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인 조사내용
<모모큔 소드>를 보면서 조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모모큔이란 이름은 모모타로 전설에서 본뜬 점이고, ② 아베노 세이메이는 기원전 10세기에서 11세기까지 활약한 음양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모타로 이야기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는 오니가시마에 가서 꿩, 원숭이, 개와 더불어 도깨비를 제압하여 보물을 가지고 온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일본에서 아주 많은 소재에 등장하는 음양사라는 점에서 <모모큔 소드>는 2가지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③ 마지막으로 카쿠야공주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삼천실복숭아를 모우는 이유는 카쿠야공주가 달에 가기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힘을 모우는 것에 있어서 조정과 조정의 신하인 아베노 세이메이 일행하고 같이 행동한다.
세 가지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하나에 뭉쳐 현대적 감각과 더불어 주인공인 모모코와 모모코의 라이벌인 오니히메가 등장한다. 원래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Animation의 Anima는 영혼이고, Animate는 살아있지 않은 존재에 혼을 불어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만드는 것이다. Anima라는 것이 영혼이란 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공간에서 살아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새롭게 만들고 해석하고 때로는 변모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인 판소리를 보면 그 흐름이 전설과 신화에서 비롯되고, 등장인물조차도 신화나 전설의 인물이다. 가령 심청전의 용왕은 바다의 신이고, 어부들이 생각하는 바다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격화한 존재다.
2. 이야기의 변주곡
그 이야기가 동화로도 되고, 때로는 소설로도 되지만, 현대에 와서 새롭게 각색되기도 한다. 예전에 한국 대표적인 판소리 주제인 춘향전을 소재로 <쾌걸 춘향>이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이야기하기는 것은 단순히 그 원류 그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형되고 탄생하고 왜곡되어진다. 그런 만큼 스토리텔링은 정해진 이야기만이 아니라 수용자가 새롭게 변화된 이야기로서 드러날 수 있다. 전설이나 신화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신화와 전설은 통시적인 것이 아니라 공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른 문화적 조건과 사회적 현상, 정치적 입지가 부여된다. 그런다고 우리가 그 이전 시대의 인간과 다른 문명이라고 해도 그들과 같은 공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계속 덧붙이거나 빼거나 또는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적어도 이야기가 변모된다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러면서도 과거의 이야기와 접점이 맞물려 있다.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이 서로 결합하여 부딪혀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부딪힘의 미학이란 바로 변증법적으로 서로 대립되겠지만, 서로 대립되기에 기존의 이야기가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잊은 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결국은 도태되거나 박물관 속에 전시된 유물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모큔 소드>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3. 복숭아에 대한 판단
<모모큔 소드>에서 모모큔의 모모는 결국 모모코의 이름에서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모모라는 것은 복숭아, 즉 도화(桃花)에서 나오는 열매다. 복숭아나무에서 나오는 과실 복숭아를 이 작품과 혹은 모모타로 신화에서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모모큔 소드>만의 리뷰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면 일본의 문화, 그리고 동아시아문화라는 인류학적인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복숭아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한국에서나 혹은 일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과실나무다. 복숭아의 역사적인 기록에서 한국은 이미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상, 대략 삼국시대 내지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복숭아의 원산지가 중국인 이상, 왜 중국의 나무가 일본으로 갔는가에서 결국은 삼국사기의 문헌정보로 판단해보면 한국의 과거 고대국가에서 일본으로 복숭아가 넘어간 사실이다. <모모큔 소드>에서 가장 생각해야 점은 복숭아라는 점이다. 복숭아가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서 어떤 모티브로 작용하는 점이다. 복숭아가 복사나무라고 불리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에 자주 먹는 과일이기도 하나, 복숭아의 나무인 복사나무는 절대로 제사상에 올리지 않은 게 특징이다. 복사나무의 가지는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으며, 그런 것들은 한국 전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모모타로 원전전설에서 생각할 점은 모모타로 복숭아에서 태어난 점에서 복숭아가 귀신만 아닐 도깨비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유령이나 귀신, 악귀 등을 쫓아내는 힘이 있던 것이다.
한국에서 악령을 내쫓는 것은 팥을 이용하여 동짓날에 죽을 해서 먹는데, 일본도 그런 유사한 풍속이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유사성에서 복사나무 가지나 팥의 경우 농경문화의 특성이다. 복사나무는 여름에 과일을 맺기에 양기를 많이 받아야 좋은 열매를 가질 수 있다. 양기를 품은 나무인 만큼 음기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 양기가 좋은 복숭아만큼 인간의 신체에 매우 탁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가령 모모타로 전설에서는 복숭아를 먹은 두 노부부가 갑자기 젊어져서 할머니가 젊은 여자처럼 임신할 수 있다고 한 점이다. 복숭아는 다양한 비타민과 무기물질, 그리고 노화에 탁월한 음식이고, 신체 면역력에 매우 좋은 효과를 보여준다.
결국 복숭아란 음식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음식으로 그 효과는 보통 인간들에게 좋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전설에서 복숭아는 일본의 오니가시마 내지 한국의 귀신들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과일이다. 그렇다면 복숭아의 문화성은 무엇인가? 복숭아가 분명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과 복숭아는 다른 과일과 비교하여 좋은 영양소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의 관련성은 천녀(天女)로 이어진다.
4. 천녀(天女)와 선교(仙敎)
일본의 종교 관념을 보면, 기본적으로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일본 창조신을 이어받은 천황(天皇)이란 존재가 있다. 21세기에 일본은 겉모습만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천황은 아직까지 존재하며, 소화와 평성으로 이어지면서 천황은 결국 하늘의 황제이다. 물론 일본 천황에 대해 일일이 논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천황을 꺼낸 이유는 천녀대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적인 종교가치관이 작품 내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천녀가 사는 세계는 하는 천상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를 크게 3가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다. 천녀가 하늘, 오니가시마가 땅, 인간은 지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구조는 무(巫)라는 한자와 잘 맞아 떨어진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의 간단한 소개로서는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천녀대란 존재는 선교라는 인간을 초월한 신선이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복숭아의 시작은 중국이고, 중국에서 시작된 선교에서 복숭아는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 고전을 토대로 제작한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전설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도깨비 또는 선녀 내지 옥황상제 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등장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어느 효심이 깊은 청년이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채 늙은 어머니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의 부모님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청년은 늘 마음이 아픈 모습이 나온다. 이때 청년은 신선을 만나거나 또는 선녀 혹은 꿈속에서 조상님 내지 옥황상제를 만날 때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병이 깨끗하게 사라져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복숭아의 소재가 항상 누군가의 병을 치료하는 점에서 약으로 사용되나, 한편 악귀가 사람에 씌워지거나 또는 이유 없는 병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천도복숭아가 거론된다. 복숭아라는 것이 결국 거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천녀장 스메라기는 삼천실복숭아의 힘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만약 그 힘이 잘못 사용될 경우 큰 재앙이 발생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는 복숭아와 천녀라는 존재로서 기존 이야기에 선교 혹은 도교(道敎)적인 가치관이 부여된 점이다. 복숭아의 가진 힘을 인정하는 것은 도교 내지 선교의 종교적 가치를 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5. 오니의 존재
오니의 존재는 귀신 내지 도깨비를 지칭한다. 도깨비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존재하는 이야기며, 한국에서는 동굴에서 도깨비가 나오거나 또는 무덤 앞에서 등장한다고 한다. 주로 음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도깨비란 존재가 나오기에 복숭아로서 도깨비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민간신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모큔 소드>에서는 복숭아에 대해 오니들이 무서워하기보단 복숭아의 힘을 오히려 노리는 것이 특이하다. 게다가 오니들은 복숭아의 힘으로 카쿠야공주의 우주선을 가동하거나 또는 오니가시마를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 오니의 존재, 그들의 본질적 요소가 조금 의아하다.
보통 이런 모험물의 경우 선악의 이분법적인 논리로서 주인공이 정의의 편, 상대편은 강력하고 악랄하며 온갖 못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악의 축이다. 그런데 오니의 존재는 과연 악의 축인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처음에 복숭아를 두고 서로 다투는 오니와 모모코의 대립에서 점차 이상한 축으로 흘러간다. 같이 협동하기도 하고, 모모코의 비밀이 담긴 물건을 잃어버릴 때 자코키가 모모코의 물건을 가지고 협박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오니히메가 자코키가 주운 물건을 도리어 모모코에게 준다. 이때 자코키는 자키오에게 오니히메가 한 행동을 고발하지만, 자키오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그의 딸이라도 오니족의 일원으로서 자키오는 오니히메에게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이에 오니히메는 오니로서 긍지를 갖고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자키오는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오니히메가 한 행동은 이른바 정언명령, 타인의 선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공공선을 넘어 공동선적인 가치다. 정의론적 가치로서 판단한다면 오니히메는 자신이 충분히 모모코의 약점을 가지고 이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하며 정정당당하게 모모코와 겨루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니라는 존재는 교활하고 악랄하며 저주스러운 존재라는 관념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만다. 후에 가면 오히려 오니히메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인 자키오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다. <모모큔 소드> 11화 오프닝 후 오니히메가 자키오를 찾아가 자신의 출생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니히메 : 그럼 왜 절 친자식처럼 키우신 겁니까?
자키오 : 천계가 혐오하고 부정해온 것, 그건 바로 힘과 우리 오니의 존재. 그리고 오니랑 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녀석에게 있어 너 같은 아이는 오니 이상으로 창피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지. 그래서 널 주워 길렀다. 널 버린 녀석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오니히메 : 단지 그것 때문에?
자키오 : 이상을 위해 버리고 부정한 것들로 인해 멸망한다. 정말 우습지 않느냐?
약간 뻔한 스토리와 여성캐릭터의 가슴움직임(버스트 무빙)에 상당히 비중을 두는 <모모큔 소드>에서 이런 대화를 나온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분명히 철학적인 담론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오니히메와 자키오의 대화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오니히메는 오니족 수령의 딸이고 후계자이겠지만,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오니히메는 오니히메라는 자키오의 말과 자신이 이때까지 묶게 만든 사슬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런 말에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가 생각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 오니히메에게 진정한 사슬은 없었다. 그 누가 무엇이라 하여도 오니히메는 오니히메였고, 오니히메의 부하이며, 사디스트 마족인 엔키는 오니히메는 그 무엇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친구라는 점은 변함없다고 한다. 사회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로서 오니히메는 친구를 얻은 것이다. 분명 오니히메는 모모코와 라이벌이 되어야 하나, 그 라이벌적인 존재가 서로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 점이다.
그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으로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모험장르 내지 용사마왕장르에서 교과서적으로 악의 축이어야 할 오니히메가 과연 악인가? 라는 질문에서 오히려 악이 아니라 단지 악으로 규정되었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오니히메의 존재성을 두고 판단하면 진정 악은 누구인가? 판단은 도덕인가 혹은 윤리적인 가치인가로서 판단해야 한다. 도덕이란 것은 그 사회의 권력에 의한 법적 제도적인 규율으로서 단순히 천녀사회에서는 오니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폭력적인 존재로 각인되었지만, 자키오 입장에서 (설사 오해라고 할지라도) 천녀장조차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존재로 보인다.
선악의 저편으로서 자키오는 적의 우두머리지만, 그가 가진 오니라는 긍지는 과연 악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오니히메에게 오니라는 긍지를 가지고 행동했는가? 라는 것은 곧 오니일지라도 자신의 정의에 의해 행동했는가라는 것이다. 신념이란 가치 아래 오니히메의 행동은 윤리적인 가치에서 정말 옳고 정당한 행동을 한 것이다. 단지 오니의 자코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오니의 반역자로서 오니히메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이란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이는 것이다.
작품 상황 그 자체에서는 오니족이 나쁜 것으로 처음에 판단하겠지만, 작품 후반에 갈수록 오히려 천녀 쪽의 가치가 틀렸다는 알아보게 해준다. 모모코와 오니히메는 쌍둥이 자매이고, 두 사람은 어머니의 유물인 반지를 서로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천녀사회에서 매우 아름다고 자상하며 천녀 중에 천녀인 분이나, 아버지는 오니족 일원이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우리는 단순히 하늘과 땅의 위배된 존재로서 보이나, 그 너머에는 인간이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해 느끼는 배타심을 보여준다. 배타심에 의해 모모코의 부모는 죽임을 당하고, 자신들은 버림 받은 하늘과 땅의 버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땅의 지하에 살던 오니족 우두머리인 자키오는 오니히메를 자신의 딸로 삼고, 딸로서 대해준다. 무표정하고 다소 감정이 없는 자키오라도 그가 오니히메에게 보여준 모습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행동하는 아버지와 같았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했던 오니히메에 대한 가치를 부정한 그로서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 혹은 부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간 셈이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한 존재이나, 오니에게는 긍정적인 존재이며, 그것 자체가 상대방에 대해 또 다시 부정이란 가치관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6. 복숭아의 농경사회
오니족과 모모코의 대결에서 최종적으로 모모코의 승리로 이어지고, 이후 자키오 대신 오니족은 오니히메의 통솔로 들어간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니족은 오니가시마의 붕괴로 인해 땅 밑이나 혹은 동굴 다르게는 인간이나 천녀사회에 의해 포박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짓고, 평화로운 농경사회 구조를 이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그들은 어떻게 바라보는 게 정당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결론 자체가 오니족이 오니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니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모모타로는 오니족을 침범하면서 보물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에서 복숭아는 일본에서 한국 내지 중국에서 유입된 물품이며, 일본은 중국과 교류하기보단 삼국시대의 백제와 교류를 더 많이 했다. 또한 지리적인 조건에서 한국의 고대국가들과 무역을 더 많이 한 일본으로서 천녀사회는 결국 일본으로 유입된 도교 내지 선교 문화이다. 도교 내지 선교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으로 유입되어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에서 (일본 자체는 이런 점을 무척 부정하겠지만) 모모타로 내지 모모코 이야기는 기존 원주민과 유입민족의 대립관계로 볼 수 있다.
복숭아라는 것은 인간이 과수원으로 가꾸는 열매이며, 농경사회인 중국과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농경문화보단 어업에 더 가까우며, 오니가시마를 신화적 요소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본다면 그들은 노략질을 하던 해적에 가깝다는 점이다. 오니가시마의 오니들은 본래 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그들이 해적일 가능성은 모모타로 이야기에서 오니족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략질을 일삼은 그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주 주변 마을이나 부락에 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다.
고대 일본은 지금처럼 통일된 국가가 아닌 세분화된 점도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부 농경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메라기 천녀장부터 천녀대의 의상은 도교와 선교의 의상으로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복식문화가 아니다. 따라서 <모모큔 소드>는 기존 해적질을 하던 원주민과 높은 문화(하늘을 나는 천녀)를 가진 부족이 만나 서로 대립하다가 모모코와 오니히메처럼 두 부족의 교류가 처음 이루어질 때 잘 되지 않았거나(혹은 인질로서 서로 결혼하는 방법에서 잘 되지 않았거나) 분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샤머니즘(한국의 전통무속신앙)적으로 본다면 천녀는 하늘이고, 오니는 땅, 인간은 중심이다. 한국에서 천지인에서 하늘은 아버지고, 땅은 어머니이니 그 사이에 인간이 태어난 것처럼(단군신화) 인간은 오니 내지 신선이 둘 될 수 있거나 혹은 그 두 부류로부터 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 최종 승리자를 보면 천녀이기도 하겠지만, 오니족 역시 멸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경사회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농경사회는 인간만의 문화인 점에서 최종 승리자는 인간이란 점이다. 천녀들은 인간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보단 그저 아이돌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째보면 아이돌이란 존재는 TV 가상매체에 등장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신은 원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관념 내지 혹은 환상에 존재한다. 신의 모습이 무언가 특별한 형체를 가지기보단 인간의 모습을 가진 것은 신이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인간이 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녀들은 신앙적인 대상으로 작품 내에서 인간세계에 직접으로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돌로서만 개입한다. 아이돌이란 숭배의식이 담긴 현실사회의 문화다. 그에 반해 오니는 힘으로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니 역시 인간과 같은 모습이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힘에 의한 폭력과 지배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단순히 오니와 천녀를 구분하기보단 그 존재에겐 인간의 모습이 담긴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오니와 천녀들은 서로 적으로 마주하겠지만, 최종 목표는 적이기보다는 서로 통할 수 있는 존재다. 오니히메가 마지막 화에 모모코와 서로 즐거운 표정을 검을 겨눌 때, 두 사람은 미소를 짓고, 모모코의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해 간식을 준비한다. 게다가 천녀대는 두 사람의 결투를 보러 오며, 모두가 누가 이기든 관계없다고 한다. 이게 <모모큔 소드>에서 말하는 작품의 미학적 가치일 것이다.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처음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만, 니체는 인간은 서로 싸워봐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래야지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