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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몰입한다는 것을 느꼈다. 글쎄, 한국이라는 국가적 틀 내에서 '사유'한다는 것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았던 것은 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자리이동', 즉 모든 개념의 '경계화'에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총체'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더더욱.
글의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이들도 있겠지만, <언어의 감옥에서>라는 제목(그리고 내용)이 '환기'하는 바를 필자는 스피노자-니체-...-라캉-데리다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미 제목 자체에서부터 라캉의 '상징계', 그리고 기표/기의의 관계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녀는 '서경식'이라는 인물의 도플갱어와도 같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불가리아 태생의 여인만큼 '경계인'의 표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녀의 '언어'와 서경식의 언어가 겹쳐지고 조립되고 서로 융화되는 어떤 지점들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여기서 경계라는 것은 단순히 지리상의 국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가 '모어', '모국어', '국민'을 등식으로 연결하려는 국어 내셔널리즘과 불가분의 관계인 이상, 주변화된 사람들은 언어 간의 경계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내면에까지 모든 언어의 균열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p.44
더불어 그가 '이양지'라는 또다른 디아스포라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시선'은, 10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그녀의 <유희>를 읽어내려가며 '치밀함'으로 필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여기에는 모어와 모국어가 어긋나버린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들이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어려움과, 그 희미한 가능성이 모두 암시되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양지의 작품은 한/일 양국에서 '어떻게' 읽혀졌는지, 그리고 읽혀져야만 하는지를 성토하고 있다.
그는 억압과 속박, 단절과 고립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일종의 '과정적 물음'을 제시한다. 사실 그것은 국가라는 틀 속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미' 내재된,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자마자 우리 내부에 잉태된 하나의 필연적 물음이다. 모어라는 '폭력', 그리고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더불어 일본이라는 '기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물음들은, 그 자체로 '과정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정의 자체를 거부하는 '주변인'의 습성을 가진다. 흔히 우리는 그들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마이너'라는 (자기-)인식에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재적인 저항의 물결, 혹은 표면적인(단순한) 저항의 모습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내재적 저항', 그리고 결코 고정되기를 거부하는 기표의 연쇄, 혹은 '유동적'(혹은 유목적)인 주체와 관련된다.
또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박유하-서경식 간의 비판-보론 부분이다. 박유하 교수에 관해서는 약간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경식은 그녀를 '열심히'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공감하는 바이다. 그냥 든 생각인데, 서경식의 비판은 '뒷문을 열어두는' 형식인 것 같다. 비판의 '여지'를 약간 남겨두는 듯 한데, 상대가 그걸 '무는' 순간, 그는 그 먹이의 '견고함'을 새삼 인식하게 만들고, 상대는 '이빨빠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뭐 그런 형식.(우스갯소리다.)
여하건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꽤 필요한 경험이다. 흔하디 흔한, 'DDD 필수 교양도서 100권'등에 꼭 포함되었으면, (혹은 포함 안되었으면) 하는 양가적인 바람이 있다. 후자의 이유는, 그런 필수 교양도서에 '엉망인' 책들이 간혹 끼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사회'라는 '큰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로부터' 배우는가. 나아가, 국가 혹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것을 마침내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자신감있게 표현할만한 '근거'를 어디로부터 배우고 학습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학습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선험성'이라는 것과 '폭력성'을 동시에 관계짓는 것에 약간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과연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토익, 어학연수의 '필연성'이라는게 얼마만큼의 폭력을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감옥'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처받은 육체를 이끌어 자신의 주체를 비로소 경계에 세운 이들은 그렇게 고함친다. "당신들의, 당신들이 세운, 당신들을 위한" 감옥에서 한발자국, 움직여보라고. 그럼, 아마도, 그 공허한 감옥에서 울려퍼지는 발자국의 파편화된 '이명'이, 당신을 조금 흔들어 깨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나의) 시선'은 폭력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도 폭력이다. 그는 확실히 '시선들의 연대'를 말하고 있다. 시선은 교차되고, 때로는 엇나가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이름이다. 혹은 진정한 '주체'의 이름이다.
p.s. 앞에서 필자는 계속해서 '우리는(우리들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러한 '범주화'에 대해서 좀 심사숙고 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오용' 혹은 '단순사용'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