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개밥바리기별을 읽는 것은 왠지 모르게 조금 내 가슴에 담고 있는 허무와 알 수 없는 반항의식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유명한 작가로 활동하시는 황석영 선생님이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젊은 시절의 여담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민 개밥바라기는 허무함과 알 수 없는 자신을 혹독하게 하려는 어느 청춘(靑春)의 눈물이 보인다.

그 청춘은 단순히 남들처럼 혹은 시대적인 흐름에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먼 발치에 있기를 원한다.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 소설의 서사적인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보통 소설은 1인칭 내지 3인칭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1인칭이 3인칭이 되고 3인칭이 1인칭이 되기 때문이다.

1인칭의 시작은 베트남전에 떠나가는 준이다. 그는 분명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행동을 했어도 많은 것을 허비한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찾아 계속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모험도 하였다. 그런 준이에게 세상이란 그저 허무한 공간이었다.

개밥바라기별, 어느 유랑노동자인 대위의 말에서 준이는 자신의 운명은 저기 초승달 옆에 떠이는 금성처럼 작고 희미하고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별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보면 황석영이란 작가가 어린 시절 그리고 철부지 같은 청춘이 얼마나 덧없이 보냈었고, 그것이 다시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에 큰 상처를 들어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제주도 산자락을 올라가는데, 준이는 수박을 잘못 먹었는지 산자락 정자에서 그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잘생긴 어느 한 여자가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말에 그는 허무한 느낌을 최대한 보인 듯이 친구가 죽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말이다. 준이는 어둡고 무서운 과거 속에 친구를 잃었다. 그것도 눈앞에서 말이다. 

준이가 미친 듯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이나 첫사랑 미아의 눈으로 통해 그가 사실은 미아를 좋아했으나 미아 그 자신은 준이에게 질렸다는 것을 나는 주목한다. 준이는 미아를 사랑했으나 미아는 준이가 미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준이의 눈에는 항상 어딘가를 향하고, 대화를 이어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준이는 그렇게 마음속에 큰 공간을 담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방황한 인물이었다. 그런 상처로 준이는 자퇴를 하게 된다. 도저히 이 사회라는 공간을 그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준이를 볼 때는 마치 나는 상황주의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심장병에 걸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대고 총알을 때려 박은 기 드보르처럼 말이다.

사실 준이가 자퇴할 때 준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준이에게 있어서 정말 구역질나는 존재였다. 준이가 자퇴를 위하여 국어선생인 황새에게 자퇴사유서를 낼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준이는 스펙타클의 사회 즉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적은 사유서는 마치 이 사회와 학교는 권력자들의 존속을 위한 감옥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가 감옥에 갇힌 피카소에게 감옥에 갇혀 안되었다고 했지만, 피카소는 친구에게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감옥에 살아가는 것보다 났다고 말이다. 준이는 그것을 심각하게 느낀 것이었다. 왜 그토록 느끼고 싶었을까? 아니면 어느 사회학자 말을 빌려 감옥의 존재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준이는 분명 그나마 살림이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과 같이 살아가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준이에게 좋은 직장에 살아가기를 그리고 노동자의 자녀들과 부랑자 같은 아이들과 놀기 바라지 않았다. 그들과 멀리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준이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世界)로 녹아 들어갔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준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몰래 타는 무전여행(無錢旅行) 기차 칸에 만난 약초상들, 농가에서 만난 농민, 바다에서 만난 어부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친구들 준이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고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맛봐야 했다.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와 신라에게 패망하여 치욕을 당하는 모습과 한일회담 반대, 독재의 그늘에서 아직까지 일제잔재와 625전쟁의 그늘은 여전히 당시 젊은이들에겐 크나큰 짊이었나 보다.

그런 세계에서 오로지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무엇일까? 나는 선이와 선이의 아버지 이야기가 유독스럽게 기억난다. 선이가 그림쟁이 정수의 만남과 동시에 집에 들어가지 않자 선이의 아버지가 정수를 때리면서 차후 그를 데릴사위처럼 데려가는데, 선이의 아버지가 증이 없으면 안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증은 건축과에 나와 취득하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다. 자격증은 기술을 배워 사회적인 인정받은 하나의 상징이다. 결국 능력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체계 속에 근현대 역사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중시키는 듯, 준이가 야간 공업고등학교 다닐 적에 한강의 기적을 말한 후에 미국의 어느 도시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준이는 모든 것을 속박하고 속박당해야지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싫어 했나보다. 어머니가 그토록 가까이 하지 마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니 말이다. 준이는 바른 사람이 되기가 싫어했다. 오히려 바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바르지 않아야 오히려 세상이란 기계부속품에서 벗어날 기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지 혹은 그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지 준이는 수면제를 과다복용으로 5일 만에 눈을 뜬다. 분명 지겹고도 지루한 세상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으려 했는데, 해방되지 못한 채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방랑인생을 뒤로 한 채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떠나야 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보내고, 친구들과 보내며, 또한 떠나간 미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들은 없었다. 집에 가니 점포를 정리하여 이사하려 하고,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 현실에 살고 있으며, 미아는 눈내리는 그 공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허무한 과거를 보내고 준이는 기차를 타고 어둠 속의 터널로 간다. 어둠 속의 터널은 프로이트적인 부분으로 성적인 묘사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알 수 없는 내일이고 그 내일은 오늘이란 혹은 현재란 시간의 코앞이다. 앞이 알 수 없는 지금이야 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늘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 속에 개밥바라기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허무함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