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영화로 국내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어 <변호인그리고 <소수의견>이란 작품이 나왔다. <부러진 화살>의 경우오판심리로 인해 수학교수의 투쟁을 다룬 것을 본다면 <부러진 화살>은 어느 개인과 권력을 가진 자의 대립구조로 이어져 있다이에 반해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이건 어느 개인이 권력을 잡은 자를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단의 개인이 국가권력 앞에 대항해야 하는 점이다. 3작품은 이렇게 하여 서로 갈림길 처음 나뉜다그리고 <변호인>과 <소수의견>은 자본과 권력의 관계에서 나누어진다군사독재 정권시절에 자본은 권력에 아첨을 했다하지만 이제는 권력이 자본 아래 결합하여 정경유차이란 관료주의적 유착관계로 이어진다.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는 곳에 반드시 권력의 입김이 작동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경제적 이익으로 공권력이 오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다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경제적 이익이 난점으로 올라와 국가권력의 이념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작품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어느 누군가의 사주로서 이루어진다그 사주자는 바로 국가권력과 연계한 자본의 손길이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노동자가 서로를 위해 일을 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그것은 곧 국가의 부로 이어지는데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으로 얻어지는 이윤과 그 노동력을 제공한 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그리고 부동산의 지대다그런데 사실 경제적 현상에서 국내 정황을 보면 과장 돈 벌기가 수월한 것은 부동산의 지대다지대로서 부동산 임대료로 먹고 산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들일 이유도누구를 고용할 이유도 없다그저 건물을 신축하여 그 건물을 팔거나 임대하는 순간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 한다대한민국에서 부동산투기가 과잉으로 이루어지고건물임대로 또는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대부분의 현명하다고 여기는 국민으로 제 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점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거나 혹은 타인의 이익에 현혹되어 부러워하기만 한다이것은 현실적인 문제다어느 주택지역에 재개발이 들려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값이 오른 것에 환영을 했다그런데 그 곳은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가 있던 곳이 아니라 주택 단위가 있었던 주거지역이었다주택은 아파트보단 가격이 낮으며보상비가 적다게다가 공시지가도 낮기 때문에 아무리 땅값이 올라도 그 돈을 받고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살만한 곳이 없다자신의 집을 팔아도 다른 집을 살 수 없었고오히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도장찍어줄 때 순간이 더 나은 상황이란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 주택재개발사업 시 개발구역 주민들은 임시적으로 다른 곳에 살다가 아파트가 완공되면 그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점점 그럴 기회는 잃게 되었다설사 아파트에 살아도 철거예정인 아파트의 매각가격과 그 자리에 올라앉은 아파트의 가격은 사실상 1 = X가 아니라 1 < X이었다문제는 그 X라는 가격이 과연 얼마나 올라가는가에서 시작된다게다가 상가지역에 임대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상가건물 주인이 그 건물을 매각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무척이나 곤란해진다세상은 인간의 인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손실관계를 보고 움직인다.

 

문제의 여기서 시작한다자기 집을 팔아도 갈 곳이 없거나임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덕분에 생긴 비극이 용산참사고그 소재로 만든 영화가 <두 개의 문>이다진압으로 온 경찰관과 안에서 시위하던 철거민들의 생사가 갈린 투쟁에서 결국 화재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희생된다과연 그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헌법에서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지만막상 생존권보단 개인의 재산권을 우선 시하는 게 대한민국이란 나라다생존에 위협받게 되는 순간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의해 날카롭게 반응하고만약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면 이성이 잃어버리고난폭한 맹수가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모순관계에서 생긴 현상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영화는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 계열이 아니라면 실제가 아니 허구의 이야기를 만든 영상서사다하지만 이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인물과 어느 상황적 배경 자체만 허구이지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현실과 같다하지만 우리는 저 현실에 대해 잘은 모르고언론미디어에서는 대중에게 특정 정보만 제공한다현실에서 일어나도 그게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알 수가 없다.우리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지 않은 일은 오로지 미디어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소수의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진압과정이다용역으로 이루어진 깡패집단과 그들과 같이 철거민들을 제압하는 경찰은 서로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어느 특정시기에 진압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무리한 작전을 시작한다이때 철거민인 박재호는 아들 신우가 오는 것을 보고경찰진압으로 아이가 다칠 것을 걱정하여 방 안 은신처에 숨기게 한다그때 박재호에게 다가온 의경 2의경 중 한 사람인 김희경은 박재호가 밀어뜨린 가구에 의해 넘어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박재호의 죄목은 공무방해치사죄다공무집행 중인 의경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그를 살해한 이유다인간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은 매우 큰 죄에 해당된다그러나 죄인인 박재호는 오히려 무죄를 외치며 그 당시 상황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재호의 아들이 병원응급실에 운송 중 사망했는데그 원인은 낙하에 의한 추락사였다하지만 박재호는 아들의 죽음이 추락사가 아니라 과잉진압이라고 말한다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꼬이고 흔들리게 된다물론 영화를 보면 충분히 알고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 박재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된다단순히 플롯으로서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관계만이 전부가 아니라이 영화에서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가 박재호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세상이 바뀌었다고 봤지만 결국 크게 바뀌지 않은 것 역시 말해주고 있다작품에서 윤진원 변호사는 지방대학 출신의 변호사다.

 

그는 지방이란 이유로 무시당하고어디 크게 좋은 자리도 못 간 채 국선변호사로 2년차 살아간다그 옆에는 윤변호사의 SM520와 비교되는 BMW를 몰고 다니는 이혼전문 변호사 장대석이 등장한다그는 과거 80년대 아마 서울대 법대생으로 데모시위를 했었고용의자로 수배되어 우연히 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윤진원을 만나 그에게 공부를 가르친다하지만 결국 잡혀 들어가고군에 가게 되었으며자신과 같이 시위하면 사귄 여자는 다른 놈과 결혼했다면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여준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과거를 후회해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마지막까지 이길 수 없는 재판에 끝까지 조력하던 장변호사는 속물적 시대에 살아가는 무리 중에 남은 인간미를 찾을 수 있었다.

 

<부러진 화살>, <변호인>, <소수의견>은 모두 변호사가 인정받지 못하고검사들과 권력들의 집단으로부터 모진 견제를 받는다이기지도 못할 싸움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에 인간의 고뇌가 보인다특히<소수의견>과 같은 경우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낭만주의 내지 휴머니즘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계에 신이란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 신은 분명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전지전능한 능력과 그들을 숭배하는 엘리트의 솜씨로 신은 불가시적인 존재로 작품으로 등장한다그리고 그 신은 그들의 기도에 감응하여 철거를 강제로 시키고,경찰청에 압력을 가하며살인현장의 검증조차 제거한다.

 

헌법체계와 그 밖에 수많은 법률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며인간이란 모두 법 아래에 존재해야만 민주주의국가이나어느 누구는 법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법 위에 군림하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알아서 그들의 숭배자들이 움직여준다그 대표자가 홍재덕 검사다홍재덕 검사는 의경 하나가 죽고 시위자 아들이 죽은 현장을 존치해야 하나오히려 용역업체와 짜고 그 흔적을 지운다그 이유는 시위진압 중 과잉진압으로 민간인 그것도 미성년자를 살해한 게 작전의 실수였기 때문이다만약 그 사실을 알려지면 철거과정의 과잉대응과 미성년자의 살해로 철거의 본질을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박경철 의원은 그 이유를 잘 알려준다그 자리에 돈을 투자한 투자가들이 일정기간 안에 철거가 시작되지 않으면 투자 금을 회수하고그 사업자는 그동안 투자받은 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은행대출금의 이자와 이로 인한 손해부담이 막강했던 점이다결국 자본은 권력을 동원하고권력은 관료주의로서 움직였다관료주의는 학벌과 출신으로 이어졌고박변호사는 지방대학이란 이유로 멸시 당한다심지어 신우와 의경이 병원에 올 때 그들을 응급실에서 진찰한 의사마저 연세대 출신이란 점에서 법정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여검사의 모습도 나온다법의학자인 검시관은 서울대 출신이란 이유로 정형외과 전문의 소견을 깔아뭉개는 현실이 드러난다.

 

학벌주의와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물론 학력으로서 좋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하나양심과 윤리가 없는 엘리트들이 다수 양성되면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진다.재판에서 패해도검사의 옷을 벗겨내지만검사는 국내 최고의 법무법인인 광평에 들어간다전관예우에 고액의 연봉으로 검사보다 못한 권력이라도 자본과의 유착관계는 여전하다올바른 양심보다 권력과 지위 앞에서 꼰대로서 내세우는 그는 윤변호사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사람은 희생당하는 자,국가에 봉사하는 자가 있는데자기는 국가에 봉사했는데윤변호사는 도대체 무얼 했냐고 묻는다.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우리 관객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겠지만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영화는 리얼리즘으로 이루어진 허구이지만허구로 만들어졌기에 현실에서 말할 수가 없는 진실을 허구인척 보여줄 수 있다재판과정에서 계속 불리한 상황만 처해지고검찰은 증인조차 빼돌리려고 한다실제 그럴 일이 일어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으나권력자들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거나 눈에 가시거리가 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친다는 점이다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모든 희생자와 그 희생자조차 진압해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옆에 있는 서민들이란 점이다.

 

박재호와 신우는 가난한 소시민이고김의경 역시 가난한 아버지와 살아가는 사람이다가난한 집안 살림을 생각하여 의경에 가면 추후 경찰시험에 가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군복무로 대체하나 변을 당한다처음에 박재호와 윤변호사를 증오로 바라보던 김의경의 아버지는 박재호의 사연과 모습을 보고 흔들리기 시작한다자신의 아들이 남을 죽일 리가 없는데그 누구보다 착하고 좋은 아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박재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이지만박재호 입장에서 김의경은 자신의 아들을 눈앞에서 죽인 원수다하지만 그 아들들은 모두 세상에 없고아들 잃은 나약한 아버지만 있다.

 

자신의 삶을 모조리 잃어버린 두 아버지는 한 사람은 죄인이 되어 한 사람은 희생자가 되어 눈물로서 설움을 토해낸다과연 이 두 사람에게 왜 절망을 안겨줘야 했는지왜 박재호가 죄인이 되어야 했는가김의경은 신우를 무참하게 폭행하고김의경은 박재호가 내려친 쇠파이프를 맞고 의식을 잃는다.박재호는 아들을 품에 안고김의경은 동료의경의 품에 안겨 서로 눈물과 절규를 외친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영화는 진압에 투입된 의경도 건물에서 시위 중인 철거민도 모두 죄인이 아니라 희생자라고 말한다그러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철거민과 의경그들은 서로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러운 악마의 얼굴을 바라보듯이 증오한다하지만 알고 보면 소시민으로 살아오던 철거민그런 철거민 앞에서 본래 일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의경이 둘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저 힘없이 살아가야 하던 소시민들이었다그러나 이때까지도 이제부터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누군가의 떠밀림으로 증오와 분노로서 싸우고 있다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라며자신들이 받는 온갖 특혜를 누리고 살아간다그리고 그들은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자가 필요하다고 한다그 희생자란 누구란 말인가? <소수의견>에서 바로 그 소수자들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국민이란 점을 말해준다.

 

처음에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지지 않겠지만어느 순간 그 상황에 도래한다는 점이다영화라는 허구적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소수의견>은 현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고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무관한 것으로 볼 것이다그러나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그 순간 자신은 대다수로부터 격리되어 소수자로 된다. <소수의견>은 바로 그런 점에서 무거운 영화다영화는 이길 수가 없는 거인을 상대로 계속 덤벼드는 인간을 보여준다.

 

이길 수 없어도 싸우고 또 싸우는 이유는 왜 그럴까윤변호사가 사회적으로 상류집단이 변호사에 속해 있어도 그 안에서 그는 차별을 당한다차별에 의한 불만에서 윤변호사는 박재호라는 인간을 단지 피의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소수약자로서 동질감으로 뭉친다상대에게 이기지 못했지만결국 윤변호사는 자신의 양심과 삶의 가치에서 승리한다우리는 삶의 승리란 과연 어떤 길인가영화에서 카메라 관점은 피해자를 변호하는 윤변호사의 관점으로 움직인다현실 언론미디어의 카메라는 윤변호사가 아니라 윤변호사 반대의 관점으로 움직인다이 거짓 같은 현실과 허구로서 사실 같은 영화에서 판단은 관객의 몫이고그 판단을 할 기회가 영화감상이라면영화감상조차 관객의 몫이다과연 그 책임은 어떻게 풀어 가야할까알아두어야 할 점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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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다. 스펙타클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그 자체로서만 스펙타클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된 것이라고 하여도 이미지는 가상의 영상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적 요소로도 드러낸다. 스펙타클의 발생범주는 단순히 이미지 영상매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에 크게 미친다. 스펙타클의 영향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성으로 가득한 TV, 라디오, 영화, PC, 핸드폰 등의 매체로 영향을 받는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정보과잉은 인간에게 주어진 정보 이상의 혼란을 준다. 미디어의 발달은 결국 그 미디어의 주인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결정된다. 미디어란 자본력이란 경제와 사회적 영향을 주는 정치적 입장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미디어를 통제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배자란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돋보이기 위해 미디어의 영향을 따라 더 가속화시킨다.

 

가령 어느 영화에서 나온 상품이나 이미지를 보고 구매하거나 따라하며, 어느 특정 장소에 몰두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미디어의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스펙타클은 언제나 일정한 모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대체된다. 물론 그 근본적인 스펙타클적인 요소는 항상 동일한 규칙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보이는 매체적인 콘텐츠는 늘 바뀐다. 즉 사라지는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것은 새로운 상품소비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인간에게 지나친 미디어의 간섭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정지시킨다.

 

영상 안의 주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비판적 요소를 끌어 올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 상황만 전개해놓고 거기에 반대되는 의견을 무시하려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런 정보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입장을 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면 될수록 자신의 발언을 포기한다. 포기라는 의미는 자신이 정말 추구해야할 가치이며, 그 가치 대신 미디어로 전파되는 스펙타클로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런 스펙타클에 저지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대략 7


시간 내외를 수면으로 보낸다.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인 시간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인간이 수면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식사, 세면 등과 같은 생리적 행위를 빼면 15시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란 얼마인가? 학교에서 학생은 수업을 받고,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근무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여유시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을까? 거의 남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가 집에 오면 여유시간은 4시간 내외다. 4시간 동안 인간들은 취미생활과 자기계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영향, 스펙타클적인 관계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많은 인간들은 자신만의 시간, 그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배제되기 보단, TV와 PC로 통해 살아간다. 자신이 선택하는 콘텐츠보단 자신에게 주어진 콘텐츠만 소비한다. 이 시간은 휴식시간이라 여기겠지만, 그 시간조차 노동이다. 왜냐하면 TV에서 수많은 상품이 광고되며, 그 시청시간은 기업에 대해서는 이윤을 증대한다. 자신에게 이윤이 도달하지 않고,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상품을 직접적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상품을 간접적으로 구매하는 셈이다.

 

그런 관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미디어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의해 생활양식이 완결되는 셈이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지루하게 흘러간다. 시간이 남아도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체계가 이미 자신에 의해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의 거대한 틀에 빠져있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애초부터 스펙타클 자체를 해체할 수 있어도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 인간에게 스펙타클의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위해서는 통신과 전화가 두절되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루소의 말대로 곰과 같이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자신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 어떤 계기이고, 그것은 충격이다.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기존 생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 이전 탄생하여 근대시대에 무섭게 성장하여 현대에서 예술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도 멀기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단어가 되었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가 제기한 예술은 이미 부르주아 시대로 흘러가는 18세기 프랑스처럼 예술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토대로 탄생하는 물질적(영화와 음악이 저장되는 시기가 아니므로) 혹은 시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루소가 생각하는 예술성에서 그는 피아노 하나에 혼자 또는 다수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영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웅장한 오페라 곡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고급문화로서 지배계층의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루소가 보던 시기에 연극조차 마찬가지다. 가령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배고픈 프랑스 파리의 비참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 불쌍한 시민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보던 후대사람들은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고 감동하나, 문제는 그 감동은 극장 내부에서 끝나고 밖에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예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새로운 감정과 사고 그리고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대중이 아무리 그런 예술을 접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강연을 하시는 교수님은 문학적인 요소 즉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예술이 필요한가? 인간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고 비겁한 모습이 많다. 자신은 남에게 좋은 인간이고 싶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런 이중적 잣대가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뭉치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가 탄생한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피해가 가면 그 누구든지 단결하여 과다한 응징과 처벌이 이루어진다. 양심의 가책보단 다수라는 제도적 이익에 치중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자신의 계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계몽적 요소를 마주하기 어렵다. 대부분 대중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부당한 일에 휘말릴 경우가 적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상황이 만약 온다면?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결국 우리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에 의거하여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철학의 시작은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었다. 물리학에서 물리적 존재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연구한 것이 철학에서 많은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보단 눈에 보이나 그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윤리학은 철학에서 제1의 학문이 되었고,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과 억압에 대해 탐구가 시작된다. 문학과 예술로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감성과 공감능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성적 판단이다. 인간의 논리보단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 앞서는 것이라면 인간의 감정이 어떤 것이냐 따라 논리적 판단력조차 달라진다. 논리에서 윤리적 요소가 선행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정한 논리가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흐름과 대세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적 요소가 바르지 못할 경우가 상당하다.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흐름에서 새로운 물꼬를 틀게 하는 샘물과 같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그 시대의 흐름에 빠져 그 자체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매우 어렵다. 인문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그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보아온 것들과 전혀 다른 세계를 주어지므로 낯설고 어려우며 때로는 혐오감까지 들 수 있다. 예술은 단순히 미술,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등이 아니다. 예술은 그런 매개체로 통해 전달될 뿐이다. 그 어떤 경로로 오던지 그 매체로 통해 자신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없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술이 너무 낯설게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주지 않으면 관객들은 재미없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느낀다. 영화에서 이미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일정부분 만족하지 않을 경우 배신감을 느낀다. 이게 대부분 관객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예술작품들은 오히려 외면당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라는 집단심리는 그 외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제외시킨다. 대중에게 물론 효과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비꼬거나 지적하는 콘텐츠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쉽게 접근해도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매체를 감상함에 있어서 전후맥락 관계 등을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를 지적하는지 알려면 그 방법자체가 막막하다. 이미 길들어진 현상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예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예술 대신 대중문화라는 소비로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적 틀을 구축한다. 인간의 틀을 깨어도 다른 틀이 존재하고, 다시 그 틀을 해체되어도 또 다른 틀에 봉착된다. 그러나 틀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느 특정 부문에 몰입하기보단 우리 인간이 사회적 관계로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다. 사회성의 포기는 말 그대로 숲에서 곰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찾아야한다. 대중에 대한 인문학에서 인문학 그 자체가 대중의 옆으로 갈 수 있어도 대중의 시선으로 하락할 수 없다. 대중의 관점 그 자체가 사유의 해답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모순이 되풀이되는 현상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소외되는 세상을 방치할 수만은 없다. 예술은 인간에게 기존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가? 같은 말이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이유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다. 즐거움을 찾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고,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그 존재적 대상으로 한정적으로 살아간다. 윤회를 하던 혹은 저승에 또 다른 삶이 있든 또는 동물적인 죽음으로 이 세상에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기회가 1번뿐이다. 단 하나의 인생을 고통과 절망에 의해 살아간다면, 혹은 그런 세상에 놓여있어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매우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술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만 충족이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정이란 마음이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들은 차가운 냉소와 이기심으로 팽배하여 있다. 물론 나 역시 다소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회의적인 관점이 다분하다. 즉 나는 내 인생관이 절대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것을 넘어 부정적 시야가 강하다. 예술은 물론 행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줄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 고뇌와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마지막 인생 끝 지점에 내 인생에 대한 후회는 있는가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여 미신과 광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고, 판단이다. 자신의 인생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타인과는 어떤 이미지의 매개로서 만나기보단 자신들의 의지와 사유로서 만나 서로 소통을 한다면 외로움의 고립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독이란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주지 않은 것이란 눈앞에 태양의 빛이 있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의 절망이다. 왜 예술인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 누구의 강요나 눈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물론 타인의 인식과 배려는 소중하다. 이미지로 꾸며진 관계란 지속될 수 없다. 늘 새로운 스펙타클이 기존의 스펙타클을 밀어내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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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2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장 자크 루소의 <고백> 2권을 읽으면서, 1권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이라면 이제 시작된 2권은 루소가 세상에 비로소 드러내는 시기다. 1권의 루소는 바랑부인의 만남 그리고 어린 시절의 방황 등이 주요 이야기다. 루소가 바랑부인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음악에 열중하고, 그녀에게 빠졌으나, 이내 루소를 대신할 근육질의 남자가 바랑의 애인이 되어주었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누구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은 루소로서는 바랑부인에 대한 집착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교감이란 한 쪽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양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한 쪽은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는 불편함에 불과하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떠난 후에 파리와 프랑스를 돌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스페인의 대사관에서 일하기도 한다. 루소의 성격을 보자면 소심하나 자신의 양심적 틀에 벗어나면 참을 수 없는 성격이다. 그 성격이기에 남들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기도 하나, 다른 사람들이 루소에게 함부로 대하는 순간 루소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성격에 의한 결벽증으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우애를 보이면서도 그에 대한 배신을 느끼며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루소는 제 아무리 예전에 친한 자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위협하더라도 그들을 모함하거나 위협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고난으로 인해 그 고난의 출처에 대한 복수나 음모를 꾸미지 않은 점이다. 그가 계속 박해를 받는 이유는 루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그 다른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루소의 가장 좋은 부분은 가장 최악의 부분이다. 그의 수줍고 양심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에게 2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믿을 수 있고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는 그런 성격을 이용하여 이용해 먹거나 음모에 빠뜨리는 경우다. 인간의 사회는 온통 부조리만 가득한 이유는 인간의 문명이 바르지 못함이다.

 

왜 루소가 디종 아카데미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2번째 논문인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했을까? 인간사회에 보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로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모습만 가득하다. 길가에 널린 불우하고 가난한 이들은 구걸과 좀도둑질로 하루를 연명하다 어느 순간 죄인으로 사로잡혀 형틀에 묶여 팔다리가 부러지는 비참한 죽음을 루소는 아주 강렬한 감정으로 담는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사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불우한 현실을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승냥이 같은 모습으로 남들을 공격한다. 나보다 약한 자들, 혹은 공격하기 좋은 자들을 말이다. 루소가 박해를 피해 온 섬에 주민들은 돌팔매질을 했고, 그 돌들은 유리창을 깨고, 벽을 부수었고, 루소의 눈 옆을 지나갈 정도로 흉폭했다.

 

그 현장을 보러 온 담당 관리는 이 장경을 보고 마치 채석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대낮에 산책하는 루소를 보고 돌을 던지고, 총을 가지고 와서 죽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라면 루소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다. 그가 운명의 비극에 빠진 것은 무엇이 시작인가? 루소는 <고백>을 1764년에 시작하여 1770년에 완성한다. <고백>을 완성한 시점에서 그가 그 책을 낭송하는 것조차 예전 친구들은 반대한다. 데피네 부인은 루소와 친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최고로 그를 억압하는 사람이 되었고, <고백> 최종본이 나온 다음해 1771년 낭송을 금지하도록 경찰에 요청했다.

 

루소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바로 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인망과 질투에서 시작된 것이다. 루소는 상당히 천재적인 인물이다. 음악에 조예가 없다가 그가 만든 <마을의 점쟁이>는 아직까지 음악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음악이다. 그런데 그 음악을 만든 것을 주변에서 시기하고, 극장의 주인은 루소의 자유 입장권을 몰수하고, 게다가 그 저작권마저 가로챘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으로 루소는 이때까지 손대지 못할 정도로 금전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명성만큼 주변에 귀찮은 인간들만 생겼다. 루소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을 넓히지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이기에 그가 느끼는 인간의 첫인상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모습은 대부분 좋은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그를 속이는 인간도 만들었다. 인간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주변 인간들을 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사회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주변 인물의 영향에 의해 바뀌기 때문이다. 루소의 가장 장단점은 남에게 거짓으로 아부를 하지 않는다. 누구를 억지로 찬양하거나 누구를 억지로 내려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다른 사람의 호의조차 거부하는 일도 많다.

 

권력자의 눈에 루소가 하는 행동은 건방진 짓이며, 라이벌이나 먼 곳에서 시기하는 사람에게 보기엔 오만한 짓이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바보 같은 짓이다. 루소가 처세술에 빈약했기에 오직 그만의 정신적 가치로서 행동했기에 <고백>이 나온 것이다. <고백>을 보면 루소가 모두 다 잘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저지른 실수도 있고 과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루소가 저지르든,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가 적이 된 디드로조차도 인간이란 점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스스로가 인정하기 어렵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그런 지적을 하게 되는 순간, 상대방의 충고와 조언을 듣기보단 난폭한 비난과 비방으로 거부할 때가 많다. 루소의 현실적 처세술은 거의 낙점이다. 그러나 <고백>에서 나오는 그만의 처세술은 엄청난 수준이다. 그는 현실에서 처세술을 사용한 게 아니라 미래의 독자에게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자신이 죽은 뒤에 보게 될 사람들을 말이다. 루소는 자신이 병약한 점에서 언제 병으로 쓰러질지 모른다고 여겼고, 게다가 박해를 가하는 정도가 심각하여 살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은 자의 명예를 죽은 자가 살릴 수 없다. 오직 그 명예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백>은 바로 그 시작이다. <고백>을 번역한 박아르마 교수의 말대로 루소의 필체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나, 그 잘못을 두고 아무 근거도 없이 비난과 조롱을 삼가고, 루소 그 자체의 진실성을 봐달라고 강조한다. <고백>을 읽으면서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 프랑스대혁명에서 그 모든 시민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이렇게도 한심한 적이 있었던가? 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망정, 그 자체로 루소를 내려 까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자신 안의 신에게 맹세하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소 마조히즘과 나르시시즘적인 모습은 루소 스스로가 자신을 채찍질을 하면서 그 채찍질이야말로 진실과 용기 있는 고백이란 점에서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무시하지 마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비웃되, 그 실수를 용기 내어 말하는 자신을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관계에서 우리는 그를 이상하게 볼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이중성이다. 인간의 이중성이 왜 무서운가? 루소가 생피에르 섬에 갈 때 처음에 마을주민 전부가 아니어도 일부 환영을 받았고, 어느 사람들과는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루소에게 가해진 박해에서 앞장 선 사람이 다름이 아닌 자신과 친하게 지낸 사람이란 점에서 루소는 충격을 받는다. 처음 초면에 다정한 얼굴로 착한 척하더니 뒤에 와서는 악의를 품고 공격을 가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간에 대한 공포와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루소는 인간을 사랑했다. 단지 그 인간은 현실적 인간보단 자연에 있는 인간 혹은 이상적 인간이었다. 농촌에서 밭을 일구고 산에서 나무를 베는 농민들이 남을 헤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진정 자신의 이성과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자라면 루소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올바른 감정과 이성이 있다면 그 누구에게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나 혹은 지금이라도 그런 올바른 것들을 갖추기란 어렵다. 누군가 약점을 잡으면 거기를 잡고 무한히 늘어지는 자들, 저항할 힘이나 의지도 없는 자를 계속 공격하여 그를 궁지로 모는 자들, 그러면서 그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가 어느 순간 그 마지막 모습을 드러낼 때 마치 불쌍하게 보는 눈빛, 인간이란 그런 이중적 잣대로 살아온 것이다. 루소가 느낀 그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정신마저 침식하여 결국 영국에 가서도 광기에 시달린다. 물론 <고백>의 마지막 부분은 생피에르 섬에서 나와 영국에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흄을 만나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루소는 자신을 괴롭히는 광기에 의해 모든 것을 의심한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것이란 정말 눈물 나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으려고 든다면 더 무얼 말할까? <고백> 후반부에는 루소의 성공보단 오히려 고난과 박해의 시간만 이루어진 시간이다. 영광의 순간은 너무 짧고 빛이 났다. 불꽃이 가장 화려한 시기는 바로 소멸하기 전의 순간이다. <신 엘로이즈>의 발간은 온 유럽을 흔들었고,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책에 대한 인문도서를 알아보면 루소가 살던 시절, 책 1권이라면 일반 가정의 1~2주 정도 생계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소설이 유럽을 강타했다. 물론 루소가 상대하던 여성들은 대부분 상류계급이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책 1권의 가격이 일반 민중들이 건들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것이 아닌 점, 또 다른 점은 소설은 문자로 이루어진 기록문학이다.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 역시 상류계급과 그들 옆에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신 엘로이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작품 주인공 생 프뢰는 높은 계급의 젊은이가 아니라 가난한 청년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 그 파리의 모습은 루소에게 오로지 죄악과 모순 그리고 허영심으로 가득했다. 아마 그런 것을 느낀 이유는 루소가 상류계층과 어울리는 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프랑스 파리에서 젊은 남자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귀족부인들과 친분을 쌓아야 했으며, 그 귀족부인들의 소개로 다른 귀족부인을 통해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었다. 루소는 이미 충분히 상류계층에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루소 덕분에 다른 사람들조차 그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루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루소이기에 높은 분들에게 아첨하지 않은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 때부터 왕으로부터 충분히 사례를 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귀족들에게 출세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루소는 거부했다.

 

그 거부는 본래 그가 몸이 허약하고, 특히나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에 없는 점에서 소변을 참을 수 없는 루소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복합적인 요소로 루소는 상류층에 있는 것보다 조용한 자연과 은신처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을 그를 계속 세상으로 나오기를 원했고, 때로는 조롱을 퍼붓기도 했다. 적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인 루소를 향한 모순에서 언제나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원했다. 루소가 나오지 않은 이유란 바로 그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 상황에서 테레즈와의 만남은 물론 중요하다.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수줍고 착실하며 거짓 없이 자신을 대해준 테레즈, 루소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남자구실을 하지 못해도 테레즈는 곁에 남아주었다고 한다.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쾌락과 욕망은 남성이 강할 뿐이지 여성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고백> 상권에서도 아직 성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루소는 어느 누군가의 침대에 잠을 잘 때 왜 밤마다 시끄러운지 이해하지 못한 점을 본다면 말이다. 테레즈가 예전보다 애정이 식은 것도 그녀와 성관계를 하지 못한 점에서도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부부사이에서 아내가 남편이 부부생활을 충실하지 못한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실제 이런 모티브로 황신혜 씨와 문성근 씨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란 영화에 등장한다).

 

그래도 테레즈는 루소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의 명예를 지키며, 마지막 가난과 빈곤에서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켰다. 루소가 병으로 서거하여 사람들이 몰려오자 테레즈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라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루소의 박해는 곧 테레즈의 불운과 연결되었다. 테레즈는 평생 글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검소하여도 숫자를 계산하지 못해 늘 살림이 빈곤했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조카마저 테레즈를 괴롭히고 때로는 폭력과 협박까지 했다. 그런 테레즈였기에 루소의 옆에서 지켜주었을 것이다. 루소 역시 <고백>에서 테레즈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가득했다.

 

세상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도 오로지 테레즈만이 옆에 있을 것이란 점이다. 살아가다보면 가까운 친구조차도 사소한 갈등과 미묘한 오해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이익으로 인해 갈리는 경우가 다분하다. 하다못해 친구를 우정으로 대하지 않고, 손익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안 봐도 아는 이야기다. 루소는 손익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배신을 당했다.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의 인생에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라고 할까? <고백> 상권을 봐도 그렇지만, 우리 인간 모두는 그렇게 현명하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이익에 단합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하여 으르렁거리며,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무비판적 집착에 매달려 중요한 근본을 놓치는 경우가 다분하다. 물론 그런 것을 알고 인정하여 고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 문제로 잘못은 일어나고, 인간은 잘못을 할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잘못을 이용하여 꼬리 잡아 공격하고 이용하는 부당함에 인간들은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노리고 달려든다. 스스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치졸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이란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대해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이 윤리적 의식을 배제하면서 늘 남들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부류다. 아마 많은 인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다고 내가 그렇게 좋은 인간이라 자부하지 않으나, 그런 이익에 내 마음을 기울이는 게 내 자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을 알아가고, 사회를 이해할수록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되는지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남의 것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배불리는 게 하는 수단이 된다. 최후에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치명적인 덫이 된다.

 

<고백>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모순된 심리와 그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루소다. 적어도 바보 같이 오늘도 자신들의 이중성에 정의를 말하는 현실을 보며 그들에게 과연 스스로를 고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적당히 수치스러운 과거의 일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서 흘러 보낸다. 하지만 정말 수치스러운 과거의 과오나 실수가 아니라, 정말 잘못된 것을 두고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손익을 따지고, 의미 없는 명예를 찾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조심해도 인간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단순히 나나 타인들이 비난하기보단 그것을 제대로 반성하고 인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루소의 <고백>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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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애니메이션은 클리쉐(Cliche)적인 요소가 강한 전형적인 모험물이다이런 클리쉐적인 요소는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만 아니라 영화만화드라마 등에 깊숙하게 뿌리깊이 박혀있다이런 작품들을 볼 때 단순히 소재로 파악하는 것보단 전후맥락 즉 Context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물론 작품은 이미 시작과 끝의 진행은 충분히 알고 남을 정도로 단순했다서사의 흐름에서 영웅의 탄생에서 그 영웅이 초반부터 강한 게 아니라 조금씩 강해져 어느 순간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주변에 흔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너무 패턴이 보이거나 또는 이미 안 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은 아마 당연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점은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고 대중이 선호하는 점이다대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작품을 극장에서 발표하는 순간 대중들은 난동을 일으킨다난동이라 해봤자 항의 내지 재미가 없었다는 불평이겠지만그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만약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예술(물론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로서 상당히 파격적이지만)과 대중문화의 사이는 늘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타고 온다.

 

예술과 대중문화를 동일하게 보게 힘들 것이고그런다고 서로 간의 벽을 올릴 수도 없다선택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미적인 감각이라 볼 것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너무 철저하게 후자에 속하지만전자의 눈인 예술로서는 뭐라 해야 하는가예술적 요소는 없다고 하나예술의 기원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인간의 예술 그리고 문학적인 공간에서 신화란 늘 전해지고 읽어지는 보물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는 바로 그 신화를 작품 내 모티브로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던전이란 개념은 없지만단지 그 신화의 인물을 던전에 참가하는 파밀리아의 우상으로 내세운다우상의 대상에서 곰이나 호랑이 같은 토템이즘이라 하겠지만그 신들은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의 신들이다주인공 벨의 경우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속해 있다헤스티아는 본래 제우스의 누이이며그녀는 처녀로서 건강과 가정의 불을 담당했다상당히 가정적이고 포근한 처녀여신인 것이다그러나 제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고다른 누이인 헤라와 결혼을 했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면 이상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고제우스와 헤라의 누이다그런 헤스티아가 헤파이스토스와 친한 것으로 나온다헤파이스토스는 본래 헤라의 아들이었다제우스와 상관없이 헤파이스토스는 헤라에 의해 나온 아들이며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태어나자 버리려 했다등장인물 요소로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는 여성으로 나온 것이다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다리 한 쪽을 절고 있으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선 눈 한 쪽을 가린 채로 나왔다.

 

작가가 그리스신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신에 대한 모에적 요소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신의 지상의 강림은 신의 존재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신의 절대적인 존재보다는 다소 불안정한 존재로 드러난다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헤스티아에게 벨의 단도를 제작하여 줄 때신의 권능보단 마치 인간의 노동으로서 제작하기 때문이다단지 신의 노동은 무기에 큰 위력과 잠재능력을 부여한다헤스티아는 벨의 신체가 특이한 것을 알고 있으며그에게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기보단 그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린다일정 수치의 레벨을 올리면 벨의 신체능력과 공격력 그리고 마법능력은 증가한다헤스티아의 철자가 추후에 health, 즉 건강이다.

 

건강을 부여하는 주신 헤스티아에게 주인공 벨은 모험하면서 많이 다치지만빨리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정말 헤스티아의 능력인지 아니면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해결하는 플롯의 구조로 활용하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지만주신의 능력이 결국 파밀리아 일원에게 큰 힘이 되는 점이다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가 제우스의 전령이듯이 헤르메스 파밀리아 일원 하나가 헤르메스에게 축복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나온다하지만 신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할 때 나오는 권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신의 존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후에 해당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그리스 신들은 제우스 주도로 한 신들의 전쟁까지와 달리 인간세계에 등장한 반인반신의 등장 그리고 신들이 관여하는 전쟁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시대일 것이다인간의 중심으로 던전을 침범하는 점에서 신은 그저 인간의 힘을 극대화시켜주는 촉매에 불과하다그러나 신은 영원한 존재이고인간은 유한한 존재다특히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란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게 되는 마련이다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사망하고제우스 아들인 사르페돈 역시 사망한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전쟁과 모험 끝에 집에 도착한다모험이란 서사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의 사랑과 시험을 받는다그럼에도 인간은 왜 모험은 포기하지 못하는가그런 요소들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보단 그저 서사적으로 보여줄 뿐이다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열광한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승자는 많은 패자 속에서 등장한다신화란 인간의 욕망의 억압 그리고 해방과 은폐에서 생기는 이야기다인간의 숨은 욕망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에서 패자들의 욕망에서 영웅이 탄생된다쉽게 말하자면 내가 혹은 우리들이 이렇게 쓰러질 때 누구 한 명 나서서 해결해주면 안 될까?”라는 심리다.

 

우리들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이는 욕망은 무엇인가주인공 벨은 무척 순진하고 착하고 마음이 여린 청년이다그러나 주변에 많은 미소녀와 미녀들이 모이는 전형적인 하렘 작품의 캐릭터로 등장한다그 내부의 심리는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인데왜 내 주변에 여자들이 모이지 않은 것일까라는 심리적 박탈감이 하나의 신화로서 등장한다대놓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보단 뭔가 어떤 상황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려는 수줍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빈곤한 심리적 기제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이니 언제나 우리는 우리만의 던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만남을 추구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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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신들이 인간의 성질을 은유화한 거라 해석되듯이, 요즘 그 신들의 힘이 촉매 역할로 약화되었다고 보시는 건 매우 타당한 해석이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7-03 08:57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리스 신도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오나, 이 작품의 헤스티아 너무 노골적입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할 뿐, 인간과 거의 별반 차이 없으니, 단지 촉매역할제라는 보조역할이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다들 미소녀란 점이....흠....
 
고백 1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지배계급에 의한 세계였다. 지배계급은 자신만의 지식과 권력, 그리고 무력을 이용하여 피지배계급을 지배했다. 철저한 지배계급 중심의 사상인 플라톤주의나 혹은 공자사상이 훌륭한 가르침이 있어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플라톤주의나 공자사상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치와 지배를 하더라도 억압과 착취를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계급의 능력으로 질서 그대로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모순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동안 정치사상에서 철학적인 요소는 배제된 채,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나마 조선의 유학은 공자의 철학이 아니라 주자의 유학이었다. 주자의 성리학으로 인해 공자의 정치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버린 채 오로지 주자의 학술에만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했다. 주자의 글자 하나 다르게 적거나 해석하면 멸문지화, 사문난적이 되어야 했다. 주자의 철학은 공자사상에서 종교적인 교리를 추가하여 만든 사상체계다. 그런 사상들이 계속 발달하면서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으나 그 학문의 깊이를 두는 의미가 사유는 계속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학문과 사상을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본래 구석기 이전 시대에는 동물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인간은 단지 동물 포유류에서 2족 보행을 하는 종이었다. 침팬지나 원숭이와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미개한 족속이었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그저 자신에게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질서였다.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살아가는 것이란 동물적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이란 것은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여도 그 죽음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조차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에게 이성적 판단력, 그리고 시간적 관념을 가지고 나서부터다.


인간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신석기 시대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보거나 거대한 돌무덤을 본다면 자연 속의 미개인이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아주 작은 이성적 능력이 있었기에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연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천둥번개를 보면 신의 분노이고, 가뭄과 홍수는 신의 재앙이며, 풍년과 수확은 신의 축복이다. 자연의 흐름은 과학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했고, 자연의 변화는 신의 능력이라 여겼다.


그런 시기에 인간은 신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점차 세력을 넓히고 무기를 들고 빼앗고 약탈했다. 힘으로 통치하던 지배자들은 더 이상 힘으로 지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고, 그 권력은 지식과 조직체계다. 인간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제시키고, 그들이 자신의 권좌를 노릴지라도 그 권좌에 앉아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의 역사란 과연 인간을 위해 존재했는가? 아니라면 문명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했는가? 물론 존재했을지 몰라도 보통 누리는 것보다 어느 특정 누군가가 훨씬 더 좋은 행복과 혜택을 누렸다.


이런 체계를 정당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지배계급의 정당화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나마 용인 받는 이유는 플라톤은 정치가에게 철저히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지혜를 갖추기를 원했다. 오로지 수련하고 검소한 행동으로 용기와 절제를 강요했다. 하지만 지배계급에 올라선 자들을 지켜보면 실제 그런 행동을 한 자는 거의 드물었다. 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이 용감했는가? 죽음이 바로 마주하는 전장에서 그들은 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을 따라 트로이아인들에게 돌격했는가? 그것은 식사시간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제사로 받친 고기를 모두 공평하게 배불리 먹게 해준 것이다. 왕이나 병사나 모두 같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전리품은 왕보단 부하에게 나누어준다. 그래서 병사들은 용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공물을 위로 몰릴수록 병사들은 겁이 많아지고, 위에 있는 장수와 부장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문명에서 과연 우린 문명인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 기술과 문명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발전한다. 이런 인간의 문명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과 좋은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이 바로 장 자크 루소다. 그의 서적은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이 내재되어 어느 편중된 시선에서 보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런 만큼 루소의 인생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어느 한 가지로 정의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루소의 인생은 과연 어떤 것인가? 사실 인간 스스로의 자서전이나 또는 그런 평전들은 문학소설(도서관 비치번호 800)이나 역사서(도서관 비치번호 900)에 올려놓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루소의 자서전이란 문학도 아니고 역사서도 아니다. 그의 서적은 100번대인 철학도서다.


처음 나온 자서전인 <고백>, 다음으로 나온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그가 죽기 전에 미완으로 끝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모두 철학도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각 그리고 그가 겪는 현실을 적는 것이 자서전이라면 분명 역사도서일 것이다. 하지만 루소의 자서전은 그의 역사만을 기록한 게 아니다. 인간이 가진 온갖 역설과 모순 그리고 비극과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통해 노래한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 시와 같고,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글들이었다.


왜 그런가? 왜 루소의 서적이 이래 독특한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리한 부분을 적지만,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영웅으로 남으려 한다. 그러나 루소는 전혀 영웅적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시절 영웅처럼 보이고 싶어 하다 곤란한 입장을 놓인 것을 적어 놓는다. 루소는 태어나면서 평범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 그 동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자말자 돌아가시고, 루소는 숙모의 손에 큰다. 어머니의 부재, 그 어머니의 산통으로 태어난 루소는 건강하지 못했다. 작은 키에 마른 체구, 체력도 약하고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삶에 대한 회고에서 그는 분명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루소는 세상이 자신보고 불우하다 해도, 자신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한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루소의 인생을 알려면 단순히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서적이 아니라 <고백>으로 통해 들어가야 한다. <고백>을 저술한 시기는 루소가 가장 인생에서 가장 불우한 시기에 적은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왕권 절대주의에 큰 문제가 되는 책이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에밀>이었다. <에밀>을 읽게 되면, 신이란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만들고 모든 것을 결정짓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신에 의해 완벽하게 태어났고 그 인간 스스로가 삶을 결정짓는 것이 바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마주하는 것은 그가 저승에 가면서부터다. 신은 그저 인간 스스로의 양심을 바라보는 이신론(理神論)적인 존재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진 것이라 말하는 기존 가톨릭교회로부터 루소는 악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에밀>에서 더 위험한 말은 곧 유럽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글이다. 실제 <에밀>은 1762년에 출간되고, 그로부터 27년 후 프랑스 바스티유광장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그의 끔찍한 예언은 루이16세의 목을 단두대의 칼로 분리시킨다. 루이16세는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린 자가 루소와 볼테르라고 한다. 하지만 볼테르보단 루소에게 더 많은 호응과 열의가 다가왔다.


루소가 살던 시절은 루소의 삶은 매우 불우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는 프랑스의 신이 되었고, 세계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 루소의 삶 자체가 엄청난 모순과 역설이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새로운 가치와 사유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삶과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 느낀다면 그 사회 자체를 읽을 수가 없다. 사회 테두리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낯선 나그네로서 바라보기에 세상을 알고 바꿀 수 있었다.


루소는 바로 그런 힘을 가졌던 것이다. <고백 1>을 보면 루소가 어머니의 부재에 콤플렉스를 가졌던 점,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했다. 고백 초반에 어린 시절 랑베르시에 양에게 교육을 맡길 때, 그녀에게 혼날 때 루소는 고통과 더불어 쾌락의 감정을 느꼈다. 흔히 말하여 상대 이성에게 성적이나 혹은 다른 식으로 학대받는 것에 성적 쾌락을 가졌다는 점이다. 루소의 성적인 증세는 마조히스트였다. 루소 시대 이후 후작이나 문제가 심각했던 사드는 사디즘을 만들데 한 장본인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루소의 성적인 결벽증과 돌발적 행동은 그의 심리적 불안에서 기여된 것이다.


그의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은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이란 세계 말고도 무의식이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것도 루소라고 한다면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중심이었다면 루소는 그들보다 이미 100년은 앞 선 것이다. 단지 루소는 자신의 분석이 자신의 역설적 요소라는 점이고, 그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어두운 곳에 나와 여성이 있는 것을 목격하면 그녀들이 눈에 뛸만한 곳에 가서 자신의 코트를 열어 놓는다.


그 옷 속에 숨은 자신의 성기가 여자에게 보이게 되고, 루소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여자들의 비명과 시선에 쾌락을 느낀다. 이름 하여 바바리맨이 루소가 보인 행동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행동을 루소는 실천했고, 덕분에 어떤 건장한 남성에게 잡혀 봉변 당할 뻔도 했다. 루소가 가진 성적인 증세는 지나친 자위로 자신의 심신이 소모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무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다른 여자들을 육체적으로 취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상력과 자기 스스로의 해소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소는 수줍음이 너무 지나쳤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아주 연약한 마을에 격렬한 감정, 도저히 자신을 자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는 누가 보더라도 루소를 이해가 불가능했다. 루소조차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보단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을 뿐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너무 지나치게 편중된 점에서 루소는 자신을 학대하고 상처 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사람을 우리가 본다면 더 이상 다그칠 수 없는 것처럼, 루소의 자화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루소를 보고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루소는 자신의 <고백>에서 자신의 책을 읽는 대단한 사람들이란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읽어본다면 나나 다른 분들은 루소에게 있어서 대단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루소보다 대단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인간중심의 민주주의,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서 아니다. 루소보다 우리가 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도 자신보단 주변에 있는 불쌍한 이웃에 향한 루소의 연민에 대해서 말이다. 루소는 파리에 가면서 느낀 것은 거리에 비참한 사람이 넘쳐나고, 시골농촌의 농부는 과다한 세금착복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그런 비극은 계속된 현실이었고, 어느 그 누구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려하지 않았다.


볼테르가 지적한 것은 무능한 정부이지, 무기력한 민중이 아니었다. 루소는 바로 그 민중을 향한 시선을 <고백>에서 처음 나타낸다. 이미 디종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받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어본다면 루소가 바라보는 것이란 문명에 대한 인간의 모순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 학자로서 가장 피하여야 할 그 방식을 예나 지금이나 고수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루소를 보고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입으로 나의 더러움을 말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그 누가 실천할 수 있는가? 이런 현실을 보면서도 아무런 외침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지만, 루소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한 존재다.


루소는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고발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되길 거부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유산이나 연금을 주려해도 거절하고, 명예와 이름을 높이려 해도 거부했다. 자신의 힘으로 책을 저술하여 매출된 서적으로 돈을 받았고, 늙어서도 방에 홀로 앉아 악보를 뺏겨 쓰며 자신의 생계비를 충당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다소의 이익에 눈을 밝히며 덤벼드는 사람을 볼 때마다 참 난감하다.


작은 이익은 아니지만, 그 이익이 결국 타인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훔쳐가고, 타인에게 커다란 빚을 안겨준다. 그런 행동에 대해 자신의 양심에 일말 가책도 없고, 좋은 기회에 돈을 벌었다고 주변에 자랑하며, 그런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힘들거나 방송에서 세상물정이 어려우면 남에 대해 걱정하는 척한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선량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바보 같은 사기에 나는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현실에서 바보처럼 내 이익에 밝지 못한 채, 그런 이익을 충실한 인간을 보며 비웃는 내 자신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속에서 그들을 비웃는 내 모습이 있기에 그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나도 그러한데 모든 인간들은 역설적이지 못해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모순에 빠져드는 세상을 보면서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고백이 존재할까? 부끄러움 자신을 알고 반성하는 삶, 그것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과연 그의 최후에 어떤 식으로 인생이 질문을 던질까? 차라리 스스로 인정하는 삶 그것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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