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日立春日 오늘은 봄이 오는 입추 날이나.

 

降雨 아침을 보니 겨울비가 내리구나

 

木蓮花望 나는 목련꽃을 바라고 있으나,

 

冬現連續 긴 겨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네.


적기는 2월 4일에 적었는데, 이제 여기 올림

그런데 우리집은 주택인데 아직 목련꽃이 피지 않음

오늘 날이 너무 추워 딱 맞는 시인듯

하지만 한자로 된 시는 처음 지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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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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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과거에 행적에 대해 문제 삼으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란 바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다. 박종철이란 이름은 한국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처어린 이름이다. 그는 19871월 젊은 나이에 남영동 고문실 안에서 잔인한 고문과 야만적인 시대의 권력 앞에 사라져 갔다. 그의 죽음이 결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6월 항쟁에서 이한열 학생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올해는 6월 항쟁이 발생한지 28주년이 되는 해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거의 30년이 되었고, 30년이면 거의 한 세대가 교체한 시간과 같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히 뭔가 바뀐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단지 고문으로 죽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고문을 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는 점이고, 그들을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사주하거나 또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 후보자 역시 그동안 30년 가까이 그 시대의 흔적들을 남긴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과거란 결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부정해야할 사실이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혹은 부조리한 일들을 외면하거나 또는 사주한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30년 지난 이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현재란 결국 과거 시간의 축척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매우 섬뜩한 작품이다. 2009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6년이 지난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강한 인상을 준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만을 가는 게 목표이던 시절, 부모들의 고생만 하고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가치, 아마 지금의 부모들은 1980년대의 부모보다 내 자식에 대한 욕심은 더 강할 것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부모 밑에 자라 서울로 오고 선배들하고 만나면서 기존에 알던 자신의 가치관과 전혀 다름을 느낀다. 주변 선배들은 선술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울분을 토하고,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열이 올라 99에 멈추다 어느 순간 100로 된다. 그리고 그것은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물의 비열에 맞춘 <100>처럼 어떤 물질이 양적 에너지를 계속 주입하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변증법으로 작용하여 수학적 수치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가해지는 불만과 분노가 바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불이 붙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따랐고, 수많은 청춘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이론적인 영역보단 차라리 직접 보고 느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성적 사고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나, 그 시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다. <100>란 작품은 한국만화에서 덜도 아닌 더도 아닌 그 시대 그 자체를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일상생활 또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인지할 수 없기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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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 작가 전작품들이 다 훌륭하더군요. 더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10 10:0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2014년 행사에서 바로 제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데, 한국만화계에서 국내 대표만화작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죠. 이 분은 만화의 에너지가 억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라 합니다. 본 작품은 바로 그런 느낌이 강하게 실린 작품이죠

AgalmA 2015-02-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장 대중에 밀접한 걸 말하는 작가가 대중 호응도가 떨어지는 게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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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독서모임에 일본에서 유명한 문예작가 등단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류노스케문학상, 그리고 나오키문학상이라 들었다. 한국에서 작가로 따지자면 <날개>를 저술한 이상이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 쪽으로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 딱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오키문학상을 받은 가네시와 카즈키의 <Revolution No.3>를 보면서 뭔가 모르는 동질감 내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Revolution이란 혁명이고, No.3은 세 번째라는 의미로 한국 영화에서 <No.3>가 있듯이 아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며 살아온 별 볼일 없던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세속이 이리하든지 혹은 세견이 저렇게 흘러가든지 No.3들도 사람이고 자신들도 살아갈 권리도 있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반 재미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 삐뚤어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 사회의 모순과 억압, 그리고 문제들이 만들어낸 이방인들이었다. 마지막에 왕국에 나타난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다리를 자르고, 머리로 율동을 하자 목을 베고, 이제 마무리로 눈 커플로 박자를 맞추려고 하나 인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면 살 수 없다. 그렇게 특이한 자들 혹은 이방인들은 이 사회로부터 제거되거나 추방당한다.

왠지 이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나 역시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온 고등학교 친구들 좀비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나름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위치해 있고, 대중이란 문화적인 권력집단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오타쿠라고 한다. 아니 오덕이나 덕후라고 하며, 마치 반사회적 인간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현실과 괴리된 인간으로 마치 신기한 인간인양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거대한 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런 베개를 들고 다니는 어느 사람이 방송미디어의 출현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주류적인 문화를 즐기지 않고 매이처럼 TV 연예방송 프로그램을 본다면 남들과 어제 TV를 보니 1박 2일이 이렇고, 무한도전이 저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volution No.3> 작품 내에서 주인공처럼 나 역시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TV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그만 둔지가 10년이 되어간다. 드라마가 무엇이 유행하는지 가요에서 아이돌스타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방학 2부에 속하던 시기, 주인공이 스토커를 찾아내던 시기, 친구 누나의 친구가 방송국에 취직할 때, 그 누나가 주인공을 의아하게 본 것과 마찬가지다. 반드시 세상에 흐름에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세상은 강요한다. 마치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인간들은 이상한 존재로 낙인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지금 일본 젊은 세대에 대한 의식에 대한 계몽이란 비판적 의식은 없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란 것을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들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주인공은 우수한 학생이나 중학교 2학년 시절, 꽃뱀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나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지가 옛날이라고 한다. 결손가정이나 편부모 게다가 불안한 심리가 그를 우수한 중학생 영재에서 골칫거리 고등학생으로 변하게 했다. 옥상에서 담배피고, 남의 여학교에 가서 소동이나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소동은 생각하면 무엇인가 그들이 틀렸기보단 그들이 틀린 짓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공부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 8%까지의 학교는 아니나, 나는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성적으로 뒤에서 8%보다 높았다. 공부를 못하고, 운동도 못 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한 시기이니 얼마나 보이지 않은 차별을 당했겠는가? 학교수업 시간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은 선생에게 그저 무시대상이고, 그것이 학생들 사이에도 이어진다. 은근히 공부 못 한다고 대 놓고 무시하지 않지만, 뭔가 언저리에 조금 불쾌감이 자리 잡은 것은 있다.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순신이, 그는 다른 것은 참아도 자신의 인종차별을 용서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로서 일본이란 사회의 불평등을 고스란히 자신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놓았다.

인종차별 발언에 눈 옆자리에 새겨진 상처부분이 붉게 변하는 그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고, 항상 독서를 하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입만 살고, 곡학아세로 지식 팔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지켜야할 선도 기준도 명확하게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자신에게 일본사회는 온통 적이었다. 적이 아닌 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주인공처럼 파탄 난 가정, 혼혈인 아기, 오키나와 출신 히로시 같은 애들이다. 하다못해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야마시타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회는 따뜻한 손길을 주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불만만 토로조차 할 수 없던 문제아들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 몰로 선생, 자신의 어머니가 히로시마 원폭 이후 자신을 출산하여 원폭피해 증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 이후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인공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온다. 어른들의 세계에 흔히 말하여 꼰대정신, 내가 살아온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도덕을 논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몰로 선생과 달리 체육선생은 그런 권위적인 의식만 가진 꼰대적인 인간상이다.

왜 문제아들이 문제아로 될 수밖에 없는지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라온 성장배경이 다르니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학생에 대해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몰로 선생에게 진심으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人間이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의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인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가지 배경적 조건이 따른다.

인간이 형성은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태어날 때 다른 종족이라고 사회적인 인식과 수용성에서 열린 사회였다면 그 당사자가 흑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자이든 각가지 사정 따위는 이유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스로 불리는 이 작품 주인공들은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 오직 사회적 규범이 정하는 공부나 또는 이 사회의 세속적 가치만 따르기를 바라는 가치관으로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몰로 선생의 가르침은 큰 충격일 것이다.

가령 열등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우등한 존재나 같은 부류만 모이게 되면 그 사회란 도태된다. 과연 그렇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하여 그들이 진짜 열등한가? 그들의 열등한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후천적인 조건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이란 선천적 조건보단 오히려 후천적 조건으로 더 가중되는 셈이다. 그 사회의 도덕성에서 불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지게 되며, 그 불평등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사회는 정신병자들이 정상인들처럼 돌아다닌다.

마치 이노우에 누나의 친구가 시바키란 대기업 인사부장에게 스토킹 당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바키 같은 인물, 즉 꼰대적인 발상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이 아직도 옳다고 우기는 부류는 우습게도 이 소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혹은 일본 현재나 우리나라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보다 단지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정신병자 내지 사이코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공들은 성화여고를 찾아 간다. 성화여고 축제 때 그들 학교에 침투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자신들에게 돈도 권력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그에 맞춘 여자들과 계속 이어간다. 그렇다면 가지지 못한 남자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여자와 맺어지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의 열등함과 여자들의 우등함을 섞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가능하려면 마음이 통하든지 또는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성화여고 축제 때 좀비들은 좀비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침투를 시도한다. 1년차와 2년차는 실패하고, 3년차에 비로소 성공한다. 그 성공에서 성화여고의 여학생들이 그들을 인정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낭만적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낭만적인 게 단순히 연애적인 요소만 생각하는데, 물론 연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고 어째보면 실패의 아픔도 존재한다. 그래도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 좀비들은 아주 낭만적인 녀석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세견에 대한 도전의식, 그리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상처투성이 영웅, 최근 여자들은 머리가 단단한 꼰대인 체육선생이나 시바키 같은 꼴통 마초들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릎 쓰고 도전하는 남자라면 봐줄 것이라 생각 든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꽃을 찾아가는 것은 나비이지 꽃이 나비로 가지 않는다. 비록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볼품이 없고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단 조건은 아직까지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TV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에 내가 거짓된 낭만에 회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방송으로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낭만적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의 시나리오로 작성된 낭만이고, 자신이 만든 낭만이 아니다.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종종 보이는 스펙타클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스펙타클의 열렬한 추종세력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세론에 빠져가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혁명은 단순 좀비들의 반란만이 아니다. 그 좀비의 반란은 그들의 일상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철두철미하게 침투하는 현실이다. 책에서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작가는 아마 1960년대 말의 일본에서 베트남전쟁 반전운동이나 혹은 야스다강당 사건 것을 인지하는 모양이다.

당시 저항에 대한 의식에서 저런 일들로 인해 뭔가 고민이 있는 청춘이라면 분명 통하는 게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서로 간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경제 고도성장 이후 거품경제 붕괴는 일본 사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빈부격차와 더불어 핵가족화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문제는 단순히 학생운동으로 하기에 뭔가 새로운 사건을 만들 수 없었다. 단지 사회에 대한 부조리나 괴리는 일상에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주인공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은 뭔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바꾸고 싶은 충동이 숨어 있다. 자기의 주변에 사건이 끊이지 않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에 한국영화 중에 한국전쟁부터 시작하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다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웃기는 점은 우리가 고생했으니 미래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금 한국에서 더 심각한 빈부격차로 이어졌다. 전쟁이후 거의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나,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부류는 여전히 많고, 그들은 사라져 간다. 그런 것을 두고 사회적으로 감정소비만 하고 뉴스이슈로 사라질 뿐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하면 아등바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보내는 우리 역시 그런 원인자인데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Revolution No.3>의 주인공들 수준까지 비주류는 아니나 그래도 비주류로 살아왔고, 지금도 비주류적인 요소가 있다. 꼴통학교의 순신이가 <논어> 같이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서적들을 보는데, 나 역시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같은 것을 읽고 있다. 세견에 따라 몸 사리는 것엔 어쩔 수 없으나, 거기에 놀아나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차라리 특이영역을 가져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자신이란 실존적 영역을 찾아가는 게 바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존주의 하니 어느 영화에서 등장한 사람이름이 생각난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진 어느 대학생의 마지막 비명처럼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꼰대들의 세상에 살아야 하는 것일까? 결과론적으로 현실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그 모순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꼰대들은 여전히 딴청을 피운다. 이런 사회에 <Revolution No.3>은 소설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보단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을 유도한다. Revolution은 만드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사고 자체를 Revolution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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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일상적인 소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은 장 자크 루소의 대표적인 서적인 <인간불평등기원론>에 가지고 온 내용이다.


조잡하고 치켜세우는 데 넘어가기 잘 하는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는이런 연설과 비슷한 것조차 필요치 않을 정도였다특히 그들은 서로 해결 지을 사건이 너무 많아 중계자 없이는 안 되었고또 강한 욕망과 야심이 지나치게 많아 오랫동안 주인 없이는 안 되었던 것이다누구나 자기의 자유를 확보할 작정으로 자기를 얽어맬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제도의 이익을 느낄만한 이성은 가지고 있었지만그 위험을 내다볼 만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그 폐해를 가장 잘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이었다그리고 현명한 자들까지마치 부상자가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 버리는 것처럼 자기네들의 자유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그리고 단 하나의 사회에 대한 성립이 어떻게 모든 사회의 성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했는가또 단결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스스로도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사회는 급속히 증가하고 넓어져마침내는 지구의 전 표면을 덮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대해 잘 모르고, 알아도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 이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익, 생각하면 간단하다. 내가 어느 집을 샀는데, 거기가 언젠가 교통이 좋아지거나 혹은 주변에 상업시설이 도래하여 땅값이 크게 오른다. 그래서 미리 구매하여 다른 곳은 산다. 또 새로이 구매한 곳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물가는 오르고, 살기는 어려워지며, 세금도 부담스럽다.


이런 과정은 보통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현명한 것처럼 땅이나 부동산으로 통한 이익을 자랑스레 생각한다. 물론 자신보다 자본력이 우월한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것은 알고 있지만, 당장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선택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특히 아이라는 미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인 동물과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한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예상할 수 있는 시간적 인지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시간은 본능에 의한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당장 자신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본능적인 행동이다. 이성적인 영역으로 시간적 판단력이란 없다. 시간의 인지능력으로 우리는 결국 자본에 대한 투자도 가능하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마치 거대한 단지와 빌딩이 자리잡는다는 판단은 우리의 시간과 더불어 공간적 이미지로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이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집 값이 오르면 주변 상점은 물가가 오른다. 상점의 부동산적인 요소와 가구 및 인테리어 소품들은 기본적으로 불변자본, 한 번 구매하면 반영구적으로 이용한다. 물론 건물이나 가구 등에 대한 보수유지가 필요하나, 특이한 일이 없다면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용된다. 문제는 음식재료와 같은 소모성 유동적인 요소는 모르나, 기본적으로 가변자본 즉 인건비에 의한 요소 역시 물가에 비례한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왜 물가가 비싼지를 생각하면 불변자본에 의한 상품구매비가 올라가고, 그 이유는 부동산의 증가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 인건비도 올라가게 된다. 자신들이 이용하는 상점가게를 운영하는 점장 및 관리자,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그들의 월급이 어느 정도 충분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상점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 물가가 비싼 이유는 국가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그 계기를 만든 것은 각자의 개별적인 사사로운 이익추구, 즉 장 자크 루소가 말하는 <전체의지>로부터다. 게다가 사람들은 교육을 생각하여 학교나 학원을 골라 생각하는데, 학교가 생길려면 먼저 부지를 구매한다. 최근에 도시개발사업에선 기부채납으로 단지조성 시 학교부지를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한다고 하나, 그 비용의 전제가 사업자에겐 하나의 자본지출이다. 따라서 그 학교부지 내지 공공부지 역시 자신들의 수지계산에 집어 넣는다.


학원과 같은 경우 여기 역시 건물에 임대해야 하는데, 집값이 비싼 곳은 임대료가 비싸다. 그런 만큼 학원수강료가 올라간다. 그러면 일반 주민들은 아이들 학원비가 비싸서 고민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물론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작 자신도 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땅값에 의한 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을 아쉬워 하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안타까워 보겠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누가 더 안타까워 해야할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자신에 의한 차익을 보겠으나 먼 미래 자신의 후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이가 1명이 아닌 2명 이상이라면 모두 커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식들은 잘 사는 집에 보낸다고 하는 계획도 좋지만, 그 상대방이 마음에 드는지 혹은 그 상대방의 가족들이 마음에 들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개인적 이익이 합계인 전체의지가 만연한 사회에서 결국 당장은 손해보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먼 미래는 더한 손해들이 닥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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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 붕괴한던 이스터섬 같아요.부족장은 더 높은 석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 하고, 부족민들은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카니발리즘까지 이르죠.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사고도 그렇고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사건도 많아지는게 이스터 섬이 떠오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04 23:31   좋아요 0 | URL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이스타섬의 멸망은 나무를 베어 결국 숲생태계가 없어져 맑은 물과 원목을 엎을 수 없고, 단백질 공급처인 동물들조차 숲이 없어 멸종하니 그야말로 최후의 카니발리즘, 식인축제죠.
우리는 먹는 것도 풍부한데, 사람들은 먹는 것보다 자본에 대해 카니발리즘을 하죠. 자본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으니 말이죠. 패배자들은 계속 분노사회로 이어지고, 폭력이 일어나고, <에밀>처럼 목을 매달 사람은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자인데, 오히려 그런 자들이 큰 소리를 뻥뻥치니...코미디입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2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권을 이어 2권을 읽어보았다. 1권에선 신선하고 상당히 리얼리티한 요소가 반영되어 일반적인 라이트노벨과 다르다는 점이 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2권은 약간 설정이 조금 현실성을 고려했지만, 상황전개는 비현실로 가게 되었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경소설로서 재미 내지 오락을 제공하나 작품 배경이 현대 일본이라면 현대적인 요소가 당연히 반영된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인공 타카시, 그러나 그 주변에 포진한 여자 인물들이 비현실적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게 특성이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상당량의 수명을 소모한 뒤로 17세가 되고, 할머니가 죽기 전에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17세 되었다. 유카는 집에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고, 타카시의 여자친구인 메이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새어머니가 17교에 의탁한 여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권에서 17세의 타카시가 17세의 어머니, 할머니, 여자친구와 조우하게 된다. 바로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인간의 나이 17세가 과연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를 다룬다.


1권보다 2권에서 그런 점이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는 것은 타카시 자체는 현실적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나 주변인물들의 비현실적 상황과 현실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다. 유카의 방에 들어간 타카시는 유카가 다른 여자아이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나, 유카의 방이 어지러운 모습에서 쌓아둔 책 사이에 여동생과 오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온 것이다. 유카가 바로 친오빠인 타카시에 대한 오빠 여동생의 관계 이상으로 오빠를 원하는 것이 보인다.


1권에서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타카시에게 충고를 해준 내용이 있다. 만약 타카시의 성욕이 주체하지 못하여 그것이 유카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면 그것을 여동생이 아니라 본인인 어머니에게 해달라는 부분이다. 물론 타카시는 그럴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작품 내에서 여동생 유카는 분명 타카시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점이다. 타카시에게 어린 시절 희미하게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유카에게 아버지의 기억이란 없다. 추억이 없는 것에서 유카에게 아버지는 단지 있었다고 여긴 인물이지 그 이상으로 다가올 수 없다.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고, 타카시의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할머니 와카바의 허전한 마음하고 유카가 느끼는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유카에게 타카시는 오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빠같은 인물이다. 타카시는 여전히 1권부터 그랬던 것처럼 2권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시 17세로 되어 아이도로 활동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이유는 가정형편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즈미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현실적인 경제문제부터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현실적인 상황전개가 이 작품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2권에서 어머니의 소속사 변경, 그리고 메이코가 그동안 계속 사이가 나쁜 새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사연은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이른바 문학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cliche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17세의 줄리아는 예전에 메이코의 아버지와 사랑하던 연인 사이다. 하지만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로 인해 비극적으로 이별한다.


메이코의 어머니가 죽고, 줄리아의 회사가 망해 다시 찾아온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회한, 그런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 태어나던 줄리아, 1권에서 메이코의 시선이 2권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선이 드러난 것이다. 비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상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결한 점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타카시가 보인 결단력과 행동은 작품 전개상 제목은 어머니가 메인으로 나오나, 어머니라는 명칭은 결국 카즈미가 어머니이기 위해 그 어머니로서 성립되어야 할 대상이 타카시다.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17세가 된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타카시로 시작하여 타카시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범한 모습에서 주변 상황은 비현실과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의 현실성과 타인이 비현실성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관계에서 상황정리는 너무 아깝다고 할까? 물론 타카시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적 조건, 가정환경과 가족관계, 더구나 메이코의 상황은 그에게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시선으로 보기보단 가족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1권 리뷰 때도 생각했지만, 가족의 파편화와 재결집이란 모티브는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현실에 대한 관찰은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조건 그 자체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상황적인 요소로 보이는 것으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분명 비현실적인 상황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르 전개하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나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타카시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인간의 마음은 어느 특별한 문화권이 아닌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17세 때 아버지와 사랑의 도피를 한 어머니, 17세 때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 그들의 17세는 지금 타카시의 17세와 다르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은 분명 비현실적일지라도, 타카시가 살아가고 있는 17세의 현실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나, 2권에서 보이는 것은 당신의 17세는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했었는가? 라는 것이다. 타카시가 바라본 17세라는 시기란 사랑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연인과 가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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