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C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유럽이든, 당시 유럽 사회는 상당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후 계속되는 산업화와 자본화 그리고 점차 뚜렷하게 나누어지는 빈부 격차로 통해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상(思想)과 혁명(革命),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크나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 중심 사건에 세계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철학자인 마르크스가 등장했다. 그런 마르크스가 과학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기 전에 유럽에는 엄청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헤겔이었다. 헤겔이란 인물은 변증법(辨證法)이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의 변증법적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철학은 독일 비판철학(批判哲學)을 세운 위대한 철학자 칸트를 이은 인물이었다. 물론 나는 헤겔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한다. 내가 헤겔이란 인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시대에 헤겔의 변증법이 한창 유행했다는 점과 최근에 잠시 읽어본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처음 알았다.

어째든 헤겔이 칸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그의 철학에서 인류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변증법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그런 철학적 업적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칸트의 사고방식을 많이 수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누구나 자기 발에 맞는 척도와 손들, 그리고 구두를 만드는 일에 필요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그리고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는 사고와 이성을 위해 계속된 연구, 배움, 노고로 통해 이룩해야 하나, 현실에서의 인간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현존하던 시대에도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어떻게 적어 내려갔을까?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정말 그렇다. 오히려 무지의 배일에 가려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치관과 사고들이 절대적 가치이며, 진리라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칸트나 헤겔처럼 그렇게 자신의 형이상학(철학)에 대해 진지한 공부나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짧은 지식과 알량한 사고로 대가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리석은 가치와 사고는 하나의 도그마로 떠오르고, 그렇게 떠오른 오류들은 절대적 진리로 되어 교조주의적인 인간들을 양성시키게 된다.

칸트는 이런 인간의 이성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사고로 통해 인간 선험적인 부분을 대해 관념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했다. 물론 이런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직후에 칸트는 인류 최고의 도덕윤리교과서(그것은 다소 많이 어렵다고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했다.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기 앞서서 먼저 순수이성비판으로 통하여 칸트는 어떤 상황과 관념에 대하여 변증법적인 상황으로 거론했다. 그리고 각각의 사고와 주장을 각각 다른 논리와 사고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서술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함이 옳은가?

그게 바로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싶다. 나의 짧은 지식과 걸음마 단계의 수준으로 칸트라는 거장을 다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처사다. 하지만 그의 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분명한 단어의 사용과 의미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 단어에 묶인 의미에 대한 접근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항상 생각하고 말을 하며, 말로 통해 타인과 대화로 통해 사회생활도 한다. 또한 몸을 움직이면서 인간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상황에 따라 2가지 상황에 닥칠 것이다. 어느 1가지 사안이 자신에게 이익 즉 사애(私愛)가 될 것인지 혹은 이타(利他)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그런 자기 욕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욕심을 절제하고 타인에 대한 인격적인 사고, 즉 윤리적인 사고를 중시했다. 또한 법과 제도에 따른 강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완전한 의무보단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통한 비강제적으로 나타나는 불완전한 의무를 중시했다.

불완전한 의무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것은 정말 존경받아야 행동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 대해 이 책의 역자이신 백종현 교수님이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버스를 타던 젊은 남학생이 약 30분 동안 서있었는데, 우연히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어느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버스에 타서 그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례를 보인 것이다.   

사실 그 젊은 사람이 반드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절대적인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은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자신의 편의를 조금 손해 봐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윤리적인 행위로 타인에게 편안함을 주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이성적인 판단이었기에 충분히 존경받을 행위다.

실천이성비판은 솔직히 말해 단어와 문구는 어렵지만, 그 단어와 문구 속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 그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의 말처럼 그런 부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인의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타인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이 사회를 되돌아본다면 자신의 모든 부족함이 이미 충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안락함을 빼앗는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고, 또한 이득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여 자신의 음흉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칸트는 비판했다.

실천적인 이성행위는 윤리적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에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일정한 사안을 두고 인간들은 대립하는 경우도 생기고, 또한 자신의 논리적인 자세로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하나 그 모든 이성 즉 논리에서는 윤리적인 요소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칸트가 이 실천이성에서 보여주는 사고는 즉 인간의 가치관에 대해 그것은 법과 제도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한 타인의 배려다. 인간의 윤리적 가치라는 것은 곧 자신만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칸트가 죽은 뒤에 칸트의 묘비에는 자신이 남긴 말이 돌에 새겨져 인간의 기억이 끝나는 그날까지 기록되었다.

 

그 글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사실 나는 이 문구에서 별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는 존재이다. 그 별이 칸트의 위에 빛나는 것은 어두운 하늘에 작은 별빛들이 곧 어두운 인간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희망 즉 자율적인 의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칸트의 마음 속 깊이 있는 도덕법칙은 이 세상을 좀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칸트의 진정한 소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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