다수 중국 민중의 삶에 비하면야.

말년의 푸이(가운데)와 루쭝린(왼쪽), 슝빙쿵(오른쪽) 루쭝린은 원래 군벌 출신으로 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장본인이고 슝빙쿵은 신해혁명의 서막인 우창봉기를 일으킨 인물. 공산당에 의해 연출된 사진이기에 저 어깨동무가 어디까지 본심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듯.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푸이로서는 말년이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제 의지대로 살았던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지.


청조는 푸이 대까지 갈 것 없이 진작에 망할 수도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시원하게 아작나면서 처음으로 콧대 높은 중화의 존엄이 짓밟힌 이후 청조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 동네북 신세였다. 그 중에서도 태평천국의 난은 이자성이 명나라를 끝장낸 것처럼 청조를 거의 결딴낼 뻔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영국, 프랑스는 청나라의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톈진을 침공했고 함풍제는 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청조는 우여곡절 속에서 버텨냈고 반 세기나 더 살아남았다. 서태후를 가리켜 '중국 3대 악녀'라느니 청조를 말아먹은 여편네쯤으로 불리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황제의 무능함을 죄다 주변 여자 탓으로 돌리기 십상인 중국 남정네들의 뿌리깊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그 거친 아재들은 어디가고 온실 속 화초처럼 담작고 심약한 사내들만 가득했던 만주족 황실에서 그나마 강단이 남아 있는 여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국지 초반에 동탁에 의해 제거되는 하태후마냥 그 바닥에서 진작에 퇴장당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보수반동의 전형으로 꼽혔지만 청 말 자강운동은 그녀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신장성을 도로 복속하고 갑신정변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모처럼 청조의 위엄을 보여주어 우리 아직 안 죽었음을 뼈저리게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청조를 찬탈하는 위안스카이조차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족의 도전과 외세의 핍박 속에서 다 쓰러져가는 청조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구심점이었으며 서태후가 죽자 청조도 망했다.

근래에 와서 '권력과 사치의 대명사'라는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면 되지"라고 했던 마리 앙투와네트의 유명한 말이 가짜뉴스였던 것처럼 서태후의 실정 또한 캉유웨이를 비롯해 그녀를 원수로 여겼던 한족 지식인들에 의해 상당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권력 농단으로 중국에 지울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악녀는 마오의 경박한 황후인 장칭이었다.


반대로 청조는 태국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 난의 재앙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희 신정으로 서태후 말기에 오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진짜 실수는 사치나 개혁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 세 살 짜리 어린아이를 옥좌에 앉혔다는 사실이었다. 푸이를 대신하여 섭정이 된 순친왕 짜이펑 또한 서태후에 비하면 20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만주족들 또한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조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토벌하여 일벌백계할 수 있었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마냥 야심 넘치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군권을 넘김으로서 자폭한 꼴이 되었다. 만약 순친왕이 좀 더 현명했거나 위안스카이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더라면 청조는 살아남았을까. 러시아나 오스만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자강에 노력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난성의 촌놈인 마오쩌둥은 동네 선생 노릇하다가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오늘날 시진핑이 트럼프와 대립각 세우는 동아시아는 좀 더 평온할까.



새해 벽두부터 중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눈 여겨 볼 신작이 나왔더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천국의 가을>은 아편전쟁 이후 내우외환에 허덕이던 청조 최대의 위기인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플랫은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중국사 교수라고. 주로 청나라쪽 역사를 다루는 모양.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중국 전토를 전란의 불길에 빠뜨렸다. 서북과 동북을 빼고 중원 18개 성 중에서 17개 성이 휘말렸으며 죽은 사람이 2천만명에서 많게는 8천만명까지 추산되어 당시 4억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의 거의 1/5에 달했을 정도.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기세. 가장 특이한 것은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이 중국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느 농민 반란군과 달리 기독교에서 파생한 사이비 짝퉁 교주였다는 사실.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도 많이 있지 않남. 차이가 있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대신 '멸만흥한'을 외쳤다는 점. 하지만 서양과 한족 양쪽 모두를 내편 삼으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두 마리 물고기 모두 놓치게 되면서 결국 패망했지만 말이다.

전성기 시절 태평천국 판도. 한때 중원의 태반을 지배하고 베이징 코앞까지 육박하기도. 하지만 사이비 짝퉁 교리의 한계와 지도부의 내분, 홍수전의 리더십 부족으로 중국판 메이지 유신을 여는 데 실패함으로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중있는 쪽은 홍수전이 아니라 그의 사촌이자 태평천국 5천왕 중 한 사람으로 홍콩과 상하이에서 외국인 선교사 밑에서 서양물 먹고 서구식 근대화를 외쳤던 간왕 홍인간이다. 서구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성경으로만 서양을 접한 동료들에 비하면 좀 더 깨였다는 것. 참고로 중국에서 철도와 보험 도입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이세계에서 산업혁명을 하자는 얘기였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에 실현되지 못했다. 원래 이론과 실천은 별개인지라. 그보다도 본인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를 써먹은 것이지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보니 주변 사람들로서는 뭔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것이다. 오히려 청조 관료들 중에서 그의 저서에 주목하여 시도해 본 게 양무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한테 폭망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수박 겉핡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만 증명한 셈. 어쨌든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운 모양.

홍인간이 이야기했듯 언제나 돋보였던 인물은 그의 사촌인 아홉살 연상의 홍수전이었다. 그들은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로 이웃한 마을에서 살았다. 맑은 날이면 광저우 동북쪽에 위치한 바이윈 산이 보일 만큼 광저우에서 가까운 마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 사이로 과거에 세도가였던 한 씨족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그들 중에서 고관과 황제의 참모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가난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다. - p.61

어떤 중국인도 쉽게 칭찬하지 않았던 레그는 홍인간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품었고 그를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하고 다재다능한 중국인"이라고 묘사했다.레그의 딸도 이를 뒷받침해 까탈스러운 자기 아버지가 홍인간에 대해 "다른 어떤 중국인에게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특별한 애정과 따뜻한 감탄"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홍인간의 성품에는 그와 함께 일한 많은 선교사들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를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물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 p.72


이 책은 광둥성의 하카족(객가인)이자 과거 4수생이었던 홍수전이 낙방의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느닷없이 신내림을 받았다더니 중생의 구원을 외치며 세상에 나서는 것부터 14년 동안 벌어지는 태평천국의 파란만장했던 흥망성쇠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태평천국군은 오합지졸 도적떼에 불과한 황건적이나 나중에 등장하는 동네 양아치 집단인 의화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5명으로 구성된 1개 분대부터 5개 분대가 1개 소대를, 4개 소대가 1개 중대를, 5개 중대가 1개 여단을, 5개 여단이 1개 사단을, 그리고 5개 사단이 1개 군을 구성했다. 서구식 사단에 해당하는 1개 군은 1만3천여명에 달했다. 군사 편제가 명나라 시절에 머물렀던 청군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게다가 엄격한 규율과 서양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서양제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기강 빠진 청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은 겁 많고 무능한 함풍제의 청조를 교체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중국을 양분하여 북부보다 훨씬 풍요롭고 한족들이 사는 남부를 통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주원장의 홍건적과 차이가 있다면 한족 사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서구 열강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었다. 홍콩과 상하이를 통해 중국에 발을 걸친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반란군이 캐캐묵은 공자 대신 기독교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자신들의 판돈을 청조가 이기는 쪽에 걸기로 했다. 후난 성의 한족 관료인 증국번은 나약한 청군을 대신하여 '상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고 거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태평천국군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인다. 태평천국을 파멸시킨 것은 청조의 군사력이 아니라 증국번과 서구 열강이었다. 봉기 초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했던 홍인간은 홍콩과 상하이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성경 너머의 서양 문명을 배웠다. 하지만 서구의 무관심과 태평천국 내부의 복잡한 권력 투쟁 속에서 그 인맥과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국의 몰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의 운명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엘프 주인공보다 훨씬 비극적이었다. 난징을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저자는 그 과정을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을 통해 서사적이고 흥미롭게 묘사한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고 재빠른 몽골인 기병대는 다가오는 연합군의 왼쪽 측면을 향해 넓은 파도를 이루며 돌격했다. 연합군은 좌측에 기병대, 중아에 포병대, 우측에 보병대, 이렇게 세 개의 열을 이루며 진군했다. 중앙의 포병대가 돌격하는 몽골인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들의 방향을 틀자 영국과 프랑스 기병들이 재빨리 흩어지며 비켜섰다. 그러자 암스트롱포들이 다가오는 청국군 기병대 대열 한가운데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몽골 기병들이 혼비백산해 멈췄고 이 순간 영국 기병대는 전력을 다해 중앙부로 돌격하여 청군 방어선을 깨뜨렸다. - p.214

1854년 2월에 이르러 증국번은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된 육상 병력 13개 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수군 10개 대대를 갖추고 있었다. 수군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함대는 200척 이상의 전함, 군용 물자를 나르는 100척의 정크선, 크고 넓은 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만 아는 증국번은 전술 지휘관으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서툴렀고 말을 타는 것도 간신히 했다. - p.247

홍인간은 태평천국의 정치적 선전물을 쓰고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궁에 있는 서양식 납활자 인쇄기를 사용하여 그러한 선전물을 대량 인쇄했다. 그렇게 나온 출판물 가운데 어떤 것들에서는 산업화에 대한 그의 신념이 드러났다. 그는 철도, 기계식 무기, 증기선, 전신의 중요성과 전국적 신문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쇄기 자체가 그런 혁신의 하나였고 그의 인쇄 담당 인력은 외국의 가동 활자 기술을 손쉽게 익혔다. 그 인력은 반란군 수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축에 속했고 한 방문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 도시에서 종교적 열정이 가장 적은 축에 속했다. - p.302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매일의 쌀 배급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텃밭의 채소와 잡초는 남김없이 먹어치워버렸다. 쥐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 사라졌고 도시 안의 굶주린 사람 수천 명을 먹여살릴 것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9월 5일 그 도시로 들어간 승자들은 그 동안에도 안칭의 시장이 문을 닫은 적이 없음을 알고 경악했다. 인육의 가격은 마지막까지 600그램(1근) 당 은화 반냥, 즉 1파운드 당 38센트에 달했다. - p.394

반란군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했다. 하비 영사는 곧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닝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스란히 태평천국 군대의 수중에 있다." 그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정복이었다. 하비 영사의 예상과 달리 광범위한 학살은 없었다. 또한 청국군이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오기 앞서 불을 지른 것 말고는 화재도 없었다. 어느 정도의 약탈은 있었으나 반란군이 "굉장한 절제"를 발휘했다고 하비는 놀라워했다. 지휘관들은 전장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호적이었고 "모든 외국인과 우정 및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인 시민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 p.443

하비의 보고에 따라 이제 <타임스>는 영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태평천국을 괴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란군은 "우리와 우리의 황금 사과 사이를 가로막는 용"이 되었다. 편집진이 독자들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문제였다. 만약 상하이와 닝보의 차 시장이 태평천국에 의해 파괴된다면 영국 정부는 차 무역으로 얻는 꼭 필요한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야 할 것이며 랭커셔 섬유 산업 붕괴로 이미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차를 마시는 영국 사회 하층 계급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 p.509

당면한 전쟁의 압박으로 홍인간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 구성과 외교를 위한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군사 작전과 보급로 확보가 최우선이었고 그 전선들에서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그가 꿈꿨던 국가의 시작은 점점 멀어졌다. 철도, 법원, 무역중개소, 신문, 광산, 은행, 산업 등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개혁들은 모두 미뤄질 것이었다. 수도의 지도부를 단결시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군사적 패배가 짙어질수록 홍수전의 광기는 커져갔고 파멸의 조짐은 환영을 보는 그의 정신을 묵시록으로 몰아갔다. 그는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의지했으며 추종자들에게 함부로 보상과 영예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유주가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는 안될 시기에 수도의 관리들 사이의 다툼이 커지고 격해지고 있었다. - p.595

외국인이 마지막으로 홍인간을 본 것은 난징 함락 직전 후저우에서였다. 패트릭 넬리스라는 용병이 그곳에 있었는데 원래 셰러드 오즈본 함대의 선원이었으나 반란군에게 끌려가서 그 도시의 방어를 돕고 있었다. 7월 초였고 왕국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후저우의 성벽은 아직 버텨내고 있었다. - p.618

얼마 전에 읽은 <동인도 회사 : 제국이 된 기업>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 무굴 제국의 분열과 혼란상을 기회삼아 일개 기업에 불과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거대한 인도 대륙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째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차이는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질 때에는 동인도회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치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중국 내전에서 어느 쪽 편을 들지를 놓고 국가적 윤리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사이에서 주판을 두들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게 정치인과 상인의 가장 큰 차이일지 모른다. 상하이에는 '상승군'이라는 소규모 용병 집단 외에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조직한 세포이 부대와 같은 거대한 현지인 고용병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개입은 느리고 제한적이었으며 청조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지도, 애초에 그럴 의사도 없었다. 중국인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랄까.

저자는 태평천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지만, 과연 태평천국이 이겼더라면 이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고 여긴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과 달리 광둥성의 산골 촌놈들이었던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정체불명의 사이비 교리와 한족 천하를 되찾겠다는 슬로건 외에 근대 국가를 향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다. 이들은 머리를 깎거나 양복을 입는 대신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잘랐을 뿐이다. 하지만 신진 세력답게 청조보다는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금방 발기부전의 무기력증에 빠지는 중국 왕조사들을 보건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적어도 이건 분명하다. 태평천국의 난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머리 굳은 청조의 영감님들이 구태의연하게 추진한 양무운동은 젊고 활기왕성하며 뇌주름이 유연했던 일본 지도자들의 도전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만약 일본 또한 막부가 도막파를 꺾고 승리했다면 청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사다보니 중간중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눈에 띈다. 가령 p.617에는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증국번과 포로가 된 충왕 이수성을 가리켜 "백발의 두 총 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남북전쟁 말기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마주한 그랜트와 리를 연상케 하지만 이수성은 증국번보다 12살이나 아래로 당시 41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고생해서 얼굴이 좀 삭았다고 해도 백발 성성은 아닐 듯. 정작 이수성과 동갑인 이홍장에게는 p.459에서 "젊은 인재가" 어쩌구. 그럼에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역사책 중의 하나로 손꼽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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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 - 탐욕과 혼돈의 아수라
윌리엄 달림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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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장난으로 신천지 가는 티켓을 얻은 사회 낙오자가 등짝 뻘건 익룡에 올라타더니만 페라리 막토 어쩌구 하면서 족장 딸래미도 꼬시고 알콩달콩 가정도 만들고 나쁜 놈들 때려잡아 우리 동네 영웅이 된다는 잉여 인간 성공기를 다룬 영화 <아바타>에서는 RDA(자원개발관리국)이라는 블랙기업이 흑막으로 등장한다. <에어리언>의 웨이랜드 유타니와 더불어 대표적인 악의 조직으로 아직 세상물 덜 먹은 외계인들에게 지구 자본주의자들의 탐욕 쩐 근성을 뼛속깊이 새겨준다랄까. 그래봐야 주인공 보정 앞에서는 알짤없지만 말이다.


RDA의 정예 용병들이자 주인공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는 비운의 잡졸들. 원래는 원주민 토벌이 아니라 기지방어를 위한 경비병들이지만 "착한 나비족은 죽은 나비족"이라는 캐캐묵은 논리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참교육을 당하게 되는. 뇌가 근육이라.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머나먼 이역만리의 행성을 개발하는데 NASA나 유엔 산하의 범정부 기구가 아니고 일개 민간업체가 주도하여 지구인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게 내버려둔 것일까. 영화 <마스>나 <인터스텔라>를 보더라도 대개 지구 바깥의 일은 나사의 역할인데 말이다. 게다가 공무원들이란 잘해봐야 본전이고 잘못되면 내 책임이기에 쓸데없이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것이 만국 공통의 습성 아니던가. 판도라에서도 돈 독 오른 업자가 아니라 나사 공무원들이 맡았다면 자원 채굴 때문에 원주민들과 척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긴 그랬으면 주인공은 영화 내내 책상 위에서 도장이나 찍고 있었을 것이고 스토리 진행이 안되었겠지.


미국 공무원들이 <주토피아> 세계의 나무늘보들 현실판이라는 얘기도. 러시아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 그 동네 공무원들을 겪어보니까 일처리 느리기로 악명높은 러시아 공무원들보다 한술 더 뜬담서. 판도라에 이런 늘보들을 보냈으면 쿼리치 대령이 홈트리 폭격하겠다고 윗선에 허가받는데만 수개월은 걸렸을 듯. 그럼 비명횡사하지도, 바랑과의 썸도 없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주도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냉전 시절 미국의 아폴로 계획이 1972년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11년만에 중단된 것도 예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달성하자 열기 또한 금새 식었다. 그 다음은 혈세 낭비라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정치인들로서는 기약도 없는 달 정복보다 당장 다음 선거에 도움되는 사업이 우선인 건 당연하다. 반대로 정치논리와 무관한 게 기업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어떤 리스크도 감수한다. 대신에 물주들 입장에서 투자금은 확실히 뽑아야 하지만 말이다. 요근래 달에 다시 사람을 보내니, 화성을 개발하느니 하는 양반이 돈 없는 나사가 아니라 초갑부인 일론 머스크인 것도 이 때문인 셈.

실제로 이런 일은 수백여년 전 대항해시대에 벌어졌다. 풍요로운 바깥세계를 알게 된 유럽인들은 고향을 떠나서 배에 올랐고 숱한 댓가를 치르면서도 결국 신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개척민으로, 탐험가로, 상인으로, 또는 용병이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에서 일확천금을 얻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인도 회사'라는 기업이 있었다. 주주회사였던 동인도 회사는 군주 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투자금을 끌어모았고 리스크가 크고 자금 회수가 불확실한 초기 단계를 버텨냈다. 실패는 경험이 되어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영화 <아바타>처럼 도덕과 윤리는 개나 줘버리고 온갖 재앙을 안겨줬다지만 어쨌든 우리네 세상은 훨씬 좁아졌다. 이점이 정화의 원정과 근본적인 차이였다. 영락제의 전시성 사업이었던 정화의 원정은 거창했지만 권력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정치적 목적 외에는 실속이 없다는 점에서 아폴로 계획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물주 노릇을 한 황제의 죽음과 함께 원정 또한 끝났다. 중국인들이 제아무리 정화가 탄 거함이 콜럼부스의 배보다 훨씬 컸다고 자화자찬한들 그거 말고 뭐가 있는가.

생각의 힘 출판사에서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작도서 <동인도회사 : 제국이 된 기업>은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초거대기업 영국 동인도회사의 274년 흥망성쇠, 그 중에서도 무굴 제국 정복기에 대한 책이다. 중국과 더불어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인구 1억 5천명의 대제국을 손에 넣음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자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윌리엄 달플림(William Dalrymple). 영국 최고의 논픽션 도서상인 <베일리 기포드>와 <2020년 역사작가협회>를 비롯해 여러 도서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고 한다.


이 살집좋은 털보 아재가 저자인 윌리엄 달플림. 어릴 때부터 인도와 인연을 맺고 인도 역사를 주로 다루는 모양. 참고로 친가는 남작, 외가는 백작 가문에 찰스 국왕의 후처인 카밀라 왕비와는 무려 팔촌지간이라고. 만나본 적이 있을라나. 어쨌든 나름 금수저일세.


칼레 해전에서 12년 뒤인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동방 무역을 전담할 기업의 설립을 승인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탄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계 바다의 지배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었고 이들 눈에 영국은 위대한 항로에 겁없이 뛰어든 뉴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신세계 무역을 장악해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용병들을 고용하여 현지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광대한 식민지까지 건설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독한 수탈과 학살, 압제가 자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막장기업의 모티브인 셈. 영국의 유명한 격언으로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어쩌구하는 말이 있다던가. 인도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듯. "뻥치시네." 그 중에서도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뒤 인도에서 활약하여 출세길을 연 대표적인 인물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때려잡아 명성을 떨치게 되는 웰링턴 공작이었다. 쿼리치 대령도 어리버리한 부하넘이 원주민 처자와 눈 맞아서 배신만 때리지 않았어도. "영화라서 다행인줄 알어 이놈아!" 그래서 옛말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람서.

영국 리즈 시절 최대 판도와 동인도회사의 무역로. 뉴비로 시작해 바다의 정점에 서기까지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책은 런던 템스강 너머 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상인과 뱃사람들이 모여서 회합을 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동인도 회사의 창립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중에는 악명높은 사략선 선장이자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한 전쟁영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수립된 지 8년 뒤인 1608년 젖과 꿀이 흐른다는 낙원의 땅 인도에 당도했다. 원피스...가 아니라 향신료를 찾아 동방 무역에 뛰어들어 부와 명성, 힘을 얻겠다는 영국의 꿈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풋내기의 만용이었고 분수 모르는 짓을 하다가 호된 댓가를 치르기도 했다.

1599년 9월 24일,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서더크 글로브 극장으로부터 강 하류 쪽에 위치한 자택에서 <햄릿> 초고를 고심하던 때였다. 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거리 템스강 건너편으로 걸어서 2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잡다한 런던 사람들이 중간 문설주가 있는 무수한 튜더 양식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미로 같은 목조 건물에 모였다. - p.43

17세기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을 상대로 딱 한번 무력 사용을 시도했다가 처참한 결과를 맞았다. 무굴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던 차일드는 무력으로 대응하여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레든 홀가에 있는 이스트인디아하우스에서 "우리가 무역을 포기하거나 인도에서 잉글랜드 국민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국왕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칼을 빼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 결과 1686년 대포 200문을 탑재하고 병사 600명을 태운 전함 19척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함대가 런던에서 출정하여 벵골로 향했다. - p.76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무굴제국'이라고 배우지만 엄밀히 말하여 유럽인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 청이나 조선과는 달리 정식 국명은 아니라고 한다. 몽골의 현지식 발음이라나. 지배계층이 몽골계였기 때문. 칭기스칸의 씨앗이 여기까지. 그들 스스로는 인도를 가리키는 '힌두스탄'을 칭했다고. 즉, 인도 제국이라는 것. 어쨌거나 동인도회사가 도착했을 때 인도는 무굴제국의 위세가 절정이었다.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없던 이들의 겁없는 도전은 무굴제국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아우랑제브 황제는 철저히 짓밟은 다음 영국인들이 두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 마땅했지만 자비를 베푸는 쪽을 선택했다. 후손들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무굴제국은 신성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수많은 봉건왕국의 집합체였다는 점이었다. 1707년 황제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어 군웅들이 부유한 땅을 놓고 쟁탈하는 춘추전국의 난세가 시작되었다. 죽다 살아난 동인도회사에게는 실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아우랑제브는 1707년 2월 20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그라나 델리가 아니라 그가 발아래 굴복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성년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끝내 실패한 데칸 고원 중부 쿨다바드의 소박한 무덤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무굴 국가의 권위는 데칸에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고 위대한 전쟁 지도자 바지 라오가 이끄는 마라타 군대가 북쪽으로 향하면서 인도 중부와 서부에서도 점차 무너졌다. - p.87

"무굴인들의 정책은 형편없다."고 잉글랜드 출신 용병인 밀스 대령은 썼다. "그들의 육군은 더 형편없고 해군은 아예 없다. 이 나라는 에스파냐인이 아메리카의 벌거벗은 인디언을 압도한 것처럼 쉽게 정복당하고 지배당할지도 모른다." 마드라스의 신임 총독 토머스 손더스도 동의했다. "무어인들의 허약함은 기정 사실이며 어느 유럽 국가든 어지간한 군사력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면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20

무르시다바드가 무너지는 동안 무굴 수도 델리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승냥이 떼들이 앞다퉈 물고 뜯는 썩은 고깃덩이처럼 남쪽의 마라타 약탈자들과 북쪽의 아프간 침공자들이 번갈아 도시를 약탈하고 점령하는 가운데 델리에 아직 남아 있는 재물은 지나가는 군대의 간헐적인 먹잇감이 되었다. - p.241



북사르에서의 전투는 짧았지만 혼전을 거듭했고 희생자가 많았다. 회사는 전장에 배치한 7천명 가운데 850명을 전사나 부상, 실종으로 잃었다. 총 전력의 1/8이 넘는 셈이었다. 무굴 쪽 손실은 몇 배 더 컸다. 아마도 5천명 정도가 전사했을 것이다. 그날의 승패는 오랫동안 불확실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북사르 전투는 궁극적으로 인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으며 심지어 7년 전 더 유명한 플라시 전투보다도 더 결정적이었다. 무굴 세계의 3개 대군이 회사를 무찌르고 인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패배한 쪽은 무굴인들이었고 회사는 인도 북동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북사르 전투는 벵골과 해안지방에 대한 회사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그들이 서쪽 내륙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할 길을 열었다. 인도 해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거점들에서 활약하는 무역 회사일 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전반에 걸친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 제국을 지배하는 통치자로 거듭난 것이었다. - p.313

1770~1771년 벵골 기근이 절정일 때 회사 경영진은 무려 108만 6,255파운드를 런던으로 이전시켰는데 현재 통화 가치로는 1억 파운드에 달할 것이다. 1770년 여름이 끝날 때쯤 회사 정책이 초래한 결관느 너무 처참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캘커타 대저택에 틀어박혀 사는 가장 부유하고 둔감한 회사 관리들조차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 p.337

한동안 이사들은 인도인들의 군사적 역량이 급속히 향상되는 것에 갈수록 경각심을 느꼈다. 10년 전 플라시 전투 시절의 손쉬운 승리는 힘들어졌다. 회사의 초창기 성공을 이끌었던 군사기술, 전술, 규율 분야에서 인도의 각 세력이 유럽의 혁신을 따라잡는 데 30년 정도가 걸렸는데 1760년대 중반에 이르자 격차가 급속히 줄고 있다는 증거가 쌓였다. 이사들은 "원주민들이 전쟁 기술에서 이룬 지식의 진보는 벵골과 코로만델 해안 양쪽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면서 벵골 집행위원회에 "유럽인 장교나 병사들이 그나라 정부에서 복무하지 못하도록" 막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모든 군사적 향상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 p.367

드 부아뉴는 신디아의 마라타 군대에 높이와 발사 각도 조절이 가능한 나사로 최신식 시사와 조준 시스템을 갖춘 대포와 정교한 유럽식 군사 과학기술을 전수하고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이 분당 세발을 발사할 수 있도록 마라타 머스킷에 쇠막대를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세줄 대형으로 늘어선 보병이 구사할 경우 마라타 세포이들은 전례없는 살상력을 과시하면서 적에게 지속적인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어느 계산에 따르면 300미터 거리에서 부아뉴의 대대에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기병 대대는 세포이들의 총검에 도달할 때까지 대략 3천발의 총알에 직면해야 했다. - p.436

회사의 많은 비행들을 의회에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고 회사의 부패와 폭력, 매수를 만천하에 알리는데 일조함으로써 정부 감독과 규제, 통제 강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1773년 규제법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회사의 정치, 군사 업무를 정부 감독하에 둔 1784년 피트의 인도법이 한결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70년 뒤인 1858년에 회사의 전면적 국유화로 절정에 달하게 되는 그 과정의 조짐은 1784년에 이미 보이고 있었다. - p.465

더욱 놀라운 것은 티푸가 자체 선박과 상관을 보유한 사실상의 국유 무역회사를 설립했다는 점이었다. 티푸가 통상 부문에 발행한 무역 규제 문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며 그 안에는 스리랑가파트남을 통해 수입되거나 수출된 귀중한 품목들에 대한 국가 주도 무역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티푸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 파견한 외교 사절들에게 바스라 항에 농장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유럽인들처럼 해외 정착지를 확보하여 자국 선박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 p.472

영국인들에게 인도는 결코 손쉬운 정복지가 아니었다. 잉카나 아즈텍에 비하면 훨씬 강적이었다. 영국 인구가 다합해서 500만명 정도에 불과할 때 인도는 1억 5천만명이 살고 있었고 세계 GDP의 1/4을 차지했다. 만약 두 나라가 붙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정복당해야 할 쪽은 틀림없이 영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손 털고 나오거나 심지어 문을 닫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사들은 부패와 각종 범죄 혐의로 탄핵을 받았고 동인도회사를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안 로버트 클라이브는 자살했다. 역사책에서는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하면서 인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강조하지만 동인도 회사에게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인도인들은 유럽인들의 군사적 선진성을 빠르게 배워나가며 격차를 줄였다. 제랄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총, 균, 쇠>는 인도에서는 강점이 될 수 없었다. 인도인들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껍데기로 전락했지만 중부의 마라타 동맹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은 만만찮은 적수였다. 마이소르 왕국의 명군이었던 티푸 술탄은 유럽식 근대화 정책을 추구했으며 수차례 영국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었다. 특히 마이소르 로켓은 영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영국판 짝퉁인 콩그리브 로켓을 만들어 나폴레옹에게 써먹는다.

그럼에도 결국 인도는 영국의 노예로 전락해야 했다. 그보다 훨씬 인구가 적고 허약했던 신대륙의 식민지조차 비슷한 시기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했는데 말이다. 미국이다. 반면 인도는 18세기 말에 오면 파국은 초읽기였다. 1799년 티푸는 전사했고 마이소르는 정복당했다. 4년 뒤에는 인도 대륙의 절반을 지배했던 마라타 동맹마저 아사예와 델레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대세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편전쟁에서 보여준 청군처럼 무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군은 인도인들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도가 분열되었고 자금력에서 동인도회사가 월등했기 때문이라고. 여기에 아서 웰즐리, 즉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한 사람이 때마침 등장한 덕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1803년 9월 23일 인도 중서부에서 벌어진 아사예 전투. 백작가문의 희망없는 삼남으로 태어나 형에게 빌붙어 살던 아서 웰즐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인생 도약의 기회를 잡았지만 자칫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로서는 워털루 전투만큼이나 아랫도리 떨렸을 듯.


얼마 전에 읽은 모친이 한국인인 영국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영국>에서 영국 학생들은 "영국의 식민지배가 문명화의 기회 또한 제공했다."라고 배운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한국 방송에 출연하여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세계사에 나쁜 일이 있으면 대충 영국이 있다나.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본 극우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개 가해자들이 입에 담을 뻔뻔한 논리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있다랄까. 그것도 일부 네티즌만이 아니라 정치인, 대학교수가 말이다. 어차피 내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면 내 알 바 아니라는 소시오패스적인 심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식민지배란 국제 구호단체가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을 대가없이 돕는 자원 봉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지배자들이 식민지에 근대적인 공장을 남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 인력이 없다면 한낱 고철이자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의 산물이지 지배당하는 자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민지배는 자력으로 일어설 기회조차 박탈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본질을 호도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 세기 전 향신료를 바치라면서 인도인들을 채찍질하는 영국인들이 지금에 와서는 거꾸로 인도인들 눈치 보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격세지감일 듯.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가 비정상이었고 지금이 제 자리 찾아간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예전에 인도를 가리켜 누가 "한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고 했던가. 그 정도로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인도는 여전히 멀고 와닿지 않는 나라이다. 황당하고 기상천외한 발리우드 영화 빼고는 말이다. <무굴제국의 역사>와 더불어 이 책이 인도를 이해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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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 독일 제국의 탄생과 세계대전의 서막
레이철 크라스틸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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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클라크 교수의 <몽유병자들>이 풍운의 발칸을 비롯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의 복잡한 유럽의 정세를 서사적으로 묘사한다면, 마가릿 맥밀런 교수의 <파리1919>는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파리강화회담 6개월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에너지 충만했던 유럽 열강들은 4년의 지독한 싸움이 지나간 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결과였고 무모한 전쟁을 강행한 정치인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을 무시한 채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집했던 늙고 고루한 장군들의 합작품이었다. 그 댓가는 기성세대의 아집 속에서 전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젊은 병사들이 치러야 했다.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했다.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 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정신은 물질을 능가할 수 있다"라는 캐캐묵은 신념을 고집하는 책상물림 장군들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나온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화력 앞에서 고기다짐이 되거나 아니면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자기 반성 대신 살육의 모든 책임은 패배자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증오심 넘치는 쪽은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의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였다. 선봉에 선 사람이 프랑스 전시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 원수였다. 이들은 독일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고 외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의 목소리는 같은 연합국들조차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물론 가장 큰 잘못은 독일에 있지만 프랑스 또한 이 전쟁의 원죄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두 나라의 싸움에 애꿎은 다른 나라들까지 함께 피본 격이었다. 파리강화회담은 관용과 징벌 사이에서 절충되었고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패배자인 독일은 싸움에는 졌지만 프랑스에게 진 것은 아니라며 기세등등한 반면, 승자인 프랑스는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렸다. SF 소설가 조지 웰스가 거창하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불과 20년 뒤 더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5천만명이 죽거나 다친 인류 최악의 살육전조차 부족했다는 얘기이다.

왜 프랑스와 독일은 그토록 피터지게 싸워야 했던 것일까.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였고 프랑스와 독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정작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가장 먼저 터진 쪽은 프랑스-독일 국경이었다. 동맹의 의무라기에는 양측은 유별나리만큼 악에 바쳐 있었다.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했다.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져야 비로소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40년 전 보불전쟁의 연장이었고 그 때의 리벤지전이었다. 마가릿 맥밀런 여사의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를 보면 보불전쟁 이후에 두 나라가 중국 고사성어에 나오는 월나라 구천마냥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칼날만 갈았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껄끄럽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석되었고 1900년 파리 엑스포가 열렸을 때 독일은 보이콧하는 대신 많은 기업들이 참여했다. 의화단의 난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동출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지난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유럽의 역학 구도는 너무 복잡했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과거의 응어리를 끊지 못한 채 결국 전쟁을 선택했다. 지난 세대가 남긴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이고 인류 전체가 파국에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화해를 선택했다. 거의 한 세기 만의 일이었다.

작년 말 인문 전쟁 분야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더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이다. 보불전쟁을 다룬 책으로는 국내 최초라고. 그러고보니 이 출판사에서 요근래 전쟁사 전문서적을 정말 많이 내는 느낌. 그렇다고 길 모 출판사처럼 밀리터리의 탈을 쓴 라노벨스러운 책이 아니라 하나같이 수준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서평을 쓰게 되는 듯. 읽고보니 그쪽 출판사 작품이던.

저자 아주매인 레이첼 크라스틸(Rachel Chrastil). 미국 자비어 대학 역사학 교수로서 주로 근현대 프랑스 전쟁사를 다루는 모양. 마가릿 맥밀런 여사도 그렇고 사학과에 여학생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다들 졸업 후에 뭐하고 먹고 사나 싶은 우리와는 천양지차랄지.

이 책은 1870년 7월 15일에 시작한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동원을 선언한 날이다. 나흘 뒤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쟁이 폭발한다. 바꾸어 말하여 그 앞에 있었던 엠스 전보 사건(Ems Dispatch)을 비롯하여 두 나라가 맞붙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빼놓고 있다. 프랑스인이라면 몰라도 한국인들처럼 보불전쟁이 뭔지 거의 접할 일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날부터 프랑스군이 아작나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2제국의 선포, 파리 국민방위정부(파리 코뮌)의 붕괴, 그리고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까지 10개월의 시간을 담고 있다. 자부심 넘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치욕의 역사인 셈. 그래봐야 1940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전쟁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1870년 7월 15일 스물 두 살의 뮌헨 출신 장교 디트리히 폰 라스베르크는 바이에른이 곧 프로이센과 연합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 군대와 싸울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흥분에 빠졌다. 그의 동생 루돌프 역시 군대에 있었고 전쟁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은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병사가 프로이센에 맞서는 대신 두 나라가 연합해서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것에 환호하는 모습은 전쟁이 통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p.24

많은 예비군은 소집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미 군복무 의무를 마쳤다고 여겼던 그들은 점차 시무룩해졌으며 이동 중에 점점 더 무질서해졌다. 많은 병사들이 새로 개발된 샤스포 소총으로 정식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전투 현장에서 대충 배워야 했다. 프랑스군에서 7월 하반기에 실제로 자원 입대한 예비군은 겨우 4천여명에 불과했다. - p.71

프로이센 군대의 집중력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했다. 프로이센 참모부의 철도 담당 부서는 50여개 노선을 운영했는데 일부는 민간, 일부는 공공, 일부는 민간-공공이 혼합된 방식이었다. 총참모부는 국가권력이 대단위로 작용하는 동원 기간 동안에 민간인의 철도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평시에 집중 지역과 철도 시설을 둘려보고 특정 군단에 선로와 열차 시간표를 배정하는 둥 훈련을 시행했다. 또한 필요한 열차와 객차의 양, 화물 선적장의 위치, 각 노선의 방향, 그리고 각 열차에 수용할 군인과 말, 물자, 수송차량 등의 수를 결정했다. - p.90

8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대전략적인 지침도 없이 프로사르의 조언에 따라 라인 팔츠의 르브뤼켄 마을을 공격했다. 바젠의 제3군단과 프로사르의 제2군단 소속 6개 사단은 마을을 쉽게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사상자가 83명이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사망자 11명을 포함해 86명이었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황태자는 말을 타고 제2군단을 순시했는데 병든 황제에게는 고문과 같은 고통을 주었다. - p.105

1914년과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은 두 나라 모두에게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보다는 프로이센이 좀 더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프로이센은 1864년과 1866년에 두번의 큰 싸움을 치렀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80여년 뒤 사방에 실속없는 싸움을 걸다가 폭망한 무솔리니와 달리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무의미하게 날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한층 일취월장했다. 1870년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대육군에 1:1로 도전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반면, 1850년대에 제정 러시아군을 상대로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싸움을 벌였던 프랑스군은 그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에 안주했다. 변화와 개혁은 없었다. 두 나라의 마음 가짐도 달랐다. 프랑스라는 강적에게 도전하는 프로이센인들로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면, 프랑스인들은 분수 모르는 튜튼족을 참교육한 다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랄까.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그는 덜 야심적이고 더 무능했으며 신이 삼촌에게 내린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62살의 고령으로서 몸은 노쇠하고 병이 들면서 만사가 귀찮다는 식이었다. 기운 넘치는 옆동네 애송이와 타이틀전을 벌이느니 자기 궁전을 지키는 쪽이 나았겠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도리어 족쇄가 된 꼴이었다.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프뢰슈밀레르에서 마크마옹은 휘하 제1군단과 제7군단의 각 1개 사단, 그리고 비치에서 오는 파이 장군의 제5군단을 보유했다. 후자는 긴 행군 끝에 8월 5일에 느린 속도로 도착했으며 무방비 상태로 국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프랑스군 사령부 내의 혼란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이동 행군해야 했던 프랑스 군인들을 녹초로 만들었다. 비록 이동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비와 햇빛이 번갈아가면서 그들의 진을 빼놓았다. 제7군단 대부분은 독일군이 검은 숲 지대에 모여 벨포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더욱 남쪽에 집결했다. - p.121

8월 6일에 벌어진 두 전투는 프랑스에게 비극이었다. 프랑스군은 잘 싸웠고 잘 방어했으며 끈질기게 반격했다. 샤스포 소총은 약속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프뢰슈빌레르에서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열세했고 스피셰렌에서는 독일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대포는 프랑스군을 그들의 진지에서 쫓아냈으며 그들이 전투 초기에 반격을 시도할 때 화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했다. 퍼커션 퓨즐르 사용한 독일군의 포탄은 물체에 충돌하면서 폭발했으며 포병들은 포탄이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도록 훈련받았다. 대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p.129

그날 저녁 바젠은 독일군이 왼쪽에서 위협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16일 아침 5시 15분에 바젠은 라드미로 장군의 전황 평가에 동의했다. 즉 프랑스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혀 있어 차라리 이동을 연기해야 프로이센의 공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가 마침내 메스를 떠나 샬롱으로 향했을 때 바젠의 군대는 그 자리에 기다렸다. -p.158

8월 18일 저녁 6시 프랑스군은 모든 지점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센군이 측면 공격을 시작하여 7시 즈음까지 캉로베르의 제6군단을 생프리바로 밀어내자 프랑스군의 오른편에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7시 30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와 작센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육탄전을 벌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일부는 무질서하고 일부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생프리바를 점령했다. - p.193

나폴레옹 3세는 마침내 스당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의원 한명을 보내려고 준비했지만 여기에는 발랑으로 행군 중이던 현 사령관 윔펜 장군의 서명이 필요했다. 르브룅이 그를 찾았을 때 윔펜은 발랑에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부하들은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침묵 속에서 말을 타고 요새로 돌아갔다. - p.252

유럽대륙의 일인자를 놓고 벌어진 결정전은 결코 명승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쉬지 않고 잽과 훅을 날리는 독일군의 공세 앞에서 프랑스군은 정신없이 난타당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유럽판 청일전쟁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은 청군처럼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고 때때로 독일군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병사들의 용기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의욕없는 황제와 무능한 장군들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의 최신 샤스포 소총은 한 세대 이전이었던 독일군의 드레이제 니들 소총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정작 소총전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특히 프랑스군이 완전히 압도당한 쪽은 독일군의 신형 C64 6파운드 강철 후장식 대포였다. 나폴레옹 3세가 포병 개혁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프랑스군의 M1858 라히테(La Hitte) 전장식 대포(왼쪽)과 독일군의 크루프 C64 후장식 대포(오른쪽). 1866년 보오전쟁 때만 해도 오스트리아군보다도 뒤떨어졌던 프로이센 포병은 4년 사이 환골탈태했다.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편에 선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격언은 프랑스군 대신 독일군이 새겨들은 셈이었다. 프랑스군은 혁신적인 '프렌치 75'를 개발하여 1914년에 앙갚음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은 의기양양하게 독일 국경을 넘었지만 대번에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꼭 한달 뒤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차라리 전쟁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서로에게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파리에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고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잔다르크와 같은 구세주도, 소련군을 상대로 '비스와의 기적'을 일으켰던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같은 전쟁영웅도 없었다. 파리의 지도자들이 가진 것은 의욕이지 능력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아집은 국가를 구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다 준 꼴이 되었다.

스당에서 독일이 승리하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도 이 경이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정세 변화가 연달아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제2제정은 몰락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 국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프랑스가 등장한 것이다. 독일군은 승리를 손에 넣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리를 포위했지만 루아르 남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계속되자 더욱 절망에 빠진 군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더 많은 프랑스 마을과 촌락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패배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268

하지만 국민방위정부는 파리를 프랑스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당황하게 만들 요소를 잃었다. 전쟁 초기 단계를 특징지었던 요소, 즉 적이 어디에 집결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 정규군이 수도 인근에서 벌어질 몇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리를 구출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면 국민방위정부는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략은 너무 늦게 추진되었다. 물론 파리의 포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p.325

전투에 이어진 몇주에서 몇달 동안 150여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했다. 열명 중 한 명 꼴이었다. 83세의 위다르 부인은 군인들에게 걷어차이고 집에서 끌려 나와서 며칠 후 결국 사망했다. 계단에 묶여 있던 아르불로-랑베르씨는 6일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는 6주 후에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인구는 1870년에 2048명이었지만 5년 뒤에는 1470명으로 줄었다. - p.454

1월 내내 포위된 도시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메지에르, 로크루아, 페론, 롱위. 오직 비치와 벨포르만이 계속 버텼다. 비치는 8월 초에 포위되었고 9월에 포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벨포르는 70일에 걸친 포격으로 마을 주민 4천여명 중 300명이 죽거나 다친 뒤에 결국 굴복했다. - p.586

저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엄청난 배상금을 강요했지만 그 대신 나폴레옹이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철저히 발라버린 다음 항복을 애걸하는 독일인들에게 요구했던 내용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은 프랑스가 1807년 프로이센에 강요했던 틸지트 조약만큼 가혹하지는 않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정치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프랑스 해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다. - p.630

과연 비스마르크가 틸지트 조약이나 나중의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관대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또한 독일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으며 그 전에도 수없이 행패를 부렸다는 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밟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의화단의 난에서 청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번 다시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게 싸울 의지를 철저히 꺾어놓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패배자의 징벌만이 아니라 자국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는 이들로서는 더 가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의 충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청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금방 회복했고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복수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실패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깊은 감정의 골이 파였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어도 결국 두 나라는 언제이건 맞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의 줄리엣>처럼 비극적인 계기로 양쪽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의 증오는 양차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세계의 패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1958년 드골과 아데나워의 극적인 화해로 끝났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만약 승자가 프랑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좀 더 잘하거나 몰트케가 좀 더 무능했다면 프랑스가 이길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만큼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을까. 알 수 없다. 그 대신 신흥 강국 독일의 등장은 보다 늦었을 것이고 유럽의 시간은 좀 더 느리게 흘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어떠했을까.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개방을 선택한 일본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자신들의 롤 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했고 프로이센처럼 군대가 나라를 지배하자 침략전쟁에 나섰다. 결과는 패망이었다. 보불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며 사소한 사건으로도 흐름이 바뀌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불전쟁이 남긴 유산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원시적인 기관총이 등장하고 소총과 대포는 한층 강력해졌다. 양측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대규모의 군대를 등원했으며 전투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비록 그 결말은 유럽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70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당시 현장을 옮겨놓은 듯한 저자의 필력과 깊이 있는 서술은 훌륭한 읽을 거리이다. 올해 전쟁사로서는 첫 책으로 1주일 내내 퇴근 후 쉬지 않고 읽은 듯. 다른 역덕들에게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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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영국 - 노동자 계층 출신 잉글랜드인이 이야기하는 영국 지구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피터 빈트.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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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도쿄에 갔던 것이 기억난다. 그 전에도 일본은 몇 번 갔지만 도쿄는 처음이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한데다 귀차니즘 덕분에 여행이 취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눈에 비친 도쿄의 인상은 아시아의 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6년 전 방문했던 베이징이 끔찍할만큼 복잡한 인산인해에 시끌벅적하고 돈과 권력이 넘쳐나지만 밑바닥 시절의 티를 못 벗은 졸부의 도시라면 도쿄는 마치 30년 전 자신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춘 듯한 늙은 여배우랄까. 그렇다고 유럽 도시들처럼 과거로 먹고 산다기에는 또 잿빛의 삭막한 느낌이다. 달리 말해서 도쿄는 현대적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와 활력은 느껴지지 않는 도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같아라던 버블 시대의 도쿄. IMF가 터졌을 때 조중동에서 한다는 소리가 서민들의 과소비 타령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과소비는 개뿔, 진짜로 돈지랄한 쪽은 바로 저 동네였다는. 소위 '사토리 세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화시대 얘기일 듯.


지하철 표를 끊으려면 아직도 동전을 써야 하고 노선은 복잡한데다 국철과 사철이 뒤섞인 덕분에 환승이 너무 헤깔렸던 것이나, 로봇 서빙이나 키오스크는 고사하고 카드 결재도 안되어 아직도 현금을 써야 하는 식당들이 태반이더라는 2000년대의 우리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아날로그 지향적인 모습은 둘째치고, 도쿄를 다니는 내내 우리의 서울역이나 광화문처럼 확성기를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먹사님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어르신들도, 살벌한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도 없었다. 아키하바라에서 메이드 코스프레 옷을 입고 알 수 없는 호객을 하는 아가씨들은 많이 본 듯. 사람들은 바쁘게 다니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사람들처럼 루프를 도는 것마냥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옆동네 섬나라에서 유행한다는 '이세계행 트럭'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레파토리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삶이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얘기. 한때 미국의 아성조차 위협하던 일본이 어쩌다가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나라가 되었는지. 극동의 나우루가 된 듯한.


솔직히 몇년 산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 보고 온 주제에 다 아는 양 젠체하는 것도 우습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기서 그기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도쿄의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은 아닐까. 오십줄인 내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을 넘어서 아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급하게 달려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워낙 빨리 바뀌다보니 때로는 따라가는 것조차 힘겹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일지도. 이만하면 잠시 한숨 돌린다고 큰 일 날리도 없을 것인데 여전히 부족하다며 더 달려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전 국민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무한 질주의 경쟁이다. 흔히 말하는 '사교육 망국병'이라는 것도 그저 일부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 탓이 아니라 남들이 죄다 달리는데 내 자식만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어 설 자리조차 없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잠깐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불의를 보면 내 일인양 분노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드는 것도 우리의 또 다른 단면이다. 외국인들이 보면 세상에서 이토록 변화무쌍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할지 모르겠다.

평소 <톡파원>이나 <걸어서 세계속으로>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여행 덕후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 나왔더라. 틈새책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지극히 사적인 영국>이다. 시리즈인 모양인데 영국 말고도 러시아, 일본, 프랑스, 심지어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평생 인연 없을 동네인 네팔도 있더라는. 저자는 피터 빈트. 생긴 걸 봐서는 백인 아닌 거 같은데(뭔가 피부 하얀 인도인같달지.)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이라고. 직업군인이었던 부친이 한국에 유엔군으로 복무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주한 영국군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주둔하다가 1993년에 모두 철수했다. 영화 <배트맨>에서 집사 양반(마이클 케인)이 주한 영국군 출신. 무려 6.25 때 중공군과 싸웠던 전쟁영웅이기도.


어린 시절 영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어 강사를 한다는데 <벌거벗은 세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언변과 쇼맨십이 있는 모양. 덕분에 "세계사에서 뭔 일이 있으면 그 뒤에는 대충 영국이 있더라"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지극히 사적>이라는 제목따나 이 책은 저자가 지극히 사적으로 얘기하는 영국 이야기이다. 평범한 소시민A인 피터 빈트가 영국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했던 영국 역사, 문화, 정치, 가치관, 정서, 일상, 부랄 친구넘들 농담 따먹기까지 온갖 시시콜콜한 것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 사는 얘기. 그래서 재미있다.

아마 영국에서만 살았다면 '영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을 것같다. 나는 영국인보다는 잉글랜드인으로 살아왔고 '영국인'이 무엇인지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영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마다 영국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가 조금씩 다르고 궁금해하는 지점도 제각각이다. - p.19

영국은 교육에서 전쟁을 비중있게 다루는 반면,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야 식민지 역사를 다루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생기고 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국인들은 식민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런 인식 때문에 외국인들은 불편하고 거부담이 들 것이다. - p.47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층이라고 해서 자신의 계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노동자 계층인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겉으로라도 그렇다. 내 힘과 능력으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딱히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상류층의 품격이나 매너는 관심 밖이다.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의 매너를 지키면서 영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p.108

어쩌면 영국인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항상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곳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 안심하고 만족한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그것을 확인한다. 영연방도 그렇고 축구팀도 그렇다. 나름 자랑할 역사이고 남들이 인정해준다. 그래서 더욱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것같다. - p.129

영국에서는 축구를 보면서도 남자답게 봐야 한다. 주변에 애들이 있든 말든 욕을 하고 상스러운 응원가를 부르고 상대 팀을 깔아뭉개야 한다. 같이 욕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다가 밖에 나가면 표지판을 부수거나 물건을 집에 가져오기도 한다. - p.150

영국 남자들은 많은 걸 할 줄 알아야 한다. 마당 위에 차고를 만들거나 마루를 깔거나 페인트 칠은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 하수구를 손보고 전기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걸 할 줄 알아야 진정한 '가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못해서 다른 사람을 부르면 또 놀림을 받는다. 내 친구 중 한명은 이런 걸 너무 잘해서 다른 집 아내들이 탐을 낼 정도였다. - p.185

한국에 와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사람들이 우산을 챙기고 약속이나 행사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그 정도 비는 우산 없이 그냥 다닌다. 날씨에 대해 가끔 불평은 해도 일상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날씨는 그냥 날씨이다. 비 때문에 약속이 취소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 p.248

한국의 아파트는 창문도 이중 새시로 되어 있어서 손을 댈 수 없다. 너무 독특하게 바꾸면 나중에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드니 그냥 살아야 한다. 다락방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영국의 주택들은 보통 2층이 있고 지붕밑에는 다락방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똑같이 생긴 집에서 살아야 한다. - p.289

영국에서는 소재에 제한이 없다. 정치인들은 물론 왕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장애인들도 유머의 소재가 된다. 모든 것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되었던 <닮은 꼴>이라는 정치 풍자 인형극이 좋은 예다. 왕실이나 정치인을 본뜬 우스꽝스러운 인형으로 조롱과 풍자, 패러디를 했는데 선이 없는 영국식 유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 p.343

영국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겁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든 일이 될 때가 있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놀리는 게 만나서 하는 일이다. 서로 칭찬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 친구끼리는 서로 비하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사르카즘이 추가된다. 비꼬고 빈정거리고 풍자하는 것이다.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 데 웃어서도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나를 비하하면 스스로를 더 비하해 준다. - p.347

한국 문화에 빠진 외국인들에 한국은 판타지 같은 나라이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K-컬처 팬들에게 한국은 완벽한 나라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 일단 K-컬처는 포장이 완벽하다. 예쁘고 멋있는 모습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말도 통하지 않기에 한국은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인 나라로 비쳐진다. - p.384

바로 옆동네 섬나라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면서 본능적으로 바깥세상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는 우리로서는 지구 반대편 나라인 영국은 그야말로 멀고도 먼 이세계이다. 기껏해야 두 세기 전에 중국을 조졌던 아편전쟁이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또는 <킹스맨>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정작 영국인인 저자는 <킹스맨>을 미국넘들이 멋대로 가공한 창작물일 뿐, 진짜 영국이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영국과 접점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구한말에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한다고 거문도를 잠시 점령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영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왔던 것 정도일까. 서로 다른 것이야 당연하지만 두 나라를 오가면서 살아본 저자의 얘기를 읽어보니 달라도 정말 많이 다른 것같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점에서는 우리가 영국보다 훨씬 편리하겠지만 그 대신 삶의 여유에서는 영국이 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서비스료가 워낙 비싼 탓에 차 수리부터 집안에서 어지간한 일은 스스로 고치는 것이 영국 가장의 기본이라고 하니 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영국 가서 살 생각부터 접어야 할 듯하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요즘이야 워낙 풍요롭다보니 어릴 때부터 해외 여행은 기본이요, 어학연수, 유학 등으로 외국 물 먹을 기회가 많아지면서 환상이 별로 없겠지만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탈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워낙 대한민국이 '헬'이다보니 적어도 바깥 세상은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막연한 현실 도피랄까. 요즘 일본 젊은 세대들이 '이세계행 트럭'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봐야 사람 사는 동네가 죄다 그기서 그기이고 좋은 점이 있으면 불편함도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요근래 와서는 K-컬처 덕분에 도리어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그런 동경의 대상이라고 하니 이 또한 격세지감이다.

전 세계에 '달고나'라는 K-푸드를 알리는데 일조한 <오징어 게임> 세계 각지에서 달고나 만든다고 국자 태워먹고 마눌님한테 혼난 아재들 많을 듯.



읽다보니 밀덕으로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더라. 영국 해군과 공군은 '왕립(Royal)'인데 육군은 그냥 육군(British Army)이라고. 육군의 뿌리가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찰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의회파 군대이기 때문. 자기네 손으로 왕 목아지를 잘랐으니 왕의 이름을 들먹일수야. 그럼에도 세계 최초의 기갑연대인 왕립 기갑연대라던가, 왕립 리버풀 연대처럼 '왕립'이 붙었으면 군주가 직접 편성에 관여하거나 충성을 맹세한 부대라는 것. 여태껏 전쟁사를 읽으면서 그냥 그런 갑다 했는데 이런 특수한 역사가 있었던 모양.

예전에 다산초당에서 나온 <30개 도시로 읽는 영국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알아가는 내용이라면, 이 책은 피터 빈트라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가는 셈이다. 남 못지 않은 영국 사랑과 더불어 절반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에서도 오래 산 사람답게 왕실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시각이라던가 영국 음식도 사실은 맛있다는 둥 영국을 그저 인터넷 잡지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의 편견을 정면에서 깨뜨리고 영국에 품는 다양한 궁금증에도 대답한다. 물론 그가 영국인 전체를 대표할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영국임에는 틀림없다. 오히려 같은 소시민으로서 훨씬 정답게 와닿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지극히 사적인 한국>도 나올만하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이다. K-컬처로는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줄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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