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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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定議)와 정의(正義)이다. 특히 후자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만남과 충돌, 다툼 등을 겪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 정치적인 동물이므로 어느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만큼 인간은 혼자가 아닌 전체적인 사회적인 구조에서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아주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쉽지가 않다. 정의는 항상 정의롭게 지켜오기 보다는 정의롭지 못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의는 이 세상에 완벽한 이데아(Idea)로서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정의를 찾아 해매거나 혹은 정의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정의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회인 유토피아라면 굳이 정의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란 자신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욕망에 따라 정의 역시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망이라 하여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가령 쾌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인간이 그 쾌락을 어디에 가치를 두는 것일까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가령 부당하게 남의 나라 및 지역에 침범하여 죄 없는 인간들을 납치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도록 강요하는 노예소유주들은 정당한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대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가치가 있다. 이것 역시 쾌락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사하게 해줄 수 있다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자신의 아이가 살아남길 바라는 욕망일 것이다. 단지 그 욕망의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점이다.


그렇듯이 이 사회에서 인간들은 갖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의식주(衣食住)라는 기본적인 생존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주 영역이 만족하지 못하다. 누구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행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탄생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 태어남의 시초에서 그 자체만으로 누구를 억압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기본적인 자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지 태생적인 부분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관이 등장하는데, 이런 문제가 과연 정의로운지 다룬 것이다. 물론 유리한 태생과 유리하지 않은 태생에서 다소 그 개인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사회적인 차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차로 인해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행위는 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사회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인간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지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그런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분명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상실하여 평생 자신과 자신의 후예까지도 현재 자신의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존 롤즈의 정의론(正義論)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정의에 대해 심도(深度) 있게 다룬 것이다. 물론 1번 독서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책의 수준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과 같은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같이 참조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 대한 정의를 논하므로 정의론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안건으로 통해 정의에 대해 논한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윤리(倫理)라는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영역에서 논리, 윤리, 물리 중에서 가장 높게 인정하는 게 윤리이다. 윤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이 되어야 필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윤리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 중에서 다른 사람이어도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성사가 되면 안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 이타심이란 나와 관계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제3자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최소수혜자이란 점이다. 최소수혜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본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류이다.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놓고 본다면 이것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인 불충족으로 자신들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문화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거나 특히 이들의 2세들은 교육에 대한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겐 인간으로서 사회적·문화적으로 공평하게 누릴 평등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질적인 부분에서 같이 즐기는 것까지는 분명 잘 못된 것이나,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면 안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이다. 부정의한 사회가 되면 결국 누군가는 그만큼의 피해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부정의는 더 크고 무거운 부정의를 막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필요악적인 부분이다. 부정의 그 자체가 하나의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회다.


문제는 이런 부정의에 논함에 있어서 당하는 주체가 언제나 사회적·경제적인 약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敎育)의 기회, 문화(文化)의 기회, 정치(政治)의 기회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함에 따라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배우지 못함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올바른 판단과 문화의 향유를 느낄 수 없다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좋은 활동을 할 수 없다.


분명 이런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존 롤즈는 경제 자유주의 체계에서의 개인의 재산영역을 인정하나 거기에 맞추어 그런 재산영역에 해당되지 못한 개인들에게도 충분한 사회적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부분으로 넘어온다면 이런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같이 고려하여 이들에게 행복이 갈 수 있는 최대 행복을 추구함이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에 논함에 있어서 공리라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이익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느 이익을 대해 어느 소수에 대해 배제함으로 그 이익을 만들어 보는 것이 공리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공리주의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이고 또한 자신 이익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런 비윤리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항상 발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가 만족하면 그것으로 멈추지만, 인간의 욕구는 한시적이지 못한 상시적으로 변하는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런 욕망이 다수의 인간으로 구성된 논리로 이루어지면 이른바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는 점이다.


인간이 이익에 연연하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거나 생활권 내지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대다수의 구성원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정의로 변하게 되고, 거기서 반대되는 쪽이 소수의 약자일 경우 그대로 배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는 하나의 정의로 변하여 결국 정의가 아닌 부정의로서 정의를 실천(實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유 경제주의에서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런 타인을 자유를 박탈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부류는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 소수약자들이 거세게 반항하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공리주의를 논한다면 소수약자를 배제함에서 그 사회는 이미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리주의적인 정의는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길 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당한 부정의에 대해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은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이다. 특히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만약 어떤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면 국민이 이에 대해 양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의한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국가는 이런 국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서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조직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자가 자신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해당되는 사람을 위해서 국민의 의지를 무시하게 될 경우 그것은 충분히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이 중간에 간간히 보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에서 군중보다는 일부 시민들의 정치를 선택했다. 물론 지금 국민직선제로 뽑는 정치가들 역시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를 임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우수한 두뇌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인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과 윤리의식이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많은 진통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은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국민들이 모두 평등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적·사상적·종교적 등 다양한 자유를 누릴 자유가 있다.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의무와 권리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자신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와 평등을 위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 존 롤즈는 평생 정의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고찰해 왔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 입장을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이타심과 윤리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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