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히어로 - 미 해군 특수부대원의 회고록
마크 오언 외 지음, 이원철 옮김 / 혜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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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화려한 액션 신은 없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감독을 맡았더라. 네이비 실 출신의 베테랑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상사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최고의 저격수로, 그가 사실한 적병은 공식적으로만 160명, 비공식적으로는 25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병기인 셈이다. 워낙 공포의 대상이라 이라크 반군들은 그의 목에 8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존 윅이나 <미션 임파셔블>의 탐 크루즈마냥 주인공이 수많은 악당들을 미친 듯이 쏘아 죽이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따위의 말도 안되는 할리우드 식 영웅물이 아니다. <애너미 앳더 게이트>처럼 적 저격수와 대결하는 드라마틱한 긴장감도, 전장에서 꽃피는 로맨스가 있는 영화도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영화 내내 몇 명을 사살하는지 따위를 세워 볼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크리스는 영웅이지만 그렇다고 람보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총을 쏘는 것은 자신이 정의라서거나 또는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그게 임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또한 주변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일을 끝없이 경험해야 한다. 언젠가 자신 또한 적에 의해서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영웅은 없다. 국가로부터 영웅이라 불리지만 PTSD(정신 외상)에 시달리는 한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는 퇴역 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남긴 상처에 고통받는 참전 군인들을 돕는 일을 하지만 결국 2013년에 한 PTSD 환자에게 살해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보는 전쟁사는 지도자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이다.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결단을 내렸으며 군대를 어떻게 지휘하여 적군을 분쇄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는가만을 강조하면서 불후의 영웅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 명령에 복종하여 전장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며 죽어 나가는 존재들은 높으신 분들에게는 한낱 종이 위의 숫자일 뿐이라도, 무기질로 된 장기말이 아니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인간이다. 무명의 군인들이 집을 떠나서 가족과 헤어져 낯선 공간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로 죽기로 싸우는 것은 장군들의 장기말이 되기 위해서도, 영웅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은 졸병들의 전쟁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말이다.

밀덕이라면 주목할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혜람 출판사에서 나온 <노 히어로(원제 : No hero - the evolution of a navy seal>, 즉 '영웅은 없다'이다. 이 책은 한 군인의 회고록이지만, 흔히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다는 늙은 예비역 장군이 젊은 후대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 역경을 반쯤 미화하면서 공적은 과장하되, 실수는 축소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그 때가 좋았지"라는 식의 그런 뻔한 회고록과는 다르다.

저자는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 해군의 네이비 실 출신의 전직 병사이다. 마크 오언은 필명이고 본명은 매트 비소네트(Matt Bissonnette)라고 한다. 그는 네이비 실에서 14년 동안 복무하면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작전에 투입되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전은 2011년 5월 1일 911테러 이래 아프칸과 파키스칸 산악지대를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10년 동안 미군이 몇 번이나 놓쳤던 빈 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사살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도 그의 이전 작이자 빈 라덴 사살 작전인 넵튜스피어 작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노 이지 데이>가 길찾기에서 출간된 바 있다. 본인은 그 책이 보안 수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기밀유출죄로 무려 700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물었다고 하던데, 우리 독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만큼 리얼하고 가감없이 썼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벌금만 이 정도라면 도대체 책 팔아서 얼마나 번건지. 역시 미국은 대단함.

전작인 <노 이지 데이>가 빈 라덴 사살 작전의 비하인드를 다룬 책이라면, 신작인 <노 히어로>는 누구나 막연히 동경하면서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세계 최강 특수부대원으로서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네이비실 팀원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서 일당백의 특수부대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내면은 남들이 추켜세우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던가.

저자 자신을 비롯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배우도 아니고,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같은 킬러들도 아니다. 평소에는 가족들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임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다른 부대원들이 작전 중에 사고가 났다고 하면 걱정하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으면 한없이 슬퍼하며, 책상물림의 높으신 분들이 어거지나 다름없는 임무를 내릴 때마다 불만을 터뜨릴 때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개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임무에 투입되는 순간부터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개월 동안 정치인들과 언론은 오사마 빈 라덴 임무에 대한 네이비실을 축하해 왔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쉽게 내뱉는 단어가 아니었으나, 지금 우리끼리는 그 의미 자체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모두가 영웅이었다."

"총알은 택시의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한발이 레이의 목을 깔끔하게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네이비실인 레리의 귀로 들어가 코를 통해 나왔다. 택시 운전사는 둘을 태운 채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했고 레이는 자신의 셔츠로 피를 지혈하며 직접 응급실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에 나는 그저 네이비실이 되는 것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훈련이 어려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어려울지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기는 너무 어렸다. 확실한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희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때 당시에는 그 이유 하나로도 앞으로 나아가기에 충분했다."

"잠영은 지옥주로 불리는 5일 반나절의 혹독한 훈련을 포함해 BUD/S의 첫번째 단계에 해당했다. 지옥주에는 각 교육생이 모두 합쳐서 4시간 정도만 수면을 취하고 3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매일 20시간 이상 체력단련을 해야 했다."

"직업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나는 모든 특수부대가 공통된 마음가짐을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얽혀 있었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평화로울 때에는 부대들 사이에 경쟁심이 있었다. 그러나 교전이 시작되면 팀워크를 위해 경쟁심을 버렸고 또 만약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즉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가장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고 베크워드가 말했던 것처럼 "훈장, 시신 운구낭, 또는 둘 다"는 공통된 것이었다. 우리 모두 섀클턴이 약속했던 것처럼 "낮은 임금, 냉혹한 추위, 임흑천지에서의 긴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우리가 실패보다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검토를 하며 나는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파편을 굴렸다. 파편은 내 운 이상의 것을 생각나게 했다. 이는 운보다도 경험이 부족한 육군 대령이 분야별 전문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얼마나 쉽게 우리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기관총에서 나오는 총구 화염은 마치 곡사포를 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뒤로 넘어져 등으로 땅에 넘어지는 순간 기관총 총열에서는 1미터 길이의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내 야간 투시경으로 보인느 모든 것들이 빛의 향연이었다. 적이 매섭게 기관총을 쏘아대며 총알이 머리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번 파병은 나에게 열세번째 파병이었다. 나는 수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인생의 일부를 바쳐왔다. 이는 더 이상 나에게 '이론'이나 '훈련'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때 나는 군 생활에서 처음으로 내가 알래스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꿈꾸었던 네이비실이 되는 목표를 비로소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네이비실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북이 아니다. 네이비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 자화자찬하는 책도 아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며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회고록들마냥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벌여놓은 명분없는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따위의 복잡한 정치 얘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왜 네이비실을 처음 선택하게 되었는지부터, 네이비실의 혹독한 훈련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는지, 베테랑 군인이자 팀장으로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14년의 복무를 끝내고 제대를 선택하기까지를 얘기한다. 여기에는 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그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그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으며 누군가를 살인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 안고 가야할 짐일 것이다. 책의 제목대로 전쟁에서 영웅은 없다.

읽다보면 책의 많은 부분이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전작에서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덕분에 호된 경험을 한 저자가 이번에는 사전 검열을 받았고 그 바람에 민감하거나 보안에 저촉되는 부분이 일일이 지워졌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해서 읽는데 지장은 없다. 이 책에서 정치인들이나 장군들이 말하는 전쟁 회고마냥 거창하게 포장하거나 한편의 영화같은 드라마틱한 얘기는 없다. 그 전쟁 한복판에 있었던 한 사람의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전쟁 이야기이다.


미국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이다보니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병사들도 이러한 참전 수기를 충분히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가 미군처럼 실제로 최전선에 나서서 실전을 경험할 일은 없지만, 아프간과 이라크 등 곳곳에 비전투요원으로 파병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외 파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아쉬웠던 일, 어떤 일을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지 등, 외교관이나 언론인, 장군들이 아닌 평범한 병사의 눈에서 바라본 전쟁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수기이자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고록은 높은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여지껏 초임 장교나 졸병 출신이 이러한 수기를 내었다거나 언론에서 연재물로 다루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파병 기간이 너무 짧고 딱히 사건 사고가 없어서 글로 쓸만한 얘기가 없어서는 아닐진데 말이다. 필력의 문제인지, 관심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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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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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여년이나 된 일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삼국지를 읽은 기억이 난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과 함께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젊은 시절의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서 도원결의를 맺는다. 비록 적수공권의 몸이지만 대장부 셋이 뭉쳐서 천하를  바꾸어 보겠다는 야망을 품은 채 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금새 천하가 얼마나 넓으며 수많은 기라성같은 영웅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조, 손견, 여포, 공손찬, 원소 등 가슴에 무궁무진한 야심이 가득찬 영웅들은 각자 넓은 대륙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천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온갖 모략과 술책이 난무하고 대군과 대군이 맞붙이치면서 수십년이 지났을 때 천하에는 조조와 유비, 손권만이 남았고 위, 촉, 위 삼국 정립의 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어이없게도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마씨가 되었고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가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 비록 소설이지만 온갖 개성 넘치는 영웅들의 대결은 너무나 흥미진진하여 매번 읽을 때마다 도저히 손을 뗄 수 없었다. 대략 열번은 넘게 읽은 듯 하다. 서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면 동양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라면 삼국지를 빼놓을 수 없으리라. 

 

삼국지만이 아니라 중국 오천년 역사는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는 역사이다. 삼국지는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역사일 뿐,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서로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면서 항쟁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바로 백여년 전에도 있었다.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이르는 이른바 '군벌의 시대'였다.

 

 

오랜만에 엄청난 책을 발견했다. 미지북스 출판사에서 나온 20세기 삼국지라 할 만한 <중국 군벌 전쟁>이다. 예전에 국내 최초 중일전쟁 통사인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를 쓴 저자가 5년 만에 낸 책이라고 한다. 당시 전쟁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여 네이버 역사 카페 등에서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오기도 했다.

 

처음에 책을 받아든 순간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에 한번 놀랐다. 그리고 읽으면서 또 한번 놀랐다. 분량은 많은데도 활자가 크고 편집이 잘 되어 있어서 너무 쉽게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또한 저자 특유의 필체로 어찌나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지 일단 한번 책을 펴는 순간 손을 뗄 수 없었다. 청말부터 신해혁명까지 다룬 1부만 해도 왠만한 교양 도서 한권 분량인데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 맨 앞에 들어 있는 지도. 신해혁명 당시 주요 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맨 위의 투바 공화국은 HOI에서 볼 수 있었던 그 투바가 아니었던가.

 

 

청일전쟁 이후 새로이 편성된 청나라의 신식군대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는 만주족 복장의 강시 군대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모습이다. 본문을 보면 청나라가 어떻게 신식군대를 편성하게 되었으며 일본군과 비교한 자료까지 상세하게 나온다.

 

 

청조,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다. 본문에는 여느 중국사 책에서 보지 못했던 온갖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저자의 해박하면서 폭 넓은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16년 옥좌에 앉으려는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키는 차이어의 호국전쟁의 상황도. 공화정이라는 국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라고 호국전쟁이라고 한다. 얼마 뒤에는 쑨원이 법통을 지키겠다면서 호법전쟁을 일으킨다. 책에는 중국식 지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30여장에 달하는 전쟁 지도가 들어 있다. 이것만 봐도 한눈에 이해가 될 정도이다.

 

 

책의 또 다른 묘미는 주요 전투마다 어느 어느 부대가 참전했다는 식으로 이렇게 부대 편제까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치 2차대전사를 보는 느낌이다. 이 정도면 삼국지처럼 게임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은 청일전쟁 직후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이라는 신식군대를 만드는 것부터,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건국,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대결, 북양군벌들의 분열, 국공합작, 북벌전쟁과 중원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여년에 걸친 중국 근대사 전체를 아우른다. 여기에는 5.4운동이나 국공합작, 공산당의 창당 등 중국 내에서 있었던 온갖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물론이고, 열강들이 왜 중국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는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중국군의 시베리아 출병, 국민당과 공산당에 이어서 제3의 혁명 정당이자 중국식 민주주의를 외쳤던 중국 청년당의 이야기, 몽골과 티베트의 독립 선언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는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좌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이외에도 장쭤린, 우페이푸, 펑위샹, 리쭝런, 탕셩즈 등 온갖 기라성 같은 군벌들이 등장하여 천하 패권을 다툰다. 이들의 싸움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나오는 군웅 할거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창과 활이 아니라 총과 대포, 항공기와 같은 최신 무기로 싸운다는 점이다.

 

군벌 싸움만이 아니라 외몽골은 독립했는데 왜 내몽골은 독립하지 못했는가, 티베트는 왜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되었는가, 만주족을 비롯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은 어째서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했는가 같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품었을 만한 질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속시원하게 설명한다. 마치 핵사이다같은 느낌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이 또 한가지 있다. 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당시 중국군이 사용했던 각종 총기와 대포, 전차, 군함, 항공기는 물론이고 중국군의 편제, 심지어 군벌들의 독가스 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있더라. 평소 중국사에 그리 관심 없어도 밀리터리 매니아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읽는 내내 여지껏 이러한 역사서는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중일전쟁에서도 느꼈지만 저자의 어마어마한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 최고의 추천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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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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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중국사라고 하면 대개 교수님들이 쓴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책은 여지껏 보지 못한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20세기 삼국지를 연상케 하는 군웅들의 파란만장한 싸움은 마치 한편의 사극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활자가 커서 읽기도 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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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 맥주를 보다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음미하다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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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뿐만 아니라 꿀벌도 술을 먹는다.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친 꿀벌은 벌을 받기도 한다.

수컷 초파리는 연애에 실패하면 더 많은 술을 먹는다.

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꿀벌은 일만 하지 않아. 술도 마셔. 초파리도 술마셔"

-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중에서

평소 술을 거의 즐기지 않는 나도 치맥의 유혹만큼은 거부하기 쉽지 않다. 불금이나 토요일 저녁, 집사람과 같이 치킨을 안주 삼아 캔맥주 하나씩 따서 마시면서 영화 한편 감상하는 것. 이보다 안락할 때가 어디 있을까. 때로는 더운 여름밤 집앞 호프집에서 500cc 크림 생맥주를 시켜서 마실 때 그 톡 쏘면서 시원한 맛이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굳이 주당이 아니라도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이 유혹을 이길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지껏 맥주를 마시면서 이것이 무슨 종류의 맥주인가 따져본 적은 없는 것같다. 하긴 종류는 고사하고 카스인지 OB인지 어디 메이커인지도 따지지 않으니 말이다. 나의 둔감한 혀로는 맥주면 맥주이지 죄다 그기서 그기인 느낌이다. 애초에 치맥의 주인공은 맥주가 아니라 치느님이 아니던가. 우리는 치느님을 먹기 위해 맥주를 마실 뿐, 맥주를 마시기 위해 치느님을 먹는 것이 아니다. 맥주는 어디까지나 치느님을 먹는 과정에서 잠시 목이 마를 때 입가심을 위한 콜라 대용일 뿐이다. 그래서 치맥이다. 맥치가 아니라.

알콜 소비량에서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양한 술을 즐길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맥주는 그냥 맥주이다. 소주는 소주이고 막걸리는 막걸리이다. 어느 지역, 어느 회사에 제조했다는 것은 있어도 어차피 알콜 도수도 정해져 있고 가격은 물론이고 맛과 향 또한 대동소이하다. 획일화된 규격품이나 다름없다. 고기집이나 호프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 메뉴판에는 오직 "맥주"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용량의 구분은 있어도 무슨 맥주냐는 구분은 없다. 고민의 여지조차 없이 "생맥주 주세요" 한마디면 끝이다. 참 쉽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면서도 막상 술의 종류가 몇 가지 없다는 것은 술맛을 따지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는 술 맛 그 자체보다는 그저 술에 취하기 위해서, 또는 안주빨을 세우려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네 세상에 주당은 많다지만 술 맛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주당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서양 술을 보면 정말 다양하다. 와인만 보더라도 그 종류가 얼마나 하늘의 별만큼 다양하며 맛과 향이 천차만별인가. 이 양반들은 진정한 술맛을, 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외국의 수입 맥주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맥주 그 자체의 맛을 취미처럼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이른바 맥주 덕후, 즉 '맥덕'시대의 개막이다.

북플리오 출판사에서 평소 맥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길을 끌만한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라는 책이다. 저자는 '음미하다'라는 필명을 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인데 일러스트를 보면 아마도 젊은 여성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취미가 맥주"라는 오리지날 맥덕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뿐 아니라 꿀벌도 꿀 술을 먹는다.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친 꿀벌은 벌을 받기도 한다. 수컷 초파리는 연애에 실패하면 더 많은 술을 먹는다. 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파리도, 새도, 박쥐도, 원숭이도, 자연이 만들어낸 술을 먹는다."

"닉네임 : 효모, 성별 : 없음, 종교 : 닌카시, 바커스, 직업 : 맥주랑 빵만들기, 좋아하는 것 : 무조건 달달한 것, 희망사항 : 가끔 나는 야생의 사바나 초원을 달리는 자유를 꿈꾼다. - 호모 프로필 중에서."

"효모가 살아있던 과거의 맥주는 햇살을 듬뿍 받은 보리 본연의 영양 성분과 효모가 만들언내 비타민, 단백질이 가득한 든든한 한 끼 식사이자 음료였다. 맑고 깨끗한 맥주라고 해서 우리 맥주가 고대 이집트인들의 그것보다 더 나을까? 더 자연스러울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깨끗하게 말린 맥주잔에 6℃의 밀맥주를 45도 기울여 따라 주다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은 병을 돌리면서 따른다. 이제 숨은 효모까지 남김 없이 마시자. - 밀맥주 맛있게 따르는 법. 진짜 맛있다~~!"

"193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딛고 베스트말레에서 만들어진 맥주가 바로 황금빛 트리플이다. 필스너와 같은 고운 빛깔에 벨기에 맥주만의 짙은 과일 향이 일품이었던 이 맥주는 곧 수도원 맥주의 대명서가 되었다. 식사와 함께 마시는 가벼운 맥주인 테이블 비어보다 대략 3배는 도수가 강하다는 의미로 트리플이라고 불렸지만 1956년부터는 공식적으로 트리펠이라고 부른다."

"피아노처럼 반짝이는 짙은 어둠이 깔린 거리를 걸어 미켈러 바로 향한다. 재즈 센터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이곳은 평일은 12시, 주말은 새벽 두 시까지 크래프트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비어가는 맥주잔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하루가 저문다."

책의 부제로 붙어 있는 "맥주를 보다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말마따나 이 책에서는 맥주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와 온갖 유익한 정보를 저자 특유의 유머러스와 함께 섞어서 풀어나간다. 맥주 특유의 허연 거품과 톡 쏘는 탄산가스가 사실은 효모가 맥아즙의 당을 소화하면서 뿜어낸 방귀라는 사실. "소리는 커도 냄새가 난다해도 너희가 좋아하는 술냄새인거?"

황금빛 연금술사 효모의 정체, 맥주가 영양가 넘치는 음식에서 술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 에일과 라거의 차이부터 대표적인 맥주들, 각각의 맥주와 찰떡 궁합인 안주 고르는 법, 나에게 꼭 맞는 맥주를 찾기 위한 관상 보는 법, 맥주를 가장 맛있게 음미하는 요령, 영국 맥주와 벨기에 맥주, 미국 맥주, 독일 맥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등 유머러스하면서도 알딸딸한 맥주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다. 컬러풀한 사진과 글을 한장한장 넘기면서 읽다보면 절로 시원한 맥주 한잔이 떠오른다. 그것도 그저 "여기 생맥주 한잔요!"가 아니라 달콤하면서 과일향이 느껴진다는 "파울라너 에딩거 헤페바이젠 한잔요!"라고 외치고 싶다.

이 책을 읽노라니 나도 치맥 덕후를 넘어서 진짜 맥덕이 되고 싶어진다. "맛있는 맥주에는 절로 나오는 추임새 캬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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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리 앙투아 네트가 사랑했던 꽃은 장미가 아니라 감자꽃이었다?"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치이다. 온갖 양념과 함께 고추장으로 시뻘겋게 갓 담근 햇김치 하나만 있어도 다른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다 아는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붉은 김치가 우리 식단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추는 토종 작물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을 통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 맛에 더 익숙해진 쪽은 일본인보다 우리가 아닐까 싶다. 일식에서 고추냉이를 제외하고 딱히 고추가 들어가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 반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한식은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그곳에서 처음 고추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우리도 잘 아는 스페인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겠다고 떠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은 고추였고 그는 엉뚱하게도 고추를 후추라고 우기면서 '붉은 후추(red pepper)'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고추가 돌고 돌아서 한 세기만에 지구 정반대편의 존재감 없는 나라 조선에까지 전해진 셈이다. 그가 신대륙에 가지 않았거나 고추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먹음직스런 붉은 김치도 없지 않았을까. "브라질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는 허리케인이 일어난다."라는 이른바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콜럼버스와 김치의 관계 또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나비효과의 사례라고 하겠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특이점 중 하나이자 근세 시대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 전까지 인류 문명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유럽이 처음으로 아시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어째서 유럽인이 아니라 비 유럽인들,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대항해에 나서지 않았던가. 왜 하필이면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이들이 거친 파도를 뚫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게 된 가장 큰 동기는 향신료(spice)였다.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유럽인들은 이것을 손에 넣으려고 목숨을 걸었다. 후추의 가격은 한 때 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수많은 바다 사나이들이 세계의 보물 "원피스" 아니 "육두구"를 찾아서 떠나는 대항해 시대.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조미료 따위에 그 정도의 가치를 매긴다는 말인가 싶지만 먹거리가 다른 탓도 있다. 아시아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한다. 쌀은 탄수화물 외에도 단백질과 지방이 함유되어 있어 별다른 부식 없이도 그럭저럭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반면, 밀은 아미노산이 부족하기에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고기는 상하기 쉽상이고 그 전까지 유럽인들은 기껏해야 거친 소금으로 짠 맛나는 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아시아에서 향신료가 들어오자 한번 여기에 중독된 유럽인들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향신료가 듬뿍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이 곧 지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만약 아시아인들이 밀을 먹고 유럽인들이 쌀을 먹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신료의 천국인 동남아에서 더 많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훗날 식민지 건설의 첨병이 된다. 향신료 경쟁은 그야말로 살벌했고 여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보다 저렴하면서 대체 가능한 다른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새로운 먹거리가 옥수수와 감자였다. 밀과 쌀에 비해서 훨씬 강인한 생명력과 수확 능력을 가진 두 먹거리는 기근 해결에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이 다름없는 노예 무역 시대를 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가축의 힘을 빌릴 수 없고 사람 손이 엄청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럽인들의 향신료 경쟁이 만든 세상인 셈이다.

사람과 나무사이 출판사의 신작 도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현대 인류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했던 13가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식물학자이자 시즈오카 대학 교수이며 자신의 전공인 식물을 통해서 본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 양반의 저서 중 하나인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글항아리>도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을 그린 만화이다. 이 만화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궁전에 핀 고고한 장미 한 송이에 비유했다. 하지만 왕비가 실제로 사랑한 꽃은 만화 제목에 있는 장미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사랑한 꽃은 감자꽃이었다. 고귀한 왕비 신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장비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감자꽃을 사랑했을까?" - p.26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식물 1위는 옥수수이다. 그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곡물이 밀이고 3위가 벼이다. 그 다음 4위는 감자, 5위는 대두이다. 토마토는 이 세계 5대 주요 작물 바로 뒤인 여섯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 p.68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즐긴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후추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상정성이 컸다. 이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이 설탕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p.90

"고추는 유럽인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장기간 항해해야 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했다. 당시 뱃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를 다량 함유한 고추는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특효가 있었다. 뱃사람들은 항해를 떠날 때 소중한 식량이자 의약품으로 고추를 챙겼다." - p.105

"논 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서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서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1년 동안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었다." - p.240

이 책에서는 도합 13가지의 식물이 나온다. 저자가 붙인 별명도 거창하다.

1. 초강대국 미국을 세운 악마의 식물 감자

2. 인류의 식탁을 바꾼 붉은 열매 토마토

3. 다항해시대를 연 검은 욕망 후추

4. 콜럼버스의 고뇌와 아시아의 열광 고추

5. 거대한 피라미드를 떠받힌 약효 양파

6. 세계사를 바꾼 두 전쟁의 촉매 차

7. 인류의 재앙 노예무역을 불러온 사탕수수

8. 산업혁명을 일으킨 목화

9. 한 톨의 씨앗이 문명을 탄생시킨 밀

10. 고대 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벼

11.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콩

1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 옥수수

13. 인류 최초 거품 경제를 불러온 욕망의 알뿌리 튤립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친숙하면서도 이들이 인류 역사에 남긴 발자취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위의 13가지 식물 중에서 하나라도 없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대항해 시대를 연 후추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가령 우리가 주식으로 쓰는 쌀이 없었다면 아시아 문명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감자와 옥수수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인류가 70억에 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면직물 산업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면직물의 원료인 목화가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없었으리라. 하물며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백김치, 물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다.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트라도 뽕뽕 날려주고 싶다.

고추는 일본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데 왜 정작 일본인들은 고추를 즐기지 않을까. 반대로 우리는 고추 없이는 살 수 없을까. 고추가루를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매운탕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고추장을 바른 불고기를 밥과 함께 쌈에 싸서 입에 넣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이보다 맛있는 별미가 없다. 저자는 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는 반면, 고려 시대 이후 우리는 불교의 영향이 약화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육식에는 향신료가 빠질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13가지 식물의 역사 이야기는 다채로우면서 흥미진진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게 알고 보니 이런 역사가 담겨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또한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분, 갈 곳이 마땅찮은 '동남아(동네에 남아 있는 아저씨)'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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