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멋진 신세계>는 중간에 읽다가 잊어버린 듯하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라는 서적에서 나온 문구를 존이 말한 것 같다. 일단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세계3대 디스토피아 중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생각이 났다. 조지 오웰의 소설 풍은 전형적인 전체주의라는 파시스트 정치체계를 비판했다. 특히 관료주의적인 권력자들의 이익이 중시되는 독재정치를 비판하였다. <1984년>은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고, 언론의 정신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언어와 지식은 통제되어 일정한 단어 외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이른바 오세아니아의 언어만이 모든 빅 브라더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빅 브라더!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치 신의 눈처럼 오세아니아의 대륙을 마치 최고의 유토피아인 것처럼 포장한다. 텔레스크린 너머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감청하는 세계에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떻게 보면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자유는 철학부터 시작하여 각종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있다.”와 같이 항상 인간은 자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이란 거대한 세계다. 그 세계 안의 인간은 그저 작고 나약하며 거대한 무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자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소소한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과 더불어 그 대다수의 군중 역시 하나의 개인이기도 하다. 개인은 대다수의 군중이기도 하고 군중은 또 다시 개인 그 자체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낭만주의적 정신은 물질의 만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은 여전히 버릴 수 없다.

 

인간의 자유가 성립해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미 사회에 나온 이상 자기 자신만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속박당해야 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자신의 원하는 길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 보여주고, 그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처럼 계속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과 더불어 그것을 접함에 따른 고독이 서로 대립되어 새로운 유행의 물결에 휘말려간다.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는 이상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보고 듣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판단력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서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행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고, 그것이 없다면 실존적인 자신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의지로서 표현되는 인간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행동이 정말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억지로 주입되어 그것이 하나의 억압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여기는 노예정신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깨닫기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노예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는 고용주조차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본인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하여 정신적 자유를 망각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제 아무리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바스티유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아래로 보내어도 기본적으로 자유라는 것은 나만이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자유가 되지 않고, 모두에게 자유가 가야지 내 자신이 자유롭다고 한다. 자유로운 공간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 자유가 없는 곳에선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만들어진 시기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외국군대가 프랑스로 침입하면서 거기에 대항하던 의용군들이 모이게 되어 만들게 되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인 것을 보여준 사례다. 물론 그 자유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어도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서 그 누구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 행동하기에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자유를 찾는 것은 내가 나로서 행동하고, 그것이 단순히 타인과의 교류를 단절하는 고립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런 자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자와 난자로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하등하고 열등한 엡실론이 나누어져 있다. 그것도 각각의 수정체에서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하고 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생명에 대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상관없는 그 냉혹함에 <멋진 신세계>는 생명윤리에 대한 어긋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작가는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어떤 과학적인 사건을 토대로 작성한지는 모르나, 적어도 과학의 발달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운영에 모든 것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만들어가기보단 그 자신이 하나의 기계처럼 되어 완벽한 사회계급체계를 만든 셈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가 정말 현실적으로 보이고 존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정말 있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신이란 존재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정신적인 환상에 있다는 것조차도 없다. 그 신이란 이름 대신에 포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포드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황제라도 불리는 포드다. 자동차 상표이름을 만든 거부 포드는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입에 빠진 인간이 결국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인간 자체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이 기계가 되어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멋진 신세계>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운동과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제작하여 팔아야 하며, 그 생산과정과 판매과정으로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품 이전의 물체가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듯이, 상품의 등장은 결국 인간의 노동력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은 결국 물질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나, 인간은 스스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적 한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그런 소모품이 아닌 인간이 노동만 하는 소모품으로 처음부터 만들고, 그 소모품들이 여러 공정과 업무를 나누어 계속 유지하게 한다면 그 노동력을 바탕으로 여가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은 상당히 편할 것이다.

 

그런 편한 생활에 빠진 자들은 알파계급, 그 아래 일정지식이 갖춘 자들이 베타계급이다. 알파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무척 똑똑하고 지성적이며, 상시 자극을 주어 자신 안의 충동을 다른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나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가진 리비도(libido)를 자극해서인지 모르나,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무적인 것과 모두가 평화롭기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유토피아고 멋진 신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일 뿐이다. 감마, 델타, 엡실론은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이 모두 같은 얼굴로 떼를 몰려다니며,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만큼 각자가 보이는 행동도 같다. 같은 유전자로 나온 아기들조차 계속 파블로프의 개처럼 끊임없이 조건실험을 시행하여 그 사회의 톱니바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늘 세뇌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세뇌당한 가치관과 사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겨우 어린아이 수준이기 때문에 이성이란 없다. 생명력도 짧기에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다.

 

루소가 <에밀>에서 거론한 것처럼 곡식이 가장 싼 것은 인간들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도시에서 가장 싼 것은 인간의 생명이라 한다. 공장 안에 부품처럼 정확하게 단체로 움직이는 하등계급 인간들은 가장 저렴한 존재다. 누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연하기에 죽음의 고뇌조차 초월해 버렸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도 외모는 전혀 바뀌지 아니하며, 오히려 외모가 바뀌는 일조차도 없다. 그런 세계를 처음 방문은 존의 눈에는 이 완전하게 만들어 버린 곳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 영혼은 없고, 단지 알파의 리비도의 방임적인 태도,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자유로운 섹스를 하여 리비도를 분출한다. 인간의 리비도를 계속 충족하는 것은 인간이 자극적인 쾌락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마라고 불리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 1㎜짜리 알약은 1g을 0.5g으로 나누어 1개 내지 다수를 복용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현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갱단이나 혹은 권태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섹스와 약물에 빠져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섹스와 약물에 찌든 사람은 금방 몸이 망가지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것조차도 권유하기에 문제없이 돌아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항상 완벽해야 하는 <멋진 신세계>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지옥이었다. 존은 자신에게 영혼을 밝혀주는 책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명의 이기심에 빠져들기보단 스스로 쟁기를 잡고 농사하기를 바랐으며, 인간이란 존재가 죄가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등에 채찍을 강하게 내려친다.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성악설에 의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닮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이 있어야 하고, 약물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모두의 두려움이기도 하고 신기한 하나의 자극제이기도 했다. 처음 존의 행동에 모두들 놀라움과 충격에 벗어날 수 없었고, 심지어 존이 혼자 살아가려 할 때조차 그의 폭력적인 행동에 두려워했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행동이 마치 즐거운 쇼로 보였으며, 그가 행동 하나하나 <멋진 신세계>의 재미였다. 심지어 그가 스스로 벌을 주는 고통의 시간마저 촉감영화 소재로 만드니 이것보다 더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없다.

 

존의 사고와 의지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의 영상매체로서 강한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도 처음 촉감영화를 볼 때 입술에 강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 타고 오는 전기적 신호가 인간의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극적인 쾌락과 미디어로 모든 사람들은 길들여져 갔다. 그런 이들과 유일하게 다르고, 이 상황을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은 세계총통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이유는 그 평등한 자 위에 누군가 군림하는 노모스 같은 존재였다. 그도 셰익스피어와 여러 고전을 알고 있었다. 그만이 위험서적을 보유하고 그 지식을 알았지만, 누구에게나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게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곧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은 세계, 아니 그런 단어는 처음부터 실제 존재하더라도 언어적으로 관념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세계다. 인간은 모두 포드님에 의해 포드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하느님이란 신 대신 포드님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 참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계문명을 만든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세계는 결국 문명의 이기심만 남았다. 모든 자연적인 문화는 소멸되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은 야만의 세계가 되어야 했다. 야만과 문명의 사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학 기술력이 발달한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는 곳인가? 아니라면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야만인은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존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기술문명국가가 오히려 더 야만의 세계였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 야만성조차가 하나의 합리성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선 오로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논리만 존재하고 윤리는 사라졌다. 사회질서는 논리적인 것만 추구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논리를 지적하며, 인간이 논리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 논리 속에 윤리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는 윤리는 없다. 인권도 그렇고, 성윤리의식(여성의 성적 억압을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궁이란 생명의 공간을 필요 없는 것으로 보기에 여성성 그 자체도 의미가 없고 단지 성행위를 하기 위한 생체조직으로 되었다)도 그렇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이란 사슬에 묶인 인간은 결국 노예가 되어버린 채 자신의 인생을 기만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은 무병장수하고, 편한 인생을 원한다. 세계총통은 어느 섬에 20,000명의 인간을 보내 살게 했더니 모두 서로 싸우면 결국 반 이상이 죽고, 추후에 지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실험이 된 인간들은 알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만 추구했지, 상대방에 대한 윤리적 의식은 배제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윤리의식이 없이 이성적 능력이 알파 플러스를 그 이상을 보내도 역시 그렇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은 공공의 이익으로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침해받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그 실험에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만 남을 뿐이다. 전체의지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 내지 그 자신과 부합되는 사람들의 이익에 추구했기에 생긴 의지다.

 

그건 우리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과 부당함에 대해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회를 좋게 바꾸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삶을 돌아온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대신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차액만 노리고, 일획천금을 노리거나 어떻게든 남들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게 목적인 야만의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 충돌을 피하고, 모든 것은 경직된 것을 추구하나, 사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곳은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회가 완벽하지 않은 점과 그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단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유토피아라는 환상은 폭력과 통제, 억압이 조건이 되어야 하며, 그 거짓된 혜택은 일부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귀결성이 따른다. 그런 세계에 모두가 자신이란 존재 대신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홉스의 이론(본래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에 비틀어 버린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아라는 것은 이성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되지 않은 세계는 그저 광기조차도 존재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세계이다. 존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있었다는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 책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멋진 신세계>가 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新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마치 <1984년> 마지막에 2+2=5라고 대답하는 스미스로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스미스는 과도한 폭력과 고문으로 정신적인 히스테리로 된 것이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스미스로 되어야 하는 세계가 아닌가 싶다. 미디어와 언론이 과연 우리의 눈을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가? 마치 촉감영화처럼 자극적인 것만 보여주고, 아무런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존이 소마를 마구 버릴 때 델타계급은 모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델타계급 같은 외형적 인간은 없으나 델타계급 인간의 정신은 여기저기 보인다.

 

노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투쟁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기억하여 자신의 현재를 알고 괴로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처럼 보인다. <멋진 신세계>는 단순히 올더스 헉슬리 세계만이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트로츠키, 바쿠닌 등과 같은 혁명가 이름이 나온다. 그들조차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의 이름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 내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나온다. <멋진 신세계>에선 과거에 투쟁하던 이들의 이름을 올리면서도 바꾸지 못한 세상을 말한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SF적인 요건에 전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읽을지도 모른다. 사실 무서운 재해 수준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예술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아주 두렵고 무서우며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다. 그 재앙을 공상소설로 만들어냈다고 하여 그게 단지 스쳐가는 이야기로 흘러가겠지만, 그의 소설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경고를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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