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이 드립니다 -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포토 에세이
문재인 지음 / 리더스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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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 사람에 대한 인격과 수준 그리고 사유를 알려면 그 사람과 대화하기 전에 그 사람의 서재를 찾아가 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생각이 그 서재에 의해 존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서재와 혹은 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으로 통해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들을 보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 무엇을 생각하고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대통령 선거후보로 나온 문재인 의원의 책 역시 문재인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 그가 의자에 앉아 보고 있던 서적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였다. 정약용이라고 하면 한국 철학사와 과학사 심지어 온갖 학문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기도 하며, 사상가였으며, 그 누구보다 백성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절망과 한탄을 안고 살아간 지식인이다. 그의 기록 중에서 나 역시 잊지 못할 사연들이 구구절절 떠오른다. 그가 강진에서 억울한 유배생활을 할 때 어느 농민의 비극을 본다. 한 농민이 군포세를 내지 못해 집안에 있던 소 한 마리를 강제로 관청에 빼앗긴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몫이 아닌 돌아가신 아버지의 군포로서 말이다. 농민은 기가 막혀 너무 분해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베었고, 그 농민의 아내는 고통스럽게 울면서 방에 쓰러져 있던 남편을 보면서 그 울분과 서러움에 한이 맺힌 채 남편의 성기를 들고 관아에 찾아갔다. 관아에 찾아간 아낙네는 잘라진 남편의 성기에 의해 손이 흥건히 피로 물들였으나, 그 누구도 아낙네의 원망과 슬픔을 받아주지 않았다. 관청의 담은 높지 않았으나 그 어떤 벽보다 높고 다가설 수 없었다. 결국 아낙네는 힘없이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는 실화다.

 

정약용은 그 사건을 보면서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지어 그들을 생각했다. 지금의 한 고전국문학에서는 이 시조는 매우 가치가 높은 작품이나, 당시 백성들이 겪던 그 고통은 지금 읽어도 내 가슴을 후빈다. 그렇게 힘없는 약자를 생각하고 살아가려한 다산 정약용을 문재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1표2서에서 대표적인 서적 목민심서는 당시 관리만 아니라 지금의 관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이다.

 

물론 문재인은 칸트의 추구한 이성을 중시한 것 같았다. 칸트는 나이 80세 동안 자신이 태어난 고향 쾨니히베르크에서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칸트는 자유를 위해서는 인간에게 이성이 중시되어야 했고, 그 이성으로 하여금 타인에게 선을 추구하는 실천이성을 중시했다. 문재인이 중시하는 이성이란 상식이 통하고, 서로간의 합의와 대화를 추구하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그가 전해주고픈 이야기라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춘에게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할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누구나 낙오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서민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잘 풀리지 않거나 오히려 길의 끝에 몰려 절망의 눈물을 흘린다. 문재인은 그런 삶이라도 좋고, 뒤틀린 길에서 넘어져도 좋다고 했다.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고, 그 길에서 새로운 자신을 찾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끔 절망과 낙담한 심정을 보내고 있다. 꿈이란 무엇인지? 뭐든지 한 가지 목표로서 그 기준에 미달되면 인간적인 가치에서 탈락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 모두 개인에게 소중하고도 존귀한 생명이고 이성적 주체이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뭔가 군중 속에 고독을 겪는 아쉬움에서 우리의 모습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필요하고, 서로간의 약속과 신뢰로 살아가야 할 사랑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두가 현실의 벽에 막힌다면 얼마나 청춘들에게 큰 좌절일까? 많은 청춘들은 그런 모순과 왜곡된 현실에서 처음에 분노와 반항을 느끼나 어느 순간 그 모순과 왜곡을 생산하는 주체자로 전도된다. 반복되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좌절, 이 모든 것은 영원히 이어갈 수밖에 없는 숙제인가?

 

오늘날의 청춘은 먼 미래의 청춘의 어른이다. 거울 앞에 선 청춘이 언젠가 그 후를 이어갈 청춘에게도 큰 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문재인의 글이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권위 있어 보이려는 애쓰는 사람보다,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는 사람이 훨씬 권위 있어 보입니다.” 라고 말이다. 청춘들에게 길이 막힌 이유는 그 권위라는 벽에서 시작됨을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도 그런 벽에 의해 살아왔고, 그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은 스스로의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기쁨, 슬픔, 좌절, 눈물, 절망, 희망, 실수 등을 솔직한 심정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반성으로 통해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그 배려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것으로 통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자신에게만 혹은 우리들에게만 사랑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웃이 아닌 자들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 어느 이는 굶고 어느 이는 추위에 떨며 어느 이는 절망으로 지낼 수 있다. 그들을 관용적인 자세로 대하고, 불평등한 것 자체를 인정함으로 좀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고 서로 미소 짓는 삶, 어떻게 보면 쉬울 것 같으나 생각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이다. 가다보면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 하지만 그 일어서는 자에게 우리 사회의 온정은 너무나도 각박하다. 그래도 문재인은 괜찮다고 한다. 자신이 아무리 쓰러져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으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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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2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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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사라는 것에서 처음에는 사건이 발생할 수 없는 동기와 원인, 그리고 그것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나온다. 그런 후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간적, 공간적 배경들이 나열되는 것이다. 금지소년 1권에서는 신류아라는 학교 아이돌 숙녀(속은 시커먼 여왕님)에게 여장을 하는 나운이의 정체를 들키게 되면서부터다. 그 모든 것이 시발점이고, 그 모든 것이 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하지만 중심축만 존재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즉 <나운이의 가정형편이 좋지 못하여 카페에서 여장을 하면서 아르바이를 하는데, 도중에 신류아에게 여장한 모습을 들켜, 신류아에게 눈가림을 약속받기 위해서는 신류아에게 집착하는 남성들을 모두 자신에게 반해야 한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서사라는 그 과정에서 그 동기의 부여에서 큰 서사와 더불어 작은 서사가 같이 돌아가야 한다. 1권의 경우 학교 최고의 스포츠맨인 도대남이라고 한다면, 이제 2권부터 다른 스타일의 남성을 공략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롤러코스트를 타고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경부선을 탄다고 볼 수 있다. 그 머나먼 여정에서 위기의 순간은 나운이를 즉 포푸리 소녀에게 운명의 장난을 부여한다.

 

운명의 장난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1권에서 도대남으로 시작하여 도대남으로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오히려 도대남으로 인해 새로운 위기가 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안승호, 안승호는 도대남에게 언제나 라이벌의식으로 불타 있었다. 도대남에게 있는 모든 것, 도대남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누르고 싶은 사나이다. 물론 사나이라고 하기에는 집념이 너무 강하고, 엘리트주의에 취하여 주변이 보이지 않은지라 심각한 소심남이라고 볼 수 있다.

 

대신 집안이 부자라는 점에서 생활여건은 대범하게 보이나, 그 이면에 보이는 도대남에 대한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이란 것에서 타인과 차이를 만든다. 가령 안승호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가정이었고, 도대남은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능력이 우월했다. 모든 것을 집안의 재력으로 이룩한 실력이었던 최승호에게 1번의 시작으로 모든 스포츠를 이긴 도대남은 그야말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에 대한 질투였다.

 

도대남에 대한 질투가 도대남이 사모한 신류아에게 전이되면서 안승호의 신류아에 대한 접근은 집착과 굴욕이란 이중적 감정에서 금지소년 2권을 진행시킨다. 그러나 이미 도대남은 신류아가 아니라 포푸리 소녀에게 마음이 갔으므로, 안승호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완벽한 외모에 똑똑한 지성 게다가 부유한 집의 딸인 신류아와 달리 귀엽게 생겼으나 충동적이고 빈약한 몸매에 동네 아줌마의 근성을 지닌 포푸리에게 안승호는 아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1권에서 안승호와 포푸리 소녀와 충돌하여 넘어졌을 때 안승호는 포푸리 소녀의 상의 소매를 이용하여 구두에 묻어있던 크림을 닦아내었다. 결국 안승호란 인물은 안하무인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그 안하무인적인 자기 성격마저 안하무인하게 만드는 도대남의 변화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의 극적플롯은 테니스경기다. 테니스경기라는 우리편과 상대편의 이분법적인 구도는 서사적으로 꽤 잘 사용되는 방법이다.

 

문제는 그 테니스 경기에서 도대남은 처음으로 하였고, 안승호는 테니스를 잘 하던 사람인 점이다. 그리고 팀페어에서 도대남은 포푸리 소녀와 안승호는 신류아와 팀을 맺는다. 게임의 법칙에서 인간은 승리를 목표로 하나, 이 경기의 목적은 안승호의 트라우마에 대한 처방이었다. 모든 운동에 발군의 실력을 가진 도대남에게 안승호는 피할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이어졌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가려워진 무의식적인 본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는 안승호의 감정만이 아니었다.

 

포푸리 소녀 아니 포푸리 소녀 안의 나운이의 트라우마는 안승호보다 비교할 수 없는 트라우마였다. 포푸리 소녀는 천애고아인 소년인 나운이었고, 나운은 동생인 솔이를 위해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었다.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오면서 겪은 고생, 수모, 울분들과 가난한 살림에 악착같이 살아가야한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생각하면 안승호보다 더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셈이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원인과 동기부여가 서로 다르더라도 분명 포푸리 소녀의 트라우마가 심하나, 포푸리 소녀는 그 트라우마를 간단히 넘기자고 했다.

 

도대남과 포푸리 소녀에게 패배하여 다시 트라우마의 늪에 빠진 안승호에게 포푸리 소녀는 시합에 진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전에도 애기했죠?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승호 씨는 도대남보다 훨씬 멋진 것 많이 가지고 있다고”, 물론 안승호가 여기에 납득할 리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포푸리 소녀의 말에 안승호는 맥이 풀리고 만다. 그것은 결국 통 큰 남자가 진정한 승리자, 남자는 통!”에서였다. 안승호가 지더라도 진 것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고 멋지게 인정하면 그것 역시 남자로서 상대방의 승리와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커지기에 진정한 승리자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대남은 승리를 하는 것은 경기에 이겨서 뭔가를 가지기보단 경기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맥없이 물러간 안승호가 이번에는 값비싼 악세사리를 포푸리에게 얼굴에 던진다. 이성적 사고로는 도대남에게 스포츠가 아닌 다른 점으로 포푸리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에 다시 도대남에게 보란 듯이 주겠다고 하나, 이성적 사고가 아닌 감성적 사고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보여준다. 포푸리에게 정리 좀 하라면서 악세사리를 던지지만, 그것은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대한 솔직함이었다.

 

그리고 2권 째에서 또 다른 정보로는 신류아는 자신의 학교만이 아니라 안승호의 학교, 그리고 성당 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3권 째에서 홍지우라는 중학교 2년생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에서 신류아와 지우와의 관계는 친한 성당 누나와 동생이란 점이다. 신류아는 동급생과 선배만이 아니라 연하의 남성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따라서 3권에 등장하는 포푸리의 벽은 고등학교 내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영역까지 퍼지는 것이다. 그런 포푸리 소녀에 대한 위기상황은 이미 2권 마지막에 나온다.

 

카페 내에서 하렘의 왕국으로 만드는 미남이 알고 보니 홍지우의 누나인 지수였던 것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홍지우가 자신의 친누나를 따르기보단 신류아에게 더 따르고 있는 이유는 아마 지수가 여성적인 모습, 지우에게 항상 다정한 누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분석이다. 그것이 아마 포푸리 소녀가 해결해야할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제는 어렵다. 지수는 포푸리 소녀를 끌어안은 채 포푸리 소녀의 허벅지를 만지면서 만족해한다.

 

허벅지가 탄탄하군, 아주 예쁜데?”라는 대사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상황은 지우가 여성이고, 포푸리 소녀는 본래 남성이다. 여성이 그동안 여성의 허벅지를 만져서 그 감촉이 좋다고 했다면, 여장하고 있는 포푸리 소녀의 허벅지가 마음에 들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포푸리 소녀가 여장남자라고 하여도 작가의 입장에서 그 여장남자에서의 남자의 상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 다른 분석으로는 마지막 스토리 작가가 직접 그리고 CROSS WORLD에서 신류아의 모습이다. 신류아는 자신의 교복에 검정 스타킹을 착용하여 한 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핥고 싶어? 예쁜 짓하면 맛보게 해주지.”라고 그려져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의 다리에 집착하는 남자를 페티시즘 즉 물신주의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남성보다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신분이 높다는 의미고, 거기에 남성은 여성이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정신적 압박 아래 여자의 발에 반응한다는 점이다. 작품 내에서 신류아를 짝사랑하는 나운이와 자신의 아르바이트를 위해 신류아에게 움켜 살아가는 포푸리 소녀의 입장을 생각하면 절묘한 포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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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시사인 만화 2 - 굽시니스트의 Memory of 2011~2012 본격 시사인 만화 2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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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권을 지나 2권을 보면서 다시 황홀한 패러디의 세계로 우리는 인도하고 있었다. 본래 나는 처음부터 굽본좌를 알지 못했다. 내가 알게 된 동기는 이번 <본격 시사인 만화2>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작년 서브컬쳐와 잉여적인 생활관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찾아온 전설적인 화백에 의해서였다. 그의 팬네임은 “엉덩국”, 고등학생인데 그의 포토폴리오는 이미 만화평론가인 박인하 교수님(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학과)에게 인정받았다.

 

 

오죽했으면, 교수님의 제자들이 S(사디즘)로 무장한 교수님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 증정했을까? 그 엉덩국이란 화백인 그린 만화는 홍콩행 게이바라는 무대로 통해 보는 게이의 이야기다. 물론 일반적인 게이라면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행동하고 의상을 입는 게이들을 생각하나, 그 게이들은 다른 게이였다. 이른바 남성적인 그것도 초남성적인 마초이즘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에 가학적인 행동들은 게이포르노가 비로소 마초이즘의 폭력적 미학인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마초적인 게이물을 엉덩국은 새롭게 만들어내었다.

 

 

그런 게이물을 다시 엉덩국에서 굽본좌로 옮겨졌다. 과거 다른 인물들이 어느 조직에 가서 아무 것도 모르던 자가 어느새 최고의 가학적 플레이어로 등극한 셈이다. 비로소 나는 굽본좌가 패러디의 본좌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본격 시사인 만화2>를 읽는 나에겐 친근함이 그대로 전해온다. 그리고 1기 못지않은 패러디들이 남발하니 그 기쁨이야 어디에 비교하겠소? 이번 2번째 권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캐릭터는 역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다. 작년 일본 SHAFT라는 제작사에서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으로 작품적 비평으로 따지자면 인류의 착취, 폭력, 억압에서 탄생한 문명사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 진행에서 희생된 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마녀는 곧 마법소녀라는 신성함과 지탄의 대상으로 이른바 인간의 신화를 고발한다. 그래서인지 마법소녀는 여기저기 가차 없이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화에서 발푸르기스의 밤을 발푸르기스의 박으로 만들어 이미 마법소녀들은 더 이상의 엔트로피를 회복할 수 없음을 정치 풍자적으로 만들어내었다. 물론 패러디의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독재자들의 세습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 3번째 레이가 나온 것으로 그 강력한 이미지를 주었다. 또한 코드기어스의 브리타니아 를르슈로서 왕자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보여준 것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명품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등장한 큐베의 패러디다. 견공의 모습을 큐베로 둔갑한 것에서 마법소녀는 정치적인 희생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희생자가 이전에는 영웅이고, 영웅 이전에는 평민이었을 터이다. 큐베의 사나운 활약이 있는 만큼 우리 사회는 그 만큼의 혼돈과 난제를 안고 있다. 패러디가 강하고 그 맛이 제대로 우려 나왔다는 점은 우리의 인생살이가 고되고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사주간지의 시사만화가 아니겠는가? 그런다고 반드시 패러디를 사회를 비꼬고 누군가에 대한 비판적 요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 대해 호무호무해지고 싶은 심정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그는 1권에서는 얼굴이 등장했으나, 2권부터는 표지에 나오지 않은 채 노란 상의에 밀짚모자만 쓰고 나온다. 대신 조금 가슴이 아픈 점은 아이유의 노래를 부르는 그 사람이 그를 두고 한 말에서 아직까지 정치의 현실에 통감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굽시니스트는 굽본좌에 항상 존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순과 왜곡, 억압으로 가득한 것에서 시작해 국제정치와 외교까지도 실시간으로 흔들리고 긴급하게 돌아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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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영화인가
조안 홀로우즈 외 지음, 문재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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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영화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 책에서는 대중문화와 영화 그리고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영화에 대한 부분보다 영화로 통해 문화와 사회적인 접근에 가깝다. 오히려 철학과 사회학으로 무장한 도서이기에 영화를 알아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단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을 담론하고 있는가이다. 단순히 어느 영화에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라는 것에 통해 대중들을 알아가는 것이 올바르고 정확할 것이다.

 

 

narrative, 즉 敍事라는 단어는 단순히 인물이 어느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안정한 어느 상태에서 불안의 요소가 침범하여 혼란 및 위기를 초래한 후 그것을 매듭짓는 것이 이른바 narrative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narrative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영화 1편 보고 나서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로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라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그것에 대한 인식적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영화라는 것은 연극이나 오페라와 같이 서사적으로 진행될 때 무대 위의 연기자와 무대 앞의 관객과 일치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시간이 2시간이라고 하여 얼마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어도 그 한계성이 존재한다. 즉 오페라와 연극은 유한의 시간 속에서 관객을 대한다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연속성이 없는 존재들을 계속 모으고 모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영화 자체에 유한적인 영역과 무한적인 영역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와 드라마의 실사영상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분명 실존했으나, 그곳에서는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 비추어진 그들은 마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왜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그들에게 빠지는 것일까? 실제 우리는 어느 인물에 대해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그 인물이 영화 속의 인물처럼 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일어나 있다. 혹은 어떤 특정인물에게 극단적 집착에 통해 물신숭배까지 일어난다. 페티시즘이라고 하여 이른바 sexuality 요소에 큰 부각점을 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특징은 다른 영화도서와 달리 그 물신주의에 대한 연구가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매우 신화적이다. 유한적인 인간이 존재하여 영원히 반복되어도 계속 그 유한한 인간이 없는 무한의 시간이 되어 유한의 인간들과 상존하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멈춘 공간이므로 언제라도 무한의 영역이고, 유한의 인간에겐 하나의 경외심, 존경심, 욕망, 분노, 폭력 등의 요건이 된다. 인간에게 주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욕망할 수 있는 공간이 영화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에서 인간적인 사회적 존재가 된다. 물론 언어라는 매개로 통해 주어진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하고, 그 욕망은 결국 사회의 억압을 자신에 대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신화적 요소에 영화란 결국 욕망의 집결체인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본인 같은 경우 영화와 드라마 같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 같은 표현주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학적으로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 강조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다른 점으로 본다면 오타쿠라는 존재다.

 

 

그렇다고 하여 오타쿠 같은 존재가 영화비평이론도서나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반인들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를 이은 자크 라캉, 그리고 문화의 사회학 다루는 삐에르 부르디외다. 다들 프랑스 철학자라는 점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파고 들어가면 언젠가는 만날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 자료에서 문화라는 것은 그 사람들이 수준이나 판단력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속하게 됨에 따라 문화의 차별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의 연구를 이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부르디외는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듯이, 대중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이들 형식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미학적·장르적 관습과 해석 기술의 복잡한 망을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거의 전무하다. 그런다고 하여 대중들이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을 보든 영화를 보든지 간에 문화의 소비에서 그들의 개별적인 차이는 존재하고, 그런다고 누군가 우월한가라는 전제 아래 분명 대중들은 실사영상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모두 그런 우월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 한하여 소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차이점을 발생하게 하는 요인은 취미나 환경적인 요인도 포함되나, 바로 문화자본이란 것이 인정된다. 대중문화에서 문화자본이란 자신이 어느 환경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저급문화에 속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의해 항상 대중들이 앞장서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전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적적이게도 저급문화와 고급문화 모두 지양하는 전위적인 예술 즉 아방가르드 장르는 오히려 엘리트주의로 변모되었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선두주자인 아방가르드는 저급문화와의 차이와 부르주아의 고급문화 역시 비웃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려 보고 자기들의 관념으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엘리트주의적으로 가기가 충분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문화는 그 아방가르드에서 한층 전위적으로 가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이므로, 아방가르드는 대중문화에서 광고, 카피,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결국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중들의 문화산업에서의 spectacle를 탈피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한다. 가령 Guy Debord라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은 <Society of the Spectacle>이란 영화를 상영하면서 현대사회가 문화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한다.

 

 

그런 그가 오히려 자신이 스펙타클화하는 것을 막기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한 번 도달하면 그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계속 그 과정을 찾아간다. 전위적은 끊임없는 자신의 탈피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상당히 일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올 확률이 높기에 다시 대중문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대중에 의해서인가 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는 mass culture라는 수동적인 영역이 강하다. 가령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장한 대중문화의 기호는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한 것들에 의해 대중들이 이끌려가는 것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star라는 영화배우에 의해서도 그것을 결정된다. 영화의 장르와 감독을 보는가? 아니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는가? 결국 작품적 가치와 작가주의적 요소에 대중들은 선호함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이란 존재적인 부류에 옹호를 한다. 그것에는 당연히 신화가 따른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구, 그 욕구는 욕망으로 이어져 1번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찾고 찾는다. 그러면 상실과 일시적 회복이란 게임 속에서 그 감정은 더 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본다면 연예인에 대한 마니아적인 요소를 지나 스토커 기질까지 추가함은 아마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욕망의 대상에서 타인들의 욕망 속에서 더욱 자신의 욕망을 추가함으로 자신의 알고 있는 현실과 영화 내지 이미지 세계의 인물의 가상세계를 구분 못하는 Hyper-reality 부분을 실감하듯이 말이다. 이런 욕망의 세계이기에 영화는 욕망으로서 사회의 욕망을 대변한다. 우리가 영화라는 장치 속에 잠든 욕망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대해 그것이 narrative화한다고 본 것이다.

당연히 스토리에는 어떤 주제가 있고, 그것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할 것이다.

 

 

또한 그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보는 이에게 어느 특별한 감정을 줄 것이다. 실제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주로 보는 헐리웃 영화는 가히 신화적이라 할 것이다. 다른 국가나 민족들 자국에 대한 역사나 전통이 있기에 그들만의 신화가 존재한다. 영국에 아서왕전설이나 유럽의 각종 요정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미국은 신화가 없었다. 있다면 원래 그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인디언들이다.

 

 

하지만 서구의 이분법적인 관념은 이들을 미개민족으로 보고,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미국의 신화는 전쟁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이루어진 미학이란 점에서 전쟁영화는 미국영화의 대표주자다. 그래서 서부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은 언제나 난폭하고 여성들을 겁탈하며 식량과 가축을 탐낸다. 여기에 비해 백인 서부 총잡이들은 보안관 마크에 중절모를 쓰고 말을 타면서 권총을 속사한다. 카우보이라는 gunman으로서 신화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언제나 사라지지 않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은 패권주의적인 신화를 반영한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합리화 여성의 종속도 강조된다. 토지라는 거대한 자본이 폭력과 처벌이란 이름 아래 정의화 되고, 여성들은 남성과 그 남성이 소유한 무기에 의해 모든 것이 안정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페미니스트적인 요소가 추가했으나, 어떻게 보면 그 페미니스트의 자질에서 자신을 오히려 얽매이는 존재로 전략하지 않은가 라는 글도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는 대중들을 상대로 만들고, 영화로 통해 보는 군중들은 그것을 비판적 수용이 아닌 무조건 수용이다. 단지 문화자본에 따라 그것이 감각적으로 미적으로 좋다와 나쁘다로 갈리게 된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narrative로 통해 보는 영화에서 단순히 스토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론하는 것을 중시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대중들을 보는 눈에 대해 봐야하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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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 "조제프 자코토"라는 인물로서 이 서적은 모든 것을 시작한다. <무지한 스승>이란 서적 명에서 분명 무지라는 것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이나 혹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정답 중에서 일부는 해당되나, 정답 자체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지한 스승>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이들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을 등장시켜 교육이란 인류의 과제를 문제 삼았을까? 그것도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그저 역사 속에서 등장한 의원이며 교육자인 그를 말이다. 교육적 부분에서 분명 탁월하나 세계사적인 영역에서 그렇게 큰 비중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도서를 읽다보면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이 이렇게도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불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나, 적어도 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되는 내분으로 네덜란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조제프 자코토는 네덜란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에게 불문학을 가르치는 행위는 아이러니하다. 그런데도 그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학생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낳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교육적인 부분에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방법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전형적으로 교수직을 맡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무지를 알아 그 무지 자체가 모르는 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 소크라테스가 여러 인물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격적 발언을 오히려 역으로 물어봄으로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게 한다.

 

 

산파술을 사용하는 반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대상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려주나, 그 무지함을 아는 것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지닌 고도의 언변술에 상대방이 넘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에 조제프 자코토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교수, 그리고 그 학생에게 프랑스어와 문학을 알리는 것은 그 중간지점의 전환소가 없었다.

 

 

조제프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통해 그저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했다. 1장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그 과정을 되풀이하자. 기적은 날개처럼 날아올라왔다. 네덜란드어로 살아가던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쓰고 이해하고, 수준이상으로 어려운 단어와 내용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교육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고 나는 지적했다. 그것은 정말 위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사회는 그저 엘리트주의적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재능을 다르게 지니고, 거기에 누구는 우등하거나 열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좋다. 한국의 교육여건에서 가장 어려운 사실은 spec이란 능력치이다. 최근에 대학입학에서 고교수능에 대한 부담을 없앤다고 하나, 오히려 이것은 더욱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미 대학입시는 고교준비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까지 포함된다. 최근 영유아의 영재교육 및 조기유학교육에서 우리는 교육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은 매우 전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가령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서적을 참고하면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인자는 오로지 교육이다. 교육으로 통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상승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란 조건에서 경제적 조건은 필수이다. 학교를 다니고 교재를 사야하며, 여기에 대한 노동의 상실(학생들 즉 미성년자들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이나 한편으로 노동의 실시는 교육의 미실시로 연계된다.)이 따르기에 교육을 받는 자들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물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활동력은 제한되어 있기에 교육과 노동은 동시에 하기에는 불가한 사항이 많다. 특히 교육의 기회에서 질적, 양적인 조건이 따라붙지 못함은 결국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면 될수록 그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아지란 사실이다.

 

 

바로 현대사회에서 엘리트주의 평등교육은 겉으로 평등이란 제한선을 맞추고 있으나, 그 내부에는 심각한 불평등을 합법적으로 맞추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념의 교육이 잘못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학부모에게 묵언의 동의를 받는다. 어떻게 본다면 학생들의 교육은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그 결정에 따라 학생들의 갈 길이 달라진다. 왜 계속 우리는 이런 과정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따로 생각하면 정해진 틀에 의해 거기에 매달릴 경우 우리는 진실로 똑똑해 지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는 그런 행위들이어야 말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자주 나오는 단어인 “똑똑한 바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들은 그것 말고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나, 그 알고 있는 것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히 똑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그런 것만 필요로 하고, 교육과정은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진정 바보 만들기 과정은 바보들의 재생산과 연결되고, 그 바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그러면서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자유라는 허무맹랑한 슬로건을 내세운다. 마치 이것은 신의 지배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겉으로 평등이라 하나, 그 내면에 숨은 불평등을 마치 평등한 것이라고 주입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불평등이 있기에 그 평등하지 못함에 대한 보완점 내지 유동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함이 아닐까?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자들도 글을 알고 예술도 아며, 그들도 화가가 아니더라도 화가라고 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일정한 차이로 두어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에서 삐에르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과 동시에 문화자본도 같이 추가했다. 곧 그말은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불평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어진 환경으로 통해 계속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부분에서 고급예술은 재산이나 신분이 높고, 저급은 신분이 낮고 노동자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문화의 공통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분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계급성과 차별성이 발생된다. 얼마든지 저급이든 고급이든 넘나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나 우월함을 제시하고 싶다.

 

 

따라서 집단적으로 누군가 구분할 필요성이 있고, 자신들에게 쏘일 수 있는 화살의 과녁을 다른 누군가의 광기로서 메우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인간들의 존재는 매우 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은 신화라고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이분법적으로 보자면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교육학에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이분법이 바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알기 위해 주입되어야 하는 억압의 욕망보단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말이다.

<무지한 스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스승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것으로 통해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소중한 교육관을 제시한다.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인간적 평등을 위한 교육으로서 첫 걸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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