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애니메이션은 클리쉐(Cliche)적인 요소가 강한 전형적인 모험물이다. 이런 클리쉐적인 요소는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만 아니라 영화, 만화, 드라마 등에 깊숙하게 뿌리깊이 박혀있다. 이런 작품들을 볼 때 단순히 소재로 파악하는 것보단 전후맥락 즉 Context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작품은 이미 시작과 끝의 진행은 충분히 알고 남을 정도로 단순했다. 서사의 흐름에서 영웅의 탄생에서 그 영웅이 초반부터 강한 게 아니라 조금씩 강해져 어느 순간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주변에 흔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너무 패턴이 보이거나 또는 이미 안 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은 아마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점은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고 대중이 선호하는 점이다. 대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작품을 극장에서 발표하는 순간 대중들은 난동을 일으킨다. 난동이라 해봤자 항의 내지 재미가 없었다는 불평이겠지만, 그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 만약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예술(물론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로서 상당히 파격적이지만)과 대중문화의 사이는 늘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타고 온다.
예술과 대중문화를 동일하게 보게 힘들 것이고, 그런다고 서로 간의 벽을 올릴 수도 없다. 선택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미적인 감각이라 볼 것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너무 철저하게 후자에 속하지만, 전자의 눈인 예술로서는 뭐라 해야 하는가? 예술적 요소는 없다고 하나, 예술의 기원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예술 그리고 문학적인 공간에서 신화란 늘 전해지고 읽어지는 보물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는 바로 그 신화를 작품 내 모티브로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던전이란 개념은 없지만, 단지 그 신화의 인물을 던전에 참가하는 파밀리아의 우상으로 내세운다. 우상의 대상에서 곰이나 호랑이 같은 토템이즘이라 하겠지만, 그 신들은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의 신들이다. 주인공 벨의 경우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속해 있다. 헤스티아는 본래 제우스의 누이이며, 그녀는 처녀로서 건강과 가정의 불을 담당했다. 상당히 가정적이고 포근한 처녀여신인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고, 다른 누이인 헤라와 결혼을 했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면 이상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고, 제우스와 헤라의 누이다. 그런 헤스티아가 헤파이스토스와 친한 것으로 나온다. 헤파이스토스는 본래 헤라의 아들이었다. 제우스와 상관없이 헤파이스토스는 헤라에 의해 나온 아들이며,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태어나자 버리려 했다. 등장인물 요소로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는 여성으로 나온 것이다.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다리 한 쪽을 절고 있으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선 눈 한 쪽을 가린 채로 나왔다.
작가가 그리스신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 신에 대한 모에적 요소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의 지상의 강림은 신의 존재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의 절대적인 존재보다는 다소 불안정한 존재로 드러난다.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헤스티아에게 벨의 단도를 제작하여 줄 때, 신의 권능보단 마치 인간의 노동으로서 제작하기 때문이다. 단지 신의 노동은 무기에 큰 위력과 잠재능력을 부여한다. 헤스티아는 벨의 신체가 특이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에게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기보단 그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린다. 일정 수치의 레벨을 올리면 벨의 신체능력과 공격력 그리고 마법능력은 증가한다. 헤스티아의 철자가 추후에 health, 즉 건강이다.
건강을 부여하는 주신 헤스티아에게 주인공 벨은 모험하면서 많이 다치지만, 빨리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헤스티아의 능력인지 아니면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해결하는 플롯의 구조로 활용하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지만, 주신의 능력이 결국 파밀리아 일원에게 큰 힘이 되는 점이다. 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가 제우스의 전령이듯이 헤르메스 파밀리아 일원 하나가 헤르메스에게 축복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나온다. 하지만 신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할 때 나오는 권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신의 존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후에 해당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스 신들은 제우스 주도로 한 신들의 전쟁까지와 달리 인간세계에 등장한 반인반신의 등장 그리고 신들이 관여하는 전쟁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시대일 것이다. 인간의 중심으로 던전을 침범하는 점에서 신은 그저 인간의 힘을 극대화시켜주는 촉매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은 영원한 존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특히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란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게 되는 마련이다.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사망하고, 제우스 아들인 사르페돈 역시 사망한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전쟁과 모험 끝에 집에 도착한다. 모험이란 서사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의 사랑과 시험을 받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왜 모험은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런 요소들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보단 그저 서사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열광한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승자는 많은 패자 속에서 등장한다. 신화란 인간의 욕망의 억압 그리고 해방과 은폐에서 생기는 이야기다. 인간의 숨은 욕망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에서 패자들의 욕망에서 영웅이 탄생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혹은 우리들이 이렇게 쓰러질 때 누구 한 명 나서서 해결해주면 안 될까?”라는 심리다.
우리들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이는 욕망은 무엇인가? 주인공 벨은 무척 순진하고 착하고 마음이 여린 청년이다. 그러나 주변에 많은 미소녀와 미녀들이 모이는 전형적인 하렘 작품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 내부의 심리는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인데, 왜 내 주변에 여자들이 모이지 않은 것일까? 라는 심리적 박탈감이 하나의 신화로서 등장한다. 대놓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보단 뭔가 어떤 상황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려는 수줍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빈곤한 심리적 기제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이니 언제나 우리는 우리만의 던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만남을 추구하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