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아침마당'프로를 즐겨 보고 가끔은 그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준다.

 

오늘 나도 본다.

 

홍승찬 교수님의 강의가 있는 날이었네.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오늘 알게 된다.

 

김형석 교수님도 그랬다. 아침마당에서 처음 보고 무척 감동을 받았었다.

 

매번 비슷한 감동의 물결이 이는 걸 보니 매주 목요일마다 한다는 '목요특강'을 계속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건만 있는 역사보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가 재미있듯이, 진리만 있는 철학보다 이야기가

 

있는 철학이 훨 이해가 쉽듯이, 클래식도 그러하다는 걸 홍승찬교수의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된다.

 

지식을 이야기로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해박하고 훌륭한 선생님일 것이다.

 

하이든의 '천지창조', '놀람, 시계, 장난감(실은 모짜르트 아버지 곡이란다), 농담, 고별 고향곡',

 

헨델-수상음악 은 다음에 들을 때면 더욱 실감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연, 책, 음악, 친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유용주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며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아~ 오세암 만화책을 보며 왈칵왈칵 쏟았었네.ㅎㅎ

 

작가의 누나이야기에서는 어느 누군들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있을라나...

 

한 사람의 고달프고 아픈 가족사가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하던 초반과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공감력이 확실히 떨어졌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술을 경계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할 수 있다.

 

연한 알콜의 취기로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면 거기서 멈출 줄 알아야 하고, 거기거 멈출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은 어떤 일도 능률적으로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글귀가 세상의 모든 책들 곳곳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즐겨 읽는 이유도 우리의 선한 영혼을 깨우기 위함일 것이며, 취함으로 인해

 

스스로의 영혼의 집을 속되게 하지 말라 했거늘!

 

솔로 인한 객기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예술가라서? 창작을 위해서라면 그런

 

취기는 부러도 할 수도 있다고? 창작을 위해서라면 마약조차도 용인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은 술에서도 예외 아니다.

 

"정말"이라는 이정록 시인의 시집을 사둔게 있었다. 그도 역시 술꾼의 일인자라 이 책에서

 

자랑질 해대니 그 시집이 다시 보고 싶지가 않은거라. 그의 책속에 들어 있는 모든 시들도

 

그런 취기에서 나왔던가 싶으니 혀를 차게 된다. 특히 이 책의 내용 중, 이 책의 저자인

 

유용주를 비롯 몇몇 그의 지인들이 이정록 근무하는 학교의 점심시간에 맞춰 찾아가 같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술판이 벌어지는 내용에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두만, 그는, 이정록은

 

엄연히 근무시간 아니던가 말이지. 토요일이었다고? 그럼 토요일이라 명시해 두었어야지.

 

온통 그가 얼마나 술꾼이었나만 적나라하게 적어둔 마지막 안학수의 '발문'에서는 그 정점을

 

찍는다. 어찌 이런 내용으로 발문을 달 수나 있는지 나는 혀를 찬다. ㅉㅉ...

 

술로 버티었을 그의 고단한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인으로 살아가는 그를 응원하지만,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라고 말한다면 부디 금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은 다섯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5-08-27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알맞게 즐길 수 있다면 아름다운 술일 텐데
늘 술만 끼고 산다면...
참으로... 좀 말썽이 되리라 느껴요

Grace 2015-08-29 15:38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은 술을 가까이 하는 분 같지 않아서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있는 분들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숲노래님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참 좋습니다. 두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그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음은 어떻게 살아야하나라는 물음의 답이기도
한 듯 해서, 그래서 참 좋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애초에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나를 따르지 않는다하여 고통을 주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이 그 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도 모르게 많은 것들이 왜곡 되어진 채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니었을라나......

 

톨스토이를 읽으면 나의 생각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착한 일을

행함으로써 각자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 악을 악으로 갚는 데 있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톨스토이의 믿음이 하느님으로 향한 종교인들의 믿음이 되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선을 행하는 곳에 신이 있고, 우리는 그 신의 사랑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종교인으로서의 충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인생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한 이야기
월호 지음 / 마음의숲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뭘 말하려는지도 모르겠다.

뜬구름 잡는 듯한 흔한 이야기...

딱 그대로,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딱 그것만 있는 것 같다.

삶은 왜 사라져야하는지, 사라지기 전에 무엇을 봐야 하는지, 사라지면 다 값진 것인지...

뭔가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리영희의 "대화"를 읽었을 때의 흥분과 감탄이 똑 같았다.

 

나는 시대정신이 없다. 이것은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닐란가...

 

리영희 교수는 그렇더라, 국내정세, 세계정세가 훤히 다 보이는 거더라. 그것을 나는 '지성'이라

 

이름하고, 나는 절대로 볼 수도, 보여지지도 않는, 느껴지지도 않는 그 지성적인 면에서는 늘

 

젬병임과 동시에, 그런 지성인에 대한 존경 내지는 무턱대고 우러러 봄이 아주 오래 전 부터 나의

 

근간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지성인이 부럽다. 내 자식 중에 한 명정도는 지성

 

인으로 자라기를 얼마나 기도 했었던가!

 

책이 너무 재미 있어서, 출판된지 20여년 된 책임을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기쁘게 읽었

 

다. 오래 전 한 때,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때, 나는 무슨 삐딱함에서인지 외면 했다.

 

그 오래 전부터 베스트 셀러라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하는 것들은 비단 책 뿐만

 

아니라 여러면에서 외면하게 되더라구. 서점에 들러서도 베스트셀러 코너보다는 다른 쪽을

 

기웃거렸던 것 같은데, 그 삐딱선이 어디서부터 출발 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니 딱히 그것이네라고 짚어지는 원인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항시 '베스트'라 일컫는 것들에 대한 실망감을 많이 했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책보다 나은

 

영화는 없었듯이, 제 아무리 영화가 재미 있어도 책을 능가하지는 못했던 실망감처럼...

 

그러나, 그러나 앞으로 나는 베스트 셀러라면 봐야 하겠구나라고 마음을 바꾼다.

 

책 앞 표지 뒷면에 그의 사진과 약력이 나온다. 그 첫 번째가,

 

"1947년 서울 출생. 경기중, 고 졸업" 이다.

 

47년에 고등학교 졸업이라면, 그럼 지금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는데...

 

다음 날 친구의 폰(난 아직 스마트 폰으로 바꾸질 못했다는)으로 검색해 보는데,

 

정치인 홍세화만 나오고 내가 찾고자 하는 홍세화는 없는거라! 아~~ 돌아가셨구나.....애재라...

 

다음 날 컴으로 다시 검색해 보니 그 정치인 홍세화가 내가 찾던 그 홍세화인거라!

 

책 표지에 있던 사진과는 모습이 너무 달라(세월이 많이 흐른게지) 미처 알아보질 못했던

 

것이며, 47년이 그의 졸업년도가 아니고 출생년도였던 것도 알게 되었다.

 

분명하게 표기해 두지 않은 책 편집인을 원망하며, 2002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오셨다니,

 

고국에 대한 그의 그리움을 읽었던 터라 참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무척 날 기쁘게 했다.

 

그리고 살아 계시다는 것도!

 

프랑스, 괜히 나와는 별로 맞지 않는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또한

 

모두 사라졌다. 프랑스 영화는 볼 때마다 뭔가 찝찝했다. 결말이 확실하게 맺어지는 것도 없어서

 

보고 나면 찜찜한 것이 뭐 이래...라는 생각을 항시 했었는데...

 

"지구를 걷는 아이"에 보면 어린 아들이 옆방인가(아프리카 여행 중인가 그러하니 딱히 방이

 

라기보다는 커튼 뒤쯤 되겠지, 여튼),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를 하는 부모의 이야기

 

를 읽고 프랑스 부모들은 우리와는 무척이나 맞지 않는 문화를 가졌구나 생각했고, 나와 맞지

 

않으니 프랑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 같다.

 

"똘레랑스", 이것만으로 나는 몹시도 그 나라가 보고 싶어졌다.

 

"지성인"의 힘이란 이런 것이기에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이런 힘이 없다.

 

대학교때 몇 번의 시위를 보았다. 난 최루탄이 무섭고 경찰이 무섭고 그들의 폭력이 무서워

 

일찌감치 그 시위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에 바빴다.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던 어린 이승복을 안타깝게 가슴에 새기며 북한은, 빨갱이는, 간첩은

 

정말 괴물같은 무서운 존재여서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라는 걸 머리 속에 넣어 둔, 철저하게

 

반공,방첩교육, 통일교육을 잘 받아 왔던  내가 그 시위에 동할리가 만무했다.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민족의 숙원이라 생각했고, 그런 숙원을 이루어 줄 사람은 훌륭

 

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 여겼다.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어린 여중생의 눈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충격과 불안이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살아 왔다. 반공, 통일 교육에 있어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나라에서 그렇게 교육을 시켰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싸우는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걸까? 

 

망명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 어려움과 고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그의 부인이

 

겪어야 하는 아픔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감히 헤아려 보면서 왜 그는 그의 아내에 대한 언급은

 

전무한지 궁금하다.

 

 

 

 

 

 

 

 

*문제는, 우리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갈 때, 일생을 두고 그 현장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봐. 죽을 때까지 말이야. 바로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의 실제 삶이거든. 우리는 현장에

들어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겐 그게 생존이 아닐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스며들자,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원한 점

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원한다는 사실이다.

(...)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는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

법을 중요시했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 운전사를 택시 운전

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이 말은 택시운전사인 내가 택시 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

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우선 프랑스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길을 모르면 가만히 있지 당신처럼 "이 놈이 돌아

가고 있는 거 아냐"하는 의심은 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아는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한 택시운전사에게 이곳 사람들은 당신처럼 불쾌

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또 속으로 "이 놈이 돌아가네"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러이러한

길이 더 빠른 길 아니오?" 하고 떳떳이 말한다. 어감에서 불쾌함을 찾기 힘들다. 택시 운전사는

이에 대해 자기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설명한다. 역시 불쾌한 어감이 아니다. (...) 빠리에서

못된 택시운전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의심은 대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리 의심부터 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입니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情)이 흐르는 사회

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똘레랑스란 첫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 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 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

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원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은 설득에 의한 동의로 바뀔 수는 있어도 강제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는 프랑스인이 우리 음식의 냄새를 맡고 당신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면 프랑스의 치즈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곧바로 응수하면 됩니다. 그는 움츠러들어 슬그머니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치즈의 냄새가 우리 음식 냄새보다 더 고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치즈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배척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의하여

자기 것을 인정 받으려면 남의 것도 인정해야 하는 똘레랑스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

입니다.

 

*신앙의 힘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독선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신앙이 온유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극단화되고 또 광신으로 갈때 그 비이성적인 파괴력으로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

왔습니다.

 

*또레랑스는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

이 존중 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은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하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

서기보다 연재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로

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내가 처음에 한국 사회를 情의 사회라고들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 정이 지나쳐서일까요? 참견을 잘하고 강요하는 사회인 것도 같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똑같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나와 똑같은 이념을 갖기를 강요

하며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갖기를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그 요구에 순응하면 한편이 되고, 또 이

른바 '정'을 주기도 하지만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적대관계로 돌변합니다. 이와 같은 강요의 논

리가 권력수단과 함께 펼쳐질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