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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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하던 <마지막 황제>를 한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초기 서양인 감독이 자금성을 5주 동안 통째로 빌려서 찍었다는 이 영화는 청나라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눈을 통해서 격동의 중국을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궐앞에 수많은 신료들이 도열해 있는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은 엄청난 비주얼이었다. 당시 투자 유치와 이미지 개선에 진심이던 중국 정부가 열성적으로 지원한 덕분. 심지어 톈안먼에 걸린 마오 수령의 대형 초상화까지 뗐다고. 참고로 톈안먼 사태 터지기 2년 전 영화. 중국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요즘처럼 호주머니 두둑하고 목에 힘주는 시진핑 시대라면 어림없는 소리겠지.


영화에서는 할머니 격인 서태후에 의해 생후 34개월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푸이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며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는 과정을 인간적인 동정심을 섞어서 묘사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본다면 꽤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당장 앞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만 하더라도 푸이가 즉위한 그 자금성을 향해 사방에서 성난 농민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또한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는 청군에 투항한 항장 오삼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원래 망국의 황제들이란 최후가 썩 좋지 않은 법이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는 길로틴에서 목이 잘렸으며 청조가 망한 지 6년 뒤 러시아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어쨌든 푸이는 옥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럭저럭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다. 하물며 그 시절 가축과 다를 바 없었던 대다수 중국 민중의 삶에 비하면야.

말년의 푸이(가운데)와 루쭝린(왼쪽), 슝빙쿵(오른쪽) 루쭝린은 원래 군벌 출신으로 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장본인이고 슝빙쿵은 신해혁명의 서막인 우창봉기를 일으킨 인물. 공산당에 의해 연출된 사진이기에 저 어깨동무가 어디까지 본심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듯.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푸이로서는 말년이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제 의지대로 살았던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지.


청조는 푸이 대까지 갈 것 없이 진작에 망할 수도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시원하게 아작나면서 처음으로 콧대 높은 중화의 존엄이 짓밟힌 이후 청조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 동네북 신세였다. 그 중에서도 태평천국의 난은 이자성이 명나라를 끝장낸 것처럼 청조를 거의 결딴낼 뻔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영국, 프랑스는 청나라의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톈진을 침공했고 함풍제는 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청조는 우여곡절 속에서 버텨냈고 반 세기나 더 살아남았다. 서태후를 가리켜 '중국 3대 악녀'라느니 청조를 말아먹은 여편네쯤으로 불리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황제의 무능함을 죄다 주변 여자 탓으로 돌리기 십상인 중국 남정네들의 뿌리깊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그 거친 아재들은 어디가고 온실 속 화초처럼 담작고 심약한 사내들만 가득했던 만주족 황실에서 그나마 강단이 남아 있는 여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국지 초반에 동탁에 의해 제거되는 하태후마냥 그 바닥에서 진작에 퇴장당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보수반동의 전형으로 꼽혔지만 청 말 자강운동은 그녀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신장성을 도로 복속하고 갑신정변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모처럼 청조의 위엄을 보여주어 우리 아직 안 죽었음을 뼈저리게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청조를 찬탈하는 위안스카이조차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족의 도전과 외세의 핍박 속에서 다 쓰러져가는 청조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구심점이었으며 서태후가 죽자 청조도 망했다.

근래에 와서 '권력과 사치의 대명사'라는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면 되지"라고 했던 마리 앙투와네트의 유명한 말이 가짜뉴스였던 것처럼 서태후의 실정 또한 캉유웨이를 비롯해 그녀를 원수로 여겼던 한족 지식인들에 의해 상당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권력 농단으로 중국에 지울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악녀는 마오의 경박한 황후인 장칭이었다.


반대로 청조는 태국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 난의 재앙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희 신정으로 서태후 말기에 오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진짜 실수는 사치나 개혁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 세 살 짜리 어린아이를 옥좌에 앉혔다는 사실이었다. 푸이를 대신하여 섭정이 된 순친왕 짜이펑 또한 서태후에 비하면 20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만주족들 또한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조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토벌하여 일벌백계할 수 있었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마냥 야심 넘치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군권을 넘김으로서 자폭한 꼴이 되었다. 만약 순친왕이 좀 더 현명했거나 위안스카이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더라면 청조는 살아남았을까. 러시아나 오스만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자강에 노력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난성의 촌놈인 마오쩌둥은 동네 선생 노릇하다가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오늘날 시진핑이 트럼프와 대립각 세우는 동아시아는 좀 더 평온할까.



새해 벽두부터 중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눈 여겨 볼 신작이 나왔더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천국의 가을>은 아편전쟁 이후 내우외환에 허덕이던 청조 최대의 위기인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플랫은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중국사 교수라고. 주로 청나라쪽 역사를 다루는 모양.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중국 전토를 전란의 불길에 빠뜨렸다. 서북과 동북을 빼고 중원 18개 성 중에서 17개 성이 휘말렸으며 죽은 사람이 2천만명에서 많게는 8천만명까지 추산되어 당시 4억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의 거의 1/5에 달했을 정도.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기세. 가장 특이한 것은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이 중국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느 농민 반란군과 달리 기독교에서 파생한 사이비 짝퉁 교주였다는 사실.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도 많이 있지 않남. 차이가 있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대신 '멸만흥한'을 외쳤다는 점. 하지만 서양과 한족 양쪽 모두를 내편 삼으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두 마리 물고기 모두 놓치게 되면서 결국 패망했지만 말이다.

전성기 시절 태평천국 판도. 한때 중원의 태반을 지배하고 베이징 코앞까지 육박하기도. 하지만 사이비 짝퉁 교리의 한계와 지도부의 내분, 홍수전의 리더십 부족으로 중국판 메이지 유신을 여는 데 실패함으로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중있는 쪽은 홍수전이 아니라 그의 사촌이자 태평천국 5천왕 중 한 사람으로 홍콩과 상하이에서 외국인 선교사 밑에서 서양물 먹고 서구식 근대화를 외쳤던 간왕 홍인간이다. 서구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성경으로만 서양을 접한 동료들에 비하면 좀 더 깨였다는 것. 참고로 중국에서 철도와 보험 도입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당시 중국인들로서는 그야말로 이세계에서 산업혁명을 하자는 얘기였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에 주변에서 알아먹지를 못해 거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보다도 홍인간 자신이 중국의 이토 히로부미나 비스마르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이론과 실천은 전혀 별개인지라. 오히려 청조 관료들이 그의 저서에 주목했고 일부나마 실천으로 옮긴 게 양무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한테 폭망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수박 겉핡기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 어쨌든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운 모양.

홍인간이 이야기했듯 언제나 돋보였던 인물은 그의 사촌인 아홉살 연상의 홍수전이었다. 그들은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로 이웃한 마을에서 살았다. 맑은 날이면 광저우 동북쪽에 위치한 바이윈 산이 보일 만큼 광저우에서 가까운 마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 사이로 과거에 세도가였던 한 씨족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그들 중에서 고관과 황제의 참모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가난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다. - p.61

어떤 중국인도 쉽게 칭찬하지 않았던 레그는 홍인간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품었고 그를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하고 다재다능한 중국인"이라고 묘사했다.레그의 딸도 이를 뒷받침해 까탈스러운 자기 아버지가 홍인간에 대해 "다른 어떤 중국인에게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특별한 애정과 따뜻한 감탄"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홍인간의 성품에는 그와 함께 일한 많은 선교사들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를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물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 p.72


이 책은 광둥성의 하카족(객가인)이자 과거 4수생이었던 홍수전이 낙방의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느닷없이 신내림을 받았다더니 중생의 구원을 외치며 세상에 나서는 것부터 14년 동안 벌어지는 태평천국의 파란만장했던 흥망성쇠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태평천국군은 오합지졸 도적떼에 불과한 황건적이나 나중에 등장하는 동네 양아치 집단인 의화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5명으로 구성된 1개 분대부터 5개 분대가 1개 소대를, 4개 소대가 1개 중대를, 5개 중대가 1개 여단을, 5개 여단이 1개 사단을, 그리고 5개 사단이 1개 군을 구성했다. 서구식 사단에 해당하는 1개 군은 1만3천여명에 달했다. 군사 편제가 명나라 시절에 머물렀던 청군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게다가 엄격한 규율과 서양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서양제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기강 빠진 청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은 겁 많고 무능한 함풍제의 청조를 교체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중국을 양분하여 북부보다 훨씬 풍요롭고 한족들이 사는 남부를 통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주원장의 홍건적과 차이가 있다면 한족 사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서구 열강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었다. 홍콩과 상하이를 통해 중국에 발을 걸친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반란군이 캐캐묵은 공자 대신 기독교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자신들의 판돈을 청조가 이기는 쪽에 걸기로 했다. 후난 성의 한족 관료인 증국번은 나약한 청군을 대신하여 '상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고 거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태평천국군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인다. 태평천국을 파멸시킨 것은 청조의 군사력이 아니라 증국번과 서구 열강이었다. 봉기 초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했던 홍인간은 홍콩과 상하이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성경 너머의 서양 문명을 배웠다. 하지만 서구의 무관심과 태평천국 내부의 복잡한 권력 투쟁 속에서 그 인맥과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국의 몰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의 운명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엘프 주인공보다 훨씬 비극적이었다. 난징을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저자는 그 과정을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을 통해 서사적이고 흥미롭게 묘사한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고 재빠른 몽골인 기병대는 다가오는 연합군의 왼쪽 측면을 향해 넓은 파도를 이루며 돌격했다. 연합군은 좌측에 기병대, 중아에 포병대, 우측에 보병대, 이렇게 세 개의 열을 이루며 진군했다. 중앙의 포병대가 돌격하는 몽골인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들의 방향을 틀자 영국과 프랑스 기병들이 재빨리 흩어지며 비켜섰다. 그러자 암스트롱포들이 다가오는 청국군 기병대 대열 한가운데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몽골 기병들이 혼비백산해 멈췄고 이 순간 영국 기병대는 전력을 다해 중앙부로 돌격하여 청군 방어선을 깨뜨렸다. - p.214

1854년 2월에 이르러 증국번은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된 육상 병력 13개 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수군 10개 대대를 갖추고 있었다. 수군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함대는 200척 이상의 전함, 군용 물자를 나르는 100척의 정크선, 크고 넓은 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만 아는 증국번은 전술 지휘관으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서툴렀고 말을 타는 것도 간신히 했다. - p.247

홍인간은 태평천국의 정치적 선전물을 쓰고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궁에 있는 서양식 납활자 인쇄기를 사용하여 그러한 선전물을 대량 인쇄했다. 그렇게 나온 출판물 가운데 어떤 것들에서는 산업화에 대한 그의 신념이 드러났다. 그는 철도, 기계식 무기, 증기선, 전신의 중요성과 전국적 신문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쇄기 자체가 그런 혁신의 하나였고 그의 인쇄 담당 인력은 외국의 가동 활자 기술을 손쉽게 익혔다. 그 인력은 반란군 수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축에 속했고 한 방문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 도시에서 종교적 열정이 가장 적은 축에 속했다. - p.302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매일의 쌀 배급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텃밭의 채소와 잡초는 남김없이 먹어치워버렸다. 쥐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 사라졌고 도시 안의 굶주린 사람 수천 명을 먹여살릴 것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9월 5일 그 도시로 들어간 승자들은 그 동안에도 안칭의 시장이 문을 닫은 적이 없음을 알고 경악했다. 인육의 가격은 마지막까지 600그램(1근) 당 은화 반냥, 즉 1파운드 당 38센트에 달했다. - p.394

반란군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했다. 하비 영사는 곧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닝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스란히 태평천국 군대의 수중에 있다." 그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정복이었다. 하비 영사의 예상과 달리 광범위한 학살은 없었다. 또한 청국군이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오기 앞서 불을 지른 것 말고는 화재도 없었다. 어느 정도의 약탈은 있었으나 반란군이 "굉장한 절제"를 발휘했다고 하비는 놀라워했다. 지휘관들은 전장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호적이었고 "모든 외국인과 우정 및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인 시민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 p.443

하비의 보고에 따라 이제 <타임스>는 영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태평천국을 괴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란군은 "우리와 우리의 황금 사과 사이를 가로막는 용"이 되었다. 편집진이 독자들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문제였다. 만약 상하이와 닝보의 차 시장이 태평천국에 의해 파괴된다면 영국 정부는 차 무역으로 얻는 꼭 필요한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야 할 것이며 랭커셔 섬유 산업 붕괴로 이미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차를 마시는 영국 사회 하층 계급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 p.509

당면한 전쟁의 압박으로 홍인간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 구성과 외교를 위한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군사 작전과 보급로 확보가 최우선이었고 그 전선들에서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그가 꿈꿨던 국가의 시작은 점점 멀어졌다. 철도, 법원, 무역중개소, 신문, 광산, 은행, 산업 등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개혁들은 모두 미뤄질 것이었다. 수도의 지도부를 단결시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군사적 패배가 짙어질수록 홍수전의 광기는 커져갔고 파멸의 조짐은 환영을 보는 그의 정신을 묵시록으로 몰아갔다. 그는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의지했으며 추종자들에게 함부로 보상과 영예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유주가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는 안될 시기에 수도의 관리들 사이의 다툼이 커지고 격해지고 있었다. - p.595

외국인이 마지막으로 홍인간을 본 것은 난징 함락 직전 후저우에서였다. 패트릭 넬리스라는 용병이 그곳에 있었는데 원래 셰러드 오즈본 함대의 선원이었으나 반란군에게 끌려가서 그 도시의 방어를 돕고 있었다. 7월 초였고 왕국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후저우의 성벽은 아직 버텨내고 있었다. - p.618

얼마 전에 읽은 <동인도 회사 : 제국이 된 기업>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 무굴 제국의 분열과 혼란상을 기회삼아 일개 기업에 불과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거대한 인도 대륙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째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차이는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질 때에는 동인도회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치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중국 내전에서 어느 쪽 편을 들지를 놓고 국가적 윤리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사이에서 주판을 두들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게 정치인과 상인의 가장 큰 차이일지 모른다. 상하이에는 '상승군'이라는 소규모 용병 집단 외에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조직한 세포이 부대와 같은 거대한 현지인 고용병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개입은 느리고 제한적이었으며 청조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지도, 애초에 그럴 의사도 없었다. 중국인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랄까.

저자는 태평천국을 굉장히 우호적으로 설명하지만 과연 태평천국이 이겼더라면 이후의 중국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자기 눈으로 바깥 세상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과 달리 광둥성의 산골 촌놈들이었던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홍수전이 내세우는 정체불명의 사이비 교리와 한족 천하를 되찾겠다는 슬로건 외에 근대 국가를 향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다. 하지만 신진 세력으로 적어도 청조보다는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금방 발기부전의 무기력증에 빠지는 중국 왕조사들을 보건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적어도 이건 분명하다. 태평천국의 난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머리 굳은 청조의 영감님들이 모처럼 시도한 서구화구태의연하게 추진한 양무운동은 보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일본 지도자들의 도전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일본 또한 막부가 도막파를 꺾고 승리했다면 청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때때로 '조선빠'들이 500년이나 지탱한 왕조가 세상에 흔한 줄 아냐면서 장수 왕국 조선을 찬양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권력이 수백년씩 고인 물 되는 것을 과연 긍정적으로 볼 일인가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사다보니 중간중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눈에 띈다. 가령 p.617에는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증국번과 포로가 된 충왕 이수성을 가리켜 "백발의 두 총 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남북전쟁 말기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마주한 그랜트와 리를 연상케 하지만 이수성은 증국번보다 12살이나 아래로 당시 41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고생해서 얼굴이 좀 삭았다고 해도 백발 성성은 아닐 듯. 정작 이수성과 동갑인 이홍장에게는 p.459에서 "젊은 인재가" 어쩌구. 그럼에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역사책 중의 하나로 손꼽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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