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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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C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유럽이든, 당시 유럽 사회는 상당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후 계속되는 산업화와 자본화 그리고 점차 뚜렷하게 나누어지는 빈부 격차로 통해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상(思想)과 혁명(革命),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크나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 중심 사건에 세계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철학자인 마르크스가 등장했다. 그런 마르크스가 과학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기 전에 유럽에는 엄청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헤겔이었다. 헤겔이란 인물은 변증법(辨證法)이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의 변증법적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철학은 독일 비판철학(批判哲學)을 세운 위대한 철학자 칸트를 이은 인물이었다. 물론 나는 헤겔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한다. 내가 헤겔이란 인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시대에 헤겔의 변증법이 한창 유행했다는 점과 최근에 잠시 읽어본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처음 알았다.

어째든 헤겔이 칸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그의 철학에서 인류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변증법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그런 철학적 업적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칸트의 사고방식을 많이 수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누구나 자기 발에 맞는 척도와 손들, 그리고 구두를 만드는 일에 필요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그리고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는 사고와 이성을 위해 계속된 연구, 배움, 노고로 통해 이룩해야 하나, 현실에서의 인간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현존하던 시대에도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어떻게 적어 내려갔을까?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정말 그렇다. 오히려 무지의 배일에 가려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치관과 사고들이 절대적 가치이며, 진리라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칸트나 헤겔처럼 그렇게 자신의 형이상학(철학)에 대해 진지한 공부나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짧은 지식과 알량한 사고로 대가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리석은 가치와 사고는 하나의 도그마로 떠오르고, 그렇게 떠오른 오류들은 절대적 진리로 되어 교조주의적인 인간들을 양성시키게 된다.

칸트는 이런 인간의 이성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사고로 통해 인간 선험적인 부분을 대해 관념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했다. 물론 이런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직후에 칸트는 인류 최고의 도덕윤리교과서(그것은 다소 많이 어렵다고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했다.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기 앞서서 먼저 순수이성비판으로 통하여 칸트는 어떤 상황과 관념에 대하여 변증법적인 상황으로 거론했다. 그리고 각각의 사고와 주장을 각각 다른 논리와 사고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서술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함이 옳은가?

그게 바로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싶다. 나의 짧은 지식과 걸음마 단계의 수준으로 칸트라는 거장을 다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처사다. 하지만 그의 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분명한 단어의 사용과 의미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 단어에 묶인 의미에 대한 접근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항상 생각하고 말을 하며, 말로 통해 타인과 대화로 통해 사회생활도 한다. 또한 몸을 움직이면서 인간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상황에 따라 2가지 상황에 닥칠 것이다. 어느 1가지 사안이 자신에게 이익 즉 사애(私愛)가 될 것인지 혹은 이타(利他)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그런 자기 욕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욕심을 절제하고 타인에 대한 인격적인 사고, 즉 윤리적인 사고를 중시했다. 또한 법과 제도에 따른 강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완전한 의무보단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통한 비강제적으로 나타나는 불완전한 의무를 중시했다.

불완전한 의무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것은 정말 존경받아야 행동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 대해 이 책의 역자이신 백종현 교수님이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버스를 타던 젊은 남학생이 약 30분 동안 서있었는데, 우연히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어느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버스에 타서 그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례를 보인 것이다.   

사실 그 젊은 사람이 반드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절대적인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은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자신의 편의를 조금 손해 봐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윤리적인 행위로 타인에게 편안함을 주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이성적인 판단이었기에 충분히 존경받을 행위다.

실천이성비판은 솔직히 말해 단어와 문구는 어렵지만, 그 단어와 문구 속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 그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의 말처럼 그런 부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인의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타인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이 사회를 되돌아본다면 자신의 모든 부족함이 이미 충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안락함을 빼앗는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고, 또한 이득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여 자신의 음흉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칸트는 비판했다.

실천적인 이성행위는 윤리적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에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일정한 사안을 두고 인간들은 대립하는 경우도 생기고, 또한 자신의 논리적인 자세로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하나 그 모든 이성 즉 논리에서는 윤리적인 요소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칸트가 이 실천이성에서 보여주는 사고는 즉 인간의 가치관에 대해 그것은 법과 제도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한 타인의 배려다. 인간의 윤리적 가치라는 것은 곧 자신만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칸트가 죽은 뒤에 칸트의 묘비에는 자신이 남긴 말이 돌에 새겨져 인간의 기억이 끝나는 그날까지 기록되었다.

 

그 글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사실 나는 이 문구에서 별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는 존재이다. 그 별이 칸트의 위에 빛나는 것은 어두운 하늘에 작은 별빛들이 곧 어두운 인간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희망 즉 자율적인 의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칸트의 마음 속 깊이 있는 도덕법칙은 이 세상을 좀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칸트의 진정한 소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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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최성일 지음 / 책동무 논장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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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읽는 순간 나는 순간 일본 인문학자인 기다 켄의 “현대사상지도(現代思想地圖)”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권의 사상가 및 사상서도 안내하기 좋은 책자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각 사상가와 더불어 그 사상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그 사상가가 저술한 도서나 혹은 관련 학문분야까지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나 기다 켄의 현대 사상 지도와 다른 점은 현대 사상 지도에서는 어느 현대철학자의 부류를 한곳에 모아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각자의 사상가 특징에 맞게끔 나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학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눈에 보기 쉬운 것은 현대사상지도이겠지만, 대신 그가 어떤 책을 적고 무슨 사상으로 개략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어느 학파와 사상부류가 나누어져 있고, 누가 있는지 그것에 대한 연계성과 그 시초정도만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어느 특정시대에 존재했거나 혹은 현재 존재하는 사상가를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저술서적, 그리고 번역된 국내도서까지 소개했다. 그러니깐 우리가 알면 좋은 사상가들의 어떤 책들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상가나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라도 그가 무슨 책을 저술했는지 무슨 내용으로 적었는지 정보가 없다면 사상을 접해보는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서는 그런 사상가에 대한 정보를 듣고 무슨 책이 좋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사상서적에 손을 대려는 사람에겐 더욱 난해할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나의 경우는 이제 사상도서에 대한 입문과정에 들어온 사람이고, 막 이제 근대와 현대사상에 대해 접해본 사람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나에게 상당한 많은 지침이 되어 준다. 또한 이 책에서 사상가들로 등장하는 근현대 철학자나 사상가들 사이에서 주요 철학자로 등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이 책에서 19C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대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마르크스라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한 사상가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그만큼 사회과학이란 분야와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의 다양한 사유와 사상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 책에서 등장한 인물로 내가 알던 사람은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움베르토 에코, 미셀 푸코, 마빈 해리스, 피에르 부르디외, 줄라이 크리스테바, 노암 촘스키, 가라타니 고진,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체 게바라”가 있었다. 그 중에서 다소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인물로 “버트란드 러셀, 빌헬름 라이히, 미하일 바흐친, 게오르크 루카치, 루히드 비트겐슈타이느 한나 아렌트, 칼 포퍼, 르네 지라르”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름을 조금이라도 혹은 실제 읽었던 사람도 있었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떻게 본다면 이 책을 읽은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내가 봐야할 책들이 계속 늘어나고 또 늘어나서 많은 양의 독서량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 그런 느낌이다. 어느 한권을 보려니 다른 책의 이해 없이 힘들고, 그 책을 잡으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책이란 인간의 사유를 담은 매체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사상서로 통해 사상가를 만나면 또 다른 사상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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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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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리기별을 읽는 것은 왠지 모르게 조금 내 가슴에 담고 있는 허무와 알 수 없는 반항의식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유명한 작가로 활동하시는 황석영 선생님이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젊은 시절의 여담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민 개밥바라기는 허무함과 알 수 없는 자신을 혹독하게 하려는 어느 청춘(靑春)의 눈물이 보인다.

그 청춘은 단순히 남들처럼 혹은 시대적인 흐름에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먼 발치에 있기를 원한다.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 소설의 서사적인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보통 소설은 1인칭 내지 3인칭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1인칭이 3인칭이 되고 3인칭이 1인칭이 되기 때문이다.

1인칭의 시작은 베트남전에 떠나가는 준이다. 그는 분명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행동을 했어도 많은 것을 허비한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찾아 계속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모험도 하였다. 그런 준이에게 세상이란 그저 허무한 공간이었다.

개밥바라기별, 어느 유랑노동자인 대위의 말에서 준이는 자신의 운명은 저기 초승달 옆에 떠이는 금성처럼 작고 희미하고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별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보면 황석영이란 작가가 어린 시절 그리고 철부지 같은 청춘이 얼마나 덧없이 보냈었고, 그것이 다시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에 큰 상처를 들어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제주도 산자락을 올라가는데, 준이는 수박을 잘못 먹었는지 산자락 정자에서 그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잘생긴 어느 한 여자가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말에 그는 허무한 느낌을 최대한 보인 듯이 친구가 죽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말이다. 준이는 어둡고 무서운 과거 속에 친구를 잃었다. 그것도 눈앞에서 말이다. 

준이가 미친 듯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이나 첫사랑 미아의 눈으로 통해 그가 사실은 미아를 좋아했으나 미아 그 자신은 준이에게 질렸다는 것을 나는 주목한다. 준이는 미아를 사랑했으나 미아는 준이가 미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준이의 눈에는 항상 어딘가를 향하고, 대화를 이어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준이는 그렇게 마음속에 큰 공간을 담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방황한 인물이었다. 그런 상처로 준이는 자퇴를 하게 된다. 도저히 이 사회라는 공간을 그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준이를 볼 때는 마치 나는 상황주의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심장병에 걸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대고 총알을 때려 박은 기 드보르처럼 말이다.

사실 준이가 자퇴할 때 준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준이에게 있어서 정말 구역질나는 존재였다. 준이가 자퇴를 위하여 국어선생인 황새에게 자퇴사유서를 낼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준이는 스펙타클의 사회 즉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적은 사유서는 마치 이 사회와 학교는 권력자들의 존속을 위한 감옥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가 감옥에 갇힌 피카소에게 감옥에 갇혀 안되었다고 했지만, 피카소는 친구에게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감옥에 살아가는 것보다 났다고 말이다. 준이는 그것을 심각하게 느낀 것이었다. 왜 그토록 느끼고 싶었을까? 아니면 어느 사회학자 말을 빌려 감옥의 존재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준이는 분명 그나마 살림이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과 같이 살아가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준이에게 좋은 직장에 살아가기를 그리고 노동자의 자녀들과 부랑자 같은 아이들과 놀기 바라지 않았다. 그들과 멀리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준이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世界)로 녹아 들어갔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준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몰래 타는 무전여행(無錢旅行) 기차 칸에 만난 약초상들, 농가에서 만난 농민, 바다에서 만난 어부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친구들 준이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고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맛봐야 했다.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와 신라에게 패망하여 치욕을 당하는 모습과 한일회담 반대, 독재의 그늘에서 아직까지 일제잔재와 625전쟁의 그늘은 여전히 당시 젊은이들에겐 크나큰 짊이었나 보다.

그런 세계에서 오로지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무엇일까? 나는 선이와 선이의 아버지 이야기가 유독스럽게 기억난다. 선이가 그림쟁이 정수의 만남과 동시에 집에 들어가지 않자 선이의 아버지가 정수를 때리면서 차후 그를 데릴사위처럼 데려가는데, 선이의 아버지가 증이 없으면 안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증은 건축과에 나와 취득하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다. 자격증은 기술을 배워 사회적인 인정받은 하나의 상징이다. 결국 능력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체계 속에 근현대 역사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중시키는 듯, 준이가 야간 공업고등학교 다닐 적에 한강의 기적을 말한 후에 미국의 어느 도시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준이는 모든 것을 속박하고 속박당해야지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싫어 했나보다. 어머니가 그토록 가까이 하지 마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니 말이다. 준이는 바른 사람이 되기가 싫어했다. 오히려 바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바르지 않아야 오히려 세상이란 기계부속품에서 벗어날 기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지 혹은 그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지 준이는 수면제를 과다복용으로 5일 만에 눈을 뜬다. 분명 지겹고도 지루한 세상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으려 했는데, 해방되지 못한 채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방랑인생을 뒤로 한 채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떠나야 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보내고, 친구들과 보내며, 또한 떠나간 미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들은 없었다. 집에 가니 점포를 정리하여 이사하려 하고,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 현실에 살고 있으며, 미아는 눈내리는 그 공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허무한 과거를 보내고 준이는 기차를 타고 어둠 속의 터널로 간다. 어둠 속의 터널은 프로이트적인 부분으로 성적인 묘사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알 수 없는 내일이고 그 내일은 오늘이란 혹은 현재란 시간의 코앞이다. 앞이 알 수 없는 지금이야 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늘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 속에 개밥바라기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허무함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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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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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告白)은 자신의 죄(罪)를 고백하는 것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 고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죄의 시작은 모든 것이 크고 원대한 문제로 시작되지 않는다. 정말 작고 작은 사건(事件)들이 하나의 인화(引火)점이 되어 크게 화산폭발로 이어진다. 아마 이런 문제를 다룬 것이 고백이란 소설일 것이다. 모든 사건의 원흉에서 범죄의 시작점은 13~14세의 어린 청소년이었다. 제2차 성징기이면서도 몸은 어느 정도 커진 상태에서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불안한 시기이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이 있다. 이때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지는 14세 중학교를 다니는 남자아이로 나온다. 14세라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서 그는 세상과 사회의 부조리와 소외 그리고 왜곡 등에 의해 갈등을 앓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신지의 행위나 심리들은 매우 부적당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 뒤에 보여진 이면에는 이 사회와 부모라는 기성세대의 이기심이 가득하게 숨어 있었다. 결국 아이는 아이 그 자체로 망가져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최고의 범죄자인 슈야와 나오키는 그런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청소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둘은 비교하여 보자면 슈야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비인간적인 요소로 인했다면 나오키는 지나친 어머니의 간섭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난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의 최고의 피해자면서도 최고의 범죄자가 된 유코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의 격렬한 분노로서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고 틀어졌을까? 슈야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머니로부터 시작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그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평범하고 인자한 슈야의 아버지와 같이 잘 지낼 수 있음에도 그녀는 욕망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 

어머니의 욕망에 대해 슈야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전할 기회를 노렸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서 어머니가 다시 자기를 봐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 과학경연대회에서 수상할 때 세구치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구치 교수는 어머니와 결혼하였고, 어머니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안주하여 자신의 존재를 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슈야는 모든 윤리적 가치관을 버리고 대규모 살인을 기획한다. 1차 계획은 유코의 어린 딸 미나미를 죽인 것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학교 모든 사람을 죽이려 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그 이전에 과학경연대회에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의 칼날을 올렸다. 분노의 칼날을 향해할 곳은 슈야의 어머니고, 그리고 분노의 칼날이 꽂혀야 할 곳은 슈야 마음에 있는 자신의 비윤리성이어야 했다. 슈야는 대단히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논리적 물리적인 이성은 뛰어났으나 정작 중요한 윤리적 이성은 형편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월하다고 여겼다. 결론은 슈야는 그런 보통 인간과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 그 행위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상관없는 제3자인 것이다. 1차 희생자는 미나미, 2차 희생자는 나오키, 3차 희생자는 미즈키, 4차 희생자는 친어머니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희생자는 자신의 분노로 인해 자신을 파탄하게 만든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분노의 복수에서 유코의 반전(反戰)은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유코와 슈야의 관계도 조금 흥미로웠다. 사실 슈야가 미나미를 노린 이유는 약한 대상인 어린아이란 사실도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은 미나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이었다. 유코는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싱글맘 선생이었으나, 언제나 미나미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대신 차가운 공학수식만 들은 슈야에겐 비교하자면 충분히 질투감에 사로잡히게 할 일이었다. 이에 반해 유코도 슈아의 어머니로서 대해주었다.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의 불만을 뒤에서 보고 있는 어머니로서 말이다.

열심히 슈야의 홈페이지를 본 유코는 자신의 복수가 어떻게 되고 가는지 철저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야가 어머니가 보기를 원한 것을 다른 어머니가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코는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아오며 매우 헌신적으로 살아온 사쿠라노미야 마사요시 선생의 연인이다. 마사요시는 AIDS에 걸려 투병하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갔으나 그 누구에게 원망을 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딸을 죽인 2학생까지 용서하려고 한다. 그는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마사요시는 자신의 딸을 죽인 학생에게 AIDS 감염시키려한 유코의 폭주도 미리 사전에 방해하였다.

결국 자신이 AIDS에 걸리지 않음을 알던 슈야는 당당히 학교에 나와 자신이 어긋난 정의를 실현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AIDS에 걸린 것으로 착각한 나오키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나오키가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을 보면 사뭇 우리 사회의 일편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적은 2사람의 범죄자에서 슈야는 어머니의 비정함에 범죄가 싹을 틔웠다면 나오키는 어머니의 간섭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오키는 평범한 집안이다. 어딜 가더라도 평범하고 나오키 역시 평범하다. 평범하기에 그의 광기는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한 남자아이가 어딜 가도 우수한 인재로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것이 아닐까? 나오키의 콤플렉스를 보면 그의 어머니의 집착이 상당한 영향이 컸었다. 우리 아이는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남의 아이가 그래서 잘못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착해요. 왜 우리 아이어야 합니까? 라는 그런 부분이 나온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나름 정의가 있다 라면서 남의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 설정에서 일가족 5명을 살해한 어느 여중생의 엽기행각에서 그 여중생은 사실 극히 평범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소녀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평소에 그런 여자아이나 혹은 나오키가 살인행위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인가 혹은 그 이상의 문제인가? 슈야의 경우는 분명히 특별 케이스다. 그런 특별 케이스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슈야보다는 신문기사에 난 여중생과 나오키가 더욱 무서운 현실처럼 다가왔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른 자체가 더욱 겁나는 것이다. 그런 점을 더욱 부각시킨 것은 베르테르 선생이 학교로 부임오면서이다. 미즈키가 반장으로 있으면서 베리테르와 함께 나오키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미즈키는 베리테르의 가식과 억지스러움에 지겨움을 느꼈다. 자신이 가능하면 베르테르를 독살하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미즈키라도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유코가 학교를 그만둔 뒤에 슈야의 학급 내에서 일련의 마녀로서 이지메를 당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일하게 이지메를 가하지 않은 것은 미즈키였다. 미즈키가 이지메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슈야가 옳기보다는 슈야로 통해 자신들이 정의(正義)롭다고 생각하는 마녀(魔女) 같은 마녀사냥꾼이 되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추후 베르테르에게 이지메 사실이 들통이 나면서 그 사실을 고하지 않은 미즈키가 되려 마녀로 몰린다. 이때 그 마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즈키는 우유팩을 슈야에게 던지는데, 던지는 부위가 등이 아닌 얼굴이었고 순간 슈야의 얼굴에 우유팩이 닿일 때 미즈키는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군중심리이다. 군중심리로 통해 미즈키는 쾌감(快感)과 우월감(優越感)을 느꼈으나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유일하게 학급 내에서 제대로 판단하였던 사람은 미즈키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타인에 대하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추후에 슈야의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슈야의 거대한 냉장고에 보관된 고기가 되어 버린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여 시체마저 유린(蹂躪)당한 것이다.

모든 편을 읽으면서 읽을수록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이냐 질문에서 점점 난해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옳은 행위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 사람이 만들어지도록 자꾸 유도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든 나쁜 근본을 다시 찾아 되돌릴 방법은 없으나 그 나쁜 근본은 모두 없앨 수는 있었다. 나오키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슈야의 어머니는 슈야의 폭탄으로 죽었다. 결국 모든 사건의 원인자들은 사건 실행자에 의해 모두 죽게 되었다. 나오키는 어머니 살인으로 경찰에 넘어가게 되면서 그의 죄는 유아살인죄로 인한 정신강박 증세로 이루어진 돌발적인 행위로 죄가 성립되고, 슈야는 동급생 미즈키의 살인과 폭탄살해로 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2사람의 살인죄를 일으키게 하고,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복수로 통해 이루어진 조작된 살인에서 가장 큰 피해자인 유코는 복수의 여신으로 등극된다. 그녀의 최고의 복수는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2사람에게 각자의 어머니를 죽이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모든 원흉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2사람에게 시작된 것으로 만들어 모든 알리바이 만든 후에 자신은 어둠의 역사로 사라져 버렸다. 최후의 장에서 슈야에게 걸린 발신표시제한번호에서 유코는 자신이 유도살인한 것에 대해 슈야에게 폭록한다. 하지만 슈야는 그것을 경찰에게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폭탄은 자기가 만들었고, 폭탄 역시 자기 학교는 아니나 어머니가 있는 대학교라는 점, 또한 냉장고에는 동급생 미즈키의 시체마저 있었다. 이 모든 비밀은 유코가 모두 알고 있었고 모두 만들도록 유도했다. 과연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어긋난 분노의 칼날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미친 분노의 칼날을 다시 회수할 수 없을까? 책에서 어린 미나미가 죽은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약하고 거기에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죽인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그물로 씌웠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역전되면 어떨까? 최근에 본 존 롤즈의 “정의론”이 생각난다. 이것을 보는 내내 응보적 정의가 떠오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응보적 정의는 개인에서 한정짓는 것에 반해 이 작품에서의 응보는 점차 확대되어 간다. 사회가 개인을 망쳐가는 듯, 그 개인의 사건이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면 개인과 사회 어디부터 틀려먹었을까? 그것은 그런 개인과 사회를 만들어낸 아이의 거울인 어른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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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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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定議)와 정의(正義)이다. 특히 후자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만남과 충돌, 다툼 등을 겪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 정치적인 동물이므로 어느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만큼 인간은 혼자가 아닌 전체적인 사회적인 구조에서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아주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쉽지가 않다. 정의는 항상 정의롭게 지켜오기 보다는 정의롭지 못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의는 이 세상에 완벽한 이데아(Idea)로서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정의를 찾아 해매거나 혹은 정의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정의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회인 유토피아라면 굳이 정의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란 자신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욕망에 따라 정의 역시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망이라 하여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가령 쾌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인간이 그 쾌락을 어디에 가치를 두는 것일까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가령 부당하게 남의 나라 및 지역에 침범하여 죄 없는 인간들을 납치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도록 강요하는 노예소유주들은 정당한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대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가치가 있다. 이것 역시 쾌락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사하게 해줄 수 있다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자신의 아이가 살아남길 바라는 욕망일 것이다. 단지 그 욕망의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점이다.


그렇듯이 이 사회에서 인간들은 갖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의식주(衣食住)라는 기본적인 생존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주 영역이 만족하지 못하다. 누구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행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탄생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 태어남의 시초에서 그 자체만으로 누구를 억압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기본적인 자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지 태생적인 부분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관이 등장하는데, 이런 문제가 과연 정의로운지 다룬 것이다. 물론 유리한 태생과 유리하지 않은 태생에서 다소 그 개인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사회적인 차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차로 인해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행위는 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사회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인간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지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그런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분명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상실하여 평생 자신과 자신의 후예까지도 현재 자신의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존 롤즈의 정의론(正義論)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정의에 대해 심도(深度) 있게 다룬 것이다. 물론 1번 독서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책의 수준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과 같은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같이 참조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 대한 정의를 논하므로 정의론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안건으로 통해 정의에 대해 논한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윤리(倫理)라는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영역에서 논리, 윤리, 물리 중에서 가장 높게 인정하는 게 윤리이다. 윤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이 되어야 필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윤리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 중에서 다른 사람이어도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성사가 되면 안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 이타심이란 나와 관계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제3자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최소수혜자이란 점이다. 최소수혜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본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류이다.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놓고 본다면 이것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인 불충족으로 자신들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문화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거나 특히 이들의 2세들은 교육에 대한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겐 인간으로서 사회적·문화적으로 공평하게 누릴 평등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질적인 부분에서 같이 즐기는 것까지는 분명 잘 못된 것이나,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면 안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이다. 부정의한 사회가 되면 결국 누군가는 그만큼의 피해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부정의는 더 크고 무거운 부정의를 막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필요악적인 부분이다. 부정의 그 자체가 하나의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회다.


문제는 이런 부정의에 논함에 있어서 당하는 주체가 언제나 사회적·경제적인 약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敎育)의 기회, 문화(文化)의 기회, 정치(政治)의 기회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함에 따라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배우지 못함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올바른 판단과 문화의 향유를 느낄 수 없다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좋은 활동을 할 수 없다.


분명 이런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존 롤즈는 경제 자유주의 체계에서의 개인의 재산영역을 인정하나 거기에 맞추어 그런 재산영역에 해당되지 못한 개인들에게도 충분한 사회적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부분으로 넘어온다면 이런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같이 고려하여 이들에게 행복이 갈 수 있는 최대 행복을 추구함이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에 논함에 있어서 공리라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이익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느 이익을 대해 어느 소수에 대해 배제함으로 그 이익을 만들어 보는 것이 공리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공리주의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이고 또한 자신 이익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런 비윤리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항상 발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가 만족하면 그것으로 멈추지만, 인간의 욕구는 한시적이지 못한 상시적으로 변하는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런 욕망이 다수의 인간으로 구성된 논리로 이루어지면 이른바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는 점이다.


인간이 이익에 연연하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거나 생활권 내지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대다수의 구성원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정의로 변하게 되고, 거기서 반대되는 쪽이 소수의 약자일 경우 그대로 배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는 하나의 정의로 변하여 결국 정의가 아닌 부정의로서 정의를 실천(實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유 경제주의에서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런 타인을 자유를 박탈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부류는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 소수약자들이 거세게 반항하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공리주의를 논한다면 소수약자를 배제함에서 그 사회는 이미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리주의적인 정의는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길 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당한 부정의에 대해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은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이다. 특히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만약 어떤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면 국민이 이에 대해 양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의한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국가는 이런 국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서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조직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자가 자신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해당되는 사람을 위해서 국민의 의지를 무시하게 될 경우 그것은 충분히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이 중간에 간간히 보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에서 군중보다는 일부 시민들의 정치를 선택했다. 물론 지금 국민직선제로 뽑는 정치가들 역시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를 임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우수한 두뇌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인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과 윤리의식이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많은 진통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은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국민들이 모두 평등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적·사상적·종교적 등 다양한 자유를 누릴 자유가 있다.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의무와 권리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자신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와 평등을 위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 존 롤즈는 평생 정의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고찰해 왔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 입장을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이타심과 윤리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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