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 2단 접이 특수양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학고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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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보기 싫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내 곁이나 혹은 우리 곁에 또는 다른 사람의 곁이든, 그저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저 건강하게 지내기만 한다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귀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 좋은가 안 좋은가를 알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19C 독일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한 번 다투어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지 그 사람이 정말 친해질 수 있는지 아니면 친해질 수 없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계속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 다툴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옆에서 혹은 멀리서 그가 다투는 모습만 봐도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안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는 노무현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무현은 다양한 이름으로 담겨있다. 정치인, 사상가, 변호사, (좋거나 혹은 나쁜) 대통령 등등이다. 그래도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 노무현은 좋은 사람이다.


실제로 볼 수 없었으나, 그저 TV의 뉴스와 신문, 잡지 속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인간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못한 가시밭길과 같은 고난이었다.


가난은 물론이오, 갖은 협박과 음모, 그리고 조작들 그 속에서 그의 인생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노무현의 신화는 화려한 이야기보다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그의 신화는 영광과 성공보다는 좌절과 패배의 맛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좌절과 패배 뒤에서는 고통 받고 있는 약자들이 있었다.


그가 비극적인 신화의 주인공이도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자신보다 더 어렵고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배운 게 없어서 백이 없어서 고통 받아본 사람은 그도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노무현보다 더 가난하고 무식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공장에서 월급도 못 받고, 다쳐도 보상도 못 받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했는데 억지로 잡혀 들어가고, 그것도 부족해서 갖은 폭력과 성희롱, 협박과 공갈 이 모든 것이 노무현이 넘어가야할 신화 속의 고난이고 모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화의 주인공처럼 그들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로 보면서 눈물도 흘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모욕과 조롱을 받고 일어섬으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르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모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가 탄핵당해도 그가 언론에 공격당해도 심지어 영혼이 신체에서 벗어나 한줌의 재로 변해도 말이다.


그의 죽음은 노무현의 이야기가 끝나고 노무현의 신화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 앞에 있던 피눈물은 다시 신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일 줄은 모르나, 정신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이 아니라 끝없이 태어날 것이다.


그가 원하던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은 배운 것이 없고, 가난하여 생계에 시달리고, 아는 것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냉대당하고, 힘이 없어서 부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꿈도 가진 채 희망을 품기를 원한 세상을 만들어갈 새로운 노무현을 말이다. 흔히들 인간이란 영혼을 가졌다는 관념 아래 정신적인 이성세계를 가졌다고 하여도 인간은 역시 마음을 가진 감정적인 동물인 것 같다.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이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떠오려도 그래도 역시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느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어느 사람들은 울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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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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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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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
문재인.김인회 지음 / 오월의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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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사상가 한 분 이름이 떠오른다. 그 분의 이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이전의 철학사에서 모든 철학은 다산학으로 마무리될 정도로 그 분의 철학은 이미 그 깊이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정약용 선생의 깊은 철학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 분의 행적과 자취를 생각하면 깊은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정약용 선생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은 그 분이 정치인이면서도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의학자 그리고 뛰어난 법학자란 사실이다. 예전에 다산연구소에서 왕성하게 연구하고 계시는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님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스승은 다산 정악용으로 신념을 두었다. 물론 그분의 위대하고 진지하고 깊은 세계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작은 존재이나, 적어도 그 분이 행한 업적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 정약용이 다산을 쓰기 전에 사암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붕당정치로 인해 곡산이라는 작은 마을의 목민관으로 부임한다. 그가 곡사부사가 업무를 맡을 적에 어느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계심의 난이라고 하여, 이계심이란 농민이 관아에 무리 천 명 정도 데리고 가서 항의하던 사건이었다. 당시 원님에게 물러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반정부 시위였으며, 정치적으로 신분이 엄격한 조선시기라면 당장 반역죄로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계심이란 인물이 정약용이 부임하던 그 길에 홀연히 나타나 다산에게 자신들이 처한 억울한 10가지 계목을 요목조목 설명하였다. 다산은 그의 말을 듣자 그를 오라로 묻기는커녕 자신과 같이 따라가자고 했다. 모두들 저 반역 죄인을 잡아 당장 치조를 하자고 원을 했으나, 다산은 딱 말을 잘랐다. 다산은 오히려 “백성의 고통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가 없다.”라고 했다.


과연 곡산부사로 오면서 자신의 마을에 얼마나 많은 폐단과 부정이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농민과 가난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원통함을 당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고 눈물 나는 일이다. 이계심의 사건처럼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 당시 조선 민중을 핍박했을까? 특히 군포와 같이 병역 대신 세금을 거두는 행위는 가렴주구 한 조선의 관료들은 백골징포와 황구첨정과 같이 시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군적에 올리고, 아직 배냇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까지 군적에 올렸다.


게다가 중간에서 관리가 횡령하고, 군수가 횡령하고, 중간에서 감찰하는 중앙관료까지 횡령했으니 나라에 세금이 오지 않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그런 원통함 사연을 오로지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암행어사였다. 물론 다산은 암행어사로도 활약했다. 그는 왕족과 고위정치가들의 친인척을 비롯해 주변 가까운 사람까지 고발하였다. 법의 적용은 제일 권력이 높은 사람부터 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의 법적인 태도는 이계심 사건만이 아니다. 함봉련 사건이라 하여 함봉련이 시비가 붙어 나무꼬챙이를 상대편에 찌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상대방 항문을 찔러 죽었다는 이유로 큰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다산은 당시 함봉련 수사를 하면서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로 통해 함봉련을 무죄 방면하였다. 운이 없었다면 그는 참수당하여 효시될 운명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정약용의 법철학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연구했다.


권력을 지닌 무소불위 대신에게 오히려 죄를 물었으며, 그 원한을 사게 되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 때 장기현과 강진군으로 유배로 갔다. 그때 다산은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민중들과 농민들을 울고 가슴이 찢게 하는지 다시 보게 된다. 강진군에 유배오고 나서 형제친구들은 모두 사지가 찢어지고, 가족들은 생이별하게 된 그 비극의 갈림길에서 다시 또 비극을 보았다.


당시 어느 농부가 군포세를 내지 못해 집안의 소 한 마리를 관아에서 강제로 끌고 갔는데, 그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칼로 잘라내었다. 민에서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너도 나도 사람인데 왜 가난하고 힘 없는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까? 갈밭마을 아낙네는 고통에 사무치면 비명을 지르는 남편의 남근을 붙잡고 관아에 달려갔다.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아 피가 손에 철철 넘치는 상태로 말이다.


그러나 관아에 가면 무엇을 하리, 포졸은 관아 문에서 아낙네를 내치고 관아 내의 사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아낙네는 그대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아픈 이야기를 실감하면서 나온 시가 바로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이다. 한국 조선 국문학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시조이겠으나, 당시 이 시조를 짓던 다산의 마음은 피가 거꾸로 흘렀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그의 원통함이 말이다.


따라서 법이란 중요한 것이며, 법은 모두 사람에게 공평해야 한다. 특히 힘 없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특히 신중해야한다. 다산 정약용의 서적 중에 목민심서를 보면 형전육조가 있으며, 거기에 더해 흠흠신서라는 전문적인 형법을 연구한 도서도 있다. 그만큼 법이란 무서운 것이다. 법은 어느 한 개인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고,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멀리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귀양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적 음모나 억울한 사연으로 많이 끌려간다.


그렇게 가는 것도 억울한데, 그들에게 대해주는 동네주민들 역시 각박하다. 당장 와도 잘 곳을 걱정하고 끼니도 걱정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해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억울하게 형을 살아가는 존재의 설움이다. 그런 것은 다산이 살아있을 때와 죽고 나서 지금 2012년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왜 권력을 해체하고, 왜 권력을 분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 즉 인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란 도서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나, 사실 변호사 자체가 인간의 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변호사 자체가 인권을 위해 일하여 하나 오히려 인권변호사란 칭호가 나왔으니 얼마나 그 많고 많은 억울함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갔을까?


이 책의 말머리에서 그런 억울한 사연과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그 현상을 이 책에서 고발하고, 그것에 대한 대처방안을 강구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힘없는 국민들이 피해를 받으며, 그 사람들은 공포와 좌절감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검찰이란 단체를 어떻게 우리가 파악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결국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 사법고시 합격 후에 판검사가 되면 키가 2개가 따라 온다고 말이다. 하나는 아파트 열쇠고, 하나는 고급승용차 열쇠라는 것이다. 검사는 5급 사무관으로 임용되나 권한은 3급 부이사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게다가 특수조직에 엘리트이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통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검사라는 말만 들어도 억장이 무너지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무섭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바로 검찰이란 점이다. 한국 검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각종 고문과 불법심문 그리고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욱 확장하기 위해 이른바 마녀사냥 행위를 저지른다. 특히 공안정국이나 독재정치 시에는 법의 중립성을 지키기보다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 권력의 중심까지 올라가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권력은 분산되어 각각 영향을 받지 않으면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은 마키아 밸리라는 군주론 저자도 말했다. 권력이 집중되면 더 이상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먹은 행동을 하면 누구도 관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현된다. 이번에 보이는 고급승용차, 외제 명품, 현금 수수 등의 일이 터져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인해 경찰에게 단속되어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음주운전으로 인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법을 심판하고 관장하는 이들이 법을 무시하고 법을 농락하면 누가 피해를 보는 것일까? 한국 사회는 이런 권력의 집중화가 결국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사실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희귀한 정치이데올로기에서 보수적인 자유주의정치는 권력이 국민들을 통제하면 안되는 원리를 가진다. 즉 자유라는 것은 국가에서 관여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그 보수의 자유주의 원리조차도 지키지 않는다. 어떻게 본다면 20C 초중반에 세계적으로 대세인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다.


검사조직은 일본에서 그대로 담습 했으며, 일본에서는 독립군을 죽이고, 조선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법을 강제적으로 집행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했고, 죄를 짓지 않아도 목에 올가미를 뒤집어 씌웠다. 이른바 권위주의적 엘리트적인 검사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마찰이 있었는가?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결국 필자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 중심으로 화두를 던진 그런 문제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상당히 계보학적으로 작성되었다. 서문에서 보이던 철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학자의 글을 보고 사유하고 철학적으로 법을 접근하려고 했다. 철학적으로 접근한 미셀 푸코라는 프랑스 구조주의학자 및 그 외 다양한 학자들을 사상과 철학을 접해 가면서 이 서적은 단순히 정치사회도서를 지나 정치사상에 대한 법철학 도서까지 올리려 했다. 그런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문재인, 김인회 검찰을 생각한다는 정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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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2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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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것은 정말 쉽게 생각하고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이고, 게다가 그 존재들이 모인 단체, 조직, 사회, 국가, 연합 등 다양하고 크고 작은 그룹 조직이 있기에 인간의 정치적인 영역은 널리 뻗어 나간다. 그러나 그 정치적인 영역은 단순히 정치라는 것에 이끌려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인자에 의해 변화한다.

 

심지어 신대륙 발견, 천동설에서 지동설, 종의 기원, 무의식의 발견, 컴퓨터와 자동차, 컴퓨터와 핸드폰 이 많고 많은 것이 정치라는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 막상 논하면 많은 문제와 벽에 걸린다. 그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로 보이는가 라는 다양한 의문들이 터져 나온다.

 

정치적으로 일단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보자.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자유주의 공화국이다. 즉 국민들이 주권을 가지고, 평화롭게 자신의 의지와 권리를 가지고 살 천부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제 정치를 택하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시민이다. 공화주의 국가에서 국민과 시민은 전쟁으로 인해 목숨과 재산에 위협 받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에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란 단순히 나와 내 옆, 혹은 우리 지역과 다른 지역, 또는 국가와 국가라는 대등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내라는 존재가 다른 지역과 다른 국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구조적, 세계추세에 영향을 받으므로 정치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있을 것이나, 이제는 개인이 죽더라도 정치적인 담론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대 그리스 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은지가 2,500년 가까이 되어도 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계속 가속화되어 철학의 기원으로 살아간다. 인간에게 정치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의 정치적인 영향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가 태어나는 위치와 공간, 부족과 토질, 국가적 상황과 지역적인 현황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지도 않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사항에서 결정된다. 인간은 어떻게 보자면 결정적인 삶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운명의 고리에 태어난 인간이 이미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치적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인간이 정치적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문명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찾아가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곳에 살아가는 원시부족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소수민족에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수렵과 채취로 통해 계급의식이나 신분도 만들지도 않은 채 그저 벌거숭이처럼 살아가는 자연 그 자체 말이다.

 

사실 정치는 문명과 사회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정치의 시작으로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치는 삶의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심지어 국가적 의결사항이 아니라 지역자치단체, 회사, 동호회, 가족 단위의 소단위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경험으로서 아동기부터 배우는 것이고,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교과과목으로 사회, 윤리, 도덕 등의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목들은 정치적인 부분이 분명 연결되어 있으나, 그 진실한 가치와 진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은 모두 인간존재에 대한 인격형성이 아닌 수험과 성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누가 어느 철학과 사상을 논할 뿐이지 그것이 왜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없다. 물론 가르쳐도 중요하지 않은 분야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쉽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본인이 서평하고 있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이란 도서는 상당히 좋은 책이다. 솔직히 정치학은 어렵다. 더구나 정치 뒷면에 가려진 철학과 사상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의 뿌리가 되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기원들을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 즉 폴리스의 민주주의부터 시작하자고 하자. 그리고 당시 탁월한 논쟁자여 인간 이상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예로 보자.

 

사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다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인 업적과 연구만 해도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갈 것이다. 게다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인 관념을 우리가 알아가야 할 것이다. 철학과 사상에 대하여 현대부터 들어가도 결국 그것에 대한 기본 과제는 고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다고 하여 정치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 조금 다가가려 해도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다면 정치사상의 본래 취지인 인간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배려가 아닌 배타로 넘어갈 위험이 높다. 하지만 정치사상이 너무 쉽게 간결하고 지나가는 전봇대와 같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널린 전봇대 수보다 많다고 하여 그 인간 개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인격체란 의미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통용되던 정치사상과 철학, 게다가 학교수업에서 배우는 윤리, 도덕, 사회 등에서 나오는 많은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대표적인 사상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알려주는 부분은 철학자 한 명당 적으면 3~4페이지에서 많으면 10페이지 가까이 되지만, 그 부분으로 통해 어느 누가 있었고 어느 누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키를 제시해준다.

 

정치가 철학과 붙어있었으나 그것을 최초로 분리하게 하여 정치가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군주론의 마키아 밸리부터 토대로, 독일 관념철학의 창시자 칸트, 변증법의 헤겔, 노동자의 대변자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유의 기초를 다진 존 스튜어트 밀, 인간 기존 윤리라는 착각을 비판한 니체, 군중심리와 대중문화를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 20C 새로운 철학자 중의 영미철학자 존 롤즈, 하버머스, 구조주의의 미셀 푸코 등 수 많은 학자들을 어떤 정치적인 테제로 통해 분리했고, 그들이 전개한 논리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철학자들의 사상과 정치적 사유를 단 몇 페이지에 기록했다고 하여 우습게 생각하지 말 것이다. 실제 그들이 저술한 도서를 읽는 순간 그들이 사유하고 정리한 철학적, 사상적인 전개를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에 대한 얼마나 깊은 통찰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로서 이루어진 인류의 보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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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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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진치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서 이 조르바라고 하는 특유하고 괴팍한 노인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사실에 많은 당황함을 느꼈다. 그 조르바라는 인물은 너무 특이하고 낯설고 또는 너무 가깝게 여기게 만드는 남자였다.

 

아마 이 소설에서 나라는 인물은 니코스 카진치키스일 것이다. 그의 행로에 대해 잘은 모르겠으나, 그가 아마 이 소설로 보이는 내용으로 보아 조르바라는 남자가 그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조르바라는 남자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기에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끼고, 조르바가 죽어가는 순간 조르바의 죽음을 알았을까?

 

자신의 곁에 없는 조르바, 하지만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은 조르바의 죽음을 느끼고, 조르바의 영혼을 숨 쉬었다. 그는 조르바와 다른 사람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조르바의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주 고생스러우며 마음 아팠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느끼는 내 감정은 아마 인간의 본연의 가치 내지 존재적인 희열일 것이다. 마치 조르바를 보는 순간 이 말이 생각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조르바에겐 신이나 천사나 혹은 악마든지 뭐든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신이 되려는가? 아니면 악마가 되려는가?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오는 싱클레어 모습처럼 그 자신의 존재의 여부가 선악으로 이원화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되었다.

 

그런 만큼 조르바의 깊은 상처와 슬픔, 고뇌도 너무 깊은 바다처럼 캄캄했으며, 그가 용솟아 오르는 춤과 흥처럼 모든 것을 초월했다. 이 작품 후기에서 나오듯이 작가인 니코스 카진치키스는 니체를 아주 좋아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 송도 좋아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의 작가 호메로스도 좋아했다.

 

니체를 좋아한 만큼 그의 조르바를 볼 때면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찬사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생각난다. 포도주는 모두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나 모두를 미치게 한다. 하지만 이 자애롭고 잔인한 디오니소스야 말로 신중의 신이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주인공 갈탄광의 사장이 술집에서 만난 조르바는 그저 직설적이고, 공격적이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철학 이상이 있었다.

 

아니 그는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조르바라는 끓는 피가 흐르는 노인이 말이다.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그의 말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또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후회를 버렸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비우고 모든 것을 채워 넣는 마법의 항아리였다.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갈구했다.

 

맛있는 고기와 생선을 게걸스럽게 먹고, 술을 있는 그대로 부어 마시고,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은 이방인과는 춤으로서 대화했다. 늙은 카바레 여가수인 오르탕스 부인을 유혹하여 그녀를 자신의 성적 욕망으로 갈구하다가 마치 아주 귀찮고 피곤한 여자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유혹의 나락에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손으로 갔다.

 

억지로 만들어져 버린 약혼과 그 뒤에 결혼식, 그런 결혼식을 마치고 오르탕스 부인은 이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험한 인생의 종지부를 마치고, 인간처럼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조르바와 더불어 탄광 사장이 보는 앞에서 결혼했지만 결국 병으로 죽는다. 조르바는 새로운 여자를 찾아 그냥 갈 것으로 보일 인간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부인을 저주했고 부인을 탐욕했고 부인을 사랑했고 부인을 애도했다.

 

부인이 병으로 땀과 진으로 침대가 범벅되어 냄새가 코를 질러 죽어가는 순간, 동네 주민들은 그녀에게 장송곡이라 해두고 그녀의 집에 가서 있는 물건을 가져갔다. 그녀의 모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말이다.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 숨소리마져 끊어지자 동네 노파들과 청년들은 성난 이리 떼처럼 몰려들어 오르탕스의 물건을 가져간다. 심지어 창문과 대문까지도 말이다. 남은 것은 오르탕스의 뚱뚱한 발바닥이 새겨진 낡은 신발이었다.

 

모두 오르탕스 부인이 죽기를 바랐고, 그 이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르바만큼 눈물을 흘렀다. 매우 격정하고 고뇌했다. 그녀가 매우 불쌍하고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죽고 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자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어간 오르탕스 부인을 대신해 열심히 살아가려 했다. 그리고 엉덩이가 펑펑한 젊은 과부와 그 과부의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며 새로운 인생을 꾸린다.

 

조르바는 오늘 죽기를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오직 오늘만을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철학이 메마른 곳에 성직자조차도 성난 이리와 잔혹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르바가 소크라테스처럼 죽음과 경계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 유쾌하면서 비극적인 조르바, 하지만 그것은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는 터키와 불가리아와 많은 시련의 투쟁을 거친 것 같다. 조르바는 자신도 용사가 되어 불가리아의 병사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그것만이 최선의 가치라고 알았다. 어릴 적에 터키 사람에 의해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조르바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발에다 키스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이라고.

 

그러나 조르바는 그것이 엉망임을 알았다. 국가, 종교, 민족, 사상 그 많고 많은 존재들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어디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해방한 그였다. 그가 그리스인을 위해 총을 들 때 불가리아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어느 불가리아 집에 들어가서 어느 여성을 발견하고, 한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한손으로 그녀의 커다란 유방을 잡는다.

 

여자는 공포에 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조르바에게 자신의 침대에 와서 같이 밤을 보내게 해주고, 게다가 불가리아 옷까지 빌려주어 그를 탈출시킨다. 조르바는 그 후에 귀대하여 파르핀으로 그 동네를 불사르면서 그녀가 그 슬픈 과부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슬픔은 불가리아의 유명한 신부의 암살이다. 그 신부는 매우 유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났다.

 

그래서 조르바는 그 신부가 마구간에 오기를 기다린 후에 잠복하여 그 신부의 목을 베어 그 목에서 귀를 잘라간다. 어느 날 무기를 숨기고 와서 동네장터에 오니 어느 꼬마들이 구걸한다. 그 꼬마들은 굶주리고 여의고 희망이 없이 눈물범벅되던 애들이다. 그런데 그 애들의 아버지가 신부였다. 오! 이런 자신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조르바는 모든 돈과 구매물품들을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었다. 진정한 자유를 말이다. 오히려 자유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부수고 말았다. 윤리라는 척도가 오히려 인간이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윤리, 또한 철학까지 부수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그 인간들을 가두는 윤리 같지 않은 윤리, 철학 같지 않은 철학을 부수고 버리고 조롱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고 사랑한 것이다.

 

그런 조르바를 보는 젊은 사장의 눈에서는 많은 심정의 변화를 느낀다. 나는 이 사장의 이야기에서 슬프게 여긴 것은 오르탕스 부인과 더불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오렌지나무의 과부이다. 그 과부는 몸매 라인이 매우 아름답고, 블라우스 밑으로 살짝 내려가자 그녀의 젖가슴 윗부분은 매우 하얗고 탐스러웠다. 조르바는 그녀가 사장을 좋아함을 알고 있었다. 조르바는 그녀에게 진정한 자비와 인간답게 대하는 방법은 사장의 딱딱한 껍질을 파괴하라고 했다.

 

그녀의 가슴을 붙잡고, 입술을 깊이 음미하고, 그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이다. 음흉하고 야하고 짐승 같은 것이 그녀를 구원하리라고 말이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세상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들은 혼자이고 싶지 않다. 여자들은 모두 집에서 기다리나, 남자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전쟁에 가서 죽이고 죽여 가엾은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었다. 조르바의 정력은 과부들과 고아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 과부는 아름다움이 죄인지 동네 청년 중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반대를 하여 자살을 하자, 그 청년의 가족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 아무 죄도 없는데, 단지 과부라는 이유로 말이다. 교회 안에 몰아넣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남자에게 조르바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나 자신의 귀가 찢어지고, 젊은 사장은 말리려다 저지당한다. 결국 그 오렌지나무를 키우는 아름다운 과부는 여자로서의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 채 목이 베인다.

 

그리고 그 목은 더 비극적으로 교회 문턱에 버려진다.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인 인간의 윤리인가? 신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그녀는 무참히 생을 마감한다. 축복받지 못한 운명에 농락에 당하며, 사랑조차 받지 못하며, 경멸 속에서 죽어간다. 과부를 보면서 조르바는 슬퍼한다.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은 테인데 조르바만이 슬퍼한다. 사장도 슬퍼한다. 그렇지만 이 두 남자 외에 슬퍼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오렌지나무의 과부가 보낸 향수 좋은 물을 젊은 사장에게 있는 것을 알자 조르바는 그 물을 몸에 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주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는 그렇게 욕심 많고 격정적이고 음흉하고 직설적이나, 그 누구도 진실적이었다. 니체의 책에서 나의 주변 사람들이 아닌 나의 주변 외의 사람에게 친절하라고 한다. 자신 안의 인간을 사랑하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와 성직자는 그저 조르바에겐 나쁜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얽매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로 있고 싶은 초인, 그 초인 조르바, 그의 죽음은 결코 죽었다 할 수 없다. 그가 아주 잘 타고 아끼던 산투리를 젊은 사장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듣던 사장은 그가 죽기 전에 크게 웃다가 울다가 생명의 촛불이 껴졌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면서 슬퍼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나누던 그 젊은 사장의 회유할 수 없는 슬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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