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앵무새 죽이기, 말 그대로 앵무새를 죽인다는 것이 앵무새 같은 존재를 죽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나온 소설인 앵무새 죽이기는 21세기가 되어도 유효한 소설이다. 어린 아이 루이스의 눈으로 통해 보는 미국의 이야기다. 비록 그곳이 미국 앨라배마 주에 위치한 메이콤이란 작은 마을이라도 아마 모두가 공감하고도 남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내전으로 큰 고통을 수반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을 겪은 만큼 그들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던 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했다. 미국은 본래 종교박해 문제로 이민한 자들이 세운 국가였다. 종교는 이민 당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인 권력을 수반했기에 그들의 종교자유는 곧 정치적 자유를 논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의지를 발산한 것이다.

 

문제는 종교에서 토크빌이 언급하다시피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명제가 모두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루이스는 어린 시절에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그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당시 일어난 일들을 회고하면서 어린 소녀 눈에 비추어진 어른들의 세계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아야 필요가 있었다.

 

미국 내전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링컨 대통령이 집권하던 미국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백인들이 우월주의로 뭉쳐있던 남부지역과 흑인도 인권을 가져야 한다는 북부지역의 사람들끼리의 의견충돌로 인해 일어난 비극이다. 모든 역사에서 현재의 진보가 있기에는 수많은 피와 눈물로 희생삼아야 했다. 예전에 다른 강연에서 미국 영화 Gang of New York에선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 국가에 300달러를 지불하면 징병되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전쟁에 징병되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만 전장에 참가하여 주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 희생을 가지고 북부군이 승리해도 여전히 남부지역의 흑인차별은 여전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 1930년대 미국은 민주당 소속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공화당과 달리 흑인에 대해 조금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 것처럼 스카웃이 살던 메이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의 아내를 조롱하는 동네주민 말투가 들린다.

 

아직 스카웃이 살던 마을은 흑인에 대한 인권의식이 상당히 부실했다. 그 부실함은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에 히틀러가 파시즘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할 때, 스카웃의 학교선생은 분명 히틀러는 옳지 못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선생이 강간범으로 고소된 톰 로빈슨의 재판에서 피고인에 대해서 상당히 냉혹한 반응을 보였다.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는 톰의 변호를 맡으면서 현명한 판사 테일러와 함께 충분히 톰의 무죄를 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배심원은 톰의 유죄를 선고했다.

 

그의 이때까지 살아온 행동이나 그의 진실함을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 이유는 단지 톰 로빈슨이 흑인이란 사실이다. 흑인은 비겁하고, 남을 속이기 좋아하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백인우월주의에서 톰의 유죄는 아무리 어느 개인이 옳고 정직한 사람이어도 출신이나 피부만으로 모든 것을 결부지어 버리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문제가 있다. 단지 어느 지역이라고, 단지 어느 학교라고 무시 받고 천대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서 그런 대접은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것은 최소한의 불평등으로서 인정할 수 있으나, 태어난 그 자체로 차별받는 점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바로 그 앵무새 1마리가 톰 로빈슨이었다. 그런 톰을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욕과 행패를 억지로 참아야 하던 애티커스의 행동은 존중을 넘어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티커스의 행동은 순수한 자신의 양심보단 자신이 세상에 남긴 소중한 존재 루이스와 루이스의 오빠 젬 덕분이었다. 자녀 2명에게 애티커스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부모님이나 선생들과 같은 어른들이 자녀나 학생 같은 아랫사람들에게 착하게 살자 내지 올바르게 살자고 말하나, 막상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해본다. 애티커스는 자신이 흑인 역시 인간이고, 그들도 인권을 가져야 한다는 법조인의 정신과 그리고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올바르게 살았으나, 마을사람들에게 공격당해야만 했다.

 

작품 초반에 젬과 루이스가 놀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입장으로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두 자녀도 매우 좋은 양심을 가졌다. 나는 톰의 재판에서 루이스와 젬의 친구인 딜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딜은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이 흑인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것을 보고 분하고 슬퍼서 눈물이 나온 것을 보면서 과연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이성적인가? 차라리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피부색을 떠나 그 인간 존재로서 대하는 딜의 자세는 우리가 모두 배워야 하는 자세가 아닌가? 톰은 죄가 없으나 흑인이란 이유로 배심원에게 유죄선고를 받을 때 그것이 억울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루이스와 젬에게서 뭔가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앵무새 죽이기는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게 적었다. 말 그대로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품 내에 이야기하는 세상은 너무나도 깊고 곤혹스럽다.

 

평소에 술주정뱅이에 아이들도 돌보지 않은 이웰의 행동에서 마을사람들은 이웰이 충분히 자녀들을 학대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래도 이웰이 백인이란 이유로 그를 승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웰이란 인물은 비열한만큼 치사했다. 테일러 판사에게 앙심을 품고 집주변을 돌아다니고, 애티커스에게 침을 뱉으며, 심지어 애티커스의 자녀를 폭행하려고 했다. 아니 살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젬의 왼팔은 오른팔에 비해 제 기능을 펼칠 수 없었다.

 

관용이 없는 인간에게 관용을 펼쳐 결국 무고한 희생자는 내게 되는 점에서 오늘날의 현실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젬의 팔을 꺾을 때, 마치 도와준 부 래들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부 래들리란 사람이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라 보았다. 젬과 루이스가 집으로 갈 때 래들리 집을 지나가는데, 그 집 앞의 나무 홈에 껌, 고장 난 시계, 동전 등과 같은 선물이 있었다.

 

처음에 부 래들리가 아주 무서운 인물로 알고, 그의 집앞을 지나가고, 집 앞에 가는 것도 담력시험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부 래들리, 아셔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예전에 친구를 잘못 사귄 덕분에 마을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그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으나 마을주민의 눈치로 못했고, 그러던 와중에 그의 존재는 마을 아이들에게 만나서 안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젬과 루이스, 딜의 장난기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셔의 집을 기웃거리면서 아셔 역시 젬과 루이스에게 관심을 주게 되었다.

 

결국 앵무새 죽이기는 톰과 같은 흑인만 아니라 인생에서 한 번 흠집내어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던 아셔까지 궁지로 몰았다. 마지막에 비춘 그의 모습은 매우 마르고 부끄러워하며, 게다가 겁도 많은 아저씨였다. 하지만 팔을 다친 채 잠이 들어있던 젬을 보자 루이스는 자신의 손을 아셔에게 가져가 젬의 머리를 만지게 해주었다. 순수한 선의와 우정은 결국 모든 오해와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것을 넘지 못한 것이 톰의 죽음이고, 그것을 넘을 것은 결국 아셔와의 우정이었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에선 그런 과정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셔가 그 동안 받아온 주민들로부터의 지탄과 소문, 그것으로 인해 마을아이들이 생각하던 아셔의 인상은 아셔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애티커스는 아셔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나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앵무새라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지만, 인간과 같이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말을 한다는 점에서 대화가 가능하나, 그 대화를 할 수 있어도 앵무새라 만드는 그 자체, 즉 인간이면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차별의식이 들어있고, 앵무새를 죽인다는 것은 출생이 그래서나 혹은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대다수로부터 배타적인 대우를 받게 됨으로 그의 인간적 존중이 상실되는 것과 같다. 단지 흑인이란 이유로 억울하게 구속되어 사형 당할지도 모르는 톰이 자신을 강간범으로 몰아넣은 이웰과 그 이웰의 딸과 법정에서 만나면서 이웰의 딸을 보고 불쌍하다고 했다. 인간이 앵무새를 돌보는 것이어야 하나, 오히려 앵무새 쪽에서 인간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별짓기 -하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흐름을 보면 분명히 앙시엥 레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앙시엥 레짐이란 과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라고 볼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그 후오 절대주의 왕권봉건사회에서 상징물이던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또 다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단두대의 여명 아래 그들의 몸과 분리되어 버렸다. 루이16세의 목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은 그야말로 구체제라는 구차한 유물의 상징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자유시민인지, 농민인지, 노동자인지, 아니면 대학교수인지, 의사나 변호사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없었다. 토크빌의 <앙시엥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역자서문처럼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시대에 발견되는 ‘노예상태 속에서 평등’으로 개념화했던 것, 그리고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로 묘사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민주적 전체주의(despotisme democratique)'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실의와 좌절에 빠진 채 정계를 등지는 계기가 되었던 1851년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의 쿠데타를 몸소 겪은 혈적 체험이기도 하다.

 

위 내용들은 <구별짓기>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제일 뒤의 역자의 후기를 읽어보면 반드시 토크빌의 서적과 그 서적의 역자서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구별짓기>는 결국 겉으로는 자유, 민주주의, 평등이 기반으로 되는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 뒤에 가려진 자본의 불평등은 결국 계급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 계급이라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역사는 계급의 투쟁이라고 하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논리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논리는 이 책으로 본다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구조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적인 지표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에 가면서 칸트의 <판단력비판>으로 통해 취미와 취향을 논하지 않은가? 미적 감각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감정이라고 하고, 그 감정조차도 이성적 판단과 지성적 수준으로 평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이란 결국 어느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그 기준에 대한 기준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사고할 수 있는 역량조차 가지지 못하면 판단조차도 불가능해지는 귀납적인 논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취미와 취향, 그리고 계급과 사회, 문화와 역사, 민주주의사회와 프랑스혁명에서 우리의 사회는 어느 관계가 있는가?

 

상당히 엉뚱한 명제들만 늘여놓은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루이16세에게 아름다운 쇳소리를 내며, 그의 목과 몸을 영원한 그림 한 폭에 집어넣는 순간, 프랑스는 前자본주의에서 실제 자본주의국가로 이환되었고, 그 자본주의적인 요소는 현재까지도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뒤죽박죽이 되어있다. 오직 한 가지의 사상과 이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면 그 사회는 이른바 파시스트의 세계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담론과 의미가 내재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일지 모른다. 오히려 이런저런 문제가 사소하게 터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 내지 <동물농장>처럼 일이 있어도 그것조차 통제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이 든 것도 모자라 죽어갈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와 문화, 계급, 자유, 평등 같은 정치적, 사회적 영역과 연결함에서 왜 중요한가이다. 게다가 이 책은 1970년대 도서이고, 한국에는 1996년에 번역되어, 지금 내 손에 2010년대의 사회에서 담론짓고 있다. 생각을 다시 해보면 왜 내가 앙시엥 레짐을 꺼냈는가이다.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국가라고 하나, 실제로는 토크빌이 지적한 ‘노예상태 속에서 평등’이란 의미이고, 루소가 칸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혁명이 그에게 큰 빚이 있었지만, 칸트는 프랑스혁명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칸트는 이성을 중시했고, 강렬한 분노로 이루어진 테러리즘적인 혁명에서 결국 그 사회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농민과 노동자는 여전히 빈곤했고, 러시아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빵의 부족을 시달렸다. 사회적 구조로 본다면 결국 상층을 제거하여 새로운 상층만 들어선 것이다.

 

우리 한국이 아직 그런 과도기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프랑스와 같은 경우 1789년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이라고 하여 좌파적 성공(루소는 좌파다)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우파의 혁명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전복되고 또 전복되어 수많은 희생자들(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피로서 역사를 적어갔기에 오늘날의 프랑스가 되었다. 물론 그 중간에 세계대전의 참혹한 역시 새로운 전환기를 이어갔다. 그들은 200년이 넘는 민주주의국가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제 해방이후 70년조차도 되지 못했다.

 

프랑스혁명에서 좌파인 자코뱅당이 자발적으로 주도했지만,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착각하는 것이 좌파라고 하면 마르크스주의로만 연결하나, 실상은 루소의 이념이었다. 루소가 민주주의국가의 기틀을 잡았는데, 민주주의 시초조차도 좌파라는 점이다. 단지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해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과도기를 지나치지 않았기에 다른 국가의 200년 이상의 시간을 불과 70년 미만으로 해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구별짓기>라는 도서는 프랑스혁명 후 거의 200년 이후에 나온 도서이다. 그런데 이 도서가 그보다 40년 정도 뒤에 내가 읽는데도 그렇게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도서가 아니었다. 지표들을 보면 당시 TV는 없었고, 라디오의 소유가 중요했다. 2010년 TV가 없는 집도 없고, 라디오는 이제 오래된 기계에 불과한 시대다. 그러나 문제는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을 부여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란 점이다. 자본이란 것이 경제력이 아니라 학력, 사회관계, 문화, 상징 등 수많은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각 차이점은 사회구성원들의 차이를 만들고, 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구별 짓게 하고, 최종적으로 정치적 참여까지 변화를 준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국가에서 자본주의 유입의 중요성은 개인의 자산을 인정한다는 점이고, 과거 봉건사회는 재산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존재하나 왕족, 귀족, 성직자, 상인, 기사, 농민, 노동자, 노예 등과 같이 간단하게 계급을 정했다. 이 중 상인이 제아무리 능력이 좋고, 재산이 많아도 정치적인 결정권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돈만 많은 사람이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결합에서 소유의 인정은 결국 이들에게 정치적 결정권에 큰 기회를 주었고, 경제적인 능력으로 통해 다른 영역까지 충분히 손을 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이라 하여 모두 부유한 것도 아니고, 일부 대부르주아지에서 유지되다가 그 밑으로 쁘디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는 유효했다. 그러나 이제 쁘디부르주아지도 기존 세력, 기존세력에서 유지 혹은 몰락, 신흥세력까지 등장하고, 하층계층 농민 내지 프롤레타리아도 교육이나 사회적 지위나 여건에 따라 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이 파리에 사는지 혹은 근교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변화의 세세함이 결국 취미와 취향 등에서 발견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상류계층인 상급관리자, 자영업, 대학교수 등을 보자. 본래부터 귀족적인 부르주아지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을 경우가 많으며, 국립행정학교로 통해 영속적인 계급세습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취미는 테니스, 승마, 요트 등과 같이 비싼 대가를 필요로 하는 취미이고, 옷이나 가구, 구두등과 생활용품들은 최신품보다 너무 티를 내지 않은 것을 요구하며, 오히려 최신품만 추구하는 쁘디부르주아에 대해 다소의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교수나 그랑제꼴 같은 높은 학력자본소유자들은 비싼 비용보단 산책이나 독서, 미술관 관람, 음악회 감상 등과 같이 문화자본에 충실했다.

 

이들은 가격보다는 문화적인 영역의 정신적 혜택을 추구했고, 독서량이나 신문읽기도 다른 계층보다 높았다. 이들은 상류계층이라도 피지배분파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머물지 않고 하층계층 쪽과 소통을 하려고 했다. 가령 1968년 5월 혁명을 생각하자. 이 책에서 드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1968년 5월 혁명은 드골정부의 강압적 정책에서 시작된 사건이었고, 그 계기로 1969년 선거에서 드골은 패배한다. 당시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심지어 주부와 청소년들까지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과 많은 지식인들이 5월 혁명에 대해 큰 호응을 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어느 특정 운동에 대해 대학교수나 사회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지선언을 종종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일부는 그 운동의 시발이 되는 세력에 대해 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류계층에서는 그만큼의 문화자본력과 학력자본이 있기에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간파하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 정치적 참여에서 토크빌에게 큰 회의감을 안겨준 ‘민주적 전체주의(despotisme democratique)'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지식인들의 계몽의식 전달이기도 하나, 계몽이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타인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인 것처럼 한계가 있다.

 

어째든 상류계층에서 교수들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이라면 부르주아지들은 대부분 경제자본이었고, 취미도 그런 것을 추구했다. 부르주아지가 있다면 쁘디부르주아지가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를 넘보는 존재로서 경제적 성공을 배경이 되나 단점으로 본래의 부르주아지보다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이 부족하다. 특히 이들의 성공의 신화에 깊이 빠져있는 부류로서 값이 비싼 의상이나 구두, 자동차 등을 구매하고, 취미 역시 요트, 테니스, 골프를 하여 자신의 교양적 수준을 경제적 자본으로 대체하려 했다. 기본적으로 본래 부르주아지들은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승 중인 쁘디부르주아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 어느 노래나 그림이 나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 전자의 경우 “글쎄? 모르겠는데요.”라고 간단히 넘어갈 것이나, 후자의 경우 억지로 아는 채를 낸다는 점이다.

 

경제적 자본을 소유한 쁘디부르주아지의 특징이 이렇고, 신흥 쁘디부르주아지 중에서도 문화자본을 소유한 세력도 나타나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고, 박물관과 영화관, 미술관 등을 방문한다. 이들의 특징은 조금 열린 사고를 가진 점과 그런 사고로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직업과 더불어 취미의 영역이 각 계층마다의 차이는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미적 감각의 차이이고, 그것이 물질적 영역인지? 아니면 정신적 영역인지에 따라 틀리다. 물론 취미생활에서 문화자본의 소유는 경제적 자본력이 필요하다.

 

가령 책 1권을 구입하거나, 음반 1장 구매하거나, 박물관과 영화관을 관람할 때도 티켓은 반드시 금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막대한 금액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미생활로서 자신의 취향을 살리고, 그 취향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부여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농민과 노동자이다. 농민의 경우 정치적 세력에서 진보와 보수가 있다면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존재로 나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러시아혁명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가 경제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쿨라크들이 소비니스트적인 자세로 포기해야 했다. 그 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정치적 패배를 하게 된 이후 스탈린이 쿨라크들을 모조리 탄압하여 소비에트연방은 강대국이 되었다.

 

저런 역사적인 사례와 더불어 농민들은 파리나 대도시 인근이 아니고, 신문이나 잡지도 잘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기존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습관성이 있었다. 이와 달리 도시노동자의 경우 경제적 압박을 받는 점과 1968년 5월 혁명 시에 바갈로레아라는 대학입학증서 소지자조차도 노동자가 되어 학력자본 소유로 통한 계급변화가 힘들어진 점 역시 무시하지 못할 처사였다. 바갈로레아가 노동계급으로 들어올 경우 중등교육 내지 초등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와 더불어 그 안에서도 사회적 지위를 상승할 수 있는 기회까지 경쟁할 수 있는 점이다.

 

어째든 그런 노동자들은 대부분 생계형으로 생활패턴이 잡혀있기에 문화자본에서 독서, 영화보기 같은 것보단 TV보기와 축구나 일반적 경기관람이 많았다. 신문이나 잡지에 대한 수효는 적었다. 기본적으로 하층계층은 자신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수준이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직접 표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간다. 이 책에서 어느 하류계층에게 “당신의 정치적 입장은 어떠나요?”라고 물어보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죠?”라고 되묻는다.

 

비록 <구별짓기>가 취미와 취향의 분포로서 각 계층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나 토크빌의 주장처럼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가 가능한 이유는 민주주의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얼마나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그 판단능력은 학력자본과 문화자본, 경제자본에 의해 다시 재정립된다. 결국 이런 자본들의 충분하지 못한 부류가 국민 대부분이기에 정치적 상황에서 어느 특정세력에 대한 지지보다는 그 자체로서의 유동적인 상황이 된다.

 

한국에서 정치는 바람이 불면 갈대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갈대가 쓰러진 곳에 바람이 온다는 말처럼 하류계층의 지적영역과 인식능력에서 결국 정치적 영향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는 말에서 이성의 영역에서 현실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영역이 이성적이라고 왜곡되는 것이다. 취미와 취향의 부류에서 왜 정치적 영역으로 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결국 취미와 취향이 인간에게 사고의 결정을 부여하고, 가치관을 정립하며, 게다가 그 취미와 취향에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같이 한다는 사회관계자본까지 결정적이다.

 

만약 골프나 요트타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일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취미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하여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통해 조직되는 계급들의 벽들은 사회적인 대립각으로 변화되는 경우가 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골프장 도입을 환영하겠으나, 그 인근의 어민이나 농민들은 반대할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라고 해도 사회관계의 차이는 분명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점은 우리 현실에서 자주 보는 일이다.

 

내가 위에서 한국사회의 흐름이 앙시엥 레짐에 가깝다고 한 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화와 취미, 취향 그리고 정치적, 정치적 영역에 왜 그런 것인가이다. <구별짓기>에서 이런 말이 있다. 정치인들은 하층계급에 대해 직접적인 입장이나 상황을 알 수 없으면서 그들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접점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과의 접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들의 생활을 따라가야 할 부분이 있다. 취미나 취향, 심지어 식사와 일반생활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행위에 대해 진심어린 행동보단 아직까지도 상징적인 요소로 통한 신화의 단절과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신화라는 존재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가 계속 바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힘들다는 점이다. 앙시엥 레짐의 연계는 바로 상징자본적인 요소가 강한 현실의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루이16세의 목을 국민들 스스로가 베었다면, 그것은 신체적 살해를 넘어 하나의 상징적 살해와 같다. 그러나 한국에선 상징적 상해는 없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 지지에서도 <구별짓기>가 제시한 학력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별짓기>를 보면서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존재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 나오나, 국민들의 권력을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권자’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어렵고, 경제적 규모로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삐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지식인이어야말로 가장 높은 존재로 보여줄 수 있다. 단지 자신이 높이 보이기 위해 억지로 무리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되고 있는 사회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소에게 큰 빚이 있다고 한다. 루소는 왕도 아니고 높은 계급에 오르지도 못했고, 매우 고된 삶을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혁명 일어나기 1년 전에 죽은 루소에게 혁명정부의 요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혁명의 앞을 만들어준 하나의 시작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니라면 토크빌처럼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과 판단하는 임무 역시 중요하다. 인간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삐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로 통해 문화의 사회학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그런 프랑스의 1970년대의 모습과 그것을 통해 보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토로의 숲을 찾다 -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
요코가와 세쯔코 지음, 전홍규 옮김 / 이후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나처럼 환경을 전공한 사람에 자연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참으로 난감하다. 일단 나는 환경을 공학적으로 배웠고, 공학 이전에 과학과 기술로서의 관점을 키운 것이다. 따라서 환경이란 것을 분명히 인간의 심성과 영혼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구조와 체계로 보는 시스템이란 점이다. 생태학으로 통해 보는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효율과 이익의 체계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조금 더 유보적으로 혹은 안정적으로 또는 회복적으로 보는 것이 환경공학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공학이란 것은 이익을 위해서라는 단기적인 인간욕구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환경을 이익과 효율을 너머로 보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환경을 탈이익과 탈효율로 보는 것이 많은 이익과 효율을 준다.

 

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그것을 증명되었다. 조금이라도 환경을 파괴하거나 망치는 경우 인간에게 돌아오는 보복은 확실하게 잔인하고도 철저했다. 수많은 인명들이 죽고, 병들며,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이 책의 저자가 주로 여행한 곳은 북유럽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미문화가 녹아든 호주와 그리고 자국 일본이다.

 

예전에 마르크스 자본을 읽으면서 심각한 노동자의 생활상을 보았다. 더러운 음식과 집, 좁은 방과 화장실조차 구비되지 않은 위생환경, 게다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하천에 유입되는 공장폐수는 이들의 건강을 모두 망치게 했다. 인간의 수명 중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명이 40세 전후라는 점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린아이가 일을 하면서 공장굴뚝에 올라가 암에 걸리거나 혹은 폐병에 걸리는 점에서 인간에게 환경오염은 생존을 위협하는 하나의 무기였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사유지이면서도 모두에게 열린 자연공간은 그런 노동자에게 필수적이었다.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풀과 나무는 인간에게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건강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모두 격리되어 갔다. 그래서 존 러스킨, 월리엄 워즈워스, 베아트릭스 포터와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위해 투쟁을 하게 된다.

 

당시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이 자본주의로 통해 문명발전과 거기에 상응하는 자연파괴가 있었다. 자연이 파괴되면 될수록 사람들에게 문명의 혜택보단 오히려 인간성 파괴와 건강악화가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게 만사가 아니라 때로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돌아봄으로서 인간에게 돌아간 공간이 확보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삶의 욕망과 동시에 죽음의 욕망이 있다. 물론 정말 죽음의 욕망에서 죽음 그 자체를 추구할 수 있지만, 때로는 그 죽음의 영역이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이 숨어 있다.

 

그 본능을 자극하고 만족하고 받아주는 곳은 오로지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광기를 아름답게 표출한다. 자연에서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시인에게 시라는 노래를, 문학가에겐 위대한 작품을 선사한다. 물론 문명사회의 공간에서도 작가의 위대한 작품은 탄생한다. 하지만 아름답고 감성이 가득한 이야기들은 자연에서 태어난다. 게다가 우리 민족의 이야기에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자연은 신화와 전설이 가득하고,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유지시킨다.

 

자연의 단절은 우리 인간에게 마음을 죽게 하고, 건강까지 죽게 한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존 러스킨이라는 예술가는 자연에 접하지 않고 예술은 태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미학적으로 우리 인간의 최초의 예술은 종교적인 제의였다. 종교적 제의가 정치적인 표현이고, 그 정치적 표현이 인간의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사용한 주술도구나 조각, 회화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고대그리스의 예술과 르네상스 예술 역시 그리스신화를 본을 땄다.

 

그리스신화조차도 자연의 흐름에 비합리적인 설명을 합리적으로 보여줌으로 신화라는 서사가 탄생했다. 특히나 디오니소스라는 포도주의 신이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이란 우리에게 끊임없는 상상력과 생명력을 준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이 있고, 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만든 이웃집 토로로라는 작품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은 매우 아름답다. 특이하게도 이 토토로의 숲은 일본 도쿄 사이타마현 시야마 구릉의 숲이라고 한다.

 

나무의 정령 토토로에서 일본의 전형적인 애니미즘 사상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 역시 고목이나 바위에 정령이 있다고 여겼다. 물론 한국의 경우 애니미즘보단 샤머니즘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 무속종교의 영역에서 자연이란 세계는 분명히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는 상상력과 생명력, 역사까지 주어진 것이다. 자연이란 세계는 그렇다. 우리 인간에 항상 미적 아름다움과 생명의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순간적 이익을 위해 모두 파괴하고, 소유화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소유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거나 불투명하게 했다. 오히려 존재로 통한 영원한 소유로도 가능한데 말이다.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면 누구나 잘 보호되도록 가꾸며, 그것을 서로 즐기고 누릴 수 있다. 자연의 공간을 사유화가 아니라 인간을 너머 자연까지 공유하면, 그 누구의 것이 아닌데도 결국 그 누구의 것이 된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사회학이란 기본적인 명제 아래 경제학비판과 동시에 이루어져 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입장과 그 대중들 사이에서 학력과 경제력, 가정환경에 따른 변화무쌍한 사회적 관계는 단순히 이 책으로 읽었다고 하여 판단하는 여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부터 마르크스의 자본, 다른 인류학 내지 미학 및 철학 도서까지 읽어야 했다.

 

본래 이 책은 사회과학 도서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찰력이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라는 엄청난 교육기관의 사회학 교수를 지낸 사람으로 과거 1968년 5월 혁명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68혁명과 이 책과의 관계는 무관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구별 짓기에서 많은 차이를 주는 요인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사항은 교육이란 점이다.

 

물론 이 책에선 교육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왜 교육일까? 최근 영미철학 도서를 보면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교육적 결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하기를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란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보다는 자신이 사회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은 그리스폴리스국가는 소수의 남자만이 직접적 민주주의가 가능한 귀족주의 시절이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귀족만이 통치하는 과두제가 아니나, 10% 정도라면 조선시대의 사대부통치시절과 맞먹는 범주다. 그들에게 정치권과 사회결정권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부분마저도 <구별 짓기>에서 중요한 사회적 계급차이를 보여준다. 그만큼 명문가문이나 오래된 자영업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가정 내력과 자력을 소유하였기에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물론 앙시엥 레짐이던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로 보자면 왕족, 귀족, 성직자, 기사, 자유상인, 농민, 노동자, 노예 등등으로 구분되었기에 그들의 신분적 한계로 문화적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독재정권 그리고 프랑스 왕권 몰락 후의 의회 성립 그 후의 1차 및 2차 세계대전, 여분으로 집어넣자면 알제리와 전투와 드골의 강압정책은 프랑스 사회에서 계급의 차이를 만들어 내던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가 물러간 뒤에 프랑스에서도 영국의 산업혁명처럼 자본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구체계라면 분명 천부적인 탄생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면, 자본주의는 다른 요소로 보았다.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완벽한 부르주아에 의해 자본력만이 상위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자본 중에서 경제적 자본은 있어도 그 외의 자본은 없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본이다. 문화자본은 학력, 지역, 취미, 식생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문화를 생산하는 것에서 문화가 인간을 생산을 하고 재분류를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인간이 문명사회에서 기호를 생산하고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기호에서 인간이 뒤따라간다. 그런 점에서 삐에르 부르디외가 살던 68혁명은 괜히 나온 시대적 배경이 아니다. 기 드보르가 이른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하여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만드는 환상의 세계가 열린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런 문화적 영향을 받는 모든 계급에 상관없다는 점이다.

 

문화적인 생활에서 계급을 나누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의 우월감과 동시에 사회적 안정망을 추구한다. 가령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상류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운동의 종류에서 항상 타자와 분류하려 했다. 특히 골프, 테니스, 승마, 요트 등은 그것이 정말 수준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을 즐기려 하는 것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지출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장 보드리야르가 논한 것처럼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즉 자신의 상품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소비를 한다.

 

<구별 짓기>에서도 테니스를 하는데 분명히 필요한 라코스테 메이커와 테니스를 하는데 필요한 아디다스와 같은 명품 스포츠상품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비싼 운동에는 다시 비싼 의상과 그 의상이 나타내어주는 상표까지 취급한다. 경제력을 모든 것으로 구별 짓는 귀족문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오랜 귀족문화를 가진 자들은 이들과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오히려 겉으로 억지로 나타내 주기보단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겼다.

 

엘리트적인 음악취향에서 상급계층보단 오히려 그보다 낮은 쁘디-부르주아 편에 더 많은 수치를 보인다. 그것은 그들에게 상류로 올라간다는 욕망과 더불어 하층계급과 다르다는 하나의 의식이 보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도 우습게 만드는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영화, 미술, 건축, 무용, 문학 등에서 20세기에 활발하게 등장하다 쇠퇴와 몰락을 맞은 운동으로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위와 같이 뭐든지 의식적으로 보이려는 행위에 대하여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여주며, 심지어 counter-culture의 등장은 귀족주의 내지 상류문화에 대한 겉치레를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신들로 하여금 실천을 옮긴다. 가령 제일 재미난 구절이 바로 축구이다. 축구는 축구인데, 축구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나 스니커즈를 신으며 여성들도 참여 가능하여 하이힐까지 신고 뛰어 들어간다. 경기장은 잘 정돈된 잔디구장이 아니라 진흙탕으로 엉망이 될 수도 있고, 경기하는 사람 수도 딱히 정해진 게 아니라 20~30명이 여기저기 몰려다닌다.

 

더 재미난 사실은 성인들만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 심지어 11~12의 어린아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구별 짓기하여 고상한 어른보다 오히려 소통과 대화로서 승부욕을 대신해 주는 모습은 새롭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다고 하여 상류로 가려하는 그들의 노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마르셀 뒤샹이 미술전시관에 소변기라는 레니메이드에 자신의 서명을 한 후 “샘”이란 작품이라 명명했다. 다다이즘 작품으로서 현대의 예술(지금의 근대이나)은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디라도 있다는 풍자로서 당시로는 엉뚱한 행동이나 지금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문화 도서에서 반드시 봐야할 통과의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밀접한 것이라고 본다. 자본의 구조와 그리고 자본의 구조만이 아닌 고상함과 신성성이 서로 겹쳐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회의 존경받는 그룹에선 반드시 돈으로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관료적, 혹은 학문적 영역도 존재한다. 그 중 교수를 보자. 교수들은 비싼 음식과 운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문학, 철학, 인문계통 교수들은 산책이나 등산을 좋아하고, 거기서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좋아한다. 상류계층이라면 상류계층이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영역이고, 문화생활을 중시한다.

 

문화생활이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문화생활일 수 있다. 작은 월급으로 음식재료에 많은 지출을 하는 농민이나 공업노동자들의 생활 역시 음식문화, 소비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가족들과 즐기는 것 역시 문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문화라고 인식하기보다는 문화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생존의 필요성이다. 유명한 옛 단어처럼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사는가? 식도락과 생존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화적일까? 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소양이라면 당연히 일상적인 영역보단 비일상적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공연장 가기, 박물관 가기, 음반 듣기, 독서생활 하기 등등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문화적 차별을 이루어진다. 아니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고 글을 적는 것마저도 문화적 차별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모든 행위 자체에서 문화적 행위는 분류가 되어 그것이 서로 재생산되고 되어 같은 부류와 만나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다른 그룹과 차이점을 둔다. 독서와 서평이란 취미와 취향에서 사회적인 영역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도 구별 지을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느 전시회에 유명한 그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많은 금액도 필요하며, 전시회 대부분 박물관 및 화랑이기에 대부분 조용한 점과 그곳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 좋은 의상에 깔끔한 외모를 하고 전시회에 들어온다. 오늘 그 그림을 보니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아비뇽의 여인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 피카소군. 참으로 좋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 자본력이 월등하다.

 

그러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피카소의 분노이고, 아비뇽의 여인들은 스페인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들을 그렸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그의 명성을 찬양하는 인간들의 의식구조에서 피카소는 자본주의에 희생된 여성과 그리고 강대국에 의해 희생된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을 추도했지만, 그런 것도 모른 채 앞에서 웃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보는 하는 것일까? 아마 아비뇽의 여인들이 최고의 화가 피카소가 창녀를 보고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구역질이 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창녀에게 어떤 미학적 존재가 있기에 그들을 예술로서 승화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말이다. 아니라면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인가? 그림이 걸린 벽을 보는 것일까? 라는 조소도 같이 보낸다. 결국 자본은 이런 그림조차 이해하기 위한 지식적 문화자본도 존재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자본력과 혹은 가족의 내력으로 결정한 자본력, 또는 학력과 지식으로 결정되는 자본력,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을 서로 구분 짓고 또 구분 짓는다.

 

문제는 그것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나, 못 가진 자에게 상당히 치명적이다. 프랑스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기에 중등교육 이상을 수료한 자들이 부족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고, 이들에게 초반에 어울리는 직장이 찾을 수 있다가, 어느새 바깔로레아(대학입학증서)도 적정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시골 포도농장에서 일한다는 문구에서 학력의 과잉 화를 볼 수 있다. 5월 혁명 시기에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저항한 이유는 바로 이들의 직업적 문제가 있을 것이다.

 

트리클 다운이란 경제적 효과는 이미 무효화된 경제정책이나 아마도 그런 체계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경제적 부분에서 학력의 상승과 동시에 일자리의 부족과 임금문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본력이 중시된다. 이 책에서 아버지가 자영업, 공업노동자, 농민, 교수, 관료이면 그 후손들도 높은 확률로 이어졌다. 결국 문화자본, 경제자본, 학력자본 등은 인간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기 보다는 계급 재생산이라는 의미심장한 현상들을 만든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이 그대로 비정규직으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처사이고, 일부 소수자만 상위로 올라간다. 특히 spec 관리는 구별 짓기를 효과적으로 몰아붙인다. 경제적 자본이 학력자본과 문화자본까지 말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본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그것에 비례하는 다른 영역에서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취미와 취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급예술이나 운동을 배우거나 높은 교육조건을 갖추는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끔 아방가르드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로서 그들을 조롱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 역시 남발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다. 그렇게 조롱하는 사람들 역시 고상한 취미와 취향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의 역사 - 현대 프랑스 철학총서 11
미셸 푸꼬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기의 역사를 읽는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정말 광기라는 것이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그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설사 그 광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체로 광인으로 분류되어 하나의 감시와 처벌이란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니 사실은 본래 이 서적의 초반부터 파스칼의 재미있는 문구가 나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그 뒤에 불세출의 문학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에서 발췌한 문구인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 적힌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 인간은 광기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 존재의 여부가 광기의 유무라는 외향적 요소가 반드시 광기의 유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적인 판단력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배제로 통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광기의 역사라는 이름만큼 분명 여기에 광기에 미친 자들이 나온다.

 

문제는 그 광기라는 기준이 참으로 모호하다. 19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열어놓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정신적 증세라는 자체가 모두 광기라는 점에서 뭔가 의문스런 기분이 아니 들 수 없었다. 특히나 파리 시민 중에 100명 중 1명은 광인으로서 수용소에 갇혀야 한다는 점과 10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용소에 나누어 수용된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점인가?

 

문득 예전에 피카소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피카소가 죄를 지어 - 물론 진실로서 그가 윤리적인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죄를 부여 받은 -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면회를 오면서 피카소의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피카소는 친구를 더욱 걱정했다. 왜냐하면 감옥은 감옥 그 자체로서의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하나, 피카소가 걱정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옥이란 물리적 도구가 존재하기에 세상이란 감옥을 갇혀 살아도 인간은 자신이 감옥에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 감옥이 하나의 신화로서 자신의 탈(脫)감옥 했다는 관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본다면 광기에 빠진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면 광기에 빠지지 않은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라면 모두인가? 광인의 존재를 생각하면 데카르트 합리주의 관념과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결합하지 않을 시에는 그들은 매우 특별했다. 물론 이 책은 프랑스 중심이기에 가끔 독일과 영국의 이야기만 나온다. 하지만 동양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라고 해서 광인의 존재가 격리된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은 샤머니즘이란 초월적 영역에 대한 존재성을 믿는 종교 관념이 있다. 그런 샤머니즘에 필수적인 존재가 바로 샤먼, 무당이다. 무당 중에서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기의 힘을 보여준다. 오이를 떨어뜨리면 바로 두 동강 나는 칼날 위에 그것도 맨발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에서 광기라는 것이 단순히 격리와 야유에서 해결될 문제를 지나 하나의 신성성과 공포심을 내리는 주술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광기를 지닌 광인은 아마 저런 무당처럼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 환상의 세계, 혹은 존재의 대상조차 형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공간과 시간을 마주보는 독특한 존재다. 그런다고 그런 광기의 신성함을 가진 그들이라고 하여 일상적 생활에서 남들과 다른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처럼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심지어 취미생활까지 즐긴다. 그러나 광기의 영역에서는 다른 모습이 된다. 광기란 인간의 합리적 세계에서 비합리의 세계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나, 다시 비합리 내에서 합리적인 답이 나올 때도 있다.

 

무척이나 신화적인 세계이다. 왜냐하면 신화의 세계는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등장인물들이 합리적 행위를 해야 하며, 그 대가에서 다시 비합리적 위기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인물로는 간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녀의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와 계획하여 남편인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 살해동기 역시 비합리적인 상황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항해 도중 바다의 재앙에 발목이 잡힌다.

 

그 재앙에 대한 해결방안은 아가멤논의 딸을 희생하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아가멤논이 합리적 방법은 결국 그의 딸을 죽이는 방법이다. 대신 그것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아가메논이 죽게 되자, 그의 딸인 엘렉트라는 자신의 남동생인 오레스테스와 계획하여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간부를 살해하게 만든다.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어린 시절에 엘렉트라에게 지극정성으로 키워진 사람이다. 어머니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이나, 어머니 못지않게 누나인 엘렉트라에게 사랑을 받아온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와 누나의 사주로서 살해를 저지르나, 아무리 어머니의 죄가 깊더라도 그는 여신들의 화를 사게 되어 미쳐 날뛰게 된다. 광인이 아닌 자가 광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광기에 젖은 인간은 현실과 신화의 세계에서 접할 기회는 많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광기의 존재들은 신화로서 가치가 높으나, 탈(脫)신화가 되어버린 근현대에서는 신화의 세계는 미지와 미개의 존재로 남겨진다. 대신 계몽이란 새로운 억압이 신화로 되어 기존의 신화의 광인들을 모두 현실의 공간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특히 기독교적 이분법에서 이성의 존재가 아닌 자들은 모두 배척당해야 했다. 과거에는 광인들은 타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거나 또는 배를 태워 보내지게 되었으나, 이제는 추방이 아닌 수감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동적인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수용이란 감옥소에서 정적인 존재로 되어야 했고, 죽음 내지 혹은 이성을 지니지 못한 아이로서 살아야 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닌 자들이고, 그 이유는 언어로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관리자들은 어른들이고 합리적 이성으로 언어를 내리므로 이른바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점이다.

 

분명 광인들은 진짜 미쳤더라도 그 정신병적인 기질이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꿈과 환상 너머로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우리 일반인들이 보는 꿈과 환상은 그 자체로 가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광인들에겐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야였다. 그것이어야 말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가끔 사이비 종교지도자 내지 혹은 진짜 위대한 종교지도자의 차이는 그런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수준과 전달력,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일지도 모르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보자. 당시 그리스 신전에서 사람들이 신탁을 듣기 위해 가는데, 그들의 질문 중에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현명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소크라테스라고 답변을 들었다. 신탁 자체가 비합리적 세계이나 사람들은 그것을 합리적 응답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산파술로서 자신이 가장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소피스트들의 두려움이 되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만난 자들이 더욱 무지한 사실이 탄로 난 것이다.

 

그런 그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덕망이 생기고, 게다가 소피스트와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큰 방해가 되자,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욕하고 나쁜 소리를 하는 불순분자로 몰아 결국 그의 손에 독배를 주게 하여 스스로 자살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당시 살던 신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당시 권력자들은 그가 신을 모욕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지혜는 보통 사람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 역시 광인일지도 모른다. 지혜를 가진 광인, 그러나 존재하면 안 되기에 추방과 죽음으로 최후를 마친 광인으로 말이다.

 

그러나 점차 그런 광인들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고, 보이지 않아야 하기에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광기에 젖은 그들은 오히려 광기를 내뿜을 수 없기에 격렬한 반발과 동물적 본능으로 저항한다. 게다가 이제는 평범한 부류이나 걸인, 부랑자, 죄인들까지 이들의 영역에 합치게 한다. 광인이 과거에는 진리를 찾는 자나 구경거리로 되던 자에서 감시와 처벌에서 보조도구로 되어버린다. 사회적인 문제가 있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자들이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그들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매도하기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광인과 같이 갇힌 자들은 모두 공포와 불안 속에 괴로워한다. 광인들의 알 수 없는 행동과 언어, 게다가 초월적인 육체능력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광인들은 일반 사람들의 뇌와 다르다는 점은 이 책에서 밝히는데, 조증을 앓는 광인은 몸에 열기로 인해 추은 겨울에도 이불 하나 걸치지 않아도 되었으며, 추운 눈밭에서 몸을 뒹굴기도 한다. 또한 광인들 중에선 강력한 철쇄를 발과 손에 묶어두는데, 그들의 힘이 워낙 세기에 잘못 구속하면 거기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인들의 통제라는 명목까지는 좋으나, 이들에게 결코 이 방법들은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서 광인 중에서 정신병을 가진 것을 부정하게 되면, 오히려 그들은 그 부정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자기들의 주장을 강력히 내세운다. 이들의 증세와 비슷한 무리들을 서로 자신과 같은 자아로 보게 하자 모두 정신병에서 나와 일반생활로 갔다고 한다. 결국 광인과 그 광인이 가진 정신병을 생각해보면 근본적 해결이 있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점과 그들이 원래부터 광인일 수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연구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이 이성의 언어만이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의 영역을 지나 무의식적 발언에서 그것 역시 하나의 언어라는 구조적인 조건으로 많은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했다. 무의식의 언어를 의식의 언어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결국 외압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벗어나오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식화하기 전에 실시하던 치료방법은 너무 비과학적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정신병자와 광인의 치료가 중요했을까? 아니면 이들의 존재로 통해 사회적 통합과 질서체계를 유지하려 했을까?

 

이 책에서는 광기의 역사만큼 광기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나, 그동안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의 역사도 나온다. 광인들에 대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으나, 일반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권력의 횡포가 나온다. 부의 수거에서 새로운 부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배분관계에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충분히 가지 않자, 그들은 빈민 내지 부랑자가 되었고, 그들을 광인수용소에 보내고, 다시 거기서 노동을 하게 한다. 물론 그 대가비용은 매우 저렴하고, 그 이익배분도 매우 부당하다.

 

그런데 그 문제는 그 빈민들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착취와 임금저하로 통해 그들이 생산한 상품들의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시장경제는 무너지게 되어 다시 빈민재생산이란 하나의 모순적인 구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광기에 빠진 것은 과연 누구? 라는 의문처럼 파스칼의 문구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왜냐하면 분명 미친 사람은 존재하나 미치지 않은 사람까지 미치게 만드는 세상을 여전하다. 광기의 역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푸코는 19세기까지를 이 책에서 언급했지 20세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서 감옥을 다니면서 인권운동을 한 점에서 20세기에 마감한 푸코의 개인적 역사에서 여전히 계보학적인 그의 관점은 유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