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도서관에서 러시아혁명과 트로츠키에 대한 자료를 구하는 도중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보면서 어이 없이 페이지만 넘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역사의 공정성에서 자유주의자라는 가치를 생각하면 전혀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혹은 공산주의자가 반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목표가 민주주의 정치체계라면 더욱 그러하다. 가령 러시아혁명이 마르크스주의자와 계몽주의자에 의해 일어났다면 그들의 뿌리는 루소와 마르크스다.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에서 루소에 대해 마르크스, 로베스피에르,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역사적 연계성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보여준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투쟁과 같다. 마르크스는 성격이 급하고, 담배 피는 것을 좋아하고 싸움도 많이 한다. 하지만 겉으로 점잖은 척하고, 깔끔한 척하고, 매너 좋게 보이려는 인간보다 훨씬 좋다. 후자는 자신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지나 원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마르크스가 영국에 망명 올 때 당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마르크스로부터 비난을 들어도 그에 대한 발언권을 존중했다. 자유주의철학자라면 여러 가지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보단 그 발언 자체에 대해 막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발언에는 책임 소재가 있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다보면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보면 오히려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행위는 여전하나, 적어도 공정성이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좋은 책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에 보는 책이 그렇게까지 좋은 책은 아니나, 그런다고 나쁜 책은 아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영국 좌파 사상가 타라크 알리가 사람이 저술했다.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국제 마르크스주의자에 제4 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이다. 트로츠키가 설립한 국제노동자연합인 제4 인터내셔널은 그 규모나 활동범위가 매우 협소하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남은 유산인 점에서 트로츠키가 남기려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다고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만 마르크스주의자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 같은 서유럽에선 네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면서 세계적 지식인들을 창출하고 있다.

 

단지 트로츠키란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맨 처음에 나오는 부분이 웃긴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적대국가 중의 50~60년대의 소련과 중공을 보면 양쪽의 정치지도자가 서로를 향하여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도대체 트로츠키가 도대체 무엇 인지 밝혀두지 않은 채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일까?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선 금기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하기 전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나마 유럽에서나 혹은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에서 등장했다. 트로츠키는 잘은 몰라도 트로츠키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새까지도 체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서 체 게바라를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와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적 공백을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말 그대로 트로츠키란 인간이 무엇을 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가 저지른 실수와 판단미스, 완고한 그의 성격은 차갑게 비판했다. 인간은 완벽한 신이 아니니 그런 평가가 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트로츠키의 실수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했던 업적을 그렇게 날조하거나 축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러시아혁명은 끝이 나고, 소비에트 연방도 끝이 났다. 마르크스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꺼졌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모든 것이 조작되었고, 서방세계에서도 역시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여 안락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영화 <트로츠키 암살사건>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를 알아가는 것은 20세기 그 격동의 시기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혁명과 1917년 10월 혁명에서 활동을 했다. 혁명의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추위, 그리고 정치적 모순이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혁명은 국가를 사랑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증오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국가가 왜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증오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위험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차르의 모순이나 스탈린의 모순에서 결국 관료주의 내지 압정이었다. 그 근본에는 경제적 궁핍이 있었고, 하부의 경제적 조건이 상부의 정치적 체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보다 훨씬 나은 점은 이 책은 어렵지 않게 만화와 코멘트로 작성했지만, 당시 러시아와 국제정세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나오나, 스페인의 통일노동자당이 독재자 프랑코와 맞서 싸우다가 스탈린의 하청기관인 GPU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과 독일나치의 등장부분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훨씬 좋은 책이란 점은 바로 그런 세계정세에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어떻게 행동을 하였을 까이다. 트로츠키 혼자 정치국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망명가서 주변 사람과 옥신각신이 다투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적 정세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만화라는 속성과 페이지수가 작아 일일이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단지 대체로 긍정적인 요소만 보여주었고, 부정적인 요소는 1921년 크론슈타트 수병의 봉기에서 보여준 잔인한 대처였다. 레닌도 만약 봐주게 되면 정세가 불안한 시국에 여기저기에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강제진압 조치에 동의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저지른 가혹한 처사는 분명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내전에서 적진에 인접한 전장에 몸소 나가 싸우는 것은 전쟁지휘관으로 본받을 상황이다. 전략과 전술을 몰랐다면 상대편의 군사력에 밀렸을 것이나 오히려 내전에서 승리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내전에 보인 승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가 더 좋은 책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역시 트로츠키의 유언이 있다.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느 단편적인 부분만 판단해서는 아니 되지만, 분명 트로츠키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간 사람은 분명하다. 미국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법정에서 그의 무죄선언이나 영국의 진정한 귀족정신을 가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경과 소통한 모습에서 그가 과연 당대 지식인으로부터 배척받아야 존재라고 보여주기 어렵다. 단지 인간이 워낙 사무적인 관계만 추구하여 인간적인 맛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직선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패배했지만, 러시아혁명을 만든 것도 그렇다.

 

인간의 최고의 단점은 최고의 장점으로 연결되고, 최고의 장점은 최악의 상황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는 20세기 문턱에서 시대를 흔들게 한 어느 남자의 모습에서 단지 그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고, 그 시대를 어떻게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트로츠키에 대한 판단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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