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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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을 보면 3명의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돼지들 무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 돼지들이 군림하는 공간에서 돼지의 왕이라는 것은 곧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그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돼지란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인간의 단백질과 지방 등을 공급하는 식량원 중에 가장 중요한 가축이다.

그런 돼지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열심히 먹이를 먹고 먹어 언제나 살을 찌우기 바쁜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동물에겐 본능만 존재하고 있기에 언제나 그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돼지가 그것도 식탐이란 욕구에 충실한 돼지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존재가 과연 식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돼지들의 천국이 아닌가 싶은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함은 정말 하늘나라 선녀님이나 천사들이 있는 천국이 아니라 온통 더럽고 추악하며 차마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숨이 막히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런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우리는 돼지의 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 여인의 죽음부터이다. 그 여인은 주인공 중에 하나인 황경민의 아내였다. 작품 내의 대사를 들어보면 경민이가 대학을 다닐 시적에 만난 후배로 경민을 잘 따르던 여자인 모양이다. 그녀가 죽기 전의 정황으로 식탁위에는 음식이 차려진 것으로 보아 경민이 사업이 망해도 그녀는 경민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경민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를 목을 졸라 교사시켰다. 그리고 집안 주변을 보니 가득하게 붙여진 붉은 딱지였다. 경민은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여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의 친구였던 정종석에게 전화를 한다. 15년 전에 중학교 다닐 때의 친구인 그에게 전화한 것이다. 왜 경민은 종석에게 전화를 하여 그를 불러내었을까?

모든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경민은 샤워를 한 후에 자신의 몸을 검은 하늘이 보이는 창밖에 비추어본다. 거기에는 경민의 모습에서 어느덧 괴물처럼 보이는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한 마리의 추악하고 험상궂게 생긴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추악한 것인가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내내 상영되면서 반전을 이룬다.
주인공 경민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른바 왕따 혹은 학급 내의 불량하지 않은 불량아들에게 폭력과 횡포를 당하는 학생이다. 어느 중학교에서 흔히 보일 것 같은 아주 소심하고 약하고 비열하기도 한 인간이다. 그에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종석이다. 종속은 경민과 달리 집안이 무척 가난하나 평소 학급 내의 통치자에게 그다지 눈에 걸리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학급 내의 분위기가 싫었다. 반에 반장이란 녀석은 겉으로는 학급을 잘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는 사실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게다가 덩치도 좋았고 싸움도 조금 하는 편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반 전체 아이들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늘 경민은 수치스러운 장난을 당한다.

반장이 경민에게 다가와 경민의 바지에 손을 올린 후에 경민의 성기를 만지면서 조롱하듯이 약을 올린다. 그런 부당한 횡포에도 경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당한다. 다른 날이었다. 3학년 중에 자신이 총학생회장 대표라고 하는 사람이 경민이 있는 반에 찾아와 자신을 뽑아달라며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때 경민은 숙제를 다시 정리한다고 연설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숙제만 정리하고 있었다.

갈등의 발단을 지나 위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이다. 경민은 연설을 제대로 듣지 않은 이유로 학급 내의 반장에게 모지게 폭행당한다. 이때 보고 있기 거북한 철이가 나와 반장을 엄청나게 때린다. 물론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경민만 아니라 종석이까지 괴롭힘을 당해도 철이는 폭력으로 대처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과 종말을 동시에 알리는 비극이었다. 철이는 사실 인생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비관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나간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바람에 철이의 어머니는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성인용)노래방에서 일을 한다. 철이에게 보이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이며,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안에서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학교의 권력자들이었다. 


 


학교가 비록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기관이라고 하나, 사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런 축소판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암흑적인 면도 불합리적인 면이 많이 나온다. 철이는 자신이 겪은 사회적인 억압과 횡포에 직접 대항할 수 없으나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가능했다. 그는 돈도 많고, 권력을 가진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혜택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다는 게 죄라는 부분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선 철이는 아버지가 나간 것이 집안 가정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원인이고, 어머니가 윤락녀가 되어 경민의 아버지에게 맞는 이유도 다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종석이의 누나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이유도 다 가난해서이다.

왜 가난한 것이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중간을 보면 가난하다는 것은 죄가 되고, 그것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가난한 자가 억압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종석이가 학급의 반장 일행에게 폭력을 당할 때이다.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신발에 밟히는 클로즈업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 폭력의 당사자의 신발을 잘 봐야 한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은 나이키 운동화이다. 나이키는 유명메이커 상품이다. 이것은 곧 상품이 기호이고, 기호가 곧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곧 종석의 얼굴을 무참하게 밟는 신발 가격이 10만원이라면 실제 그 신발의 기능할 수 있는 상품가격은 3만원이다. 나머지 7만원은 나이키의 상표가격이다. 그것은 곧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기호의 소비가 작용하고, 그런 점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소비의 문화이기 때문에 결국 소비로 통하여 자신의 계급이나 위치를 나타낸다. 문화자본에서 소비경제능력은 문화의 지표를 나타나게 해준다. 그런 점은 무참히 얼굴을 밟히던 종석의 누나에서 알 수 있다. 종석의 누나는 집에 와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라댄다.

친구들은 모두 그 청바지를 사서 입는데, 자기는 그 청바지가 없어서 애들이 무시당한다고 한다. 흔히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는 소유하고 있는 반면 누구는 소유하지 못한다. 소유하지 않음은 곧 도태로 치부되게 되고, 문화적 공유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덕분에 단칸방에 살아가는 종석의 가족은 누나의 응석에 결국 그 청바지인 guess 블랙진을 사게 된다. 단칸방에 식구 4명이나 자는데, 그 청바지를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누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뒤쫓아 가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강박관념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 부각 받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은 욕구와 다른 점이다. 진짜 돼지는 먹기만 하면 배부르기만 하면 그 욕구는 다 한다. 인간의 욕구는 돼지와 처음에 같을지는 모르나 욕망은 다르다. 욕망은 욕구를 지나 인간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종석은 그런 누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소비사회의 인간으로서 욕망은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누나의 청바지를 입고 갔으나 문제는 여자청바지는 삼각형이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그가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니 학급반장과 그 일행들이 종석의 바지를 찢어 버려 칠판에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종석이 입고 온 청바지가 여자용이니 그것을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하여 하는 모욕적인 그림을 그린다.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히려 묵살하고 놀리는 것이다. 그래서 종석은 돼지들의 세계인 자신의 학급과 학교를 저주한다. 그런 곳에 종석의 친구인 경민 역시 저주한다. 자신을 때리고 놀리고 조롱하는 학급을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우선시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시골에서 전학 온 안경잡이 녀석을 특히나 그랬다.

안경잡이 우등생 천영이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처음에 그를 달갑지 않은 반장과 일행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연히 함정에 걸려 그들에게 대항하려 했을 때 옆 반에 있던 학생회장 졸개 하나가 천영이를 무참하게 때린다. 그 후 천영이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며, 반장 친구녀석이 그의 바지 위에 손을 올려 성기를 만져도 오히려 웃어댄다. 폭력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존재는 바로 철이였다. 철이는 경민과 준석이에게 모두 희망의 존재였다. 그는 패싸움을 하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유명한 싸움꾼이 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모조리 이겨주었다. 학교 선생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와서 철이를 때려도 철이는 학급반장과 옆 반 싸움꾼을 모조리 잡아 패버렸다.

철이는 유일한 돼지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돼지의 왕, 아니 돼지의 왕을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철이의 존재는 자신들만의 세계, 즉 안정화된 세계를 원하는 학급반장과 학생회장에겐 눈의 가시거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학생회장과 반장은 겉으론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하나 폭력과 협박으로 통치한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란 인간들 사회에서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보단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눌려 자신들이 이익을 보는가이다.

정치라는 것에 철학보다는 사익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폭력은 거기에 동원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 뒤에는 또 권력을 이용했다. 그것은 처벌이란 제도였다. 분명 잘못은 반장무리가 잘못하였으나, 모든 상황적인 최종 죄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철이었다. 정학을 당한 것도 심지어 퇴학을 당한 것도 말이다.

퇴학은 학생회장과 그 일당들이 단체로 경민과 종석을 붙잡아 가혹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방해물인 철이를 불러내어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철이는 굴복하기 보다는 떼로 덤벼드는 학생회장 일원들을 때려 눕혔으며, 최후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이프를 꺼내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녀석의 손등을 베었다. 



철이의 폭력은 권력을 잡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파시즘으로 얼룩진 학교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던 철이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죄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1학년인 이제 퇴학을 당하고, 집안은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객지에서 자살하여 죽었다. 더는 철이에게 삶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 철이에게 한 가지 다른 희망이 생겼다. 철이의 어머니는 언제나 죽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희망이 잃은 채 살아간다. 그런 철이의 어머니가 좌절할 때 철이는 모든 분노와 좌절에 이성을 상실한다. 철이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때마침 어머니는 노래방 사장인 경민의 아버지에게 모질게 혼나 그것이 서러워서 혼자서 울고 있었다.

게다가 가게 전화기로 자신의 언니에게 전화하여 사는 것이 어렵지만, 남편이 죽었지만 그래도 철이가 있어서 힘내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철이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를 죽일 수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를 괴롭히는 경민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경민이 때문에 노래방 사장이 경민이 아버지란 사실을 안 것이다.

철이에겐 더 이상 돼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다. 그는 퇴학은 당했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아버지가 객지에서 죽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모든 것을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까지 철이가 있어서 살아간다는 말에 죽을 이유도 없어졌다. 또한 학교에서 잘만 하면 퇴학에서 재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철이가 퇴학을 하고 나서이다. 철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퇴학을 당하여 미친 듯이 본드를 마시고, 세상을 저주할 때 그는 자살할 것이라 한다. 자살을 하여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던 부와 권력을 지닌 반장과 학생회장, 그리고 안일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교장과 선생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그런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모두를 절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거기서 인상 깊은 말은 철이가 만약 이들이 어린 시절 이후 어른이 되어도 이들은 과연 변하는가라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계속 커서 어른이 되어도 그들은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축소판에 있던 자들이 사회로 가는 것은 확장되어 팽창되어 나갈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압박이 강해질 뿐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약한 자들은 발버둥 쳐도 그 자리에서 헤맬 뿐이다. 그 말은 남동생 종석에게 뺨을 맞은 종성의 누나가 한 이야기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고등학교만 나오고, 결혼하여 자식을 놓아도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열심히 할 필요 없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억지로 손을 넣으려 한다. 그것이 비록 법적으로 틀려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뭔가 고칠 수 없을망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울분 정도는 보여주어 파장을 줄 수 있다. 3친구의 대화에서 그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 중학교 시절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좋은 추억으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가이다. 반장과 학생회장과 싸우고 대들어서 퇴학당한 철이로서는 그것이 최고의 복수였다. 만약 그 복수가 통한다면 반장과 학생회장은 더 이상 자신들의 부당한 폭력정치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한 월요일 조례시간 철이는 학교건물 옥상에 나타나고, 그대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그 뒤의 일로 종석과 경민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철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보고 다시 제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게다가 학교에 다시 오면 반장과 학생회장에게 더 이상 눈에 가시가 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려 한다. 그것을 위해 철이는 경민에게 자신이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면 비명을 질러달라고 한다. 만약 지르면 퇴학은 무효가 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자들은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날 철이는 떨어져서 죽는다. 그 죽음의 원인은 경민은 알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종석이 밀었기 때문이다. 종석은 철이가 죽어야지 자신이 비로소 지긋지긋한 학급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을 풀기 전에 분명 경민의 행동들이 비겁하고 줏대가 없었다. 철이에게 붙다가 전학생에게 붙다가 이제 다시 철이에게 가다가, 옥상에서 학생회장 일당에게 맞을 때에는 철이를 불러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겁한 경민보다 더 비겁한 것은 종석이었다. 종석은 마치 옆에서 관찰하고 지켜보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물론 철이의 광기에 동의하여 고양이의 배에 나이프를 찔러 죽인다. 반장과 싸움꾼이 철이에게 맞을 때 반장 친구녀석이 교무실 가는 것마저 길을 막는다. 그런 그가 철이를 죽게 한 것이다. 그가 철이를 죽이게 한 것은 돼지의 왕이 필요해서이다. 왕은 모든 것을 통치하나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희생양이었다.

왕은 곧 지배자이며, 하나의 제물인 것이다. 철이는 돼지의 왕으로 되기를 종석이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기 때문에 종석은 억지로 철이를 돼지의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 종석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경민은 15년 지난 후에 종석 앞에 그 비밀을 폭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민이 진정 자신이 돼지의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년 전에 이루지 못한 철이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종석이 학교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이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돌아보니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15년 전의 바로 그 자리에 철이가 죽었던 자리에 경민이가 자살하여 차가운 시체로 변한 것이다. 그때 종석에게 걸려온 종석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종석은 아주 무서웠다고 눈물을 흘리면 절규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로 지금 어디냐는 말에 그는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가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 돼지의 왕에서 돼지들은 이 현실에 살아가는 추악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들인 것이다. 마치 그것은 종석이 교실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주변 학급학우들이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돼지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약자는 그저 밟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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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서진 2020-05-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돼지의왕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누리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혹은 그 권리를 당연한 것이고, 만약 당연하다면 과연 그것이 나만 우리만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지은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로 프랑스 파리10(낭테르)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사람이다. 번역자는 이전에 자크 데리다가 저술한 마르크스의 유령을 번역한 진태원 교수이다. 진태원 교수가 주로 프랑스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도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 진태원 교수의 연구목적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아니 애초부터 진태원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참고로 역자후기를 유심히 보면 2011년 9월에 번역을 완료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갈등과 원인들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으로 통해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일들과 그리고 그 일들을 서술하는 발리바르의 연구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을 할 수 있다.

다소 철학적인 범주라기보다는 정치학 범주에 가까운 이 책은 정치라는 것 역시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나에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프랑스란 국가에 대한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 문제점이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자유와 평화 등 같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잘 지키고 보전한 국가로 알고 있다.

게다가 루이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와네트 여왕을 날카로운 단두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만든 국가이다. 그 후에 자코뱅파, 왕당파, 나폴레옹, 독일과의 전쟁, 세계 제1차 및 2차 대전 등등 그 만큼 많고 많은 전쟁과 혁명, 사건들이 늘 존재했던 나라이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프랑스 혁명 전에 있다가, 20C에 도달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문학자 롤랑 바르트, 실천하는 철학자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은 정신분석학의 권위자 자크 라캉 등 이른바 프랑스에서 등장한 구조주의와 그 뒤를 이은 후기 구조주의는 21C에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서도 그들의 철학과 사상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져 있다. 또한 프랑스는 철학과 더불어 피카소를 배출한 예술의 명국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자유와 평화, 철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에도 멍은 있었다. 아니 확실히 정말 이런 문제는 잘못되었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것은 오래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고,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한 행동들 역시 과연 자유와 평화를 외친 국가라는 슬로건에 부합되는가이다.

이전에 다른 도서에서 paris-match 즉 파리의 마치라는 사진을 보았다. 이 사진에는 어느 흑인 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며 경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 의미는 과거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합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광고인 것이다.

흑인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고 경례한다는 의미는 결국 흑인소년은 알제리 국가국민이고 그들은 프랑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흑인의 선택 범주에서 어른이 아닌 소년의 의미는 아직 그들은 어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여 올바르게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이 동양, 아프리카, 혹은 문화적 수준이 자신들보다 미개한 나라와 민족들은 문화적으로 우수한 국가와 민족에게 통치를 받는 것이 합당한 파시즘이 이르게 된다. 그런 파시즘을 이 책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다루고 있다. 파시즘은 상당히 무섭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적인 정치노선으로 통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국민들을 전체주의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즘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더불어 잔인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러 연합국 노선이 당시 그들의 투쟁은 옳으나 그 후가 문제다. 그들 역시 파시즘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파시즘을 척결한 순간부터 자신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하는 안일한 의식구조다.

혹은 그런 의식구조가 자기들에겐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자유와 평등이 없는 국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이른바 자본주의국가와 대립되던 (스탈린주의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은 탈이데올로기와 탈냉전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프랑스는 아주 잔인한 법을 시행한다. 어떤 정치인 법을 발효한다. 문제는 그 법에서 프랑스의 외국인들을 강제로 비행기로 태워 추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권과 의식에 대한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이 보냈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임부도 있었다. 임산부가 그 긴 시간동안 비행기 안에서 산통으로 괴로워하면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강제출국을 시켰다. 이게 과연 인권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프랑스에선 오히려 이것이 인권적이라 말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프랑스 안의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이른바 국민사회국가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이 파시스트로 변모한 것도 모른채 파시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극단적인 극우들은 유대인들의 묘지를 훼손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네오-나치즘이라고 했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무덤인 묘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주의를 외친다. 타자와의 경계선을 정하여 자신들의 가치가 옳다고 폭력적인 행동이 결국 애국이란 단어로 연계되는 게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태이다. 최근 얼마 전에는 어느 극우인물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사람 100명 정도가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행동들이 왜 일어나는가?

이른바 국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혹은 그 국민이 구성하는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자기 스스로 개선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닌 타자들에게 전가하여 자기비판에서 도피한다. 이런 방법은 프랑스에서 우파나 좌파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든지 혹은 노동자를 위해서라든지 어느 쪽이든 파시즘으로 빠진다.

그러나 본인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한다. 파시즘은 계속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나, 그 주범들은 각성하지 못한 채 계속 자신들의 파시즘을 정당화할 희생양을 찾는다. 특히 그것이 외국인이란 존재에 가장 부합된다. 초기 그들이 유입될 때에는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노예일수고 있고, 혹은 아메리카 드림처럼 해외이주로 통한 성공을 꿈꾸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낯선 타국에 와서 제대로 기반을 갖출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최하의 조건에서 시작하여 갖은 허드렛일이나 위험한 일들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도 점차 교육을 받고, 주변 현지인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치는가?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적인 행위들은 여지없이 터진다.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과연 자유와 평등에 의거한 인민주권을 외치는 것에서 과연 옳은가?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을 몰락시키려 한다. 방법은 많다. 법적으로 강제퇴거와 출국시키거나 또는 사회구조적으로 견디기가 어렵게 하던가?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주 쉽게도 혹은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고 실행하는 이들은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바로 그 무섭고도 잔인한 파시즘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되어가고 있는 셈인 것이다.

아마 그런 내용을 진태원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 역시 그런 파시즘에 빠져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생긴 대항세력 역시 파시즘화되어 간다면 결국 파시즘끼리 싸움이다. 그래도 문제는 먼저 파시즘으로 무장하여 파시즘을 만들게 한 원인부터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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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역해 / 문예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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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알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란 철학, 미학, 신학, 자연과학 등 많고 많은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형이상학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을 찾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보며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이란 정말 어려운 학문이나, 그 학문적 영역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나 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야에서나 흔히 겪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meta-physics라는 것은 physics의 물리학적인 범주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인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은 것에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란 분야는 형이상학적보다는 형이하학적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갖가지 풀리지 않은 분야나 또는 새롭게 정립되는 분야 때문에 자연과학이 고대그리스에선 철학자의 영역인 반면 지금은 과학자 또는 그 과학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공학자의 영역가지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미경의 발달이 아주 크지 않았나 싶다. 현미경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형이상학 영역에서 인간 그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 신체와 관련된 의학이나 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천체학, 생물학에서 당시 인간들에게 볼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포가 보이고, 인간 주변에 있는 미생물들이 보이며, 지구 멀리 존재하는 태양계 행성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신체구조와 작동원리, 해부학적인 학문발달은 인간 그 자체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사고와 다른 것을 증명했다. 물론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인식을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변화에서 인간 사고영역까지 변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그런 인간의 존재론, 인식론, 마지막으로 신학 영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학문으로 심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다룬 것이다. 단지 조금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형이상학에서는 물리, 논리, 윤리 3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리학을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윤리학 교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자료언급과 주석이 달리기도 하였다. 일단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그 서적 원본은 번역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철학교수가 연구한 내용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형이상학이란 학문영역은 인간의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영혼적인 부분이 많기에 쉬운 도서는 아니다.

단지 그 다루는 내용들이 너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접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생활 속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사유라는 것에 대해 단지 사유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 사유에 대하여 다시 더 사유를 하여 그 사유의 존재 근본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단순히 일정한 틀에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이 도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100% 옳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현대사회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학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아테네의 민주사회라는 것을 자신의 스승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예와 동물에게 사고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은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시대엔 노예사회가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 일부는 존재하겠지만 - 않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고, 노예 역시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과 이성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러면 노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면 그가 세운 형이상학에서 아무리 논외로 설정해도 그가 세운 학문적 뿌리에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 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면 재미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이 있는 그림을 본다. 플라톤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보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다. 진리는 플라톤에게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있다.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일 수 있겠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존재에 다가가니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적인 사고에 대해 분명 사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나 사유 그 자체는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을 그저 있다고 하여 거기서 끝나기만 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처럼 있음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영혼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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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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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이름은 이전에 어느 정도 듣고 있었다. 하워드 진 교수는 미국 역사학자라는 것과 얼마 전 작년 1월에 작고하신 20C와 21C의 사이에서 활동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하워드 진의 책을 직접 읽어보진 않았으나, 그가 예전에 MIT공대 노암 촘스키라는 언어학자와 함께 여론조작이란 도서를 같이 낸 것으로 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어 볼 때 마치 노암 촘스키의 도서 중에 예전에 내가 읽은 것들이 생각난다. 집에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로 통해 국제사회의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이 무엇에 의해 생기는지 또는 강대국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테러리즘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문화, 경제 등의 다양한 문제를 고발한 도서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겉으로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 없이 그저 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답게 미화되어 추악한 면을 마치 동화처럼 꾸민 신데렐라 신화와 백설공주 신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로 신데렐라의 신화는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며, 백설공주 신화는 매우 부도덕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디즈니 세계명작만화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흘러간다. 세상에 그렇게 좋겠지만 보이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 조차도 숨기고 조작한 이야기들을 고발한 작품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이라는 인물을 알고 이 책을 열어보면 그렇게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나, 모르고 본다면 충격 그 자체이다. 자유와 평등의 국가에서 어떻게 인종차별과 다른 국가에 저지른 범죄를 그것도 인권이나 윤리도 없이 말이다. 인종차별에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의 전통문화를 파괴했으며 또한 그들을 자유의 적으로 몰아버렸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인디언의 몰살, 그와 동시에 시작된 흑인에 대한 무차별적 대우는 미국이란 국가가 과연 자유와 평등이 있는가이다. 있기는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있지 못할 존재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쿠바, 멕시코에 군사작전을 펼치고,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때 묵인한 것도 모자라 원조까지 해주었다.

필리핀을 침공할 때에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육은 도가 지나쳤으며, 베트남 전쟁의 통킹만 사건은 이미 미국정부가 진실을 공개한 일이기도 하다. 전쟁을 일으키면 누가 이익을 볼까? 무기판매와 더불어 각종 공장에서 군수물자의 생산은 일부 기득권층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그들은 이전부터 계속 그렇게 이익을 가졌으며, 국민들에 대해 속이고 억압하려 했다.

가령 전쟁을 일부러 하기 위해 조작과 첩보활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아 국민을 죽음의 사지로 내몰고, 그들에게 전쟁을 원하지 않고 반대하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적어도 세계 2차 대전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러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역시 응징을 받아야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파시즘과 군국주의 요소를 자신들에게 가지지 않았나는 것이다.

그런 폭력적인 테러리즘 정치와 군사 활동은 오직 적을 만들어가고 그 적을 응징함으로 자신들의 정의를 관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정의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그 조직 내에서 흑인과 유색인종 차별은 극하게 심했다. 밥을 따로 먹거나 건물에 같이 못 들어가거나 특히나 대학도서관에서 어느 흑인대학생이 미국독립선언문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당하고,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빌리려고 해도 거부당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나도 읽어본 도서이다. 인간의 자유와 그 자유에 대한 책임과 권리, 그리고 윤리 등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보편적인 인권을 다룬 도서이다. 여자에게도 똑같은 정치참여권을 부여하고, 노예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책이다. 도서관에 자유론을 소장하고도 그 자유론에 대한 가치를 묵살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하워드 진은 그런 미국 역사의 오랜 인종차별과 테러리즘 정치, 그리고 하워드 진 스스로가 살아온 그 역사에서 그도 인종차별 반대와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평등 인권을 위해 활동하다가 대학교에서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책이 발매된 동기는 아마 2001년 911테러 사건이 동기였을 것이다.

테러가 일어난 것이 단순히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인가?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가? 물론 이런 극단적인 위협은 대외적으로 받은 것만은 아니다. 20C 초반에 미국 내의 많은 노동자들이 철도나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또는 경제지수의 변화에서 월급이 깎이고 해고당하기도 했다. 거리에 해고된 노동자가 분노하여 울부짖는데, 양심 없는 악덕고용주는 자신들의 주주배당금이 더 많아졌다고 좋아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분노한 대중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절규에는 단지 공권력만 투입되어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과연 자유와 평등을 기초한 국가일까?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보장하는 평등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고 싶으나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자유와 평등을 기초한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끔찍한 정치가의 이야기를 보았다.

영국의 전쟁영웅인 원스턴 처칠이 아주 유능하고 잘생긴 장교시절에 한 이야기다. 앵글로 잭슨족이 지배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자신들에게 라이벌이 되는 국가라도 말이다. 2차 세계 대전에 파시즘을 몰아내고 세계평화를 찾겠다고 하는 이들이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정치는 인정한다는 것 자체에서 과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보아야 하는가?

참고로 이 만화는 다른출판사의 다른만화시리즈의 제1번째 작품이다. 다른출판사의 다른만화시리즈 중에서 2번째인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작품이 있다. 본래 이 작품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팩션 영화를 만화로 만든 것이다. 만화이든 애니메이션이든 그 “바시르와 왈츠를”과 이 “하워드 진의 미국 만화사”를 같이 읽으면 조금 공통적인 접점이 보인다. 그것은 하워드 진 교수가 고발한 내용이 거기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ps. 2010년 1월에 작고하신 하워드 진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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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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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라는 도서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정치, 사회,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학자의 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이다. 이 책을 보자면 현대사회에서 세계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유명 대석학들의 의견과 사고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을 읽어보면 8명의 세계 유명 석학들이 길지 않은 페이지에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흐름과 현황을 적어 놓았다. 그들의 의견은 모두 조금씩 다르게 나왔으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로서 가치를 발현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세계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는 공산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의 2원화적인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된 운명을 바꾸어 버렸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 탈(脫)냉전 등의 단어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탈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조되면 될수록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완성되기 보다는 오히려 비뚤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다수의 국민이 가진 투표권을 토대로 선출되나, 그 투표권에 의해 추대된 정치대표자가 과연 정치적인 행보가 옳은지?

혹은 다시 투표함에 있어서 국민들 즉 주권을 가진 투표권자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한 활동을 하는지 말이다. 이들을 움직이는데 뭔가 강력한 미끼가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인 방법보다는 전체주의적인 부분이 강하다.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민주주의를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본다면 독일의 나치즘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민족 그리고 독일이란 국가를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야 했다. 자신들이 정당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를 자신들의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혹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던 그리스 아테네의 폴리스도 그렇다. 폴리스에서 정말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잘 운영하더라도 단 10%의 남자성인이었다.

이방인, 노예, 여자, 아이들, 그 밖의 소외계층은 무시되었다. 민주주의는 이때까지 누군가의 기반과 혹은 누군가를 국가의 적이나 사회 내부의 악적인 존재가 존재할 때 정말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이 책에서 아직도 고발하고 있다. 가령 기독교와 반기독교 사이의 문명대립은 과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가령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 대한 이질적인 존재감은 과연 세계 평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평화가 정당한 것인가 의심하게 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그것을 하나의 교조적인 잣대로 삼아 마치 신의 영역까지 올려, 더 이상 거기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여 그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목 높여 외치는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나 그 진리가 의도되지 않거나 혹은 조작되어 타인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국가적 정치에서 자유로운 국민 스스로의 권리를 찾을 때 민주주의라면 우린 어떤 역사를 보았는가? 예전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었는데, 18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는 독일군에 대항한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파리코뮈니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이 독일군에 저항한 이유는 당시 독일이 프랑스 정부와 짜고 프랑스 국민들을 국가권력 안에 가두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시민들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독일군과 독재로 억압하는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차마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무참히 파리의 시민들은 무장된 총칼에 무너지고, 점령된 파리의 거리는 총살된 시민들의 주검만이 무성했다. 맑스·엥겔스 평전에 본 당시 기록에는 10대 후반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몸이 아주 불편했고, 게다가 10대 중반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왜 이들은 이기는 것이 힘든 싸움에 총탄이 쏟아지는 그 거리에서 목숨을 던져 투쟁할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과연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과연 납득하게 될까?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단순히 국민들을 속이고 만든 하나의 상징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그 상징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최고의 적이 아닐까?

세상에 정보가 발전하고 교류도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국가인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는가? 민주주의라고 외치는 국가가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자신만의 이익에 충실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라고 외친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가장 잔혹하고 비겁한 상징이다.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절실하게 유용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제는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들은 그것을 파악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른바 소비의 사회와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거대한 인간의 욕망과 수동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주인 없는 노예, 노예 없는 주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주인도 노예도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는 민주주의는 주인과 노예를 만들어도 그것이 아닌 것처럼 합리적으로 눈을 속인다. 그래서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닌가? 그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고, 이미지의 매개에서 이미지는 우리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존재이니, 그 욕망이 소비로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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