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문제적 인간 10
로버트 서비스 지음, 양현수 옮김 / 교양인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러시아혁명에서 나는 2월 혁명보단 10월 혁명에 더 신경을 쓰는데, 그런다고 하여 볼셰비키혁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관점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말하고 싶은 것은 볼셰비키혁명이 가지는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는 충분히 긍정적인 가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읽어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가 저술한 책들이 코뮤니스트 즉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면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적어도 관료주의 타도와 독재정치를 타도를 외치다가 순간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혁명이란 것이 무조건적으로 평화로서 된다는 식이 그의 머리에 꽂혀 있는 것인가? 너무 기만한 자세로만 나오는지 한 번 다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의 해온 볼셰비키혁명 이후부터 러시아내전, 정치국 다툼들에 대해 모두 옳다거나 합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과 조건, 그가 추구하는 설정에서 정작 그가 제대로 짚은 것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연설이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두뇌와 문장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기 고집과 착각이 심하며, 인간관계가 너무 업무적이란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첫 번째 아내를 자신이 러시아 인민주의자(Narodniki)이던 시절 만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혁명 활동으로 인해 아내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고, 자신은 혁명을 위해 떠나면서 아내와 헤어진 것을 두고 사적인 영역으로 지나치게 끌여 당겼다.

 

분명 트로츠키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이랑 친분을 유지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고, 특히 당파적으로 스탈린과 대결할 때 다른 반 스탈린 분파와 협공을 하지 않은 것 역시 트로츠키의 오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개인적인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두고 서로 비교하여 다른 것이 러시아혁명을 두고 보면 확인이 가능한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계속 은폐, 날조, 왜곡되어 트로츠키의 이름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금기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서로 추구하는 성향과 방법은 달라도 같은 공포정치가로 봤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이 Non-Sense로 작용한 것이다. 마지막에 트로츠키의 유언장이 문제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균형 잡히지 않은 것은 처음과 끝을 보여준 게 아니라 처음에서 중간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그의 졸렬한 필력에 웃음이 나왔다.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에서 그 자체가 트로츠키의 이야기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100% 옳은 것이 아니란 점에서 적어도 100% 아닌 그 나머지 %를 생각해야 했다. 단지 가치관에 따라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으나, 유언장을 보면 <트로츠키>란 책이 전혀 공정성이 없는 사족으로 얼룩진 책이란 점은 내 생각에서 버릴 수가 없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유언장을 이렇게 작성했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거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나탈랴)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ㅂ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칸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로버트 서비스는 위에서 트로츠키 2번째 아내 나탸샤(나탈랴)의 모습을 관찰하던 부분은 아예 텍스트 위로 표현하지 않았다. 페이지는 부록과 색인을 포함하면 1,000페이지 가까운 책이다. 그 두꺼운 책속에서 유언이 차지하는 부분은 한 페이지에 반 페이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이미 공정성이란 정확성은 잃은 책이다. 처음부터 나는 아이작 도이처의 책을 봤으나, 그것보다 오히려 영국 에식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가 객관적으로 저술했다.

 

당시의 사료와 사진들을 인용했으며, 사견을 넣는 것은 마지막 맺음말 부분에 강조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중간 본문마다 사견을 넣었고, 정확하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이래저래 섞어 넣었다. 트로츠키의 책 중에서 <배반당한 혁명>, <레닌 이후 제3인터내셔널>을 읽은 후에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읽어 보면 뭔가 일치하지 않은 점을 분명 인지한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에 대하여 그는 똑똑하나 한 마디로 외곬적인 혼자 잘난 사람 바보라는 점이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분명하고 하다못해 러시아내전에 보여준 잔인한 대응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극단성에서 어느 진영이나 마찬가지고, 그 외적인 부분으로 같이 역사적 흐름으로 살펴보는 게 아니라 스탈린과 동급대우라는 자체가 엉망인 점이다.

 

그의 저서에도 보듯이 분명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문제점은 관료주의와 폭력적인 공포정치도 있지만, 그 원동력이 스탈린이 고의로 흐름을 만든 쇼비니즘적인 요소다. 러시아민족이 소비에트연방을 지배한다는 논리가 바로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진 동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관료주의로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개인적 이기심과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고, 그 방법의 동원과 수단 역시 다른 점이다. 독일나치와 소비에트 러시아이 비밀조약에서 트로츠키의 예상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가 멕시코에 가서 다른 여자와 바람난 것은 문제나 그것을 고질하게 잡고, 그 외의 업적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로버트 서비스 자체가 쇼비니스트에 가까웠다. 지금 세계에 코민테른은 해체하고, 이제는 제4 인터내셔널이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특이하게도 미국에서 활동적인 요소가 돋보인 점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이며, 트로츠키의 서적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가 맥스 이스트먼이란 미국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맥스 이스트먼을 비롯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맥스 이스트먼을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 평했다. 분명 뛰어난 인물이고 훌륭한 업적을 한 것은 사실이나, 미국인에 대한 앵글로 잭슨적인 요소는 조금 짜증이 났다.

 

빅토르 세르주나 앙드레 지드와 같은 역사학자에 대한 업적에서 제대로 다루주긴 보다 그의 사생활적인 요소에 강하게 집착한 것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와 비교하여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쇼비니스트적인 요소가 잘 보인 이유는 바로 미국인들에 대한 그의 옹호성이다. 물론 민족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못했지만, 트로츠키가 가장 배제할 것이 민족적으로 뭉쳐 그 민족이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민족을 시기, 질투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 사실이다. 자신이 유대인이란 점을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챙기지 않으려 한 점과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가 해온 업적과 능력으로 소비에트 내의 정치활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점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어리석다는 말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어리석지 않은 인간은 이 세상이 없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역사학을 전공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도 했지만, 그는 미국의 후버연구소의 일원이었다. 후버대통령을 기념하여 만든 연구기관이니 그의 입장이 책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쓴다는 것은 그의 자유이나 적어도 조금은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트로츠키는 고집만 세어 러시아혁명을 성공해도 결국 스탈린과 같이 소비에트연방은 공포정치로 가득한 독재국가 된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스티브 스미스 교수가 지적한 정통주의적인 관점이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이었다. 만약 트로츠키의 마지막 유언에서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악과 억압, 폭력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로버트 서비스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평화라는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된 적은 결단코 없다. 러시아혁명을 두고 사람들이 오류를 저지르는 요소는 러시아혁명은 단지 러시아혁명이 아니라 1789년 프랑스대혁명부터 1871년 파리 꼬뮌까지 다양하게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 중간에 1830년과 1848년 혁명, 그리고 나폴레옹의 1799년 쿠데타와 1851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까지 말이다.

 

기본적으로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에 의해서만 아니라 계몽주의자도 다수 있었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볼셰비키혁명에서 인터내셔널가(歌)와 더불어 같이 불러진 사실이고, 볼셰비키혁명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단어만 나온 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동했던 당통과 같은 혁명가들의 말도 나온 점이다. 러시아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면 결코 러시아혁명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는다면 러시아혁명이 된 원인에서 공통성을 찾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경제침체, 식량부족, 지나친 남성의 징집에 농촌과 도시 노동력 부족, 가족들의 분노 등등을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프랑스혁명과 달리 러시아혁명은 세계열강들의 1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사건인 만큼 그 원인과 문제점, 과정을 살펴본다면 과연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을 가지게 한 요소가 옳은가? 아무튼 예전에 읽은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을 다시 떠오른 점에서 나름 재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결코 좋은 책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공적인 영역과 실적인 영역을 잘 구분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세계정치변화에서 움직인 트로츠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세계정세에 대한 비판성은 없었다.

 

트로츠키의 적은 트로츠키란 말은 맞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고, 자신의 적은 곧 자신이다.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이기심과 고집적인 부분에 의해서다. 그것은 어느 인간이라도 가지고 있는 딜레마다. 알고 있어도 고쳐지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습관이다. 관성적으로 인간은 반복하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합의점에 도달하나 그 과정이란 정말 어렵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트로츠키를 관찰하던 로버트 서비스 자신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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