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을 읽고 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는 술술 넘어가다가 사도행전에서 좀 헤맸다.

"온 가족이 읽는 신약 성서"를 읽으니 사도행전은 바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설명을 읽고 조금 이해가 되었다.

성경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아주 먼 사촌에게서 선물을 받았던 책이다.

마태복음이나 마가, 누가 복음은 여러번 읽었지만 언제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하는 성미때문에 몇번을 포기하다가 다음에 완독해야지 하고 밀어두었던 것이 이십 오년이 흘렀다.

이번에 신약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읽는 느낌을 예전엔 왜 못가졌을까 하는 마음과 부처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정말 본질적으론 똑 같구나 하는 것을 실감 한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누가복음 9장

성철 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싶어 이 구절을 읽을 땐 환희심을 느꼈다.

오늘은 로마서를 읽다가 불교의 오계와 같은 부분이 있어 밑줄을 그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로마서-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태복음-

좋은 말이 너무 많지만 아직 성경을 읽지 않은 분이 보물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만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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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1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을 천천히 보고 있는데, 정말 하느님 말씀이랑 부처님 말씀이랑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단 생각을 자주 합니다.
성경은 게을러서 잘 안 읽어 지는데, 저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껴 읽으려고 하루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언제 기회 되면 한 번 보시길...

혜덕화 2006-04-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요즘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경 읽으시는 줄 알았어요.
다음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성경과 능엄경을 함께 공부하랴, 다석강의도 읽으랴 밀린 책이 많네요. 학교에선 가끔 선의 황금시대도 읽는데, 참 좋더군요.

달팽이 2006-04-1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이 달라도 그것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체험해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들의 삶이 미망 속을 헤매지 않을테니까요.
공부하는 마음이 좋은 것은 그래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바로 본 모습은 무엇일까?
오늘 이 의문 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혜덕화 2006-04-1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잘 지내시죠?
오늘은 고린도 전서를 읽었는데, 어제 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우리 몸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부분이 나오더군요. 성경 속에서 찾는 부처님 말씀, 재미있어요.

니르바나 2006-04-1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안녕하세요.
아랫글 속 어린 친구의 안타까운 일이 자꾸 눈에 밟히는군요.
혜덕화님이 읽으시는 경전속의 사랑이 친구의 가슴을 환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늘 몸과 마음으로 수행하시면서도 열심히 책을 읽으시는 혜덕화님의 선교쌍수가
거듭 거듭 드리는 말씀이지만 많이 부럽습니다.
오늘도 행복지으시는 날이 되시길 빕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오시는 날이 한 보름 남았군요.
니르바나가 미리 축하드립니다. ^^

 

여기 저기 수행처요, 먹을 것 걱정 없네. 발우 들고 가는 곳에 천지가 내집이라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 알지 말라. 가사 장삼 수하기가 더욱 더 어렵다네.

임금이라 나라의 주인 노릇 하느라고 국가와 백성 걱정 갈수록 걱정거리

백년 삼만 육천 날 풍진 속 이내 신세, 절 집안 반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당초의 부질 없는 한 생각 잘못으로 가사를 벗어 놓고 곤룡포를 입게 됐네.

이 몸은 예적에 인도의 스님일러니 그 어떤 인연으로 왕가에 떨어졌나

이 몸을 받기 전엔 무엇이 '나'이런가 세상에 태어난 뒤 나는 과연 누구런가

자라서 성인 됨에 잠깐 동안 나라더니 눈 한번 감은 뒤엔 이 또한 누구런가

세상사 백년은 하루 밤 꿈과 같고 수만리 산과 들은 한판의 바둑일세

니땅 내땅 서로 차지 약육강식 한심하고 지루한 바둑판 인생

자손은 제 스스로 살아갈 복 타고 났나니 후손을 위한다고 소와 말 되지 말라

지긋지긋한 역사 속에 많은 많은 영웅들이 푸른산 언덕 위에 한줌 흙 되었다네.

날적엔 기뻐하고 죽을 땐 슬퍼하나 덧 없는 인간 세상 한바퀴 도는걸세

애당초 안왔으면 갈일도 없을건데 기쁜일 어디 있고 슬픔인들 있을손가

나날이 한가로움 스스로 알것 이니 풍진 속 세상 길의 온갖 고통 여의었네.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 경계 몸 위에 입고픈 옷 잿빛 승복 한 벌이네

사방 천지 간에  가장 높은 손님 되어 부처님 도량에서 마음껏 노닐 적에

세속을 떠나는 일 쉽다고 하지마오, 숙세에 쌓아 놓은 선근 없이 아니되네.

18년간 지나간 일 자유라곤 없었는데 땅뺏는 큰 싸움 이제야 쉬게 됐네.

내 이제 속세를 벗어나 절집으로 들어가니 천만가지 근심 걱정 이제는 다시 없으리.

 

오늘 아침 우학 스님의 초발심 자경문을 공부하다가 이 출가시를 읽어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니르바나님의 서재에서 이 시의 일부를 보고 전문이 낭독 된 것 같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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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6-01-16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 중에 나온 글을 인용한 것이었는데
올려주신 전문을 펼쳐놓고 보니
출가하는 대장부의 기개가 느껴지는군요.
혜덕화님 감사합니다.
 

그대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어느날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동료들과 헤어졌다. 그는 사흘동안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하고 배가 고팠으며 맹수들때문에 겁이 났다.

밤이면 그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흘째 되는 날은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앉았다. 사흘동안의 배고픔과 고단함, 그는 잠도 자지 못했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달을 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달에 대한 아름다운 시들을 많이 지었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그의 마음이 다른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달이 하늘에 떠가는 커다란 빵덩어리로 보였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달 속에서 항상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이 빵덩어리로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 투사한 것일 뿐이다.

                          라즈니쉬  -달마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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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인간의 목숨은 예측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살지 알 수도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괴로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늙으면 이윽고 죽음이 오나니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이다.

제 아무리 잘 구워낸 도자기도 마침내는 모두 깨어져 버리고 말 듯

인간의 목숨도 이와 같은 것.

늙은이도, 젊은이도,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다.

사람들은 죽음에 붙잡혀서 저 세상으로 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버지도 그 아들을 구할 수 없고

친척도 그 친척을 구할 수 없다.

보라, 친척들이 지켜보며 슬퍼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는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른다.

탄생과 죽음의 양끝을 모르면서 왜 그리 구슬피 울고만 있는가.

슬피 우는 것으로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현명한 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 있으면  괴로움만이 괴로움만이 더할 뿐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가는 슬픔을 또 다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해도 마침내는 친지들을 떠나서

이 생명을 버려야 할 날이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이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슬픔을 거둬야한다.

비탄과 고뇌의 화살을 뽑아 버린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는 일 없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슬픔을 극복한 다음 더 없는 축복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ps: 이누아님

통속적인 위로 밖에 나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작은 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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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06-04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에 님을 봤습니다. 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소나무에서 송화가루가 날리는 시골길에서 작은 언니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님에게 "의사가 사망진단을 했는데도 며칠 만에 언니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편지를 보내는 꿈이었습니다. 낯모르는 님에게 저도 모르게 의지했었나 봅니다. 님의 말씀들이 제게 위로가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혜덕화 2005-06-0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1. 세계는 자아의 중력에 의해 휘어져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불교 이해의 관건이다. 쉬운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욕구, 주장, 그리고 지배와 권력의 의지를 통해, 주변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있다. 이 '주관적 환상'을 우리는 '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2.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 한용운-

현대불교라는 신문에 연재되는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를 후배가 모두 복사해서 한권의 책으로 엮어서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문 칼럼이라 글자도 7포인트 정도로 작아서 보기 불편해서 하루에 한편씩만 읽어나가는데 오늘 만난 이 구절은 불교를 이해하는 키워드쯤 될 것 같아 올립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현대불교 불기 2548년 11월에 연재된 금강경 강의 18회분부터 쭉 읽어보세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스님들께서 해설한 금강경과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한 구절을 더 보태어 소개 하자면

"망계에 의한 집착인게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다니, 마음 속 의심이 곧 암귀가 되고, 눈에 병이 들면 허공에 꽃이 어지럽지. 풍경은 하나인데 세 사람이 보는 것이 왜 이렇게 다를까. 이 비밀을 깨달으면 이름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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