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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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행의 시대>를 읽어보면서 거론하던 서적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였다. 원래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부르디외는 본래 도시가 아닌 시골출신이었으나, 우수한 능력으로 프랑스 명문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입학하던 대학교에서 그를 대하는 학생들은 냉소적이었다. 부르디외는 시골출신이고, 그들은 도시사람이란 점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가지고 있는 삶의 흔적 내지 축척된 인생의 보이지 않은 재산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구별짓기>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로서 더 확장해본다면 좋은 도서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온 공간이란 문화적인 공간에서 터득한 삶의 축척이고, 그 축적된 것은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해주고, 앞으로 그가 살아갈 인생을 결정되게 만들어준다. 쉽고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그런 인간이 가진 삶의 흔적이 문화적 취향과 취미로서 나타나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자본이란 매체가 화폐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라는 문화적 요건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문화자본이라고 불리는 이 생활양식의 축척들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그의 지위와 위치를 보여주며, 단순히 경제적인 요소를 지나 직업과 사회적 입지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미디어로 통해 문화생활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화산업처럼 육체적 노동이 끝난 후에 집에서 다시 정신적 심리적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이 반영된 매체이므로, 미디어가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은 단순히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으로 통해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군중을 위한 문화 아니 군중들이 즐기도록 만든 문화다.

 

같은 사고방식과 같은 가치관을 조성하고, 여기에 대한 미디어적인 요소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방송이나 정보로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입장을 넣을 수 있다. 이런 요소는 현재 우리나라의 미디어 방송 상황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현재도 그 폐단은 심각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한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곧 고급문화 내지 하위문화, 반문화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은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며, 반문화는 사회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의 현실적 비판에서 대중문화는 인간에게 다양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파괴하고, 획일화를 바라며, 대중들이 미디어에 길들여져서 자신들의 의지로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흔하게 이런 말을 한다. “TV는 바보상자이고, TV를 보기만 하면 공부가 안 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바보상자와 정신적 박약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다. 왜 아이들은 안 되고, 자신들은 된다고 생각하는가? 공부하는 것은 결국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일환만 생각하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공부와 학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 역시 미디어의 영향이다. 바보상자를 영향 받는 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바보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만큼 아이러니가 없다.

 

이에 반해 고급문화 같은 경우 무엇인가? 전에 미혼여성이 선호하는 남성의 취미가 바로 승마 내지 요트 같은 게 나왔다. 승마나 요트 같은 취미를 하려면 상당한 경제력이 받쳐주어야 하며, 그런 재력을 가진 남성을 여성이 원하고 있다. 남성은 돈, 그 돈을 가진 남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여성은 섹스, 결국 섹스와 돈이라는 공식이 형성된다. 문화자본 중에 하나인 취미나 취향이 결국 상대방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까지 연계되는 점이다. 적은 경제력으로 큰 효율을 볼 수 있는 독서 같은 취미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결국 지적인 사색이나 연구보다는 오로지 물질적인 욕망만이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생활에서 문화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생산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령 1차 산업이 중심이던 농업과 손으로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대부분은 소비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한다. 우리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들처럼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지 않은 이상, 소비에 의해 문화를 즐길 수밖에 없다. 결국 문화의 소비는 자본의 소비이고, 그 소비의 문화로서 사회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소비의 대상이 무엇이냐? 것이다. 왜 취미생활이 승마나 요트를 원하는 여성들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가방은 왜 집착하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누구와 동일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욕망도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보다 특별해지기를 바라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런 갈등과 욕망은 유행이란 단어를 생성시키고,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특별하면서도 누군가와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이 그 동질감을 느끼려는 사람보단 자신의 모습을 남들이 따라오게 유도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모습에서 탈피한다. TV에서 가장 문제되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유행이란 것으로 통한 상품 또는 사회적 현상이다. 마치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만들거나 또는 사회적 현상이란 조류를 타지 않으면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기 힘들게 만드는 점이다.

 

가령 나 같이 TV를 일체 감상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갈등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류와 상품구매에 눈이 멀게 될 경우 처음에는 그것에 따라잡기 위해 어떻게든 사람들은 몸부림치겠지만,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오는 순간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 채 도태되고 만다. 유행이란 것에 대해 내가 논하면 정말 고급문화는 다른 문화이지만, 고급문화가 아닌 상품이 고급문화로 둔갑한 문화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가방, 시계, 신발, 의상 등과 같이 고정적인 성향이 적은 물품들이 그러하다. 자동차의 경우 1년에 1번 이상 바꾸는 일이 흔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집은 고정적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유동적인 물품일수록 유행의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정신을 거기에 몰두하게 한다. 문화적 유행은 상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미디어적인 현상이며, 그 문화적 현상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스펙타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문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억지로 조장되기도 하나, 이와는 다르게 다른 집단과는 다르게 우월의식 내지 정의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학창시절 일화처럼 시골출신 학생은 도시학생에 비해 소외되고, 모두들로부터 무시당한다.

 

그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시골학생의 소외감과 불합리적인 처우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나,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거나 우월감에 취한 사람들은 서로 단합을 느낀다. 문화적인 구별로서 문화의 벽과 차이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보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에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무의식적인 거부의식은 문화적인 요건으로서 차별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문화는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즉 인간의 문화형성에서 단순히 사회적 현상보다는 그 이면에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 조건이란 것이 상부구조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상부구조인 문화가 하위구조에 영향을 받는 점에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부르디외의 경우 후천적인 불평등이고, 최근에는 후천적인 불편등인 문화적 차별인 선천적인 요소가 근본이 되어 나타난다. 부르디외는 후천적인 조건이나 환경적인 조건이 뒤따라오므로, 인간의 불평등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인종, 민족 등과 같은 선천적 요소가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런 불편한 사회적 현상을 왜 일어나는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이른바 진짜 고급문화를 즐기는 부류에 의해 일어난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하여금 계속 대립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리처드 로티는 현대에 이 유서 깊은 전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클리포드 이어츠의 표현으로) ‘중층기술’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가 민족,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열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정의로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이 옳고 정당한 것만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윤리적 가치로서 철학적 사고로 비판을 하기보단 그저 자신들과 같은 연대적 단체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의 이용은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정보에 유출되어 거기에 매달리는 대중들은 그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문화적 집단의식은 공동체 조직들에서 자주 보이며, 이런 조직들은 때때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대상은 자신들이 배제하고픈 대상으로 하여금 배타적 행위를 보여준다. 그 배타적 행위에 대해 그들은 잘못된 행동이기보단 자신들의 정의와 가치로서 행동한다고 여긴다. 그런 행동을 부추이게 하는 상황은 그들의 의지보단 조장된 정보와 상황이다. 많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강박관념에 벗어나게 하면서 폭력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유행의 시대>에서 이런 말이 등장한다.

 

「가장 강한 의미의 공동체는 사실 자신들의 집단적인 존재의 기본 전제를 찾아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로부터 저항력과 권한을 가졌다는 강한 느낌을 제공하는 동질감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는 보기에 그들 자신을 찾는 사회적 관계를 통계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자신들의 공동체 크기로 줄여 버리고 그것을 기초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은 대부분 강박적인 애국심을 만일의 사태에 대항하거나 포용하는 수단으로 삼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의 차이에서 결국 누군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박탈감을 느낀다면, 결국 그 박탈감을 대체할 존재들이 소외된 자 내지 이방인들이다. 그들의 외적인 요소가 결국 문화적인 이질감을 형성하고, 다문화주의라는 겉치레적인 문화현상에 맛이 들여 상대방의 문화가 그대로 그 문화로 남아주어 자신들의 문화영역에 침범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만약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과격한 폭력과 응징이 시도된다. 가령 과거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여성을 그냥 봤다는 이유로 심하게 린치당하는 일들이 벌여진 것처럼 인간의 문화는 사회적인 요소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여줄 뿐이란 점이다.

 

이런 일들은 계속하여 인간 스스로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투쟁하도록 하여 정작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고급문화를 즐기면서 대중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는 방도는 서로 적을 만들어 싸우게 하여 각자의 정의라는 것이 있다고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인 요소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낭비가 심하고 겉치레가 심한 예술은 많은 농민과 도시사람들 굶주리게 하는데, 그 고통이 가중되는 원인은 누군가 그 재원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의 가치를 두고 미학적 가치보단 단지 자기 과시용 내지 지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폐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고급문화는 진정한 고급적인 미적 기준보다는 고급적인 상품적 가치로부터 나온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한참 지나가는 시대에 예술이란 어느 일정한 선에 지향하기보단 그 선에서 비켜가는 것을 예술적으로 가치를 매긴다. 그것은 우리가 이때가지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을 환기시켜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가격으로서 상품적인 가치만 올려놓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권력을 소유하는 이들의 자만심에 가까울 것이다.

 

<유행의 시대>를 읽으면서 유행과 대중문화보단, 유행의 문화는 그저 목차 중에 하나일 뿐이고, 실제는 다문화주의와 문화우월주의에 따른 폭력적 현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동적이지 못한 것이 오히려 그 사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유로운 사회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가치관이 정립된 사회는 조용한 일상이 아니라 늘 시끄러운 일들이 발발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나기에 그것을 확인함에 따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와 문화현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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