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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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릴 때의 5월이란 봄은 아직까지 시원한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 계절이었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원래는 비가 여름에 많이 오고 더운 몬순기후이기 때문이었다. 계절적 특징이 몬순기후라면 당연히 5월은 여름이 아니기 때문에 더울 리가 없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와 산업의 발달, 특히 자동차의 증가는 우리나라를 더운 나라로 만들었다. 5월에 반팔을 입는 것은 어린 시절에 생각하지 않았으나, 5월이 이제는 초여름으로 변하면서 30℃ 이상 넘어가기도 한다. 이런 5월이 언제부터인가 가정의 달이 되었고, 어느 순간 5월은 잔인한 날로 변했다.

 

지금 2014년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은 비참한 비극으로 인해 분노라는 감정이 이제는 증오라는 저주로 변할 정도다. 2014년 이 잔인한 5월을 보내며 가정의 달에서 가족을 읽은 사람들에겐 그저 머나먼 신기루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5월은 광주에서 피로 거리를 물들게 했고, 5월하면 또 생각하는 사람, 노무현이란 3글자다. 당시 군대생활을 하던 시기, 노무현이란 남자가 국군의 통수권자였다. 군대에서 아무리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중하더라도 뉴스로 보면 다 드러난다. 언론이 그때는 자유로운 발언권을 가졌으며, 일부 언론은 자유의 발언권을 지나 자극의 발언권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것은 재난에 대한 대응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03년 여름, 우리나라에 큰 태풍인 매미가 찾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그 무서운 태풍이 말이다. 당시 대통령은 극장에서 태풍상황을 알았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끝까지 관람했고, 거기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자, 바로 국민 앞에 사죄했다. 국가지도자가 완벽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직분에 있어서는 충실해야 하는 것은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그런 상태서 나는 2003년 추운 겨울을 훈련으로 보내고, 다음해 봄에 임관했다. 2004년 자대배치를 받을 때 처음에는 현장에서 직접 유지보수업무를 하는 곳에 있다가 얼마 후에 구청이나 시청에 있을법한 사무실과 같은 곳에 갔다.

 

구청에 가면 건설과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름에 비오고 나서 이래저래 건축물에 대한 관리를 맡으면서 하자보수의뢰를 건설사에 맡겼는데, 이때 시설물 하자보수 관리대장을 보면서 2003년 여름과 가을에 많은 보수공사가 이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지붕방수나 벽체방수 등과 같은 공사를 말이다.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신 상사(그 당시 계급 역시 상사였다.) 분에게 물어보니 정부에서 예산을 긴급으로 내려 유지보수하게 해준 것이라고 했다. 군에서 긴급예산이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중기계획 내지 경상계획 혹은 대규모 보수 및 소규모 보수라도 예산을 올려 본부에 올려 국방부에서 자금이 조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군사조직 역시 국가예산에 의해 운영되니 금방이라도 내려올 리가 없다.

 

그런데 그때 그 예산이 긴급으로 들어올 수 있던 것은 당시 대통령이 업무를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판공비가 긴급보수 예산으로 집행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랐고, 이때까지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다음 대통령이 되던 사람이 서울시장인 시절에 서울공항 활주로 각도를 틀지 않기 위한 것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전역 후에 대통령이 바뀌고, 참모총장이 바뀌면서 서울시에서 허가해준 제2 롯데월드가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바뀌면서 드디어 착공이 된 것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군용항공기지법」, 시행령도 아니고 시행규칙이 아닌 법률에 활주로가 건축물로 인해 영향이 받는 게 아니라 건축물이 활주로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을 말이다.

 

활주로 위로 달리는 전투기가 곧 우리 국민의 방패인데, 어느 재벌을 위해 틀어진 활주로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근무한 곳은 아니나, 하늘과 조국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당시나 혹은 예비군훈련이 끝나가는 지금 역시 그렇다. 내가 공군교육사령부에서 보던 푯말에 이런 말이 기억난다. “다시 태어나도 공군”, 군대생활하면서 힘든 일은 많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대한민국 남자라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내가 공군을 선택한 것은 그 만큼 보람이 많았던 것이다. 내가 노무현이란 사람보다 노무현이란 대통령을 좋아한 게 동기는 군대에 가서이다.

 

군대를 생각하면 열악한 병영시설이 생각나고, 거기서 사는 사병들의 열악한 병영생활이 보인다. 병영시설에 들어가면 비가 새는 낡은 건물에서 이제는 침대가 있는 신식건물을 바꾸고, 내무반 휴게실에는 최신 컴퓨터에 인터넷까지 보급되어 사병들의 생활이 좋아졌다. 그런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아마 그분이 다른 대통령과 달리 직접 육군 만기제대를 했기에 자신이 겪은 군생활의 고초를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자이툰부대에서 복무했던 많은 전우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그들을 찾아 직접 C-130H 탄 그의 모습에서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노무현이란 대통령을 남들처럼 그 무섭다고 하던 1980년대 군부독재시절을 본 게 아니라 군대에서 처음 느꼈다. 군에 가기 전에는 대충 이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아직 학생인 나로서 세상에 대해 잘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역 1달 전에 그는 다시 봉하로 내려가고, 힘든 대통령 생활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군에 있을 때이니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옛날 공자가 제자에게 정치를 가르쳤을 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정치로 인해 고통이 없어 정치에 대한 관심보단 삶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 좋은 정치라고 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관심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관심사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왠지 모를 허무감에 젖어들었다. 지금도 약간의 허무주의적인 요소가 나에게 남겨져있다. 정치적으로 무지한 나였으나, 어느 순간 책이 내 손에 잡혀있었다. 차별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내가 차별에 대한 부조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런다고 어떻게 해볼 힘은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너무 그립게 느껴졌다. 바른 말하여 잡혀가는 세상이 예전에 있었지만, 다시 또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가 그립다>란 책을 읽는 순간, 아마 나보다 그 책을 저술한 사람들이 더 그가 그리울지 모른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던 송변처럼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대사,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게 되는 현실이 그때나 지금 역시 그렇다. 나는 그저 군인으로서 그에게 크게 이끌려서 찾아왔다면 이 책에서는 순수하게 노무현이란 인물이 어떤 여파를 헤쳐 나오는 것을 알고 적었다. 하지만 보면서도 조금 마음이 아픈 이유가 참여정권 시절,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 지지하던 이들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 비판하다가, 막상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당시 그들이 했던 차가운 비판의 칼날이 다시 자신에게 찾아올지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지지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비판해야 하고, 그것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은 최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선택이든지 모두가 좋게 다가갈 수만 없다. 어떻게든 누군가에 대해 불평등한 처사가 뒤따르는 것이고, 그 불평등에 대한 부조리를 다시 보완하여 정리하는 것이 정치의 필요다. 법이란 것이 너무 늦게 변하니 그것을 풀어가는 게 정치라는 것은 정치철학의 본질을 말해준다.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에 유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정치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치적 해결보단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존한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유라는 것은 공적인 영역의 이성이 추구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는 칸트나 롤즈의 사상에 동의한다. 그러나 정치적 흐름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 안에 가려진 무의식적인 조합이다. 세상에는 왜? 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틀렸음에도 그 틀림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틀림이 결국 정의라고 보여주기 위해 폭력이 등장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무고한 사람을 잡아 구타하고 괴롭힌 그들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권력 앞에 국민을 기만한 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모욕하고 있다.

 

국가를 모욕하는 자는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권위의식을 가지는 자인가? 아니면 그 권위의식에 대항하는 자인가? 분명히 자유주의철학자들의 책에도 시민의 권리에는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부조리조차 하나의 정의 내지 도덕으로 받아들이는 기가 막히는 일들이 발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왜 도덕을 그토록 부정했을까?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정의와 신의 이름이라고 외치는 것이 하나의 도덕으로 꾸며진 힘의 논리가 숨어 있을 때 그것은 정의를 파괴하고 신을 매장한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그립다>처럼 나 역시 그가 그립다. 그가 분명히 100% 잘 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100%에 안 되는 것도 알고, 될 수도 없는 것도 알지만, 끊임없이 걸어가려고 한 것은 존중해야할 가치관이다. 그의 전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란 삶의 철학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이 만든 미숙아처럼 우리는 아직 미개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하는가? 그러나 미개한 것이 야만스러운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한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처럼 그 나라의 정치는 곧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이란 것처럼 우리는 아직 미개할지 모르나 성난 이리처럼 야만스러우면 안 된다.

 

세월호의 사건에서 피해가족과 국민들에게 미개하다던 어느 청년, 우리의 정치적 수준이 국민의 수준을 반영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야만적인 성향을 몰랐다. 그 야만스러운 인간들에게 물려 사라져간 노무현이란 세 글자엔 우리 시대의 아픔과 모순 그리고 아련함이 새겨진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국민이 대통령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불러 욕을 해서 국민들이 기분이 좋아지면 그것에 대해 기쁘게 받아들이는 그, 우리는 다시 그런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비가 오는 5월의 저녁 진심으로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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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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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러시아혁명과 트로츠키에 대한 자료를 구하는 도중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보면서 어이 없이 페이지만 넘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공정성에서 자유주의자라는 가치를 생각하면 전혀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혹은 공산주의자가 반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목표가 민주주의 정치체계라면 더욱 그러하다. 가령 러시아혁명이 마르크스주의자와 계몽주의자에 의해 일어났다면 그들의 뿌리는 루소와 마르크스다.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에서 루소에 대해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르,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역사적 연계성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보여준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투쟁과 같다. 마르크스는 성격이 급하고, 담배 피는 것을 좋아하고 싸움도 많이 한다. 하지만 겉으로 점잖은 척하고, 깔끔한 척하고, 매너 좋게 보이려는 인간보다 훨씬 좋다. 후자는 자신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지나 원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마르크스가 영국에 망명 올 때 당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마르크스로부터 비난을 들어도 그에 대한 발언권을 존중했다. 자유주의철학자라면 여러 가지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보단 그 발언 자체에 대해 막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발언에는 책임 소재가 있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다보면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보면 오히려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는 여전하나, 적어도 공정성이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좋은 책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에 보는 책이 그렇게까지 좋은 책은 아니나, 그런다고 나쁜 책은 아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영국 좌파 사상가 타라크 알리가 사람이 저술했다.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국제 마르크스주의자에 제4 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이다.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인 제4 인터내셔널은 그 규모나 활동범위가 매우 협소하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남은 유산인 점에서 트로츠키가 남기려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다고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만 마르크스주의자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 같은 서유럽에선 네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면서 세계적 지식인들을 창출하고 있다.

 

단지 트로츠키란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맨 처음에 나오는 부분이 웃긴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적대국가 중의 50~60년대의 소련과 중공을 보면 양쪽의 정치지도자가 서로를 향하여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도대체 트로츠키가 도대체 무엇 인지 밝혀두지 않은 채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일까?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선 금기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하기 전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나마 유럽에서나 혹은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에서 등장했다. 트로츠키는 잘은 몰라도 트로츠키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새까지도 체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서 체 게바라를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와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적 공백을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말 그대로 트로츠키란 인간이 무엇을 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가 저지른 실수와 판단미스, 완고한 그의 성격은 차갑게 비판했다. 인간은 완벽한 신이 아니니 그런 평가가 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트로츠키의 실수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했던 업적을 그렇게 날조하거나 축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러시아혁명은 끝이 나고, 소비에트 연방도 끝이 났다. 마르크스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꺼졌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모든 것이 조작되었고, 서방세계에서도 역시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여 안락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를 알아가는 것은 20세기 그 격동의 시기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혁명과 1917년 10월 혁명에서 활동을 했다. 혁명의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추위, 그리고 정치적 모순이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혁명은 국가를 사랑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증오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국가가 왜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증오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위험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차르의 모순이나 스탈린의 모순에서 결국 관료주의 내지 압정이었다. 그 근본에는 경제적 궁핍이 있었고, 하부의 경제적 조건이 상부의 정치적 체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보다 훨씬 나은 점은 이 책은 어렵지 않게 만화와 코멘트로 작성했지만, 당시 러시아와 국제정세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나오나, 스페인의 통일노동자당이 독재자 프랑코와 맞서 싸우다가 스탈린의 하청기관인 GPU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과 독일나치의 등장부분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훨씬 좋은 책이란 점은 바로 그런 세계정세에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어떻게 행동을 하였을 까이다. 트로츠키 혼자 정치국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망명가서 주변 사람과 옥신각신이 다투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적 정세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만화라는 속성과 페이지수가 작아 일일이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단지 대체로 긍정적인 요소만 보여주었고, 부정적인 요소는 1921년 크론슈타트 수병의 봉기에서 보여준 잔인한 대처였다. 레닌도 만약 봐주게 되면 정세가 불안한 시국에 여기저기에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강제진압 조치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저지른 가혹한 처사는 분명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내전에서 적진에 인접한 전장에 몸소 나가 싸우는 것은 전쟁지휘관으로 본받을 상황이다. 전략과 전술을 몰랐다면 상대편의 군사력에 밀렸을 것이나 오히려 내전에서 승리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내전에 보인 승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더 좋은 책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역시 트로츠키의 유언이 있다.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느 단편적인 부분만 판단해서는 아니 되지만, 분명 트로츠키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간 사람은 분명하다. 미국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법정에서 그의 무죄선언이나 영국의 진정한 귀족정신을 가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경과 소통한 모습에서 그가 과연 당대 지식인으로부터 배척받아야 존재라고 보여주기 어렵다. 단지 인간이 워낙 사무적인 관계만 추구하여 인간적인 맛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직선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패배했지만, 러시아혁명을 만든 것도 그렇다.

 

인간의 최고의 단점은 최고의 장점으로 연결되고, 최고의 장점은 최악의 상황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20세기 문턱에서 시대를 흔들게 한 어느 남자의 모습에서 단지 그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고, 그 시대를 어떻게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트로츠키에 대한 판단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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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문제적 인간 10
로버트 서비스 지음, 양현수 옮김 / 교양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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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러시아혁명에서 나는 2월 혁명보단 10월 혁명에 더 신경을 쓰는데, 그런다고 하여 볼셰비키혁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관점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말하고 싶은 것은 볼셰비키혁명이 가지는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는 충분히 긍정적인 가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읽어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가 저술한 책들이 코뮤니스트 즉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면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적어도 관료주의 타도와 독재정치를 타도를 외치다가 순간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혁명이란 것이 무조건적으로 평화로서 된다는 식이 그의 머리에 꽂혀 있는 것인가? 너무 기만한 자세로만 나오는지 한 번 다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의 해온 볼셰비키혁명 이후부터 러시아내전, 정치국 다툼들에 대해 모두 옳다거나 합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과 조건, 그가 추구하는 설정에서 정작 그가 제대로 짚은 것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연설이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두뇌와 문장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기 고집과 착각이 심하며, 인간관계가 너무 업무적이란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첫 번째 아내를 자신이 러시아 인민주의자(Narodniki)이던 시절 만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혁명 활동으로 인해 아내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고, 자신은 혁명을 위해 떠나면서 아내와 헤어진 것을 두고 사적인 영역으로 지나치게 끌여 당겼다.

 

분명 트로츠키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이랑 친분을 유지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고, 특히 당파적으로 스탈린과 대결할 때 다른 반 스탈린 분파와 협공을 하지 않은 것 역시 트로츠키의 오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개인적인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두고 서로 비교하여 다른 것이 러시아혁명을 두고 보면 확인이 가능한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계속 은폐, 날조, 왜곡되어 트로츠키의 이름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금기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서로 추구하는 성향과 방법은 달라도 같은 공포정치가로 봤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이 Non-Sense로 작용한 것이다. 마지막에 트로츠키의 유언장이 문제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균형 잡히지 않은 것은 처음과 끝을 보여준 게 아니라 처음에서 중간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그의 졸렬한 필력에 웃음이 나왔다.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에서 그 자체가 트로츠키의 이야기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100% 옳은 것이 아니란 점에서 적어도 100% 아닌 그 나머지 %를 생각해야 했다. 단지 가치관에 따라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으나, 유언장을 보면 <트로츠키>란 책이 전혀 공정성이 없는 사족으로 얼룩진 책이란 점은 내 생각에서 버릴 수가 없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유언장을 이렇게 작성했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거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나탈랴)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ㅂ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칸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로버트 서비스는 위에서 트로츠키 2번째 아내 나탸샤(나탈랴)의 모습을 관찰하던 부분은 아예 텍스트 위로 표현하지 않았다. 페이지는 부록과 색인을 포함하면 1,000페이지 가까운 책이다. 그 두꺼운 책속에서 유언이 차지하는 부분은 한 페이지에 반 페이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이미 공정성이란 정확성은 잃은 책이다. 처음부터 나는 아이작 도이처의 책을 봤으나, 그것보다 오히려 영국 에식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가 객관적으로 저술했다.

 

당시의 사료와 사진들을 인용했으며, 사견을 넣는 것은 마지막 맺음말 부분에 강조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중간 본문마다 사견을 넣었고, 정확하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이래저래 섞어 넣었다. 트로츠키의 책 중에서 <배반당한 혁명>, <레닌 이후 제3인터내셔널>을 읽은 후에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읽어 보면 뭔가 일치하지 않은 점을 분명 인지한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에 대하여 그는 똑똑하나 한 마디로 외곬적인 혼자 잘난 사람 바보라는 점이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분명하고 하다못해 러시아내전에 보여준 잔인한 대응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극단성에서 어느 진영이나 마찬가지고, 그 외적인 부분으로 같이 역사적 흐름으로 살펴보는 게 아니라 스탈린과 동급대우라는 자체가 엉망인 점이다.

 

그의 저서에도 보듯이 분명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문제점은 관료주의와 폭력적인 공포정치도 있지만, 그 원동력이 스탈린이 고의로 흐름을 만든 쇼비니즘적인 요소다. 러시아민족이 소비에트연방을 지배한다는 논리가 바로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진 동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관료주의로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개인적 이기심과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고, 그 방법의 동원과 수단 역시 다른 점이다. 독일나치와 소비에트 러시아이 비밀조약에서 트로츠키의 예상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가 멕시코에 가서 다른 여자와 바람난 것은 문제나 그것을 고질하게 잡고, 그 외의 업적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로버트 서비스 자체가 쇼비니스트에 가까웠다. 지금 세계에 코민테른은 해체하고, 이제는 제4 인터내셔널이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특이하게도 미국에서 활동적인 요소가 돋보인 점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이며, 트로츠키의 서적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가 맥스 이스트먼이란 미국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맥스 이스트먼을 비롯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맥스 이스트먼을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 평했다. 분명 뛰어난 인물이고 훌륭한 업적을 한 것은 사실이나, 미국인에 대한 앵글로 잭슨적인 요소는 조금 짜증이 났다.

 

빅토르 세르주나 앙드레 지드와 같은 역사학자에 대한 업적에서 제대로 다루주긴 보다 그의 사생활적인 요소에 강하게 집착한 것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와 비교하여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쇼비니스트적인 요소가 잘 보인 이유는 바로 미국인들에 대한 그의 옹호성이다. 물론 민족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못했지만, 트로츠키가 가장 배제할 것이 민족적으로 뭉쳐 그 민족이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민족을 시기, 질투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 사실이다. 자신이 유대인이란 점을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챙기지 않으려 한 점과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가 해온 업적과 능력으로 소비에트 내의 정치활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점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어리석다는 말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어리석지 않은 인간은 이 세상이 없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역사학을 전공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도 했지만, 그는 미국의 후버연구소의 일원이었다. 후버대통령을 기념하여 만든 연구기관이니 그의 입장이 책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쓴다는 것은 그의 자유이나 적어도 조금은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트로츠키는 고집만 세어 러시아혁명을 성공해도 결국 스탈린과 같이 소비에트연방은 공포정치로 가득한 독재국가 된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스티브 스미스 교수가 지적한 정통주의적인 관점이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이었다. 만약 트로츠키의 마지막 유언에서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악과 억압, 폭력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로버트 서비스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평화라는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된 적은 결단코 없다. 러시아혁명을 두고 사람들이 오류를 저지르는 요소는 러시아혁명은 단지 러시아혁명이 아니라 1789년 프랑스대혁명부터 1871년 파리 꼬뮌까지 다양하게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 중간에 1830년과 1848년 혁명, 그리고 나폴레옹의 1799년 쿠데타와 1851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까지 말이다.

 

기본적으로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에 의해서만 아니라 계몽주의자도 다수 있었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볼셰비키혁명에서 인터내셔널가(歌)와 더불어 같이 불러진 사실이고, 볼셰비키혁명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단어만 나온 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동했던 당통과 같은 혁명가들의 말도 나온 점이다. 러시아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면 결코 러시아혁명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는다면 러시아혁명이 된 원인에서 공통성을 찾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경제침체, 식량부족, 지나친 남성의 징집에 농촌과 도시 노동력 부족, 가족들의 분노 등등을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프랑스혁명과 달리 러시아혁명은 세계열강들의 1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사건인 만큼 그 원인과 문제점, 과정을 살펴본다면 과연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을 가지게 한 요소가 옳은가? 아무튼 예전에 읽은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을 다시 떠오른 점에서 나름 재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결코 좋은 책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공적인 영역과 실적인 영역을 잘 구분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세계정치변화에서 움직인 트로츠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세계정세에 대한 비판성은 없었다.

 

트로츠키의 적은 트로츠키란 말은 맞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고, 자신의 적은 곧 자신이다.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이기심과 고집적인 부분에 의해서다. 그것은 어느 인간이라도 가지고 있는 딜레마다. 알고 있어도 고쳐지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습관이다. 관성적으로 인간은 반복하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합의점에 도달하나 그 과정이란 정말 어렵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트로츠키를 관찰하던 로버트 서비스 자신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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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보내야 한데, 요새 사회를 보면 더욱 생각나게금 만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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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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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책의 비판이 되는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고 있지만, 예전에 읽은 스티븐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를 읽다보면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참으로 제대로 쓰여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스탈린과 거의 동급이란 설정자체가 다소 치킨인듯, 나중에 한 번 요 책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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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2014-05-1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버트 서비스는 좌파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공격을 업으로 삼고 있는 우파 자유주의 저술가입니다. 그의 책 <코뮤니스트>를 읽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날 지경이죠. 아마도 '공정성'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저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저자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폴 존슨이죠)

만화애니비평 2014-05-13 13:47   좋아요 0 | URL
따악 하고 동물농장 흰색돼지인 스노볼이군요. 끝과 처음만 읽어보니 악의적인 책이라고 생각만 들더군요. 마르크스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들을 읽다보니 이것은 무슨 러시아혁명을 알로 보는 기분이더군요.
트로츠키가 스탈린과 같다는 말에서 웃음이 나오더군요. 물론 트로츠키가 성격이 거만하고 인하무인격인 것은 알지만, 최소한 자신의 이기심으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인데, 너무 비하하니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