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 - 탐욕과 혼돈의 아수라
윌리엄 달림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명의 장난으로 신천지 가는 티켓을 얻은 사회 낙오자가 등짝 뻘건 익룡에 올라타더니만 페라리 막토 어쩌구 하면서 족장 딸래미도 꼬시고 알콩달콩 가정도 만들고 나쁜 놈들 때려잡아 우리 동네 영웅이 된다는 잉여 인간 성공기를 다룬 영화 <아바타>에서는 RDA(자원개발관리국)이라는 블랙기업이 흑막으로 등장한다. <에어리언>의 웨이랜드 유타니와 더불어 대표적인 악의 조직으로 아직 세상물 덜 먹은 외계인들에게 지구 자본주의자들의 탐욕 쩐 근성을 뼛속깊이 새겨준다랄까. 그래봐야 주인공 보정 앞에서는 알짤없지만 말이다.


RDA의 정예 용병들이자 주인공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는 비운의 잡졸들. 원래는 원주민 토벌이 아니라 기지방어를 위한 경비병들이지만 "착한 나비족은 죽은 나비족"이라는 캐캐묵은 논리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참교육을 당하게 되는. 뇌가 근육이라.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머나먼 이역만리의 행성을 개발하는데 NASA나 유엔 산하의 범정부 기구가 아니고 일개 민간업체가 주도하여 지구인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게 내버려둔 것일까. 영화 <마스>나 <인터스텔라>를 보더라도 대개 지구 바깥의 일은 나사의 역할인데 말이다. 게다가 공무원들이란 잘해봐야 본전이고 잘못되면 내 책임이기에 쓸데없이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것이 만국 공통의 습성 아니던가. 판도라에서도 돈 독 오른 업자가 아니라 나사 공무원들이 맡았다면 자원 채굴 때문에 원주민들과 척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긴 그랬으면 주인공은 영화 내내 책상 위에서 도장이나 찍고 있었을 것이고 스토리 진행이 안되었겠지.


미국 공무원들이 <주토피아> 세계의 나무늘보들 현실판이라는 얘기도. 러시아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 그 동네 공무원들을 겪어보니까 일처리 느리기로 악명높은 러시아 공무원들보다 한술 더 뜬담서. 판도라에 이런 늘보들을 보냈으면 쿼리치 대령이 홈트리 폭격하겠다고 윗선에 허가받는데만 수개월은 걸렸을 듯. 그럼 비명횡사하지도, 바랑과의 썸도 없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주도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냉전 시절 미국의 아폴로 계획이 1972년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11년만에 중단된 것도 예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달성하자 열기 또한 금새 식었다. 그 다음은 혈세 낭비라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정치인들로서는 기약도 없는 달 정복보다 당장 다음 선거에 도움되는 사업이 우선인 건 당연하다. 반대로 정치논리와 무관한 게 기업이다. 돈이 된다 싶으면 어떤 리스크도 감수한다. 대신에 물주들 입장에서 투자금은 확실히 뽑아야 하지만 말이다. 요근래 달에 다시 사람을 보내니, 화성을 개발하느니 하는 양반이 돈 없는 나사가 아니라 초갑부인 일론 머스크인 것도 이 때문인 셈.

실제로 이런 일은 수백여년 전 대항해시대에 벌어졌다. 풍요로운 바깥세계를 알게 된 유럽인들은 고향을 떠나서 배에 올랐고 숱한 댓가를 치르면서도 결국 신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개척민으로, 탐험가로, 상인으로, 또는 용병이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에서 일확천금을 얻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인도 회사'라는 기업이 있었다. 주주회사였던 동인도 회사는 군주 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투자금을 끌어모았고 리스크가 크고 자금 회수가 불확실한 초기 단계를 버텨냈다. 실패는 경험이 되어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영화 <아바타>처럼 도덕과 윤리는 개나 줘버리고 온갖 재앙을 안겨줬다지만 어쨌든 우리네 세상은 훨씬 좁아졌다. 이점이 정화의 원정과 근본적인 차이였다. 영락제의 전시성 사업이었던 정화의 원정은 거창했지만 권력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정치적 목적 외에는 실속이 없다는 점에서 아폴로 계획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물주 노릇을 한 황제의 죽음과 함께 원정 또한 끝났다. 중국인들이 제아무리 정화가 탄 거함이 콜럼부스의 배보다 훨씬 컸다고 자화자찬한들 그거 말고 뭐가 있는가.

생각의 힘 출판사에서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작도서 <동인도회사 : 제국이 된 기업>은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초거대기업 영국 동인도회사의 274년 흥망성쇠, 그 중에서도 무굴 제국 정복기에 대한 책이다. 중국과 더불어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인구 1억 5천명의 대제국을 손에 넣음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자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윌리엄 달플림(William Dalrymple). 영국 최고의 논픽션 도서상인 <베일리 기포드>와 <2020년 역사작가협회>를 비롯해 여러 도서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고 한다.


이 살집좋은 털보 아재가 저자인 윌리엄 달플림. 어릴 때부터 인도와 인연을 맺고 인도 역사를 주로 다루는 모양. 참고로 친가는 남작, 외가는 백작 가문에 찰스 국왕의 후처인 카밀라 왕비와는 무려 팔촌지간이라고. 만나본 적이 있을라나. 어쨌든 나름 금수저일세.


칼레 해전에서 12년 뒤인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동방 무역을 전담할 기업의 설립을 승인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탄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계 바다의 지배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었고 이들 눈에 영국은 위대한 항로에 겁없이 뛰어든 뉴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신세계 무역을 장악해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용병들을 고용하여 현지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광대한 식민지까지 건설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독한 수탈과 학살, 압제가 자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막장기업의 모티브인 셈. 영국의 유명한 격언으로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어쩌구하는 말이 있다던가. 인도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듯. "뻥치시네." 그 중에서도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뒤 인도에서 활약하여 출세길을 연 대표적인 인물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때려잡아 명성을 떨치게 되는 웰링턴 공작이었다. 쿼리치 대령도 어리버리한 부하넘이 원주민 처자와 눈 맞아서 배신만 때리지 않았어도. "영화라서 다행인줄 알어 이놈아!" 그래서 옛말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람서.

영국 리즈 시절 최대 판도와 동인도회사의 무역로. 뉴비로 시작해 바다의 정점에 서기까지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책은 런던 템스강 너머 한 건물에서 한 무리의 상인과 뱃사람들이 모여서 회합을 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동인도 회사의 창립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중에는 악명높은 사략선 선장이자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한 전쟁영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수립된 지 8년 뒤인 1608년 젖과 꿀이 흐른다는 낙원의 땅 인도에 당도했다. 원피스...가 아니라 향신료를 찾아 동방 무역에 뛰어들어 부와 명성, 힘을 얻겠다는 영국의 꿈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풋내기의 만용이었고 분수 모르는 짓을 하다가 호된 댓가를 치르기도 했다.

1599년 9월 24일,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서더크 글로브 극장으로부터 강 하류 쪽에 위치한 자택에서 <햄릿> 초고를 고심하던 때였다. 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거리 템스강 건너편으로 걸어서 2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에 잡다한 런던 사람들이 중간 문설주가 있는 무수한 튜더 양식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미로 같은 목조 건물에 모였다. - p.43

17세기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을 상대로 딱 한번 무력 사용을 시도했다가 처참한 결과를 맞았다. 무굴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던 차일드는 무력으로 대응하여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레든 홀가에 있는 이스트인디아하우스에서 "우리가 무역을 포기하거나 인도에서 잉글랜드 국민의 권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국왕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칼을 빼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 결과 1686년 대포 200문을 탑재하고 병사 600명을 태운 전함 19척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함대가 런던에서 출정하여 벵골로 향했다. - p.76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무굴제국'이라고 배우지만 엄밀히 말하여 유럽인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 청이나 조선과는 달리 정식 국명은 아니라고 한다. 몽골의 현지식 발음이라나. 지배계층이 몽골계였기 때문. 칭기스칸의 씨앗이 여기까지. 그들 스스로는 인도를 가리키는 '힌두스탄'을 칭했다고. 즉, 인도 제국이라는 것. 어쨌거나 동인도회사가 도착했을 때 인도는 무굴제국의 위세가 절정이었다.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없던 이들의 겁없는 도전은 무굴제국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아우랑제브 황제는 철저히 짓밟은 다음 영국인들이 두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 마땅했지만 자비를 베푸는 쪽을 선택했다. 후손들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무굴제국은 신성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수많은 봉건왕국의 집합체였다는 점이었다. 1707년 황제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어 군웅들이 부유한 땅을 놓고 쟁탈하는 춘추전국의 난세가 시작되었다. 죽다 살아난 동인도회사에게는 실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아우랑제브는 1707년 2월 20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그라나 델리가 아니라 그가 발아래 굴복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성년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끝내 실패한 데칸 고원 중부 쿨다바드의 소박한 무덤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무굴 국가의 권위는 데칸에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고 위대한 전쟁 지도자 바지 라오가 이끄는 마라타 군대가 북쪽으로 향하면서 인도 중부와 서부에서도 점차 무너졌다. - p.87

"무굴인들의 정책은 형편없다."고 잉글랜드 출신 용병인 밀스 대령은 썼다. "그들의 육군은 더 형편없고 해군은 아예 없다. 이 나라는 에스파냐인이 아메리카의 벌거벗은 인디언을 압도한 것처럼 쉽게 정복당하고 지배당할지도 모른다." 마드라스의 신임 총독 토머스 손더스도 동의했다. "무어인들의 허약함은 기정 사실이며 어느 유럽 국가든 어지간한 군사력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면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20

무르시다바드가 무너지는 동안 무굴 수도 델리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승냥이 떼들이 앞다퉈 물고 뜯는 썩은 고깃덩이처럼 남쪽의 마라타 약탈자들과 북쪽의 아프간 침공자들이 번갈아 도시를 약탈하고 점령하는 가운데 델리에 아직 남아 있는 재물은 지나가는 군대의 간헐적인 먹잇감이 되었다. - p.241



북사르에서의 전투는 짧았지만 혼전을 거듭했고 희생자가 많았다. 회사는 전장에 배치한 7천명 가운데 850명을 전사나 부상, 실종으로 잃었다. 총 전력의 1/8이 넘는 셈이었다. 무굴 쪽 손실은 몇 배 더 컸다. 아마도 5천명 정도가 전사했을 것이다. 그날의 승패는 오랫동안 불확실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북사르 전투는 궁극적으로 인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으며 심지어 7년 전 더 유명한 플라시 전투보다도 더 결정적이었다. 무굴 세계의 3개 대군이 회사를 무찌르고 인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패배한 쪽은 무굴인들이었고 회사는 인도 북동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북사르 전투는 벵골과 해안지방에 대한 회사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그들이 서쪽 내륙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할 길을 열었다. 인도 해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거점들에서 활약하는 무역 회사일 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전반에 걸친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 제국을 지배하는 통치자로 거듭난 것이었다. - p.313

1770~1771년 벵골 기근이 절정일 때 회사 경영진은 무려 108만 6,255파운드를 런던으로 이전시켰는데 현재 통화 가치로는 1억 파운드에 달할 것이다. 1770년 여름이 끝날 때쯤 회사 정책이 초래한 결관느 너무 처참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캘커타 대저택에 틀어박혀 사는 가장 부유하고 둔감한 회사 관리들조차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 p.337

한동안 이사들은 인도인들의 군사적 역량이 급속히 향상되는 것에 갈수록 경각심을 느꼈다. 10년 전 플라시 전투 시절의 손쉬운 승리는 힘들어졌다. 회사의 초창기 성공을 이끌었던 군사기술, 전술, 규율 분야에서 인도의 각 세력이 유럽의 혁신을 따라잡는 데 30년 정도가 걸렸는데 1760년대 중반에 이르자 격차가 급속히 줄고 있다는 증거가 쌓였다. 이사들은 "원주민들이 전쟁 기술에서 이룬 지식의 진보는 벵골과 코로만델 해안 양쪽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면서 벵골 집행위원회에 "유럽인 장교나 병사들이 그나라 정부에서 복무하지 못하도록" 막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모든 군사적 향상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 p.367

드 부아뉴는 신디아의 마라타 군대에 높이와 발사 각도 조절이 가능한 나사로 최신식 시사와 조준 시스템을 갖춘 대포와 정교한 유럽식 군사 과학기술을 전수하고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이 분당 세발을 발사할 수 있도록 마라타 머스킷에 쇠막대를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세줄 대형으로 늘어선 보병이 구사할 경우 마라타 세포이들은 전례없는 살상력을 과시하면서 적에게 지속적인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어느 계산에 따르면 300미터 거리에서 부아뉴의 대대에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기병 대대는 세포이들의 총검에 도달할 때까지 대략 3천발의 총알에 직면해야 했다. - p.436

회사의 많은 비행들을 의회에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고 회사의 부패와 폭력, 매수를 만천하에 알리는데 일조함으로써 정부 감독과 규제, 통제 강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1773년 규제법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회사의 정치, 군사 업무를 정부 감독하에 둔 1784년 피트의 인도법이 한결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70년 뒤인 1858년에 회사의 전면적 국유화로 절정에 달하게 되는 그 과정의 조짐은 1784년에 이미 보이고 있었다. - p.465

더욱 놀라운 것은 티푸가 자체 선박과 상관을 보유한 사실상의 국유 무역회사를 설립했다는 점이었다. 티푸가 통상 부문에 발행한 무역 규제 문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며 그 안에는 스리랑가파트남을 통해 수입되거나 수출된 귀중한 품목들에 대한 국가 주도 무역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티푸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 파견한 외교 사절들에게 바스라 항에 농장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유럽인들처럼 해외 정착지를 확보하여 자국 선박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 p.472

영국인들에게 인도는 결코 손쉬운 정복지가 아니었다. 잉카나 아즈텍에 비하면 훨씬 강적이었다. 영국 인구가 다합해서 500만명 정도에 불과할 때 인도는 1억 5천만명이 살고 있었고 세계 GDP의 1/4을 차지했다. 만약 두 나라가 붙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정복당해야 할 쪽은 틀림없이 영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손 털고 나오거나 심지어 문을 닫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사들은 부패와 각종 범죄 혐의로 탄핵을 받았고 동인도회사를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안 로버트 클라이브는 자살했다. 역사책에서는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하면서 인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강조하지만 동인도 회사에게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인도인들은 유럽인들의 군사적 선진성을 빠르게 배워나가며 격차를 줄였다. 제랄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총, 균, 쇠>는 인도에서는 강점이 될 수 없었다. 인도인들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껍데기로 전락했지만 중부의 마라타 동맹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은 만만찮은 적수였다. 마이소르 왕국의 명군이었던 티푸 술탄은 유럽식 근대화 정책을 추구했으며 수차례 영국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었다. 특히 마이소르 로켓은 영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영국판 짝퉁인 콩그리브 로켓을 만들어 나폴레옹에게 써먹는다.

그럼에도 결국 인도는 영국의 노예로 전락해야 했다. 그보다 훨씬 인구가 적고 허약했던 신대륙의 식민지조차 비슷한 시기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했는데 말이다. 미국이다. 반면 인도는 18세기 말에 오면 파국은 초읽기였다. 1799년 티푸는 전사했고 마이소르는 정복당했다. 4년 뒤에는 인도 대륙의 절반을 지배했던 마라타 동맹마저 아사예와 델레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대세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편전쟁에서 보여준 청군처럼 무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군은 인도인들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도가 분열되었고 자금력에서 동인도회사가 월등했기 때문이라고. 여기에 아서 웰즐리, 즉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한 사람이 때마침 등장한 덕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1803년 9월 23일 인도 중서부에서 벌어진 아사예 전투. 백작가문의 희망없는 삼남으로 태어나 형에게 빌붙어 살던 아서 웰즐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인생 도약의 기회를 잡았지만 자칫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로서는 워털루 전투만큼이나 아랫도리 떨렸을 듯.


얼마 전에 읽은 모친이 한국인인 영국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영국>에서 영국 학생들은 "영국의 식민지배가 문명화의 기회 또한 제공했다."라고 배운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한국 방송에 출연하여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세계사에 나쁜 일이 있으면 대충 영국이 있다나.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본 극우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개 가해자들이 입에 담을 뻔뻔한 논리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있다랄까. 그것도 일부 네티즌만이 아니라 정치인, 대학교수가 말이다. 어차피 내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면 내 알 바 아니라는 소시오패스적인 심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식민지배란 국제 구호단체가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을 대가없이 돕는 자원 봉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지배자들이 식민지에 근대적인 공장을 남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 인력이 없다면 한낱 고철이자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의 산물이지 지배당하는 자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민지배는 자력으로 일어설 기회조차 박탈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본질을 호도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 세기 전 향신료를 바치라면서 인도인들을 채찍질하는 영국인들이 지금에 와서는 거꾸로 인도인들 눈치 보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격세지감일 듯.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가 비정상이었고 지금이 제 자리 찾아간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예전에 인도를 가리켜 누가 "한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고 했던가. 그 정도로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인도는 여전히 멀고 와닿지 않는 나라이다. 황당하고 기상천외한 발리우드 영화 빼고는 말이다. <무굴제국의 역사>와 더불어 이 책이 인도를 이해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