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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몰입한다는 것을 느꼈다. 글쎄, 한국이라는 국가적 틀 내에서 '사유'한다는 것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았던 것은 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자리이동', 즉 모든 개념의 '경계화'에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총체'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더더욱. 

글의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이들도 있겠지만, <언어의 감옥에서>라는 제목(그리고 내용)이 '환기'하는 바를 필자는 스피노자-니체-...-라캉-데리다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미 제목 자체에서부터 라캉의 '상징계', 그리고 기표/기의의 관계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녀는 '서경식'이라는 인물의 도플갱어와도 같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불가리아 태생의 여인만큼 '경계인'의 표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녀의 '언어'와 서경식의 언어가 겹쳐지고 조립되고 서로 융화되는 어떤 지점들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여기서 경계라는 것은 단순히 지리상의 국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가 '모어', '모국어', '국민'을 등식으로 연결하려는 국어 내셔널리즘과 불가분의 관계인 이상, 주변화된 사람들은 언어 간의 경계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내면에까지 모든 언어의 균열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p.44  

더불어 그가 '이양지'라는 또다른 디아스포라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시선'은, 10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그녀의 <유희>를 읽어내려가며 '치밀함'으로 필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여기에는 모어와 모국어가 어긋나버린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이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어려움과, 그 희미한 가능성이 모두 암시되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양지의 작품은 한/일 양국에서 '어떻게' 읽혀졌는지, 그리고 읽혀져야만 하는지를 성토하고 있다. 

그는 억압과 속박, 단절과 고립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일종의 '과정적 물음'을 제시한다. 사실 그것은 국가라는 틀 속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미' 내재된,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자마자 우리 내부에 잉태된 하나의 필연적 물음이다. 모어라는 '폭력', 그리고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더불어 일본이라는 '기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물음들은, 그 자체로 '과정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정의 자체를 거부하는 '주변인'의 습성을 가진다. 흔히 우리는 그들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마이너'라는 (자기-)인식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재적인 저항의 물결, 혹은 표면적인(단순한) 저항의 모습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내재적 저항', 그리고 결코 고정되기를 거부하는 기표의 연쇄, 혹은 '유동적'(혹은 유목적)인 주체와 관련된다.

또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박유하-서경식 간의 비판-보론 부분이다. 박유하 교수에 관해서는 약간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경식은 그녀를 '열심히'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공감하는 바이다. 그냥 든 생각인데, 서경식의 비판은 '뒷문을 열어두는' 형식인 것 같다. 비판의 '여지'를 약간 남겨두는 듯 한데, 상대가 그걸 '무는' 순간, 그는 그 먹이의 '견고함'을 새삼 인식하게 만들고, 상대는 '이빨빠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뭐 그런 형식.(우스갯소리다.) 

 여하건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꽤 필요한 경험이다. 흔하디 흔한, 'DDD 필수 교양도서 100권'등에 꼭 포함되었으면, (혹은 포함 안되었으면) 하는 양가적인 바람이 있다. 후자의 이유는, 그런 필수 교양도서에 '엉망인' 책들이 간혹 끼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사회'라는 '큰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로부터' 배우는가. 나아가, 국가 혹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것을 마침내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자신감있게 표현할만한 '근거'를 어디로부터 배우고 학습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학습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선험성'이라는 것과 '폭력성'을 동시에 관계짓는 것에 약간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과연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토익, 어학연수의 '필연성'이라는게 얼마만큼의 폭력을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감옥'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처받은 육체를 이끌어 자신의 주체를 비로소 경계에 세운 이들은 그렇게 고함친다. "당신들의, 당신들이 세운, 당신들을 위한" 감옥에서 한발자국, 움직여보라고. 그럼, 아마도, 그 공허한 감옥에서 울려퍼지는 발자국의 파편화된 '이명'이, 당신을 조금 흔들어 깨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나의) 시선'은 폭력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도 폭력이다. 그는 확실히 '시선들의 연대'를 말하고 있다. 시선은 교차되고, 때로는 엇나가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이름이다. 혹은 진정한 '주체'의 이름이다. 

p.s. 앞에서 필자는 계속해서 '우리는(우리들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러한 '범주화'에 대해서 좀 심사숙고 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오용' 혹은 '단순사용'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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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괴감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두들겨 맞고 난 다음에는, 왠지모를 기시감이 든다.

0.  

이 리뷰는 두서가 없을 예정이다. 

1.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 리뷰에서도 잠깐 밝힌바가 있지만, 쨌든 메타비평만큼이나 '감히' 손가락을 놀리기 힘든 글쓰기도 없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쉽게' 다가섰던 로쟈의 '저공' 비행과는 좀 다르게, 최정우의 비행은 확연히 '고공'을 날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엘리트주의라던가 나르시시즘이라던가 하고는 거리가 약간 있는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쓰기가 하나의 '귀감'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로 하여금 이 새벽의 타자놀이를 '타자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글쓰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또한 로쟈 리뷰에서도 밝힌 바가 있듯이(이쯤 되면 로쟈 리뷰가 뭐 대단한 거나 되는줄 알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거 없다. 흐흐.) 리뷰 혹은 비평이란 게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면, 이건 확실히 리뷰도 비평도 아닌, (항상 아름답고 규칙적이며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하나의 불협화음이자, 분절되고 재조립되어 버린 필자 자신의 현실에 대한, 그리고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키보드라는 타악기를 위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아, '알흠다운' 취업준비생(=대학 4년)의 '현실'이여. 

2.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잠깐 잡설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들뢰즈 이야기인데, <시네마>라는 두통유발 S급 도서를 읽고 있다가 만난 <사유의 악보>의 글쓰기, 사유 등등은 약간 '연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최정우의 '서곡'을 보자.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 p.8 

그리고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7장, '사유와 영화'에서 나오는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우리는 아직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신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만큼 전체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 끈임없이 화석화되고 무너져 내리는 사유, 그것에 대해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병치해놓고 보면 그가 말하는 사유의 '조각들'이란, 이렇게 마치 우리가 사유하고 있다는 행위-사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발견이자, 결국 사유가 만들어내는 조각성에 대한 '사유'인 것처럼 들린다. 내친 김에 하이데거의 얘기까지 들어보자.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의 상태가 끊임없이 사유하게-하는 상태로 변해가더라도 아직까지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유하게-하는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무엇이 사유함을 요청하는가> 

그렇다. 사실 우리는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을 사유할 수(사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정우가 들려주는 '사유'에 대한 '조각난 사유', 기형과 잡종의 '신체(육체)'들이야말로 들뢰즈의 '그것'과 연결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유해야만 한다!"는 당위, 혹은 강박적 선언의 필요성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사유-행위'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유는 '누구'로부터 '흘러' 들어와서는, '어디로' 조용히(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이것은 사유의 '조각화'를 통하여 진정한 사유-행위 자체의 즉자/대자적인 '조각組閣화(조직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판단된다.  

3. 

책 리뷰에 대해 최정우님(람혼)이 답변을 달아주시는 저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부진아같은 리뷰보다, 몇 가지 책 내용에 대한 질문들을 남겨놓고자 한다.  

- 이른바 '라캉으로의 복귀'(그러니까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는, 마치 라캉에 대해 지젝이 가지고 있는(그리고 우리들 독자가 '호명'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환기'시켜주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건 말하신대로 '순수한 라캉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 텐데, 과연 이러한 '청년 라캉'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라캉없는) 라캉주의'들이 어떻게 변화해나갈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관련내용 485-491쪽) 

- 개인적으로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읽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뮈(까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확히 말하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 편을 읽으면서, 로쟈의 번역비평도 생각나고, 제가 힘겹게 읽어내려갔던 랑시에르의 몇몇 책들이 떠올랐는데요, 직접 번역을 좀 (자주, 많이)해주시는게 어떨지요? 흐흐.  

4. 

각주에 대한 각주.  

"... 나는 밤 앞에 서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다, 내가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어딘가로 튕겨졌다가, 다시 다른 어딘가로 튕겨져 왔다는 기억만이,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버젓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중략) 그 이후로 나는 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벌건 대낮을 송두리째 흙 뿌리 같은 어둠으로 죄다 포장해버렸던 듯도 하다,그래, 여기는 캄캄하다, 여기는, 말도, 안되게, 캄캄하다,,,(중략) " p.517-518 1)

1) 밤이 듣는다 - 에레나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옛 노래)
내 하늘을 가득 소음으로 채운다
(새들만이 주소를 알아본 섬나라)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빌딩보다 구름이 낮은 밤)

흔적 없이 길은 노래 뒤로 숨었다
(베개 속에 꺼져 있던 길의 숨소리)
잠을 깨워 술을 불러 함께 걷는다
(느릿하게 물러나는 밤의 눈동자)
너무 커서 못 보는 얼굴이 그립다
(빈 액자가 발끝에 치인 밤)

골목마다 다른 불빛들이 환하다
(누구 하나 듣고 있지 않은 노래들
비도 없이 멜로디는 젖어 무겁다
(섬나라의 시민들이 적은 손 글씨)
이런 밤은 색이 바랠 만큼 걷는다
(익숙해진 노래를 망치는 비-밀)
사람들은 어딜 떠나려고 바쁘다
(밤 열차는 여기에 소리로 남는다)

밤이 듣는다(누가 떨면서 있다)
다정함을 지키던 마음 속
괄호가 새들 틈으로 날아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이 듣는다(꼭 붙어서 있다)
바위 속에 한 번쯤 닿고픈
이끼가 새벽쪽으로 커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소리들)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내 하늘은 가득 소음 속에 갇힌다)


music by ELENA
word by BANG YOUNG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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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2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jk7228님의 소중한 리뷰 너무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2절에서 제가 사용하고 의미한 '사유'의 개념을 들뢰즈와 하이데거의 언급과 비교하시는 지점에선 무릎을 치며 탄복했습니다. 제 '사유' 개념의 전사(前史)와 맥락을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 주신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바로 그 사유의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하고 싶은 마음이고, 이 책 또한 바로 그러한 욕망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가능성, 곧 그 (불)가능성을 공유해주심에 더욱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던져주신 질문들에 대한 답변:

1) 저는 제가 말했던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에 대한 강조가 특정 라캉주의자들(지젝-라캉-헤겔주의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말씀하신 대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 또는 우리의 어떤 특정한 이해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 '환기'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소멸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고 또 제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라캉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지반이 어떤 지평 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가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유하자면, 그 이해 지평이라는 '상징계'가 '후기성' 혹은 '파국'이라고 하는 어떤 이론적 '실재' 위에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그 극단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이러한 지평(에 대한 지평)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에 대해서는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현상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카뮈와 그의 책이 대단히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서곡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그의 반동적인 실존철학의 문제 틀('자살')을 더 확장된 형태의 다른 틀('절멸)로 - 하지만 그와 같은 강도(强度)의 어떤 절실함을 갖고 - 대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의 지점은 어쩌면 저 '반복(repetition)'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유하고 재전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저도 번역을 많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제약들의 내용을 자세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만큼 번역이라는 형태와 지점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이라, 제 자신이 번역에 임할 때 스스로에게 (역시나 과도할 만큼의) 엄격성을 부과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때때로 제 자신을 매우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각주에 대한 각주 형식도 매우 소중하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의 '종곡'은, 아마도 섬세하게 느끼셨을 테지만, 본문이라는 공간의 부재를 통해 그 본문이 '본래'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곧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라고 하는 것이 어떤 부재 위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점을 또 다른 변주로 연주해주신 것 같아 너무 반갑고 감사했답니다.^^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기보다, 아마도 계속될 것입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확실히 4월은 좀, 잔인한 계절인듯. 제대로 된 '독서'를 한 지가 얼마나 지났는지 까마득하다..  

어쨌든, 거의 잠결에 두들기는 5월의 추천도서들. (리뷰는 언제쓰나..ㅠㅠ)

 

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이 책에 대해선, 다른 이유가 있기보다는, 한윤형이라는 저자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골랐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가 '키보드 워리어'로서, 그리고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주는 의미란 무궁무진하다. 전작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을듯 싶다. 

 

 

 

 

2. 아이스테시스 

 

벤야민의 사유처럼 매력적인 것은 드물다. 여기서 '드물다'라는 동사가 함의하는 것은, 다만 희소성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유의 '가장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들에게 인식되는 진정한 기표의 연쇄, 그 흐름의 '현장'이자, '사건'으로 확장된다. 예컨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모더니티'에 대한 미학적 '비평'들은, 그저 의미들이 지시하는 '지평'을 넘어서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저자 또한 전공자라고 하니, 기대해본다. 

 

 

 

 

3.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고진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영구 평화를 위하여'는 칸트에게서 '정치적 물음'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도덕과 정치, 혹은 '국가'라는 주체에게 있어 '영원한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가? 칸트처럼 '근본적인' 사상가는 없다는 대전제 아래, 그의 이론적 '실천'을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4. 사유 속의 영화 

 

  요런 책 좋아한다. 겉핥기를 사랑하는 비루한 취향에 대한 만족과 동시에, 운이 좋다면, 관심있지만 '원서'가 아니면 접하기가 힘든 저자들의 논문에 대한 소개서로서 필자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에이젠슈타인부터 들뢰즈까지 '영화'에 대한 이론적인(?) 사유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만한 책인듯. 다만 들뢰즈의 '시네마1,2'를 읽다 지쳐 떨어져 나가기 직전인, 필자와 같은 이들이라면, 자연스레 펴들기 싫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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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2011-05-06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이 책,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꼭 읽고 싶어서 저도 추천 리스트에 올렸는데 너무 반갑네요. ^^

지나가다 2011-05-0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괜한 태클 같지만 <아이스테시스> 추천 내용 중 '드물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 같네요.

rainmaker_1201 2011-05-30 01:59   좋아요 0 | URL
아이구. 그러네요. 아직 한글을 더 배워야 하나 봅니다 저는.ㅋ
 
8기 활동 종료 페이퍼

 

짤막한 변 : 신간평가단 모집이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보고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학교생활의 연장선상에 있던 저 자신의 처지를 뒤돌아보면서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지요. 결국 그건 오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진정한 어려움을 저는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죠. 결국 저는 대뇌를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책들은 쌓여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오독과 오해의 계절을 겪으며, 그렇게 벌써 봄이 찾아와 버리고 말았네요. 물론 지난 시간들에 관한 책임을 저는 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럴 힘이 없거든요. 

무엇보다, 저는 지난 신간평가단의 운영방침보다 이번 8기의 변경된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깜냥의 비루함과는 별개로 일종의 객기 비슷한 것을 보이며 활동해왔던 것 같습니다. 뭐, 여하건 제가 신간평가단이라는 어려운(?) 조직의 내부에서 이렇게 한 '시즌'을 보내왔다는 것에 대해선 저 자신보다 아무래도, 시스템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문/사회/과학)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좋았던 책 Best3 >

1. 책을 읽을 자유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통해서 이현우씨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접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위치(스탠스)'를 가늠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어쨋든 필자로서는 그를(그러니까 그의 '책읽기-노동'을) '본받아먄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꽤 자학적인 독해의 한 장 한 장이었다.  

여담이지만,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를 출간했던, '박가분'(박원익)이라는 또 한명의 젊은 '인문학도'가 (1세대 블루커(Blog+book+er)인)로쟈만큼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약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필자의 '추천'은 신간평가단 다수의 '취향'과 그다지 상관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은 거의 유일하게 선정된 추천도서인데, 물론 그 때문이 아니라 '도스또예프스키' 라는 인물만으로도 충분한 Best임에는 틀림없다. 

E.H.Carr가 그려내는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란, 마치 프루스트의 기호를 탐구하는 작업처럼, 일종의 '영원-회귀'로서 기능한다. 필자는 그의 문학이란 비단 하나의 작품론으로써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독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를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세대'와 '사회'의 맥락들을 짚어나가는 작업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그'를 읽자!

 

 

3. 대칭

 마지막 도서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어쨋든 나는 '대칭'을 골랐는데, 그건 앞으로도 과학분야가 약간 골고루 평가단의 취향 속에 '분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섞인 것이다. 

대칭에 대한 '리뷰'도 쉽지 않았다. 일자무식의 수학꽝에게, '자연은 대칭이다.'라는 선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다른 차원의 얘기인것만 같았으니. 하지만 인간이 가진 최후의 무기는 '호기심'이었으니, 그것은 오만과 아집을 넘어서는 '이해'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통해 읽었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어쨋든 필자는 이 분야에 대한 넘쳐나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를 '조금 달리'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도저언~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향후 신간 평가단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 

건의사항은 별로 없지만 약간의 사족이라면, '도서 선정'시에 다수득표한 도서부터 순위를 개시하고, 담당자분이 출판사와의 협의와 설득과 권유와 협상(?)의 '인내어린' 시간을 거쳐 선정된 두 도서를 제외한, (우선순위였던) 상위랭크의 도서들이 왜 선정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짤막한 '공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건 (선정되지 않은 도서의) 출판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음미하고 고취시키겠다는 의도는 물론 아닙니다.(^_^) 다만 다수득표 도서와 '선정 도서' 사이의 '거리' 속에는 담당자분의 노고가 있을 테고, 결과 이전의 '과정'이 있을 텐데, 그걸 약간 구체화해보자는 뜻이지요. 

뭐, 그리고 저는 9기에도 함께하게 되었지만, 8기로 마무리하시는 평가단 분들께는 좋은 글 읽게 되어 즐거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건의사항이 있었네요. '건강'인데요, 책도 건강해야 제대로 읽어내려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건강을 건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슈슈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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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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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습겠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의 존재를 '생물학'이라는 분야의 서가로부터 격리시켰을 때, '벌레'라는 것은 결코 그 즉물적인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물'로 우리에게 '개입'한다. 가정용 곤충이라는 '은밀한' 에세이의 형식으로. 

1.  

군 생활을 철원에서 한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다정다감'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그 곳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막사 밖 구석탱이에서 한창 고참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 바라보았던 '집게벌레의 비행'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와 곤충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ㅋㅋ) 주황색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1~2미터 가량을 비행하는 녀석들의 징그러움이란.(흐뭇) 게다가 녀석들은 내 머리 속이나 은밀한 부위까지 침투하며, 간혹 아침에 침낭 속에서 일어나다가 필자가 온몸으로 애무한 녀석들의 '잔해'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튼 필자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하나이다. 그들(곤충 혹은 해충)이 우리들 '곁'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란, 마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즉 벌레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생존욕구, 그것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같은 곳에선 그 욕구의 발현이라는게 좀 '무디게' 나타나는데, 확실히 그 곳에선 벌레와 해충 말고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건 이 책에는, 당신이 '별로 알고싶어하지 않는' 진실들(곤충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주석들이 실려 있다. 다만, 한국적 생활양식과는 좀 동떨어진 관계로, 빈대나 흡혈진드기 같은 '서양식' 식사습관을 가진 녀석들도 나오니 참조할 것.(물론 이건 필자의 사견이다. 서울 바닥에 빈대로 넘쳐나는 집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 

다만 이 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필자는 약간의 의문점이 드는데, 대체 저자가 이토록 친절하게 이들에 대한 정보 - 그들의 삶부터, 좋아하는(싫어하는) 음식, 생식, (약간 애매한)퇴치법에 이르기까지 - 를 이야기해주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는 걸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피하는' 방법 또한 알려주며, 단순히 '공존'이라는 지루한 모티브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피하면서 살아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또한 '종교적인' 색체를 떠나 '지혜'를 가지라는 오묘한 말로 마무리된다.  

여하건 우리들은 곤충들을 '확대'해서 바라보면서, 저자의 말처럼 그들을 하나의 '에어리언' 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다. SF영화를 비롯한 모든 '상상적' 생산에서 우리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어떤 것'이란, 결국 이러한 존재(혹은 주체)의 절대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뻔한 얘기로 설명하자면, 우리 또한 '외계인'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생명 에세이', 혹은 우리들이 가진 외계인이라는 외적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코드'란,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우주적'인 생명의 관점이다. 

3. 

이 책이 필자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다. 실제로 '개미군단'을 방으로 맞이한 작년 여름의 '전투'에서, 필자의 전략은 육탄공격(!)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필자의 '시간'을 공략했다. 게다가 체격이 큰 인간은 동시에 에너지소모가 크고, 그들은 수적 우위까지 점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필자의 전략은 모든 공격으로 그들을 초토화하여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는 것이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그들의 '성질' - 몇몇을 살해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  을 깡그리 무시한 필자의 무대포 공격은, 단 두시간 만에 무릎을 꿇었고, 개미군단이 점점 더 밀려오는 좌중을 바라보며 결국 한숨짓고 말았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터전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다만 그래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온 세상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4. 

또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벌레'에 관한 책이다. 카프카의 변신으로도 느끼기에 부족했던, 그리하여 아직도 부조리로 남아있는 인간의 '복수적 현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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