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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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敍事, narrative)라는 이야기(story)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주인공에서 우리는 어떻게 보고 느끼고 판단해야 하는가? 서사에서 주어진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이 가진 고뇌와 좌절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기만의 해법들은 우리는 또 다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보고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을 판단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그 틀 속에서 넣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역사는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시는 그 누구나 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듯이, 서사라는 존재는 인간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을 하고 싶어서, 즉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는 진실과 허구가 섞여 있으며, 거기서 진실보다는 허구가 더 인간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닿는 경우가 많다. 진실이란 이미 옆에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것을 깊이 들어다 볼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누가 보통 식단에 앉아 밥을 먹고, 평범한 의자에 앉아 공부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이야기라면 그 누구라도 눈에 힘을 주며 집중하여 보겠는가?

 

그런 특이하지 않은 상황, 일상적이라도 쉽게 일어나지 않은 미묘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에서 인간의 관심이 쏠린다. 인간이 듣고 싶거나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그냥 그대로의 정해진 패턴이 아니라 그 패턴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들이 재미를 느끼고,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들은 옆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주인공에게 마음은 쏠린다.

 

그 세계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낯선 대상이나, 그 세계에 있는 가상적 존재 즉 인간과 사회들도 나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뭔가 비슷하다. 오히려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지금의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현재 있는 그대로만 보이는 것보다는 다르게 보임으로서 다르다는 인식을 전해주다가 결국은 그것이 현실에 이어짐을 발견한다. 어차피 영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하다못해 스텝진 모두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모든 서사에서 진실의 이야기가 마치 거짓말처럼 보이면 어떨까? 이번에 읽어본 만화책 푸른 알약(PILULES BLEUES<프랑스어임)을 어떻게 내가 받아들어야 할까? 우선 이 만화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만화가 제9의 예술이다. 제9라고 하여 거의 마지막 꽁무니에 있다고 해도 예술은 예술이다. 그렇지만, 왜 예술인가라고 말한다면 이런 표현이 맞을까 싶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푸른 알약은 정말 삶이라는 것을 광학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만화책을 만든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라는 만화작가의 삶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고 그 이상(異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그의 삶은 이상적(理想的)인 삶이 아니라 비합리성(非合理性)에 있다고 해도 무색하지 않다. 아니 합리(合利)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 해야지 바를 것이다.

 

그는 결혼을 했다. 그것도 아이가 딸린 이혼녀와 말이다. 보통 한국에서 젊은 남성이 이혼녀에 그것도 아이까지 딸려 있다면 수많은 반대와 질타가 쏟아진다. 한국에서 이른바 보수적인 사고관념 중에서 가족이란 사회적 단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유교 중에서 성리학적인 관념으로 조선 중후기가 시작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관계있다. 약간 아이러니하지만 성리학적인 관념이 사라지고 서구적인 관념이 들어와도 여전히 건재하다.

 

사회적 개방과 진보가 도래해도 이런 부분에 항상 민감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다면 할 수 있다. 가족의 성립은 사랑과 배려라는 기본 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보수적인 부분에서 위와 같은 이야기는 거의 조선시대와 가깝다. 그래도 거기에 반항해도 이것만큼 어려운 것이 있다. 배우자가 평생 살아갈 수 있을 최소한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경제적, 사회적, 그밖에 조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 상대방이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이 있는가이다. 이 작품 주인공이면서도 작가인 프레데릭은 그런 봉변에 처했다. 그와 결혼한 여자인 카티가 에이즈 양성이 나온 환자였다. 더더욱 심각한 상황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에이즈 감염자로 태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에 그 환자의 아들마저 감염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견의 모든 일상생활을 버려야 하고,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 눈에 띄지 않은 어디서 숨어 지내던지 혹은 격리병동에서 일생의 최후를 마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최종목표란 매우 비관적이라 희망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전 일일 것이다. 그런 카티와 카티의 아이를 프레데릭은 맞이하기로 한다. 19살 고등학교 졸업하던 시기에 그것도 2살 많은 연상의 여자에게 반하여 다시 만난지 6년 만에 재결합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보는 우리 독자로 하여금 매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이타적인 프레데릭을 보면서 정말 착하고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말 엄청난 착각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그는 에이즈감염자를 아내로 맞아, 감염된 채로 태어난 아들까지 그의 아들로 맞이한 것이다. 외국인 유럽에서 어떻게 볼지는 모르나, 동양권 문화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충격이다.

 

그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가상속의 이야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프레데릭에겐 완벽한 현실이었다. 젊은 나이에 에이즈에 걸린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중요한 것은 둘 다 사랑을 하고 싶은 동물적인 인간, 혹은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에이즈라는 틀에 그들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페이지 1장에서 6컷으로 나누는 장면에 마치 작가가 침착하게 관찰하듯이 그려간 작품이나, 그 작품을 이해할 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열렬한 사랑에 과연 나도 이런 상황에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남자인 프레데릭은 초조한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한편으로 쿨한 모습도 나온다. 콘돔을 착용한 채 성행위를 카티와 나눈다. 카티가 에이즈 환자라고 하여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와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가치관이 조금 흔들렸다. 에이즈 환자와 콘돔을 착용하고 성행위를 한다고 하여 그것이 완전한 안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로 콘돔이 파손되거나 혹은 상처가 난 부분에 혈액이 들어가거나, 면도칼이나 부엌칼에 서로 찔릴 수 있는 위험은 있지 않은가?

 

후반부에 가면 카티와 성행위를 한 프레데릭이 실수로 콘돔에 무방비적으로 손가락을 건들게 된다. 문제는 단지 맨 손가락을 건든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에 손가락이 베여져서 피가 새어 나오는 그 손가락으로 콘돔을 만진 것이다. 의사에게 찾아가서 혹시라도 자기가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는지 고민하던 프레데릭의 모습에서 현실의 세계는 얼마나 냉혹하고 고된가 싶다. 그는 자기 의심으로 인해 자기 입안에 염증이 생기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의사에게 말한다.

 

물론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으나, 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뛰어넘기는 넘는다.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니까! 그래도 끝난 것은 아니다. 카티가 있다면 카티의 아들이 있었다. 이제 태어난지 몇 년도 안되는 카티의 아들은 카티에 비해 에이즈에 대한 신체저항력이 약했다. 에이즈환자가 먹어야 하는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 소년은 약이 맛이 없다고 싫어한다.

 

심지어 시럽 같은 것에 타서 주어도 그 맛을 알아챈다. 그래도 카티는 아들에게 먹일 수밖에 없다. 그 푸르고 푸른 알약을 말이다. 그것이 자신과 유일하게 피가 이어진 세상의 마지막 존재인 아들을 더 자신 곁에 두고, 아들은 다시 어머니 카티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화책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둘러보는 나에겐 하나의 충격에 가깝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푸른 알약 속에 모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모자와 그것을 지켜보고 사랑해주기로 하는 프레데릭, 인간의 사랑이란 과연 어디까지 향하야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그리고 자신주변에 놓여있는 현실과의 싸움이다. 푸른 알약은 그냥 보면 잔잔한 호수 위를 보는 것처럼 흘러가지만, 그 호수 밑바닥에는 상당한 심한 와류가 존재한다. 남들이 보면 그냥 넘어갈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그러나 그 이야기는 작가의 현실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찬찬히 흘러가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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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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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존 유럽 철학에서 근대철학자로 데카르트, 루소, 볼테르, 몽테키스외 같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18세기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철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이 있다. 그들은 프랑스 철학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과 사상을 남긴 이들의 업적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프랑스의 숙적 독일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등장은 철학의 기조가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 후로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 니체, 프로이트와 같은 철학자, 사상가, 사회학자 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 미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 독일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생각했으나, 독일에 히틀러의 등장과 더불어 나치가 유럽을 망가뜨리고 있을 때, 다시 철학의 거대한 틀은 프랑스로 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철학과 사상계열이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은 철학과 사회학을 지나 정신분석학, 계보학, 문학, 인류학 등 다양한 인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조주의의 등장은 곧 세계 사상계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구조주의학자 중에서 유명한 4인방이 있다. 인류학자이면서 콜라쥬 드 프랑스라는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에서 강의하게 된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 니체를 이어 진정한 자유와 인간이 믿고 있는 인식 그 자체가 억압이란 것을 폭로한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어 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한층 더 성숙시킨 자크 라캉, 그리고 문학과 더불어 기호학에 큰 업적을 남긴 롤랑 바르트, 이렇게 4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소개하려는 이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 1명이 들어가고 롤랑 바르트는 빠지게 된다. 그 1명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이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 중에 다른 한권을 전에 읽어보았는데, 그는 진실로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한편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을 끊임없이 대립하여 꾸준히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철학은 자신이 믿고 있는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 새로운 가치관을 세상에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다.

 

어떻게 본다면 언행일치로서 선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철학과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단지 그리스철학은 당시 그리스에서 통용되고 사고되는 것이지 세상이 바뀌고, 조건이 달라지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서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철학은 있어도 그 철학은 단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지, 그것이 그 자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루이 알튀세르의 판단이게도 이번에 읽은 <재생산에 대하여>는 철학적인 도서보다는 차라리 사회과학적인 도서에 가깝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가 왜 철학적인 도서가 아닌 <자본>과 <공산당선언>을 저술했는지 생각하면 루이 알튀세르 역시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는 분명히 철학자이지만, 내가 읽은 도서는 철학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보다는 현실 속에 보이는 인간의 과학적인 고찰이 주요 관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거기에 대한 성찰이 오히려 더 철학적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은 세상을 바르게 만들어가야 하는 하나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책임에 대해 이 책을 한번 읽으면서 내가 생각나는 점은 예전에 마르크스의 자본(도서출판 길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 번역)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자본 3편에 대한 국내번역본 5권에 비하면 이 책은 상당히 적은 분량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시 마르크스 자본을 보고 지금 루이 알튀세르가 보고 있는 프랑스와 그 동안 프랑스가 살아온 현실을 적용한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과 갈등, 그리고 희생과 도전이라는 변증법적인 관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도서 1권이 생각났다. 구조주의자 1명인 미셀 푸코이다. 예전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 루이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는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과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믹스하여 그 중간마다 프랑스 역사를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제일 기억나는 점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는 방법은 어느 조직의 하나의 존재로 만드는 법이다.

 

인간을 하나의 조직체가 되고, 그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하고, 그 인간이 말을 잘 듣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 수동적인 인간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지휘해야 하는 인간이 필요했다. 그 지휘하는 인간은 수동적인 인간들을 다룬다고 하여 그 자체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단지 그 수동적인 인간에 대해서만 능동이지, 그 능동 자체도 하나의 수동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단체생활을 한다면 그 단체에 대한 장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리더는 과연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인간은 단순히 매뉴얼에 움직이는 머리라고 한다면 말이다. 현대사회에 오면서 엘리트라는 존재는 분명히 엘리트적이지 못한 인간들에 비해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 엘리트가 군림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나 혹은 조직들이 그 엘리트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엘리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직적인 사회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을 더욱 더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다.

 

인간들은 그런 관계 속에서 계속 지배당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될지 모른다. 가령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국가에서는 주권은 국민과 시민들에게 있다고 하나, 불과 한국은 을사늑약과 합일강제병합이 체결되기 전에는 조선이란 국가는 영원한 군주를 위한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군주국을 정립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이다. 또 다시 넘어가 루이16세가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18세기 프랑스에서 봉건적인 국가가 영원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거나 혁명이 일어날 시기만 국민과 시민이 국가체계 전복을 꿈을 꿀 뿐이지, 그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다. 만약 그 꿈을 누군가 옆보고 있다면 그는 당장 다음날 목이 잘려나간 채로 광장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나 혹은 성문 앞에 걸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존재에 어울린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들여져 갔다. 그것은 국가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감시와 처벌에 보면 임금을 살해하려한 남자가 미수에 끝난 채 간단히 죽이지 않고, 왕과 대등한 수준의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앙상 레짐(구체제)에서 왕에게 신체적 존재와 더불어 권력적 존재가 함께 했다.

 

그렇게 존재하는 왕권신수설 내지 절대왕권의 힘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결국 그렇게 만들도록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은가 이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국가적 권력을 위한 도구이며 장치인 듯하다. 가령 유럽에서는 모든 국가에서 가톨릭을 신봉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한국의 가톨릭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가톨릭이 존재했다. 물론 다른 가톨릭이라도 가톨릭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가톨릭의 최정상의 권좌에 앉은 자가 문제였다. 그의 존재는 교황이다.

 

가톨릭의 종교적인 권위는 이미 유럽의 모든 왕권에 외교정치적인 압박을 전달할 정도로 막강했다. 문제는 이 종교가 하나의 권력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감시와 처벌을 보면 인간을 감시하기 제일 좋은 방법과 그 감시 속에서 길들이기 좋은 방법은 하나의 숭배의식이다. 신의 숭배로 통해 전 국민들이 종교를 강요하고, 그 종교의 신앙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교황의 성스러움 안위를 전도 받은 왕에게 축복한다. 결국 신의 대리인 중에서 최고의 권위자인 교황이 모든 유럽의 관념을 지배할 때 왕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사실과 거기에 따른 국민의 신앙심에서 국민의 신앙심은 국가체계에 대한 복종에 이어진다는 점이다.

 

재생산에 대하여서는 교회가 개인이란 존재를 가족들로 하여금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 교회에 가서 종교제의와 더불어 도덕적 가치관을 강요당한다. 그 가치관은 왕권이 또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도구로 쓸 수 있다.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정치를 못하고, 능력도 없는 무능한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군대 대부분 신분들은 귀족출신 장교보다는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로 이루어져있다. 군대 안의 병사들은 막대한 화기를 지녔고, 인원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장교가 붙어 있기도 하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누군가 발설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이다. 이런 두려움의 의심은 더욱 더 지배계급에게 영원한 권력의 확신을 준다. 인간의 두려움은 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을 이용하고 더욱 더 체계화하는 것은 조직적인 교육이다. 그런 교육이 처음에는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와도 그 기관은 존재했다. 교회가 인간을 교육을 맡았다고 하나, 근대사회에서 진정한 교육은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실시된다.

 

교육기관이 학교는 교회와 달리 더욱 더 철저하게 인간들을 감시하고 원하는 것을 교육시킬 수 있다. 물론 학교가 있음으로 인간의 문명사회는 유지되고 있으나, 그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순 역시 유지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새로운 부품이 교체되어야 한다. 학교라는 장소는 그런 곳이다. 감시의 효율과 감시의 처벌에서 우등과 열등의 상하를 나누고, 거기에 따라 충실한 노동자와 농민도 생가고, 정부기관의 요원도 생긴다.

 

어차피 국가가 돌아가기 위해서 국가권력이 하나의 장치로서 움직이려면 누군가는 계속 있어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부계층에 있는 존재가 계속 하부로서 머물고 있다는 점과 그 하부계층이 어떤 노력을 해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면 교육은 하나의 문학적인 장치다. 교육과 훈육은 국가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가 또 하나의 문제다.

 

그것은 아주 냉혹하고 처절한 엄벌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국가권력을 위해 공권력과 경찰력, 법적인 강제집행, 무력으로서 응징하는 군사력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동학운동을 했는데, 원인은 부정부패한 관리와 정치인들의 무능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강요한 성리학이 더 이상 하층계급에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군에게 밀리게 되자 일본군으로 토벌하게 된다. 190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을 보자. 공장운영자들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시내에 나와 평화시위를 했으나, 그들에게 온 것은 차가운 총알이었다.

 

차르 왕권이 보호해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외면했다. 국가적 폭력은 문화적으로 폭력적으로 대중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계속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계속 이어가기 위해 재생산이 필요했다. 누군가 재화를 생산하여야 할 이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톱니바퀴는 어쩔 수 없이 톱니바퀴로 이어진다. 부모님이 계속 대를 이어 자손을 남겨두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겐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오로지 자신의 몸만 있었으며, 이 몸으로 육체적, 정신적 노동만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용주에게 고용되는 것은 고용주와의 계약이라고 하나, 그 계약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망정 평등하지 못하다. 그 자유는 노동자가 자신이 일할 공장이나 직장의 선택이지,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점은 변함없는 점이다. 사실 이런 말이 기억난다. 고용주의 이익이 노동자의 이익일까? 노동자의 이익이 고용주의 이익일까?

 

그러나 기본적으로 후자보다는 전자편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다고 해서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에게 제때 급료를 지불하고, 노동기준과 시간, 작업환경과 위생, 각종 지켜야할 의무를 지킨다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등장하는 점이다.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작업공간에서 쉬는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과도한 노동에 급료도 밀리고, 임금도 오르지 않는다. 착취에 대한 분노에서 노동자들은 파업 내지 사보타지를 일으킬 것이다.

 

이 일이 발생할 때 윤리적 가치에서는 분명하게 원인제공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되어야 하나, 막상 현실을 보면 파업노동자들이 구속되거나 파업한 만큼 월급삭감 및 손해보상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파업의 강도가 심해지면 공권력이 투입되어 그들을 폭력으로서 막는다. 물론 자기가 태어난 가정이 먹고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나게 고민이 없다면 전혀 이해가지 않은 현상이나, 당장 내일 생존이 걸린 인간이라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생산수단이 없고, 오로지 노동할 육체와 정신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가장 심각하다고 여기는 문제 중에 국가가 이런 사항(파업과 사보타지)에 대해 원인규명과 적절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면 모르나, 지금 법의 진행이 인권중심보다는 개인에 대한 권리라는 점이다. 인권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그 인간 자체에 대한 하나의 권리, 즉 권리를 위한 권리라고 칭한다면, 개인에 대한 권리는 어느 개인이 가진 권리를 위한 것이다. 개인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고, 게다가 그 기회를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인 교육까지도 차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에서 도출되고 있으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도 도출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 내지 민주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미국 철학자 존 롤즈의 사상에도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언급하고 넘어간 것이다. 최소수혜자에 대한 최소의 기회가 있어야 공정으로서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만이 마르크스주의만의 고민이라는 것도 조금 웃기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런 고민들은 계속 진행 중이다. 아니 더 더욱 심각해진다. 부익부 빈익빈의 가속화는 심각해진다.

 

재생산에서 인간의 재생산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져도 사회의 재생산에서 희망 없이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이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분명히 나누어져 있으나, 노동자는 생산품만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생산된 상품에 대하여 서로 다른 프롤레타리아가 소비하고 있다. 즉 대중들의 대부분인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은 서로가 소비자라는 점이다.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권리가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과 시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부의 균형에서 고용주가 성공해야 고용인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들이 성공해야 고용주가 성공한다고 말이다. 결국 재생산되는 것에 대한 소비는 부르주아 계급보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재생산을 착취의 도구로 전이하고, 그 과정을 합리화하는 도구와 장치가 있음은 단순히 계급의 차이만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전폭적인 압력이 뒤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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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 - 조폭언론과 맞선 노무현 5년의 투쟁기록
김상철.김상철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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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독일 뭔휀에 유럽공동체 회원국 기자연합회와 여러 국제 기자조직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뭔휀에 모여 이른바 “뭔헨선언”이란 것을 채택했다. 그 채택된 선언은 이미 40년이 넘었고, 그 선언 전문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정보에 대한 권리,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 비판할 권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다. 언론인의 의무와 권리는 모두 시민이 사실과 의견을 알아야 한다는 이 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시민에 대한 기자(언론인)의 책임은 다른 모두 책임 특히 그 고용주와 공권력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그리고 왜 내가 이 선언문 전문 첫 부분을 이렇게도 인용하려고 했을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 과연 언론의 자유가 있는지? 혹은 언론의 책임이 있는지? 또는 언론의 윤리가 있는지? 등등 많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나는 의문이 드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언론매체가 너무 권력지향 적이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권력에 거슬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배제하거나 응징하는 것이다. 주변 친척 중에서 방송사를 상대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친척이 말하는 바로 언론계에 들어다 보면 많은 모순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언론방송계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엘리트적인 우수한 인재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좀처럼 구시대적인 요소가 다분하다고 했다.

 

 

물론 구시대적이나 신세대적이나 어느 쪽이 좋다 나쁜 것을 따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언론인들로서 가져야할 양심이란 과거나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도 구시대나 신세대나 모두 가져야할 하나의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자면 내가 이 글을 적는 것에서 약간 한쪽에 편향된 것이 아닌지? 또는 너무 깊숙이 들어다 보고 따질 수도 있다. 그 만큼 이 책에서 다루려는 내용이 너무 무겁고 민감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한번 2002년 유시민 전 장관이 저술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읽어 본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2002년 노무현이란 사람이 대통령 선거이전의 언론사와 싸운 이야기라면 이 책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그가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닐 때까지의 언론과의 전쟁을 다룬 서적이다. 책 제목도 정말 어울리는 도서이다. “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것은 부정하지 않을 사실이나, 그런다고 하여 모든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지지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자를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지지요소를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 없는 지지는 단지 종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어떻게 본다면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사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에 국민들이 많은 반응을 보낸다.

 

 

그렇지만 국민 대부분인 개인들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느 특정 정치가들에 대해 직접 옆에서 보고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가들의 옆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보고 들은 후에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로지 언론이다. 언론만이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어 보여주고 들려준다. 만약 그런 과정에 정말 제대로 전달했는지 아니면 거기에 누락되었거나 혹은 추가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방송매체나 언론매체에서 그대로 찍어낸 미디어만이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래서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서적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표지(출판사 민음사)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지는 실제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실제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실제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다. 이것이 바로 지시 대상도 테두리는 없는 끝없는 시뮬라시옹의 순환 속 시뮬라크르이다. 무언가를 감추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방송언론매체는 우리가 직접 눈앞에서 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방적인 관점이나 혹은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일부만 또는 허구의 것으로만 칠해버릴 수 있다. 진실이 아닌 허구이기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그 허구의 것들이 더더욱 진실일 수도 있다. 진실은 뒤로 가려진 채 허구의 이미지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여 나타난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실이 나와도 시뮬라크르이다. 과거에 뉴욕 911테러사건에서 분명 미국에 큰 비극과 많은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우리는 직접 현장에 가서 그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갔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실제로 그 비극의 현장만 남은 어두운 거리의 풍경만이 우리를 반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이미지가 녹화된 가상세계는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가 늘 살아오면서 이런 가상세계가 펼쳐져 있는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현대문명사회가 있는 어느 국가라도 이 미디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생 미디어부터 정보를 받고 그 정보에 따라 사람들은 움직인다. 그래서 지속적인 미디어의 노출 속에서 인간은 어느 특정 정보가 일방적인 정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즉 미디어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데올로기의 전환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에서 이데올로기는 과거 이상의 이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념이라는 것으로 바뀐다. 솔직히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눈에는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이나 그것은 현상화로 바뀌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양식과 일상생활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이미지라는 점에서 현대사회가 이미지를 매개하여 움직이는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스펙타클이란 것은 누가 고의로 혹은 누가 고의로 만들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현상화해버린 현실이다. 스펙타클의 존재에 노출되는 국민은 결국 대중(mass)이라는 존재다. 거기서 대중들은 군중심리로서 미디어에 반응한다. 그것이 정말 맞는지 틀렸는지 말이다. 그런 현상에서 가장 시달린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도 조선일보와 전쟁을 하였다. 그의 길고 질긴 언론사들과 전쟁이 이제 대통령이 되고나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번졌다.

 

 

이 책을 읽으면 평소 노무현하면 실패한 대통령, 개혁에 도전했으나 미완에 끝난 대통령이란 말이 나온다. 게다가 임기 종료 후에는 불명예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아마 당시 검찰과 수구기득세력권과 대형 언론매체에서는 그의 죽음을 분명히 노렸다. 그의 죽음 정치적, 사회적 죽음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정치적, 사회적 죽음 대신 생물학적인 죽음을 선택했다. 물론 그것이 자살이라고 해도 정말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 했는가 이다.

 

 

그의 죽음은 타살에 가까운 자살이다. 이 정치와 사회가 그리고 권력이라는 거대한 손이 말이다. 그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바로 언론사들의 작품이다. 대형신문업체에서는 노무현을 매우 싫어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고교출신 변호사가 엘리트집단에 오는 것부터 난색을 표했다. 한국의 엘리트주의에서 부산에 있는 상고출신인 노무현으로서는 반기지 않고 싶은 존재다. 게다가 현실 안의 거대한 권력에 의지하기보다는 그것을 저항했다.

 

 

니체와 푸코적인 의견으로 본다면 도덕은 정말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점이다. 아니라면 현실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 분명 그것이 틀리고 잘못된 일이라도 힘이 없는 이유로 부당하게 누군가에게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법적인 제도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의 룰이라고 한다. 도덕이라 것은 하나의 룰이다.

 

 

국가는 국가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그 권력들은 언제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가진 자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곧 거대한 세력들에게 제거되어야 할 존재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기득권세력들에겐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그를 죽이려면 단순히 그를 국가 권력을 이용해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사회논리로서 귀결해야 한다. 언론이란 것은 바로 폭력적인 언어로서 사회를 조장하는 하나의 선동자다.

 

 

이 책에서 보이는 일들을 보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과거정권에서 공약한 정책에 대해 당시 신문사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국방정책에서 전시작전환수권에 대해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냈다. 노무현이 처음 대통령이 되면서 전시작전환수권을 제기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 이전에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낸 그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연설문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면 분명히 그런 부정적인 언사가 아닌데, 그들은 그 연설의 중간만 잘라 붙이기 식으로 하여 부정적인 요소만 선전했다. 짜깁기라는 몽타주적인 요소를 반복하여 신문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거짓된 루머를 진실인양 보도했다. 만약 그것이 틀린 것이 들통 나면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응대했다. 조폭언론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런 책임감 없는 요소와 꼬투리만 있으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삽 하나만 판 땅에 마치 불도저가 지나간 것처럼 꾸며대었다.

 

 

그런 언론들의 권력적인 횡포와 폭언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끝날 때까지의 일이었고, 퇴임 후에 시골에서도 끝없이 싸워야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만을 겨냥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이들과 반대되던 한겨례와 경향신문까지도 포함했다. 그들은 평소 대형신문매체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막상 불리한 입장에 오면 마치 그들과 같은 페이스로 유지한다. 마치 자기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한 존재라고 말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대형신문매체만 비판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신문언론도 같이 비판했다. 자신들의 권력과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안위만 찾는 그 모든 언론을 비판한 것이다. 최근에 읽어본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진정한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일부분만을 위한 포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포괄적 자유주의도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하나의 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런 다시 내가 이 글을 적으면서 초반으로 돌아 가보자. 왜 뭔헨선언이 필요했을까? 내가 노무현을 좋아한다고, 이 글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꼭 그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그를 무조건 좋아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단지 내가 이때까지 글을 적으면서 그에 대해 제대로 한 번이라도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이 옳은 정보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미 야만의 언론 속에서 노무현은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노무현이 죽음을 선택해도 아직 이 글을 적는 나와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살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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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암살사건
조셉 로지 감독, 리처드 버튼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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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많이 감상하지 않은 나로서 영화배우에 대해 잘은 모른다. 물론 국내 배우 이름 몇몇이나 진짜 유명한 해외배우 이름 몇몇 정도는 기억한다. 그런데 1972년 리처드 버튼과 알랑 드롱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동시에 영화에 나온 줄은 몰랐다. 영화 제목은 트로츠키 암살사건이다. 제작감독은 조셉 로지로 내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대신 그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제작한 점과 이번에 제작한 트로츠키 암살사건 역시 영국에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든 만큼 이번에 출연한 알랑 드롱의 경우, 그가 1960년 전후로 등장하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라는 점과 지금도 왕성히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점에서 그가 30대 중후반에 들어서게 되면서 그의 연기관록이 이미 쌓은 만큼의 시기이니, 제목 그대로 트로츠키 암살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묘미는 트로츠키의 죽음에서 알랑 드롱이 연기한 킬러의 역할은 매우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허탈한 담담히 잘 드러난다.

 

 

트로츠키, 그는 레프 내지 레온 트로츠키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조지 오웰의 문학소설인 “동물농장”이다. 소설과 더불어 영화로도 봤지만, 트로츠키라는 인물에 흥미가 가는 것은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흉악한 돼지에 의해 무참히 정치적 숙청을 당하면서 동물농장의 미래를 불행한 폭풍우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무참히 쫓겨난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가 바로 트로츠키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을 겪은 러시아와 그것에 대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러시아의 무능한 차르 왕권과 봉건사회를 허물었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과 동시에 트로츠키는 레닌과 동시에 러시아혁명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트로츠키는 그 탁월한 능력과 윤리적인 가치,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질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다. 그의 태생은 유태인이었다.

 

 

아무리 다 같이 무능한 봉건사회에 핍박받는 군중이라도 러시아란 나라에서는 러시아인이 있었으나, 유태인이었던 트로츠키로서는 민족의 벽에서 자신이 레닌 이후 최고 대표를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트로츠키의 지식인적인 요소에 많은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이에 레닌이 지목한 6명 중에서 조셉 스탈린은 매우 난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군권을 조금씩 잡아가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모든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세력에서 트로츠키 주변 인물들을 배제하고, 트로츠키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선동을 했다. 그게 레닌 사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면서 어느덧 1929년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다른 국가로 추방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러시아혁명의 주요핵심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의해 그는 그렇지 못한 자라고 하였으며,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에서 트로츠키와 같이 활동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무능한 차르왕권과 귀족들의 악정에 지친 국가를 프롤레타리아의 국가로 가자고 한 볼셰비키 혁명이 어느덧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요, 우리 전 인류에게 큰 선물로 다가온 임마누엘 칸트가 1789년 자신이 살던 옆 나라인 프랑스에서 큰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가 늘 산책 가는 시간에 산책을 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체계가 전복되어도 다른 체계가 기존 체계를 따라 가는 것에서 혁명이 일어나도 근본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떻게 생각해보면 현대의 민주자유주의에서 그 시초는 프랑스혁명이 맞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목이 단두대 아래 나누어지면서 봉건사회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원인은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로 인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게 하나의 분노로 표출되었다. 또 다른 계급인 부르주아는 아무리 능력과 재산이 있어도 태생적인 문제로 자기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단합하여 왕족을 무너뜨렸다. 왕족이 무너져 세상이 변할 줄 알았으나 농민과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왕족과 귀족 자리를 부르주아가 대신하여 차지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 근본의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체제가 변화되어도 원점이라는 점이다. 물론 칸트의 생각을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토대로 꾸준히 봉건사회에서 공화제로 가고 있었다. 단지 그 과도기적인 기간 아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란 항상 희생을 토대로 세우진 것일까?

 

 

어째든 그런 역사적인 변증법적인 현실을 보아도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씩 변화하는 듯하다. 그래도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런 끝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만큼 그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식 역시 끝없이 등장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사이었다. 트로츠키는 비록 자신이 러시아에서 추방되어도 저 멀리 남미 멕시코에 있어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64년 마르크스가 만든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정신을 유지하여 레닌이 세운 제3의 국제노동자협회, 국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인 코민테른을 올바로 지속하기 위해 제4의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한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숙청한 스탈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이란 공산주의국가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무장한 공산주의로 전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분단선에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마찰을 빚는 북한이 바로 스탈린에 의해 노동자를 이름만 내걸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독재국가로 된 것처럼 말이다.

 

 

트로츠키는 11년 동안 망명생활하면서 계속 스탈린과 투쟁한다. 영화에서 보면 뭔가 집필을 하고, 연설을 하여 녹음하여 방송하며, 스탈린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스탈린에겐 강력한 무기와 병력, 그리고 권력이 있었으나, 트로츠키에겐 큰 힘이 없었다. 그는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정원이 달린 집에서 가축을 돌보고 식물도 재배하며, 밤에는 원고를 집필한다. 그의 무장력이 얼마나 없었으면,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하는 라몬 메르카데르이 반트로츠키파를 이용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할 때 트로츠키 일원들은 무력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청부를 받은 그들에겐 위장경찰복과 손에는 기관소총이 들려 있었다. 운 좋게 트로츠키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의 충직한 부하 쉘던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스탈린에 대한 저항심과 그 저항심과 더불어 지식인으로서 의무, 그런 그를 받쳐주는 아내 나타샤만이 존재했다. 트로츠키는 고립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프랑스에서 지원금이 들어와야 하나, 1940년 8월 트로츠키가 살해되기 전 6월에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광기와 그 광기 속에서 제국주의들의 욕망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식민지 국가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 현상에서 트로츠키의 존재는 스탈린에게 큰 혹이었다. 그의 한마디가 세계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트로츠키의 제거야 말로 스탈린의 최고 목적이었다. 당시 1929년에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쉽게 죽이지 못했기에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죽는다. 라몬 메르카데르의 손에 들린 피켈이 그의 뒷머리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트로츠키는 이미 죽음을 늘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서랍에는 권총 하나가 있었으며, 스탈린이 항상 자기를 노리고 있음과 오랫동안의 망명과 저항으로 트로츠키는 병이 있었다. 밤에 일찍 잠을 들지 않고,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인으로서 살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백발의 노년이라도 눈빛이 항상 살아있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인생을 본다면 끊임없는 투쟁과 혁명정신이다. 프랑스 위대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인간주의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이 트로츠키가 분명하나 그런 그도 폭력이라는 수단은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폭력을 부당한 폭력을 종언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스탈린과 스탈린 이전의 차르 왕권은 폭력을 지속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그 폭력에 저항하던 그는 테러리즘이란 폭력 아래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살아서도 혹은 죽어서도 스탈린에게 저항한 이유로 노동자의 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반트로츠키파의 행동을 보면 그들 역시 노동자 내지 일반 서민인데도, 트로츠키를 노동자의 배신자로 보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1990년 스탈린주의로 물든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되고, 이제는 공화국으로 변모되어 폭력으로 유지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없어졌다. 물론 본래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폭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권력유지에 힘쓰던 사람들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트로츠키라는 인물이 다시 재조명되고, 마르크스-트로츠키주의도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00% 트로츠키를 옳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 마르크스가 1867년 자본이 나올 때 17년 정도 집필했다. 그런 이유가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유럽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외교가 계속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바뀌고 거기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 말이다.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당시에 맞은 답이나 지금은 틀린 답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를 계속 알아보는 것은 그가 그냥 그대로 멈추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에 대해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현실을 본다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처럼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가? 어지러운 세계전쟁 속에서 파시스트들은 다른 국가를 짓밟고, 노동자와 농민은 계속 착취당하고 살며, 스탈린은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척,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는 척하며 그들을 착취한 현실에서 누가 가장 현실적인가? 라몬 메르카데르는 자신과 같이 호흡하던 요원의 대화에서 현실적이지 못한 인물이 트로츠키라고 했다. 현실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트로츠키가 비현실적이지 못했다는 말에 과연 당시 사람들은 이성적일까? 현실적일까? 라고 생각해보면 참 난감하다.

 

 

니체가 말했듯이 정치는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처럼 인간의 권력이 있는 자에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그 권력이 향하는 곳이 과연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해본다면 옳지 않은 것에 가고 있고, 게다가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가 당시 살아가던 사회의 도덕에 대해 깊이 유감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사회의 도덕에 대한 유감은 트로츠키가 살아가는 시대나 지금 내가 살아가던 시대 역시 유감적인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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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정치는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평생을 머물게 된다. 먼저 가족이라는 작은 혈연지간의 사회, 다음에 학교와 지역사회,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군대와 직장, 국가까지 연계된다. 사회라는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만의 의견과 생각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이란 사이를 이어주는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무엇이 필요 한가 라고 상기시켜보면 정치라는 큰 조율적인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사회라는 틀에 머물기 때문에 인간 본인이 사회적 존재가 아닌 동물적 내지 무의식 또는 식욕, 수면욕, 성욕까지도 사회적 영역에 벗어날 수 없다.

 

밥을 먹는 시간과 공간마저도 사회 안에서 이루어질 문제고, 잠을 자는 공간 역시 자기의 집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집인지 또는 집단 무리인지, 성욕도 부부의 합법적인 행위로 이어지는지 혹은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미성년자들끼리의 동의로서 오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난감한 상황이 계속 벌어진다. 인간이 가진 기본 무의식 욕구마저도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에 계속 변화가 온다.

 

인간이 동물적인 요소로 살아가는 것마저도 사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정치적인 영역 아래 영향을 받는다. 실제 저런 기본 욕구마저도 인간이 만든 이성과 그 이성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로서 통제를 받는다. 지나친 무의식의 표출은 사회에 큰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은 자기의 무의식적 세계의 표출과 또는 욕망,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행동하기에 정치적인 중재나 판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대부분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리고 자신 주변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현상에 대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이야기하고 옳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다른 누군가가 부정하게 될 경우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 타인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가 월등하게 높은 것이 인간 본인들의 운명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 나 역시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로 얼룩진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이익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그 집착을 받쳐주는 권력이나 힘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다.

 

실제 많은 역사적 기록이나 사건을 참고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란 결코 아름다운 문화 창조만이 아니라 투쟁과 전쟁,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많은 문제들이 문화 창조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즉 파괴를 위해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위한 기술 중에서 대중교통과 의료기술이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빠른 병력이동과 빠른 적군의 타격은 자동차, 선박, 항공기로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화학전, 생물학전, 방사능전의 공격이 약학과 의학, 그리고 엑스레이 등과 같은 영상진단장치 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의 갈등이 인간을 파괴하면서 이룩해온 인류의 문명과 역사 속에서 정치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 현재의 순간만으로 판단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과 저기 너머, 앞으로 다가올 미래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들,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문제에 난봉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와 사회에 대해 쉽게 말할지언정 그 정치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방법이나 가치들은 정말 찾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와 사회를 일상 속에서 말하고 살지만, 정치학과 사회학에 대하여 대부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며, 정치학과 사회학의 원류가 될 수 있는 철학을 더더욱 멀리한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 밸리의 군주론으로 통해 철학이 정치에서 분리된 최초라고 하여도 정치에 철학이 따라붙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는 인간을 상대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영역이지 결코 공학적으로 보는 수단적인 영역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고 고통 받고 억울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은가? 이번에 읽은 김만권 박사의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들”이란 도서는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로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담론하는 도서다. 이미 김만권 박사의 서적은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으로 통해 미리 접촉한 바가 있다.

 

앞에도 읽어본 이 책 역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맞으나 그 이야기 뒤에는 사상과 사상가가 있었다. 사상가는 결국 사회학과 철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2가지 책에서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을 쉽게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은 좀 더 내용이 깊이를 추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두 책에서 마키아 밸리의 등장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다루어야할 근대 내지 현대철학자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에서 철학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시 다루는 사건은 세계 제1차 내지 2차 대전이다. 20세기에 들어온 인간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는지 아니면 광기에 빠졌는지 당시 구분하지 못할 병폐가 세계 도처에 만연했다. 히틀러라는 독재자와 히틀러만큼의 난폭한 스탈린의 등장은 전체주의적인 사회와 국가의 권력이 민주주의사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로 이어지는 여파로 이어졌다.

 

인간이란 자기의 주관과 가치를 명확히 이해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개인이 자각과 판단 의지를 모두 살해당한 채 말이다. 인간의 광기가 폭발하던 시기에 인권이 무엇인지? 또 그런 인간들이 무참히 살아가야했던 지난 세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지 이 책에서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으로 풀어나간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많은 공감과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단순히 한 가지로 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런다고 하여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야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그 가치적인 영역에서 많은 고민이 든다. 루소가 인간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니체는 인간을 평등하다는 것이 오히려 불평등하다는 점, 인간의 자유적인 가치가 평등한 인권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권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 등등에서 어떻게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고 살아야할지 또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어야 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중(mass), 선동가(mobs), 시민(people, 책에서는 인민)에서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들이 선동가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구도를 지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듯 하다. 인간이 합리주의 사상이 나오기 전에 신을 믿는 신화적 세계에서 그것을 제거하는 계몽 자체가 다시 억압이라는 신화로 탄생했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가치라고 하여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억압과 비이성이란 형태로 나오지 않았던가?

 

아니면 인간은 너무 이성적인가? 혹은 아직 이성이 결여되어서 그런가? 내가 볼 때는 인간은 분명 이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은 너무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모든 경험적인 조건을 배제하여 순수하게 형이상학적 관념으로서 판단하려고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이성의 영역은 모든 인간에게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성 자체에 대한 의심과 비판 없이는 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에 어느 큰 비이성적인 대규모가 하나의 합리적 이성으로 변모하여 마녀재판을 열어 인간을 사냥하듯이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만 바라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간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만 남겨 놓는다면 그것은 육체라는 껍질만 지닌 인공지능 로봇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바로 전체주의적인 국가이며, 그곳에는 오로지 국가권력 합리화를 위해 약자를 계속 희생시켜야만 한다. 누군가 정의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그 사회의 정치적 도덕이라고 한다면 정말 정치적이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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