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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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릴 때의 5월이란 봄은 아직까지 시원한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 계절이었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원래는 비가 여름에 많이 오고 더운 몬순기후이기 때문이었다. 계절적 특징이 몬순기후라면 당연히 5월은 여름이 아니기 때문에 더울 리가 없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와 산업의 발달, 특히 자동차의 증가는 우리나라를 더운 나라로 만들었다. 5월에 반팔을 입는 것은 어린 시절에 생각하지 않았으나, 5월이 이제는 초여름으로 변하면서 30℃ 이상 넘어가기도 한다. 이런 5월이 언제부터인가 가정의 달이 되었고, 어느 순간 5월은 잔인한 날로 변했다.

 

지금 2014년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은 비참한 비극으로 인해 분노라는 감정이 이제는 증오라는 저주로 변할 정도다. 2014년 이 잔인한 5월을 보내며 가정의 달에서 가족을 읽은 사람들에겐 그저 머나먼 신기루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5월은 광주에서 피로 거리를 물들게 했고, 5월하면 또 생각하는 사람, 노무현이란 3글자다. 당시 군대생활을 하던 시기, 노무현이란 남자가 국군의 통수권자였다. 군대에서 아무리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중하더라도 뉴스로 보면 다 드러난다. 언론이 그때는 자유로운 발언권을 가졌으며, 일부 언론은 자유의 발언권을 지나 자극의 발언권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것은 재난에 대한 대응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03년 여름, 우리나라에 큰 태풍인 매미가 찾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그 무서운 태풍이 말이다. 당시 대통령은 극장에서 태풍상황을 알았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끝까지 관람했고, 거기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자, 바로 국민 앞에 사죄했다. 국가지도자가 완벽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직분에 있어서는 충실해야 하는 것은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그런 상태서 나는 2003년 추운 겨울을 훈련으로 보내고, 다음해 봄에 임관했다. 2004년 자대배치를 받을 때 처음에는 현장에서 직접 유지보수업무를 하는 곳에 있다가 얼마 후에 구청이나 시청에 있을법한 사무실과 같은 곳에 갔다.

 

구청에 가면 건설과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름에 비오고 나서 이래저래 건축물에 대한 관리를 맡으면서 하자보수의뢰를 건설사에 맡겼는데, 이때 시설물 하자보수 관리대장을 보면서 2003년 여름과 가을에 많은 보수공사가 이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지붕방수나 벽체방수 등과 같은 공사를 말이다.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신 상사(그 당시 계급 역시 상사였다.) 분에게 물어보니 정부에서 예산을 긴급으로 내려 유지보수하게 해준 것이라고 했다. 군에서 긴급예산이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중기계획 내지 경상계획 혹은 대규모 보수 및 소규모 보수라도 예산을 올려 본부에 올려 국방부에서 자금이 조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군사조직 역시 국가예산에 의해 운영되니 금방이라도 내려올 리가 없다.

 

그런데 그때 그 예산이 긴급으로 들어올 수 있던 것은 당시 대통령이 업무를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판공비가 긴급보수 예산으로 집행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랐고, 이때까지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다음 대통령이 되던 사람이 서울시장인 시절에 서울공항 활주로 각도를 틀지 않기 위한 것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전역 후에 대통령이 바뀌고, 참모총장이 바뀌면서 서울시에서 허가해준 제2 롯데월드가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바뀌면서 드디어 착공이 된 것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군용항공기지법」, 시행령도 아니고 시행규칙이 아닌 법률에 활주로가 건축물로 인해 영향이 받는 게 아니라 건축물이 활주로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을 말이다.

 

활주로 위로 달리는 전투기가 곧 우리 국민의 방패인데, 어느 재벌을 위해 틀어진 활주로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근무한 곳은 아니나, 하늘과 조국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당시나 혹은 예비군훈련이 끝나가는 지금 역시 그렇다. 내가 공군교육사령부에서 보던 푯말에 이런 말이 기억난다. “다시 태어나도 공군”, 군대생활하면서 힘든 일은 많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대한민국 남자라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내가 공군을 선택한 것은 그 만큼 보람이 많았던 것이다. 내가 노무현이란 사람보다 노무현이란 대통령을 좋아한 게 동기는 군대에 가서이다.

 

군대를 생각하면 열악한 병영시설이 생각나고, 거기서 사는 사병들의 열악한 병영생활이 보인다. 병영시설에 들어가면 비가 새는 낡은 건물에서 이제는 침대가 있는 신식건물을 바꾸고, 내무반 휴게실에는 최신 컴퓨터에 인터넷까지 보급되어 사병들의 생활이 좋아졌다. 그런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아마 그분이 다른 대통령과 달리 직접 육군 만기제대를 했기에 자신이 겪은 군생활의 고초를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자이툰부대에서 복무했던 많은 전우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그들을 찾아 직접 C-130H 탄 그의 모습에서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노무현이란 대통령을 남들처럼 그 무섭다고 하던 1980년대 군부독재시절을 본 게 아니라 군대에서 처음 느꼈다. 군에 가기 전에는 대충 이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아직 학생인 나로서 세상에 대해 잘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역 1달 전에 그는 다시 봉하로 내려가고, 힘든 대통령 생활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군에 있을 때이니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옛날 공자가 제자에게 정치를 가르쳤을 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정치로 인해 고통이 없어 정치에 대한 관심보단 삶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 좋은 정치라고 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관심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관심사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왠지 모를 허무감에 젖어들었다. 지금도 약간의 허무주의적인 요소가 나에게 남겨져있다. 정치적으로 무지한 나였으나, 어느 순간 책이 내 손에 잡혀있었다. 차별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내가 차별에 대한 부조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런다고 어떻게 해볼 힘은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너무 그립게 느껴졌다. 바른 말하여 잡혀가는 세상이 예전에 있었지만, 다시 또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가 그립다>란 책을 읽는 순간, 아마 나보다 그 책을 저술한 사람들이 더 그가 그리울지 모른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던 송변처럼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대사,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게 되는 현실이 그때나 지금 역시 그렇다. 나는 그저 군인으로서 그에게 크게 이끌려서 찾아왔다면 이 책에서는 순수하게 노무현이란 인물이 어떤 여파를 헤쳐 나오는 것을 알고 적었다. 하지만 보면서도 조금 마음이 아픈 이유가 참여정권 시절,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 지지하던 이들이 되고 나서는 그렇게 비판하다가, 막상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당시 그들이 했던 차가운 비판의 칼날이 다시 자신에게 찾아올지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지지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비판해야 하고, 그것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은 최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선택이든지 모두가 좋게 다가갈 수만 없다. 어떻게든 누군가에 대해 불평등한 처사가 뒤따르는 것이고, 그 불평등에 대한 부조리를 다시 보완하여 정리하는 것이 정치의 필요다. 법이란 것이 너무 늦게 변하니 그것을 풀어가는 게 정치라는 것은 정치철학의 본질을 말해준다.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에 유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정치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치적 해결보단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존한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유라는 것은 공적인 영역의 이성이 추구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는 칸트나 롤즈의 사상에 동의한다. 그러나 정치적 흐름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 안에 가려진 무의식적인 조합이다. 세상에는 왜? 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틀렸음에도 그 틀림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틀림이 결국 정의라고 보여주기 위해 폭력이 등장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무고한 사람을 잡아 구타하고 괴롭힌 그들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권력 앞에 국민을 기만한 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모욕하고 있다.

 

국가를 모욕하는 자는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권위의식을 가지는 자인가? 아니면 그 권위의식에 대항하는 자인가? 분명히 자유주의철학자들의 책에도 시민의 권리에는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불복종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부조리조차 하나의 정의 내지 도덕으로 받아들이는 기가 막히는 일들이 발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왜 도덕을 그토록 부정했을까?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정의와 신의 이름이라고 외치는 것이 하나의 도덕으로 꾸며진 힘의 논리가 숨어 있을 때 그것은 정의를 파괴하고 신을 매장한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그립다>처럼 나 역시 그가 그립다. 그가 분명히 100% 잘 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100%에 안 되는 것도 알고, 될 수도 없는 것도 알지만, 끊임없이 걸어가려고 한 것은 존중해야할 가치관이다. 그의 전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란 삶의 철학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이 만든 미숙아처럼 우리는 아직 미개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하는가? 그러나 미개한 것이 야만스러운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한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처럼 그 나라의 정치는 곧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이란 것처럼 우리는 아직 미개할지 모르나 성난 이리처럼 야만스러우면 안 된다.

 

세월호의 사건에서 피해가족과 국민들에게 미개하다던 어느 청년, 우리의 정치적 수준이 국민의 수준을 반영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야만적인 성향을 몰랐다. 그 야만스러운 인간들에게 물려 사라져간 노무현이란 세 글자엔 우리 시대의 아픔과 모순 그리고 아련함이 새겨진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국민이 대통령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불러 욕을 해서 국민들이 기분이 좋아지면 그것에 대해 기쁘게 받아들이는 그, 우리는 다시 그런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비가 오는 5월의 저녁 진심으로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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