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확실히 4월은 좀, 잔인한 계절인듯. 제대로 된 '독서'를 한 지가 얼마나 지났는지 까마득하다..  

어쨌든, 거의 잠결에 두들기는 5월의 추천도서들. (리뷰는 언제쓰나..ㅠㅠ)

 

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이 책에 대해선, 다른 이유가 있기보다는, 한윤형이라는 저자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골랐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가 '키보드 워리어'로서, 그리고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주는 의미란 무궁무진하다. 전작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을듯 싶다. 

 

 

 

 

2. 아이스테시스 

 

벤야민의 사유처럼 매력적인 것은 드물다. 여기서 '드물다'라는 동사가 함의하는 것은, 다만 희소성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유의 '가장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들에게 인식되는 진정한 기표의 연쇄, 그 흐름의 '현장'이자, '사건'으로 확장된다. 예컨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모더니티'에 대한 미학적 '비평'들은, 그저 의미들이 지시하는 '지평'을 넘어서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저자 또한 전공자라고 하니, 기대해본다. 

 

 

 

 

3.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고진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영구 평화를 위하여'는 칸트에게서 '정치적 물음'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도덕과 정치, 혹은 '국가'라는 주체에게 있어 '영원한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가? 칸트처럼 '근본적인' 사상가는 없다는 대전제 아래, 그의 이론적 '실천'을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4. 사유 속의 영화 

 

  요런 책 좋아한다. 겉핥기를 사랑하는 비루한 취향에 대한 만족과 동시에, 운이 좋다면, 관심있지만 '원서'가 아니면 접하기가 힘든 저자들의 논문에 대한 소개서로서 필자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에이젠슈타인부터 들뢰즈까지 '영화'에 대한 이론적인(?) 사유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만한 책인듯. 다만 들뢰즈의 '시네마1,2'를 읽다 지쳐 떨어져 나가기 직전인, 필자와 같은 이들이라면, 자연스레 펴들기 싫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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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2011-05-06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이 책,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꼭 읽고 싶어서 저도 추천 리스트에 올렸는데 너무 반갑네요. ^^

지나가다 2011-05-0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괜한 태클 같지만 <아이스테시스> 추천 내용 중 '드물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 같네요.

rainmaker_1201 2011-05-30 01:59   좋아요 0 | URL
아이구. 그러네요. 아직 한글을 더 배워야 하나 봅니다 저는.ㅋ
 
8기 활동 종료 페이퍼

 

짤막한 변 : 신간평가단 모집이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보고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학교생활의 연장선상에 있던 저 자신의 처지를 뒤돌아보면서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지요. 결국 그건 오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진정한 어려움을 저는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죠. 결국 저는 대뇌를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책들은 쌓여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오독과 오해의 계절을 겪으며, 그렇게 벌써 봄이 찾아와 버리고 말았네요. 물론 지난 시간들에 관한 책임을 저는 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럴 힘이 없거든요. 

무엇보다, 저는 지난 신간평가단의 운영방침보다 이번 8기의 변경된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깜냥의 비루함과는 별개로 일종의 객기 비슷한 것을 보이며 활동해왔던 것 같습니다. 뭐, 여하건 제가 신간평가단이라는 어려운(?) 조직의 내부에서 이렇게 한 '시즌'을 보내왔다는 것에 대해선 저 자신보다 아무래도, 시스템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문/사회/과학)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좋았던 책 Best3 >

1. 책을 읽을 자유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통해서 이현우씨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접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위치(스탠스)'를 가늠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어쨋든 필자로서는 그를(그러니까 그의 '책읽기-노동'을) '본받아먄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꽤 자학적인 독해의 한 장 한 장이었다.  

여담이지만,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를 출간했던, '박가분'(박원익)이라는 또 한명의 젊은 '인문학도'가 (1세대 블루커(Blog+book+er)인)로쟈만큼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약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필자의 '추천'은 신간평가단 다수의 '취향'과 그다지 상관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은 거의 유일하게 선정된 추천도서인데, 물론 그 때문이 아니라 '도스또예프스키' 라는 인물만으로도 충분한 Best임에는 틀림없다. 

E.H.Carr가 그려내는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란, 마치 프루스트의 기호를 탐구하는 작업처럼, 일종의 '영원-회귀'로서 기능한다. 필자는 그의 문학이란 비단 하나의 작품론으로써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독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를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세대'와 '사회'의 맥락들을 짚어나가는 작업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그'를 읽자!

 

 

3. 대칭

 마지막 도서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어쨋든 나는 '대칭'을 골랐는데, 그건 앞으로도 과학분야가 약간 골고루 평가단의 취향 속에 '분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섞인 것이다. 

대칭에 대한 '리뷰'도 쉽지 않았다. 일자무식의 수학꽝에게, '자연은 대칭이다.'라는 선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다른 차원의 얘기인것만 같았으니. 하지만 인간이 가진 최후의 무기는 '호기심'이었으니, 그것은 오만과 아집을 넘어서는 '이해'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통해 읽었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어쨋든 필자는 이 분야에 대한 넘쳐나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를 '조금 달리'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도저언~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향후 신간 평가단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 

건의사항은 별로 없지만 약간의 사족이라면, '도서 선정'시에 다수득표한 도서부터 순위를 개시하고, 담당자분이 출판사와의 협의와 설득과 권유와 협상(?)의 '인내어린' 시간을 거쳐 선정된 두 도서를 제외한, (우선순위였던) 상위랭크의 도서들이 왜 선정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짤막한 '공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건 (선정되지 않은 도서의) 출판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음미하고 고취시키겠다는 의도는 물론 아닙니다.(^_^) 다만 다수득표 도서와 '선정 도서' 사이의 '거리' 속에는 담당자분의 노고가 있을 테고, 결과 이전의 '과정'이 있을 텐데, 그걸 약간 구체화해보자는 뜻이지요. 

뭐, 그리고 저는 9기에도 함께하게 되었지만, 8기로 마무리하시는 평가단 분들께는 좋은 글 읽게 되어 즐거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건의사항이 있었네요. '건강'인데요, 책도 건강해야 제대로 읽어내려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건강을 건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슈슈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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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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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습겠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의 존재를 '생물학'이라는 분야의 서가로부터 격리시켰을 때, '벌레'라는 것은 결코 그 즉물적인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물'로 우리에게 '개입'한다. 가정용 곤충이라는 '은밀한' 에세이의 형식으로. 

1.  

군 생활을 철원에서 한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다정다감'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그 곳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막사 밖 구석탱이에서 한창 고참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 바라보았던 '집게벌레의 비행'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와 곤충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ㅋㅋ) 주황색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1~2미터 가량을 비행하는 녀석들의 징그러움이란.(흐뭇) 게다가 녀석들은 내 머리 속이나 은밀한 부위까지 침투하며, 간혹 아침에 침낭 속에서 일어나다가 필자가 온몸으로 애무한 녀석들의 '잔해'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튼 필자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하나이다. 그들(곤충 혹은 해충)이 우리들 '곁'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란, 마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즉 벌레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생존욕구, 그것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같은 곳에선 그 욕구의 발현이라는게 좀 '무디게' 나타나는데, 확실히 그 곳에선 벌레와 해충 말고도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건 이 책에는, 당신이 '별로 알고싶어하지 않는' 진실들(곤충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주석들이 실려 있다. 다만, 한국적 생활양식과는 좀 동떨어진 관계로, 빈대나 흡혈진드기 같은 '서양식' 식사습관을 가진 녀석들도 나오니 참조할 것.(물론 이건 필자의 사견이다. 서울 바닥에 빈대로 넘쳐나는 집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 

다만 이 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필자는 약간의 의문점이 드는데, 대체 저자가 이토록 친절하게 이들에 대한 정보 - 그들의 삶부터, 좋아하는(싫어하는) 음식, 생식, (약간 애매한)퇴치법에 이르기까지 - 를 이야기해주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는 걸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피하는' 방법 또한 알려주며, 단순히 '공존'이라는 지루한 모티브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피하면서 살아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또한 '종교적인' 색체를 떠나 '지혜'를 가지라는 오묘한 말로 마무리된다.  

여하건 우리들은 곤충들을 '확대'해서 바라보면서, 저자의 말처럼 그들을 하나의 '에어리언' 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이다. SF영화를 비롯한 모든 '상상적' 생산에서 우리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어떤 것'이란, 결국 이러한 존재(혹은 주체)의 절대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뻔한 얘기로 설명하자면, 우리 또한 '외계인'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생명 에세이', 혹은 우리들이 가진 외계인이라는 외적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코드'란,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우주적'인 생명의 관점이다. 

3. 

이 책이 필자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다. 실제로 '개미군단'을 방으로 맞이한 작년 여름의 '전투'에서, 필자의 전략은 육탄공격(!)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필자의 '시간'을 공략했다. 게다가 체격이 큰 인간은 동시에 에너지소모가 크고, 그들은 수적 우위까지 점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필자의 전략은 모든 공격으로 그들을 초토화하여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는 것이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그들의 '성질' - 몇몇을 살해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  을 깡그리 무시한 필자의 무대포 공격은, 단 두시간 만에 무릎을 꿇었고, 개미군단이 점점 더 밀려오는 좌중을 바라보며 결국 한숨짓고 말았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터전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다만 그래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온 세상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4. 

또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벌레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벌레'에 관한 책이다. 카프카의 변신으로도 느끼기에 부족했던, 그리하여 아직도 부조리로 남아있는 인간의 '복수적 현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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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전쟁은 없다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는 사실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완전한 상태'를 향한 욕망을 파헤치고자 한다.

어쨋든 이 철지난(2004년 산이다) 논문들의 집합이 지금-여기 우리에게 갖는 '여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세기 동안이나 '휴전국'으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물음일 것이다. 왜 '전쟁'이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이 책이 넌지시 제기하는 '물음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반전주의자는 동시에 열정적 전쟁지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신이 '작동'하는 자동기계적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2. 문자와 국가 

아, 정말 모종의 페티시적 욕망이 불타오르는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아직 고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필자이기에, <트랜스크리틱>의 이해는 언제나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진만큼 쉽게 '읽히는' 사상가도 드물지만, 그만큼 오독의 여지와 진정한 '독해'의 어려움을 동시에 담보해야만 하는 사상가 또한 드물다. 

<문자와 국가>라는 강연집에서의 여러 초기 작업들은, 그의 정치철학에 대한 입문서 격의 저서 - <세계 공화국으로>, <트랜스크리틱>(은 좀 어렵지만) - 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 더불어 '문학평론가'로서의 고진과 데리다의 문자론(그라마톨로지)와 비교되는 그만의 '문자론'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쨋든 '언어' 혹은 '문자라는 이름'이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문젯거리'가 됨은 분명한 듯. 

  

 

 

3.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독일 낭만주의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분석서라고 할 만하다. '프레드릭 바이저'라는 이름은 비록 꽤 낯선 이름이긴 하지만, 그가 작업하고 있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와 독일관념론에 대한 연구는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브레히트처럼 '낯설게' 보지만 않는다면.) 다만 낭만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어떤 '보수성', 그리고 중세적 세계관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이 저서가 초기 낭만주의에 대해 밝혀내는 '급진적' 제스쳐의 발견이란, 놀라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쌍 슐레겔(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 노발리스 등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시'적 개념은, 충분히 철학적/윤리적/정치적으로 확장 가능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명령은 결코 유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의 범주를 넘어, 비판정신을 토대로 한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 나아간다. 

 

 

4. 언어의 감옥에서 

이 평론집의 목차를 보면서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특히 1부 '식민주의와 언어' 부분은 제목만으로 충분히 필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비록 직접 읽어봐야 하겠지만) 보론격의 2부 또한 흥미가 간다. 사실 그저 '흥미가 간다' 라고 표현하기엔 좀 씁쓸한 감정이 밀려오기는 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그의 글이 과연 어떤 '굴곡'을 보여줄지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사실이다. 

'내셔널리즘'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골자'라 할 만하고, 그가 "모어의 폭력성"이라고 부른 언어의 '감옥'에 대한 저항적 고찰이 과연 얼마나 구조주의적 한계를 잘 극복해내면서 개인과 주체,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조건들'로 사유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5. 성혁명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결합.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신분석'이 가지는 쌍방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욕망' 그 자체이다. 마이너한 사회사상가가 역사 속에서 전유하는 스탠스가 늘 그러하듯, 저자인 빌헬름 라이히 또한 시대 속에서 함몰되지 않은, 시대를 항상 '뛰어넘는' 주체들과 조우한다.  

'성교육'이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그것은 왜 국가적 교육의 '대상'이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교육의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경험이다. 더불어 그것은 가족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그리고 나아가 '집단'이라는 이름속에 묻힌 개인을 해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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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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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은 기억 하나.   

어쨋든 나는 그의 평전을 추천하면서, 지난 군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그 시절 내가 <죄와 벌>에 대한 '독서'를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 도스또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것' - 은 내게 세계가 가지는 어떤 초월적 감정들을 분해하고, 해체시켜, 나의 과거 속에서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그를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의 어떤 '고착상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철학', 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온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에게 풍기는 향기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꽤 다양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안락함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재미있게도, 나는 군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련의 독서를 통해서 이 '불편한 이름'을 획득했다. 아니, 그것은 반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을 빌어 또한 고백하건데, 그 이전에 나는 결코 철학을 '한다'라는, 불편하고 동시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의 문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비교적 장황한 설명이 뒤이어져야만 하나, 그것은 어쩌면 너무 편협한 개인의 일대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다만 내가 지금 이렇게 뜬금없이 '철학' 운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죄와 벌>이 가져다준 무한한 충격,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게서 받은 어떤 지난한 영감, 또한 그를 추억하면서 얻게 되는 모종의 '분석적 함의'로 인해 내가 비로소 철학이라는 의미를 '실천praxis'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쨋든 그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저자인 카 또한 왠일인지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요지는, 그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해 여름, 한창 유행하던 신종플루로 '격리'된 채 천막에서 소일하며 <죄와 벌>을 집어든 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결코 타인을 '향해'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롯이 내 자신의 내부에서, 그 언저리의 작은 모퉁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그 자폐된 공간을 맘껏 향유하면서 (마치 내가 로쟈가 되어버린 듯이)그 책을 읽어내려갔다. 이후 나는 한 편의 글을 적었다.(그 글을 적은 '공간'은 지금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글이 내 최초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독서는, 반대로 글쓰기를 통해 외부로의 '확장'을 (내부로부터)이루어낸다. 나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맘껏 조롱하며, 비웃으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폭로'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 '시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건 꽤 시원섭섭한 경험이었다. <죄와 벌>이 가져다준 하나의 (관념적)쓰나미가 나라는 매개를 통해 타자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으며 느꼈던 모종의 '이물감', 그리고 이후 니체를 읽으며 느꼈던 '모호함', 칸트와 헤겔의 겉핥기를 통해 느낀 '견고함', 마르쿠제를 신봉하면서 생각했던 '나태함', 벤야민을 통해 느낀 자신의 '비겁함', 프로이트를 즐기면서 느꼈던 '억압감', 그리고 이후에 알게 된 수많은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충격들'을, 나는 결코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 처음으로 '인식'했던, 그 이전에는 경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하나의 '이론적 실천'이었다. 

 

비범, 혹은 평범. 그리고 이중성 혹은 결여

그의 인생을 비범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니, 대신 비범하다고 해두자. 대체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그의 평전을 새로이 읽게되는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그의 삶 속에 투영시켜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선, 저자의 생각에 따라(때로는 반대하며) 흘러가는 그의 여정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결실'을 맺어가는 과일나무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 - 러시아가(혹은 러시안이) 가진 어떤 근원적 아픔을 포함한 - 그것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형성시킨다. 그의 작품이, 다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해석틀'이 되는 이유는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세계관'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비범한(위대한)' 누군가의 실천이란, 그래서 결코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건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범함' 속에서 비로소 잉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이제야 느꼈지만 '그'라고 줄여쓰고 있었구나..) '정체성'이란, 그 모든 이력 속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용광로에서 나온 하나의 '철재(작품)', 그리고 그 철재가 다양하게 사용될(해석될), 여러 분야의(예컨대 철로라던지, 건축물의 철골이라던지) '타자성' 속에서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처럼 다양한 분석과 비평의 잣대를 가진 작품이 이전에 존재했던가?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간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 사회의 보통의 인습과 규약에서 벗어난, 거의 인간 이하의 생존에 다다른 사람들과 생활했다. 그는 지리멸렬한 인간 열정의 있는 그대로의 요소들이 끓어오르는 심연을 응시했고, 그 심연은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 p.83 

니체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악의 저편(선악을 넘어서)>이 <죄와 벌>과 갖는 연관성이란, 마치 프로이트가 라캉에게 갖는 그것만큼이나 주요한 '누빔점'을 갖는다. 사실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이 얼마만큼의 정서적 교류를 경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속에는 어떤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그 '응시'속에서 그 이외의 단 한사람, 바로 '니체'라는 하나의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 문제, 더불어 이러한 윤리적 작인으로부터 파생되는 '죄의식'의 문제는 결코 현대인의 '권리'의 문제와도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확대-재생산되어, 그리고 라캉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우리들에게 한층 더 가속화된 죄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은 이러한 '억압'을 부정한다.(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모든 억압된 죄의식들에 대해 분자화된 '혁명'을 추구한다.) 이렇게 로쟈로부터 파생되는 일련의 윤리적 '문제제기'는, <백치>를 통해 형이상학적 구체성을 향해 나아가며 <악령>을 통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포획한다.  

"..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연역되야 한다면, 또한 모든 현실이 에고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라면 행위의 외적 기준 혹은 제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최상의 의무는 자기 자아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그리고 최상의 사명은 자기 개성의 발전과 성취가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기는 스스로가 초인임을 입증하고 도덕적 관습을 뛰어넘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p.232 

결국 이러한 '권리', 즉 주체가 가진 윤리적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후' 작품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지 헤겔을 참조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내비치고 있는 죄의식의 '주체'는 확실히 유물론적이다.  

"... 그것은 아마도 죄에 있어서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바, 이것은 <악령>의 마지막 부분의 한 줄에 처음 나타나 그의 후기 작 전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자기 임종에 앞선 확각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를 졌다"고 말한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조시마는 죽어 가는 형으로부터 "모두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에 죄를 졌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속죄의 신학적 이론을 수학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이론일 것이다.." p.351 

그는 단호하고 선언적인 태도로, '모든 죄의식의 주체'가 다름 아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확실히 신학적인 언표로 들린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은 하나의 토대, 그러니까 죄의식이 가지는 일종의 하부구조를 담지한다. <이>로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침묵할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단순히 이러한 죄의식의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죄의식 자체의 '전全책임성'을 인정하고 하나의 '권리'를 재-탄생시킬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죄의식을 '모두' 해체하고만 있을 것인가? 

나의 경우엔, 모든 '해체의 작업'은 해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성의 구조 내부에 잠식하는, '우연성'이라 불릴 만하다. 죄의식이 가지는 모종의 '권리'의 해체에 대한 모든 시도는 어떤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해체되는 것일지도. 다만 그러한 작업이 잉태하는, 나머지로서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미성년>에서 그가 보여주는 비형식성,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적 혼돈과 분열의 제 과정이야말로, 그러한 후기 작품에서 그가 주요 쟁점으로 생각하는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저자인 카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미성년>을 하나의 '위대한 실패'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쨋든 또다시 모든 귀결은 이것이다. "인간 본연의 윤리, 그 무의식의 심연을 오롯이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테제의 분열과 안티테제의 도전을 허용하는 모든 '죄의식'의 권리가 만들어내는 복합물로서의 '해체'의 잔여물이란, 과연 어떤 경로로서 이러한 '결여'의 공백을 대체하는 '이중적 욕구'를 만들어내는가?" 

그러므로 내게 만약 그의 평전을 읽고난 뒤에 남은 단 하나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무엇' 때문에 당신은 <범인凡人>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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