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 독일 제국의 탄생과 세계대전의 서막
레이철 크라스틸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12월
평점 :
크리스토퍼 클라크 교수의 <몽유병자들>이 풍운의 발칸을 비롯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의 복잡한 유럽의 정세를 서사적으로 묘사한다면, 마가릿 맥밀런 교수의 <파리1919>는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파리강화회담 6개월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에너지 충만했던 유럽 열강들은 4년의 지독한 싸움이 지나간 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결과였고 무모한 전쟁을 강행한 정치인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을 무시한 채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집했던 늙고 고루한 장군들의 합작품이었다. 그 댓가는 기성세대의 아집 속에서 전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젊은 병사들이 치러야 했다.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했다.

프랑스 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 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정신은 물질을 능가할 수 있다"라는 캐캐묵은 신념을 고집하는 책상물림 장군들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나온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화력 앞에서 고기다짐이 되거나 아니면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자기 반성 대신 살육의 모든 책임은 패배자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증오심 넘치는 쪽은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의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였다. 선봉에 선 사람이 프랑스 전시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 원수였다. 이들은 독일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고 외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의 목소리는 같은 연합국들조차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물론 가장 큰 잘못은 독일에 있지만 프랑스 또한 이 전쟁의 원죄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두 나라의 싸움에 애꿎은 다른 나라들까지 함께 피본 격이었다. 파리강화회담은 관용과 징벌 사이에서 절충되었고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패배자인 독일은 싸움에는 졌지만 프랑스에게 진 것은 아니라며 기세등등한 반면, 승자인 프랑스는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렸다. SF 소설가 조지 웰스가 거창하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불과 20년 뒤 더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5천만명이 죽거나 다친 인류 최악의 살육전조차 부족했다는 얘기이다.
왜 프랑스와 독일은 그토록 피터지게 싸워야 했던 것일까.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였고 프랑스와 독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정작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가장 먼저 터진 쪽은 프랑스-독일 국경이었다. 동맹의 의무라기에는 양측은 유별나리만큼 악에 바쳐 있었다.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했다.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져야 비로소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이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40년 전 보불전쟁의 연장이었고 그 때의 리벤지전이었다. 마가릿 맥밀런 여사의 또 다른 저서인 <평화를 끝낸 전쟁>를 보면 보불전쟁 이후에 두 나라가 중국 고사성어에 나오는 월나라 구천마냥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칼날만 갈았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껄끄럽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석되었고 1900년 파리 엑스포가 열렸을 때 독일은 보이콧하는 대신 많은 기업들이 참여했다. 의화단의 난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동출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지난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유럽의 역학 구도는 너무 복잡했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과거의 응어리를 끊지 못한 채 결국 전쟁을 선택했다. 지난 세대가 남긴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이고 인류 전체가 파국에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화해를 선택했다. 거의 한 세기 만의 일이었다.

작년 말 인문 전쟁 분야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더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이다. 보불전쟁을 다룬 책으로는 국내 최초라고. 그러고보니 이 출판사에서 요근래 전쟁사 전문서적을 정말 많이 내는 느낌. 그렇다고 길 모 출판사처럼 밀리터리의 탈을 쓴 라노벨스러운 책이 아니라 하나같이 수준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서평을 쓰게 되는 듯. 읽고보니 그쪽 출판사 작품이던.

저자 아주매인 레이첼 크라스틸(Rachel Chrastil). 미국 자비어 대학 역사학 교수로서 주로 근현대 프랑스 전쟁사를 다루는 모양. 마가릿 맥밀런 여사도 그렇고 사학과에 여학생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다들 졸업 후에 뭐하고 먹고 사나 싶은 우리와는 천양지차랄지.이 책은 1870년 7월 15일에 시작한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동원을 선언한 날이다. 나흘 뒤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쟁이 폭발한다. 바꾸어 말하여 그 앞에 있었던 엠스 전보 사건(Ems Dispatch)을 비롯하여 두 나라가 맞붙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빼놓고 있다. 프랑스인이라면 몰라도 한국인들처럼 보불전쟁이 뭔지 거의 접할 일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날부터 프랑스군이 아작나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2제국의 선포, 파리 국민방위정부(파리 코뮌)의 붕괴, 그리고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체결까지 10개월의 시간을 담고 있다. 자부심 넘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치욕의 역사인 셈. 그래봐야 1940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전쟁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1870년 7월 15일 스물 두 살의 뮌헨 출신 장교 디트리히 폰 라스베르크는 바이에른이 곧 프로이센과 연합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 군대와 싸울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흥분에 빠졌다. 그의 동생 루돌프 역시 군대에 있었고 전쟁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은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병사가 프로이센에 맞서는 대신 두 나라가 연합해서 프랑스에 맞서 싸우는 것에 환호하는 모습은 전쟁이 통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 p.24 |
많은 예비군은 소집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미 군복무 의무를 마쳤다고 여겼던 그들은 점차 시무룩해졌으며 이동 중에 점점 더 무질서해졌다. 많은 병사들이 새로 개발된 샤스포 소총으로 정식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전투 현장에서 대충 배워야 했다. 프랑스군에서 7월 하반기에 실제로 자원 입대한 예비군은 겨우 4천여명에 불과했다. - p.71 |
프로이센 군대의 집중력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했다. 프로이센 참모부의 철도 담당 부서는 50여개 노선을 운영했는데 일부는 민간, 일부는 공공, 일부는 민간-공공이 혼합된 방식이었다. 총참모부는 국가권력이 대단위로 작용하는 동원 기간 동안에 민간인의 철도 여행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평시에 집중 지역과 철도 시설을 둘려보고 특정 군단에 선로와 열차 시간표를 배정하는 둥 훈련을 시행했다. 또한 필요한 열차와 객차의 양, 화물 선적장의 위치, 각 노선의 방향, 그리고 각 열차에 수용할 군인과 말, 물자, 수송차량 등의 수를 결정했다. - p.90 |
8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대전략적인 지침도 없이 프로사르의 조언에 따라 라인 팔츠의 르브뤼켄 마을을 공격했다. 바젠의 제3군단과 프로사르의 제2군단 소속 6개 사단은 마을을 쉽게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사상자가 83명이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사망자 11명을 포함해 86명이었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황태자는 말을 타고 제2군단을 순시했는데 병든 황제에게는 고문과 같은 고통을 주었다. - p.105 |
1914년과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은 두 나라 모두에게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보다는 프로이센이 좀 더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프로이센은 1864년과 1866년에 두번의 큰 싸움을 치렀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80여년 뒤 사방에 실속없는 싸움을 걸다가 폭망한 무솔리니와 달리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무의미하게 날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한층 일취월장했다. 1870년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대육군에 1:1로 도전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반면, 1850년대에 제정 러시아군을 상대로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싸움을 벌였던 프랑스군은 그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에 안주했다. 변화와 개혁은 없었다. 두 나라의 마음 가짐도 달랐다. 프랑스라는 강적에게 도전하는 프로이센인들로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면, 프랑스인들은 분수 모르는 튜튼족을 참교육한 다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랄까. 무엇보다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그는 덜 야심적이고 더 무능했으며 신이 삼촌에게 내린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62살의 고령으로서 몸은 노쇠하고 병이 들면서 만사가 귀찮다는 식이었다. 기운 넘치는 옆동네 애송이와 타이틀전을 벌이느니 자기 궁전을 지키는 쪽이 나았겠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도리어 족쇄가 된 꼴이었다.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프뢰슈밀레르에서 마크마옹은 휘하 제1군단과 제7군단의 각 1개 사단, 그리고 비치에서 오는 파이 장군의 제5군단을 보유했다. 후자는 긴 행군 끝에 8월 5일에 느린 속도로 도착했으며 무방비 상태로 국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프랑스군 사령부 내의 혼란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이동 행군해야 했던 프랑스 군인들을 녹초로 만들었다. 비록 이동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비와 햇빛이 번갈아가면서 그들의 진을 빼놓았다. 제7군단 대부분은 독일군이 검은 숲 지대에 모여 벨포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더욱 남쪽에 집결했다. - p.121 |
8월 6일에 벌어진 두 전투는 프랑스에게 비극이었다. 프랑스군은 잘 싸웠고 잘 방어했으며 끈질기게 반격했다. 샤스포 소총은 약속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프뢰슈빌레르에서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열세했고 스피셰렌에서는 독일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대포는 프랑스군을 그들의 진지에서 쫓아냈으며 그들이 전투 초기에 반격을 시도할 때 화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했다. 퍼커션 퓨즐르 사용한 독일군의 포탄은 물체에 충돌하면서 폭발했으며 포병들은 포탄이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도록 훈련받았다. 대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p.129 |
그날 저녁 바젠은 독일군이 왼쪽에서 위협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16일 아침 5시 15분에 바젠은 라드미로 장군의 전황 평가에 동의했다. 즉 프랑스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혀 있어 차라리 이동을 연기해야 프로이센의 공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가 마침내 메스를 떠나 샬롱으로 향했을 때 바젠의 군대는 그 자리에 기다렸다. -p.158 |
8월 18일 저녁 6시 프랑스군은 모든 지점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센군이 측면 공격을 시작하여 7시 즈음까지 캉로베르의 제6군단을 생프리바로 밀어내자 프랑스군의 오른편에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7시 30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와 작센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육탄전을 벌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일부는 무질서하고 일부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생프리바를 점령했다. - p.193 |
나폴레옹 3세는 마침내 스당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의원 한명을 보내려고 준비했지만 여기에는 발랑으로 행군 중이던 현 사령관 윔펜 장군의 서명이 필요했다. 르브룅이 그를 찾았을 때 윔펜은 발랑에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부하들은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침묵 속에서 말을 타고 요새로 돌아갔다. - p.252 |
유럽대륙의 일인자를 놓고 벌어진 결정전은 결코 명승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쉬지 않고 잽과 훅을 날리는 독일군의 공세 앞에서 프랑스군은 정신없이 난타당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유럽판 청일전쟁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은 청군처럼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고 때때로 독일군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병사들의 용기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의욕없는 황제와 무능한 장군들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의 최신 샤스포 소총은 한 세대 이전이었던 독일군의 드레이제 니들 소총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정작 소총전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특히 프랑스군이 완전히 압도당한 쪽은 독일군의 신형 C64 6파운드 강철 후장식 대포였다. 나폴레옹 3세가 포병 개혁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프랑스군의 M1858 라히테(La Hitte) 전장식 대포(왼쪽)과 독일군의 크루프 C64 후장식 대포(오른쪽). 1866년 보오전쟁 때만 해도 오스트리아군보다도 뒤떨어졌던 프로이센 포병은 4년 사이 환골탈태했다.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편에 선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격언은 프랑스군 대신 독일군이 새겨들은 셈이었다. 프랑스군은 혁신적인 '프렌치 75'를 개발하여 1914년에 앙갚음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은 의기양양하게 독일 국경을 넘었지만 대번에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꼭 한달 뒤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차라리 전쟁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서로에게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파리에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고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잔다르크와 같은 구세주도, 소련군을 상대로 '비스와의 기적'을 일으켰던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같은 전쟁영웅도 없었다. 파리의 지도자들이 가진 것은 의욕이지 능력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아집은 국가를 구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다 준 꼴이 되었다.
스당에서 독일이 승리하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도 이 경이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정세 변화가 연달아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제2제정은 몰락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새로운 군대를 창설해 국가를 방어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프랑스가 등장한 것이다. 독일군은 승리를 손에 넣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리를 포위했지만 루아르 남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계속되자 더욱 절망에 빠진 군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더 많은 프랑스 마을과 촌락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패배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268 |
하지만 국민방위정부는 파리를 프랑스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당황하게 만들 요소를 잃었다. 전쟁 초기 단계를 특징지었던 요소, 즉 적이 어디에 집결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다는 사실, 그리고 프랑스 정규군이 수도 인근에서 벌어질 몇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리를 구출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면 국민방위정부는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략은 너무 늦게 추진되었다. 물론 파리의 포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p.325 |
전투에 이어진 몇주에서 몇달 동안 150여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했다. 열명 중 한 명 꼴이었다. 83세의 위다르 부인은 군인들에게 걷어차이고 집에서 끌려 나와서 며칠 후 결국 사망했다. 계단에 묶여 있던 아르불로-랑베르씨는 6일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는 6주 후에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인구는 1870년에 2048명이었지만 5년 뒤에는 1470명으로 줄었다. - p.454 |
1월 내내 포위된 도시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메지에르, 로크루아, 페론, 롱위. 오직 비치와 벨포르만이 계속 버텼다. 비치는 8월 초에 포위되었고 9월에 포격을 받아 부분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벨포르는 70일에 걸친 포격으로 마을 주민 4천여명 중 300명이 죽거나 다친 뒤에 결국 굴복했다. - p.586 |
저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엄청난 배상금을 강요했지만 그 대신 나폴레옹이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철저히 발라버린 다음 항복을 애걸하는 독일인들에게 요구했던 내용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은 프랑스가 1807년 프로이센에 강요했던 틸지트 조약만큼 가혹하지는 않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정치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규모를 제한하거나 프랑스 해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다. - p.630 |
과연 비스마르크가 틸지트 조약이나 나중의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관대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또한 독일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으며 그 전에도 수없이 행패를 부렸다는 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밟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의화단의 난에서 청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번 다시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게 싸울 의지를 철저히 꺾어놓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패배자의 징벌만이 아니라 자국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는 이들로서는 더 가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의 충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청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금방 회복했고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복수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실패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깊은 감정의 골이 파였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어도 결국 두 나라는 언제이건 맞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의 줄리엣>처럼 비극적인 계기로 양쪽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의 증오는 양차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세계의 패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1958년 드골과 아데나워의 극적인 화해로 끝났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만약 승자가 프랑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좀 더 잘하거나 몰트케가 좀 더 무능했다면 프랑스가 이길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만큼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을까. 알 수 없다. 그 대신 신흥 강국 독일의 등장은 보다 늦었을 것이고 유럽의 시간은 좀 더 느리게 흘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어떠했을까.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개방을 선택한 일본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자신들의 롤 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했고 프로이센처럼 군대가 나라를 지배하자 침략전쟁에 나섰다. 결과는 패망이었다. 보불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며 사소한 사건으로도 흐름이 바뀌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불전쟁이 남긴 유산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원시적인 기관총이 등장하고 소총과 대포는 한층 강력해졌다. 양측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대규모의 군대를 등원했으며 전투의 양상 또한 달라졌다. 비록 그 결말은 유럽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70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당시 현장을 옮겨놓은 듯한 저자의 필력과 깊이 있는 서술은 훌륭한 읽을 거리이다. 올해 전쟁사로서는 첫 책으로 1주일 내내 퇴근 후 쉬지 않고 읽은 듯. 다른 역덕들에게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