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 - 조폭언론과 맞선 노무현 5년의 투쟁기록
김상철.김상철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71년 독일 뭔휀에 유럽공동체 회원국 기자연합회와 여러 국제 기자조직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뭔휀에 모여 이른바 “뭔헨선언”이란 것을 채택했다. 그 채택된 선언은 이미 40년이 넘었고, 그 선언 전문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정보에 대한 권리,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 비판할 권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다. 언론인의 의무와 권리는 모두 시민이 사실과 의견을 알아야 한다는 이 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시민에 대한 기자(언론인)의 책임은 다른 모두 책임 특히 그 고용주와 공권력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그리고 왜 내가 이 선언문 전문 첫 부분을 이렇게도 인용하려고 했을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 과연 언론의 자유가 있는지? 혹은 언론의 책임이 있는지? 또는 언론의 윤리가 있는지? 등등 많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나는 의문이 드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언론매체가 너무 권력지향 적이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권력에 거슬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배제하거나 응징하는 것이다. 주변 친척 중에서 방송사를 상대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친척이 말하는 바로 언론계에 들어다 보면 많은 모순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언론방송계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엘리트적인 우수한 인재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좀처럼 구시대적인 요소가 다분하다고 했다.

 

 

물론 구시대적이나 신세대적이나 어느 쪽이 좋다 나쁜 것을 따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언론인들로서 가져야할 양심이란 과거나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도 구시대나 신세대나 모두 가져야할 하나의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자면 내가 이 글을 적는 것에서 약간 한쪽에 편향된 것이 아닌지? 또는 너무 깊숙이 들어다 보고 따질 수도 있다. 그 만큼 이 책에서 다루려는 내용이 너무 무겁고 민감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한번 2002년 유시민 전 장관이 저술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읽어 본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2002년 노무현이란 사람이 대통령 선거이전의 언론사와 싸운 이야기라면 이 책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그가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닐 때까지의 언론과의 전쟁을 다룬 서적이다. 책 제목도 정말 어울리는 도서이다. “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것은 부정하지 않을 사실이나, 그런다고 하여 모든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지지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자를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지지요소를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 없는 지지는 단지 종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어떻게 본다면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사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에 국민들이 많은 반응을 보낸다.

 

 

그렇지만 국민 대부분인 개인들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느 특정 정치가들에 대해 직접 옆에서 보고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가들의 옆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보고 들은 후에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로지 언론이다. 언론만이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어 보여주고 들려준다. 만약 그런 과정에 정말 제대로 전달했는지 아니면 거기에 누락되었거나 혹은 추가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방송매체나 언론매체에서 그대로 찍어낸 미디어만이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래서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서적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표지(출판사 민음사)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지는 실제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실제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실제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다. 이것이 바로 지시 대상도 테두리는 없는 끝없는 시뮬라시옹의 순환 속 시뮬라크르이다. 무언가를 감추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방송언론매체는 우리가 직접 눈앞에서 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방적인 관점이나 혹은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일부만 또는 허구의 것으로만 칠해버릴 수 있다. 진실이 아닌 허구이기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그 허구의 것들이 더더욱 진실일 수도 있다. 진실은 뒤로 가려진 채 허구의 이미지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여 나타난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실이 나와도 시뮬라크르이다. 과거에 뉴욕 911테러사건에서 분명 미국에 큰 비극과 많은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우리는 직접 현장에 가서 그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갔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실제로 그 비극의 현장만 남은 어두운 거리의 풍경만이 우리를 반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이미지가 녹화된 가상세계는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가 늘 살아오면서 이런 가상세계가 펼쳐져 있는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현대문명사회가 있는 어느 국가라도 이 미디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생 미디어부터 정보를 받고 그 정보에 따라 사람들은 움직인다. 그래서 지속적인 미디어의 노출 속에서 인간은 어느 특정 정보가 일방적인 정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즉 미디어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데올로기의 전환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에서 이데올로기는 과거 이상의 이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념이라는 것으로 바뀐다. 솔직히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눈에는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이나 그것은 현상화로 바뀌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양식과 일상생활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이미지라는 점에서 현대사회가 이미지를 매개하여 움직이는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스펙타클이란 것은 누가 고의로 혹은 누가 고의로 만들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현상화해버린 현실이다. 스펙타클의 존재에 노출되는 국민은 결국 대중(mass)이라는 존재다. 거기서 대중들은 군중심리로서 미디어에 반응한다. 그것이 정말 맞는지 틀렸는지 말이다. 그런 현상에서 가장 시달린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도 조선일보와 전쟁을 하였다. 그의 길고 질긴 언론사들과 전쟁이 이제 대통령이 되고나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번졌다.

 

 

이 책을 읽으면 평소 노무현하면 실패한 대통령, 개혁에 도전했으나 미완에 끝난 대통령이란 말이 나온다. 게다가 임기 종료 후에는 불명예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아마 당시 검찰과 수구기득세력권과 대형 언론매체에서는 그의 죽음을 분명히 노렸다. 그의 죽음 정치적, 사회적 죽음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정치적, 사회적 죽음 대신 생물학적인 죽음을 선택했다. 물론 그것이 자살이라고 해도 정말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 했는가 이다.

 

 

그의 죽음은 타살에 가까운 자살이다. 이 정치와 사회가 그리고 권력이라는 거대한 손이 말이다. 그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바로 언론사들의 작품이다. 대형신문업체에서는 노무현을 매우 싫어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고교출신 변호사가 엘리트집단에 오는 것부터 난색을 표했다. 한국의 엘리트주의에서 부산에 있는 상고출신인 노무현으로서는 반기지 않고 싶은 존재다. 게다가 현실 안의 거대한 권력에 의지하기보다는 그것을 저항했다.

 

 

니체와 푸코적인 의견으로 본다면 도덕은 정말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점이다. 아니라면 현실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 분명 그것이 틀리고 잘못된 일이라도 힘이 없는 이유로 부당하게 누군가에게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법적인 제도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의 룰이라고 한다. 도덕이라 것은 하나의 룰이다.

 

 

국가는 국가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그 권력들은 언제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가진 자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곧 거대한 세력들에게 제거되어야 할 존재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기득권세력들에겐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그를 죽이려면 단순히 그를 국가 권력을 이용해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사회논리로서 귀결해야 한다. 언론이란 것은 바로 폭력적인 언어로서 사회를 조장하는 하나의 선동자다.

 

 

이 책에서 보이는 일들을 보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과거정권에서 공약한 정책에 대해 당시 신문사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국방정책에서 전시작전환수권에 대해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냈다. 노무현이 처음 대통령이 되면서 전시작전환수권을 제기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 이전에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낸 그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연설문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면 분명히 그런 부정적인 언사가 아닌데, 그들은 그 연설의 중간만 잘라 붙이기 식으로 하여 부정적인 요소만 선전했다. 짜깁기라는 몽타주적인 요소를 반복하여 신문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거짓된 루머를 진실인양 보도했다. 만약 그것이 틀린 것이 들통 나면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응대했다. 조폭언론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런 책임감 없는 요소와 꼬투리만 있으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삽 하나만 판 땅에 마치 불도저가 지나간 것처럼 꾸며대었다.

 

 

그런 언론들의 권력적인 횡포와 폭언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끝날 때까지의 일이었고, 퇴임 후에 시골에서도 끝없이 싸워야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만을 겨냥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이들과 반대되던 한겨례와 경향신문까지도 포함했다. 그들은 평소 대형신문매체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막상 불리한 입장에 오면 마치 그들과 같은 페이스로 유지한다. 마치 자기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한 존재라고 말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대형신문매체만 비판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신문언론도 같이 비판했다. 자신들의 권력과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안위만 찾는 그 모든 언론을 비판한 것이다. 최근에 읽어본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진정한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일부분만을 위한 포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포괄적 자유주의도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하나의 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런 다시 내가 이 글을 적으면서 초반으로 돌아 가보자. 왜 뭔헨선언이 필요했을까? 내가 노무현을 좋아한다고, 이 글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꼭 그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그를 무조건 좋아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단지 내가 이때까지 글을 적으면서 그에 대해 제대로 한 번이라도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이 옳은 정보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미 야만의 언론 속에서 노무현은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노무현이 죽음을 선택해도 아직 이 글을 적는 나와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살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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