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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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敍事, narrative)라는 이야기(story)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주인공에서 우리는 어떻게 보고 느끼고 판단해야 하는가? 서사에서 주어진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이 가진 고뇌와 좌절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기만의 해법들은 우리는 또 다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보고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을 판단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그 틀 속에서 넣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역사는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시는 그 누구나 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듯이, 서사라는 존재는 인간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을 하고 싶어서, 즉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는 진실과 허구가 섞여 있으며, 거기서 진실보다는 허구가 더 인간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닿는 경우가 많다. 진실이란 이미 옆에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것을 깊이 들어다 볼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누가 보통 식단에 앉아 밥을 먹고, 평범한 의자에 앉아 공부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이야기라면 그 누구라도 눈에 힘을 주며 집중하여 보겠는가?

 

그런 특이하지 않은 상황, 일상적이라도 쉽게 일어나지 않은 미묘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에서 인간의 관심이 쏠린다. 인간이 듣고 싶거나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그냥 그대로의 정해진 패턴이 아니라 그 패턴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들이 재미를 느끼고,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들은 옆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주인공에게 마음은 쏠린다.

 

그 세계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낯선 대상이나, 그 세계에 있는 가상적 존재 즉 인간과 사회들도 나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뭔가 비슷하다. 오히려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지금의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현재 있는 그대로만 보이는 것보다는 다르게 보임으로서 다르다는 인식을 전해주다가 결국은 그것이 현실에 이어짐을 발견한다. 어차피 영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하다못해 스텝진 모두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모든 서사에서 진실의 이야기가 마치 거짓말처럼 보이면 어떨까? 이번에 읽어본 만화책 푸른 알약(PILULES BLEUES<프랑스어임)을 어떻게 내가 받아들어야 할까? 우선 이 만화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만화가 제9의 예술이다. 제9라고 하여 거의 마지막 꽁무니에 있다고 해도 예술은 예술이다. 그렇지만, 왜 예술인가라고 말한다면 이런 표현이 맞을까 싶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푸른 알약은 정말 삶이라는 것을 광학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만화책을 만든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라는 만화작가의 삶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고 그 이상(異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그의 삶은 이상적(理想的)인 삶이 아니라 비합리성(非合理性)에 있다고 해도 무색하지 않다. 아니 합리(合利)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 해야지 바를 것이다.

 

그는 결혼을 했다. 그것도 아이가 딸린 이혼녀와 말이다. 보통 한국에서 젊은 남성이 이혼녀에 그것도 아이까지 딸려 있다면 수많은 반대와 질타가 쏟아진다. 한국에서 이른바 보수적인 사고관념 중에서 가족이란 사회적 단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유교 중에서 성리학적인 관념으로 조선 중후기가 시작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관계있다. 약간 아이러니하지만 성리학적인 관념이 사라지고 서구적인 관념이 들어와도 여전히 건재하다.

 

사회적 개방과 진보가 도래해도 이런 부분에 항상 민감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다면 할 수 있다. 가족의 성립은 사랑과 배려라는 기본 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보수적인 부분에서 위와 같은 이야기는 거의 조선시대와 가깝다. 그래도 거기에 반항해도 이것만큼 어려운 것이 있다. 배우자가 평생 살아갈 수 있을 최소한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경제적, 사회적, 그밖에 조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 상대방이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이 있는가이다. 이 작품 주인공이면서도 작가인 프레데릭은 그런 봉변에 처했다. 그와 결혼한 여자인 카티가 에이즈 양성이 나온 환자였다. 더더욱 심각한 상황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에이즈 감염자로 태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에 그 환자의 아들마저 감염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견의 모든 일상생활을 버려야 하고,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 눈에 띄지 않은 어디서 숨어 지내던지 혹은 격리병동에서 일생의 최후를 마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최종목표란 매우 비관적이라 희망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전 일일 것이다. 그런 카티와 카티의 아이를 프레데릭은 맞이하기로 한다. 19살 고등학교 졸업하던 시기에 그것도 2살 많은 연상의 여자에게 반하여 다시 만난지 6년 만에 재결합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보는 우리 독자로 하여금 매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이타적인 프레데릭을 보면서 정말 착하고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말 엄청난 착각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그는 에이즈감염자를 아내로 맞아, 감염된 채로 태어난 아들까지 그의 아들로 맞이한 것이다. 외국인 유럽에서 어떻게 볼지는 모르나, 동양권 문화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충격이다.

 

그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가상속의 이야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프레데릭에겐 완벽한 현실이었다. 젊은 나이에 에이즈에 걸린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중요한 것은 둘 다 사랑을 하고 싶은 동물적인 인간, 혹은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에이즈라는 틀에 그들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페이지 1장에서 6컷으로 나누는 장면에 마치 작가가 침착하게 관찰하듯이 그려간 작품이나, 그 작품을 이해할 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열렬한 사랑에 과연 나도 이런 상황에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남자인 프레데릭은 초조한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한편으로 쿨한 모습도 나온다. 콘돔을 착용한 채 성행위를 카티와 나눈다. 카티가 에이즈 환자라고 하여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와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가치관이 조금 흔들렸다. 에이즈 환자와 콘돔을 착용하고 성행위를 한다고 하여 그것이 완전한 안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로 콘돔이 파손되거나 혹은 상처가 난 부분에 혈액이 들어가거나, 면도칼이나 부엌칼에 서로 찔릴 수 있는 위험은 있지 않은가?

 

후반부에 가면 카티와 성행위를 한 프레데릭이 실수로 콘돔에 무방비적으로 손가락을 건들게 된다. 문제는 단지 맨 손가락을 건든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것에 손가락이 베여져서 피가 새어 나오는 그 손가락으로 콘돔을 만진 것이다. 의사에게 찾아가서 혹시라도 자기가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는지 고민하던 프레데릭의 모습에서 현실의 세계는 얼마나 냉혹하고 고된가 싶다. 그는 자기 의심으로 인해 자기 입안에 염증이 생기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의사에게 말한다.

 

물론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으나, 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뛰어넘기는 넘는다.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니까! 그래도 끝난 것은 아니다. 카티가 있다면 카티의 아들이 있었다. 이제 태어난지 몇 년도 안되는 카티의 아들은 카티에 비해 에이즈에 대한 신체저항력이 약했다. 에이즈환자가 먹어야 하는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 소년은 약이 맛이 없다고 싫어한다.

 

심지어 시럽 같은 것에 타서 주어도 그 맛을 알아챈다. 그래도 카티는 아들에게 먹일 수밖에 없다. 그 푸르고 푸른 알약을 말이다. 그것이 자신과 유일하게 피가 이어진 세상의 마지막 존재인 아들을 더 자신 곁에 두고, 아들은 다시 어머니 카티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화책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둘러보는 나에겐 하나의 충격에 가깝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푸른 알약 속에 모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모자와 그것을 지켜보고 사랑해주기로 하는 프레데릭, 인간의 사랑이란 과연 어디까지 향하야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그리고 자신주변에 놓여있는 현실과의 싸움이다. 푸른 알약은 그냥 보면 잔잔한 호수 위를 보는 것처럼 흘러가지만, 그 호수 밑바닥에는 상당한 심한 와류가 존재한다. 남들이 보면 그냥 넘어갈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그러나 그 이야기는 작가의 현실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찬찬히 흘러가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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