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리영희의 "대화"를 읽었을 때의 흥분과 감탄이 똑 같았다.

 

나는 시대정신이 없다. 이것은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닐란가...

 

리영희 교수는 그렇더라, 국내정세, 세계정세가 훤히 다 보이는 거더라. 그것을 나는 '지성'이라

 

이름하고, 나는 절대로 볼 수도, 보여지지도 않는, 느껴지지도 않는 그 지성적인 면에서는 늘

 

젬병임과 동시에, 그런 지성인에 대한 존경 내지는 무턱대고 우러러 봄이 아주 오래 전 부터 나의

 

근간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지성인이 부럽다. 내 자식 중에 한 명정도는 지성

 

인으로 자라기를 얼마나 기도 했었던가!

 

책이 너무 재미 있어서, 출판된지 20여년 된 책임을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기쁘게 읽었

 

다. 오래 전 한 때,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때, 나는 무슨 삐딱함에서인지 외면 했다.

 

그 오래 전부터 베스트 셀러라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하는 것들은 비단 책 뿐만

 

아니라 여러면에서 외면하게 되더라구. 서점에 들러서도 베스트셀러 코너보다는 다른 쪽을

 

기웃거렸던 것 같은데, 그 삐딱선이 어디서부터 출발 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니 딱히 그것이네라고 짚어지는 원인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항시 '베스트'라 일컫는 것들에 대한 실망감을 많이 했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책보다 나은

 

영화는 없었듯이, 제 아무리 영화가 재미 있어도 책을 능가하지는 못했던 실망감처럼...

 

그러나, 그러나 앞으로 나는 베스트 셀러라면 봐야 하겠구나라고 마음을 바꾼다.

 

책 앞 표지 뒷면에 그의 사진과 약력이 나온다. 그 첫 번째가,

 

"1947년 서울 출생. 경기중, 고 졸업" 이다.

 

47년에 고등학교 졸업이라면, 그럼 지금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는데...

 

다음 날 친구의 폰(난 아직 스마트 폰으로 바꾸질 못했다는)으로 검색해 보는데,

 

정치인 홍세화만 나오고 내가 찾고자 하는 홍세화는 없는거라! 아~~ 돌아가셨구나.....애재라...

 

다음 날 컴으로 다시 검색해 보니 그 정치인 홍세화가 내가 찾던 그 홍세화인거라!

 

책 표지에 있던 사진과는 모습이 너무 달라(세월이 많이 흐른게지) 미처 알아보질 못했던

 

것이며, 47년이 그의 졸업년도가 아니고 출생년도였던 것도 알게 되었다.

 

분명하게 표기해 두지 않은 책 편집인을 원망하며, 2002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오셨다니,

 

고국에 대한 그의 그리움을 읽었던 터라 참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무척 날 기쁘게 했다.

 

그리고 살아 계시다는 것도!

 

프랑스, 괜히 나와는 별로 맞지 않는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또한

 

모두 사라졌다. 프랑스 영화는 볼 때마다 뭔가 찝찝했다. 결말이 확실하게 맺어지는 것도 없어서

 

보고 나면 찜찜한 것이 뭐 이래...라는 생각을 항시 했었는데...

 

"지구를 걷는 아이"에 보면 어린 아들이 옆방인가(아프리카 여행 중인가 그러하니 딱히 방이

 

라기보다는 커튼 뒤쯤 되겠지, 여튼),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를 하는 부모의 이야기

 

를 읽고 프랑스 부모들은 우리와는 무척이나 맞지 않는 문화를 가졌구나 생각했고, 나와 맞지

 

않으니 프랑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 같다.

 

"똘레랑스", 이것만으로 나는 몹시도 그 나라가 보고 싶어졌다.

 

"지성인"의 힘이란 이런 것이기에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이런 힘이 없다.

 

대학교때 몇 번의 시위를 보았다. 난 최루탄이 무섭고 경찰이 무섭고 그들의 폭력이 무서워

 

일찌감치 그 시위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에 바빴다.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던 어린 이승복을 안타깝게 가슴에 새기며 북한은, 빨갱이는, 간첩은

 

정말 괴물같은 무서운 존재여서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라는 걸 머리 속에 넣어 둔, 철저하게

 

반공,방첩교육, 통일교육을 잘 받아 왔던  내가 그 시위에 동할리가 만무했다.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민족의 숙원이라 생각했고, 그런 숙원을 이루어 줄 사람은 훌륭

 

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 여겼다.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어린 여중생의 눈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충격과 불안이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살아 왔다. 반공, 통일 교육에 있어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나라에서 그렇게 교육을 시켰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싸우는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걸까? 

 

망명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 어려움과 고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그의 부인이

 

겪어야 하는 아픔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감히 헤아려 보면서 왜 그는 그의 아내에 대한 언급은

 

전무한지 궁금하다.

 

 

 

 

 

 

 

 

*문제는, 우리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갈 때, 일생을 두고 그 현장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봐. 죽을 때까지 말이야. 바로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의 실제 삶이거든. 우리는 현장에

들어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겐 그게 생존이 아닐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스며들자,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원한 점

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원한다는 사실이다.

(...)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는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

법을 중요시했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 운전사를 택시 운전

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이 말은 택시운전사인 내가 택시 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

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우선 프랑스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길을 모르면 가만히 있지 당신처럼 "이 놈이 돌아

가고 있는 거 아냐"하는 의심은 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아는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한 택시운전사에게 이곳 사람들은 당신처럼 불쾌

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또 속으로 "이 놈이 돌아가네"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러이러한

길이 더 빠른 길 아니오?" 하고 떳떳이 말한다. 어감에서 불쾌함을 찾기 힘들다. 택시 운전사는

이에 대해 자기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설명한다. 역시 불쾌한 어감이 아니다. (...) 빠리에서

못된 택시운전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의심은 대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리 의심부터 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입니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情)이 흐르는 사회

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똘레랑스란 첫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 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 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

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원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은 설득에 의한 동의로 바뀔 수는 있어도 강제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는 프랑스인이 우리 음식의 냄새를 맡고 당신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면 프랑스의 치즈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곧바로 응수하면 됩니다. 그는 움츠러들어 슬그머니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치즈의 냄새가 우리 음식 냄새보다 더 고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치즈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배척될 수 있다는 지적에 의하여

자기 것을 인정 받으려면 남의 것도 인정해야 하는 똘레랑스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

입니다.

 

*신앙의 힘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독선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신앙이 온유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극단화되고 또 광신으로 갈때 그 비이성적인 파괴력으로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

왔습니다.

 

*또레랑스는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

이 존중 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은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하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

서기보다 연재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로

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내가 처음에 한국 사회를 情의 사회라고들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 정이 지나쳐서일까요? 참견을 잘하고 강요하는 사회인 것도 같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똑같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나와 똑같은 이념을 갖기를 강요

하며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갖기를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그 요구에 순응하면 한편이 되고, 또 이

른바 '정'을 주기도 하지만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적대관계로 돌변합니다. 이와 같은 강요의 논

리가 권력수단과 함께 펼쳐질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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