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히어로 - 미 해군 특수부대원의 회고록
마크 오언 외 지음, 이원철 옮김 / 혜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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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화려한 액션 신은 없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무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감독을 맡았더라. 네이비 실 출신의 베테랑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상사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최고의 저격수로, 그가 사실한 적병은 공식적으로만 160명, 비공식적으로는 25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병기인 셈이다. 워낙 공포의 대상이라 이라크 반군들은 그의 목에 8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존 윅이나 <미션 임파셔블>의 탐 크루즈마냥 주인공이 수많은 악당들을 미친 듯이 쏘아 죽이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따위의 말도 안되는 할리우드 식 영웅물이 아니다. <애너미 앳더 게이트>처럼 적 저격수와 대결하는 드라마틱한 긴장감도, 전장에서 꽃피는 로맨스가 있는 영화도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영화 내내 몇 명을 사살하는지 따위를 세워 볼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크리스는 영웅이지만 그렇다고 람보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총을 쏘는 것은 자신이 정의라서거나 또는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그게 임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또한 주변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일을 끝없이 경험해야 한다. 언젠가 자신 또한 적에 의해서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영웅은 없다. 국가로부터 영웅이라 불리지만 PTSD(정신 외상)에 시달리는 한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는 퇴역 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남긴 상처에 고통받는 참전 군인들을 돕는 일을 하지만 결국 2013년에 한 PTSD 환자에게 살해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보는 전쟁사는 지도자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이다.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결단을 내렸으며 군대를 어떻게 지휘하여 적군을 분쇄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는가만을 강조하면서 불후의 영웅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 명령에 복종하여 전장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며 죽어 나가는 존재들은 높으신 분들에게는 한낱 종이 위의 숫자일 뿐이라도, 무기질로 된 장기말이 아니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인간이다. 무명의 군인들이 집을 떠나서 가족과 헤어져 낯선 공간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로 죽기로 싸우는 것은 장군들의 장기말이 되기 위해서도, 영웅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은 졸병들의 전쟁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전쟁, 장군들의 전쟁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말이다.

밀덕이라면 주목할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혜람 출판사에서 나온 <노 히어로(원제 : No hero - the evolution of a navy seal>, 즉 '영웅은 없다'이다. 이 책은 한 군인의 회고록이지만, 흔히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다는 늙은 예비역 장군이 젊은 후대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 역경을 반쯤 미화하면서 공적은 과장하되, 실수는 축소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그 때가 좋았지"라는 식의 그런 뻔한 회고록과는 다르다.

저자는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 해군의 네이비 실 출신의 전직 병사이다. 마크 오언은 필명이고 본명은 매트 비소네트(Matt Bissonnette)라고 한다. 그는 네이비 실에서 14년 동안 복무하면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작전에 투입되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전은 2011년 5월 1일 911테러 이래 아프칸과 파키스칸 산악지대를 이리저리 숨어다니며 10년 동안 미군이 몇 번이나 놓쳤던 빈 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사살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도 그의 이전 작이자 빈 라덴 사살 작전인 넵튜스피어 작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노 이지 데이>가 길찾기에서 출간된 바 있다. 본인은 그 책이 보안 수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기밀유출죄로 무려 700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물었다고 하던데, 우리 독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만큼 리얼하고 가감없이 썼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벌금만 이 정도라면 도대체 책 팔아서 얼마나 번건지. 역시 미국은 대단함.

전작인 <노 이지 데이>가 빈 라덴 사살 작전의 비하인드를 다룬 책이라면, 신작인 <노 히어로>는 누구나 막연히 동경하면서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세계 최강 특수부대원으로서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네이비실 팀원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서 일당백의 특수부대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내면은 남들이 추켜세우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던가.

저자 자신을 비롯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배우도 아니고,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같은 킬러들도 아니다. 평소에는 가족들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임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다른 부대원들이 작전 중에 사고가 났다고 하면 걱정하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으면 한없이 슬퍼하며, 책상물림의 높으신 분들이 어거지나 다름없는 임무를 내릴 때마다 불만을 터뜨릴 때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개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임무에 투입되는 순간부터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개월 동안 정치인들과 언론은 오사마 빈 라덴 임무에 대한 네이비실을 축하해 왔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쉽게 내뱉는 단어가 아니었으나, 지금 우리끼리는 그 의미 자체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모두가 영웅이었다."

"총알은 택시의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한발이 레이의 목을 깔끔하게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네이비실인 레리의 귀로 들어가 코를 통해 나왔다. 택시 운전사는 둘을 태운 채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했고 레이는 자신의 셔츠로 피를 지혈하며 직접 응급실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에 나는 그저 네이비실이 되는 것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훈련이 어려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어려울지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기는 너무 어렸다. 확실한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희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때 당시에는 그 이유 하나로도 앞으로 나아가기에 충분했다."

"잠영은 지옥주로 불리는 5일 반나절의 혹독한 훈련을 포함해 BUD/S의 첫번째 단계에 해당했다. 지옥주에는 각 교육생이 모두 합쳐서 4시간 정도만 수면을 취하고 3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매일 20시간 이상 체력단련을 해야 했다."

"직업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나는 모든 특수부대가 공통된 마음가짐을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얽혀 있었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평화로울 때에는 부대들 사이에 경쟁심이 있었다. 그러나 교전이 시작되면 팀워크를 위해 경쟁심을 버렸고 또 만약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즉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가장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고 베크워드가 말했던 것처럼 "훈장, 시신 운구낭, 또는 둘 다"는 공통된 것이었다. 우리 모두 섀클턴이 약속했던 것처럼 "낮은 임금, 냉혹한 추위, 임흑천지에서의 긴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우리가 실패보다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검토를 하며 나는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파편을 굴렸다. 파편은 내 운 이상의 것을 생각나게 했다. 이는 운보다도 경험이 부족한 육군 대령이 분야별 전문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얼마나 쉽게 우리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기관총에서 나오는 총구 화염은 마치 곡사포를 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뒤로 넘어져 등으로 땅에 넘어지는 순간 기관총 총열에서는 1미터 길이의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내 야간 투시경으로 보인느 모든 것들이 빛의 향연이었다. 적이 매섭게 기관총을 쏘아대며 총알이 머리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번 파병은 나에게 열세번째 파병이었다. 나는 수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인생의 일부를 바쳐왔다. 이는 더 이상 나에게 '이론'이나 '훈련'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때 나는 군 생활에서 처음으로 내가 알래스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꿈꾸었던 네이비실이 되는 목표를 비로소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네이비실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북이 아니다. 네이비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 자화자찬하는 책도 아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며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회고록들마냥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벌여놓은 명분없는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따위의 복잡한 정치 얘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왜 네이비실을 처음 선택하게 되었는지부터, 네이비실의 혹독한 훈련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는지, 베테랑 군인이자 팀장으로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14년의 복무를 끝내고 제대를 선택하기까지를 얘기한다. 여기에는 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그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그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으며 누군가를 살인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 안고 가야할 짐일 것이다. 책의 제목대로 전쟁에서 영웅은 없다.

읽다보면 책의 많은 부분이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전작에서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덕분에 호된 경험을 한 저자가 이번에는 사전 검열을 받았고 그 바람에 민감하거나 보안에 저촉되는 부분이 일일이 지워졌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해서 읽는데 지장은 없다. 이 책에서 정치인들이나 장군들이 말하는 전쟁 회고마냥 거창하게 포장하거나 한편의 영화같은 드라마틱한 얘기는 없다. 그 전쟁 한복판에 있었던 한 사람의 평범한 군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전쟁 이야기이다.


미국은 워낙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이다보니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병사들도 이러한 참전 수기를 충분히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가 미군처럼 실제로 최전선에 나서서 실전을 경험할 일은 없지만, 아프간과 이라크 등 곳곳에 비전투요원으로 파병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외 파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아쉬웠던 일, 어떤 일을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지 등, 외교관이나 언론인, 장군들이 아닌 평범한 병사의 눈에서 바라본 전쟁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수기이자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고록은 높은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여지껏 초임 장교나 졸병 출신이 이러한 수기를 내었다거나 언론에서 연재물로 다루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파병 기간이 너무 짧고 딱히 사건 사고가 없어서 글로 쓸만한 얘기가 없어서는 아닐진데 말이다. 필력의 문제인지, 관심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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