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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의 숲을 찾다 - 내셔널트러스트의 여행
요코가와 세쯔코 지음, 전홍규 옮김 / 이후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나처럼 환경을 전공한 사람에 자연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참으로 난감하다. 일단 나는 환경을 공학적으로 배웠고, 공학 이전에 과학과 기술로서의 관점을 키운 것이다. 따라서 환경이란 것을 분명히 인간의 심성과 영혼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구조와 체계로 보는 시스템이란 점이다. 생태학으로 통해 보는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효율과 이익의 체계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조금 더 유보적으로 혹은 안정적으로 또는 회복적으로 보는 것이 환경공학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공학이란 것은 이익을 위해서라는 단기적인 인간욕구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환경을 이익과 효율을 너머로 보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환경을 탈이익과 탈효율로 보는 것이 많은 이익과 효율을 준다.
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그것을 증명되었다. 조금이라도 환경을 파괴하거나 망치는 경우 인간에게 돌아오는 보복은 확실하게 잔인하고도 철저했다. 수많은 인명들이 죽고, 병들며,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이 책의 저자가 주로 여행한 곳은 북유럽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미문화가 녹아든 호주와 그리고 자국 일본이다.
예전에 마르크스 자본을 읽으면서 심각한 노동자의 생활상을 보았다. 더러운 음식과 집, 좁은 방과 화장실조차 구비되지 않은 위생환경, 게다가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하천에 유입되는 공장폐수는 이들의 건강을 모두 망치게 했다. 인간의 수명 중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명이 40세 전후라는 점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린아이가 일을 하면서 공장굴뚝에 올라가 암에 걸리거나 혹은 폐병에 걸리는 점에서 인간에게 환경오염은 생존을 위협하는 하나의 무기였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사유지이면서도 모두에게 열린 자연공간은 그런 노동자에게 필수적이었다.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풀과 나무는 인간에게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건강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모두 격리되어 갔다. 그래서 존 러스킨, 월리엄 워즈워스, 베아트릭스 포터와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위해 투쟁을 하게 된다.
당시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이 자본주의로 통해 문명발전과 거기에 상응하는 자연파괴가 있었다. 자연이 파괴되면 될수록 사람들에게 문명의 혜택보단 오히려 인간성 파괴와 건강악화가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게 만사가 아니라 때로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돌아봄으로서 인간에게 돌아간 공간이 확보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삶의 욕망과 동시에 죽음의 욕망이 있다. 물론 정말 죽음의 욕망에서 죽음 그 자체를 추구할 수 있지만, 때로는 그 죽음의 영역이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이 숨어 있다.
그 본능을 자극하고 만족하고 받아주는 곳은 오로지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광기를 아름답게 표출한다. 자연에서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시인에게 시라는 노래를, 문학가에겐 위대한 작품을 선사한다. 물론 문명사회의 공간에서도 작가의 위대한 작품은 탄생한다. 하지만 아름답고 감성이 가득한 이야기들은 자연에서 태어난다. 게다가 우리 민족의 이야기에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자연은 신화와 전설이 가득하고,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유지시킨다.
자연의 단절은 우리 인간에게 마음을 죽게 하고, 건강까지 죽게 한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존 러스킨이라는 예술가는 “자연에 접하지 않고 예술은 태어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미학적으로 우리 인간의 최초의 예술은 종교적인 제의였다. 종교적 제의가 정치적인 표현이고, 그 정치적 표현이 인간의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사용한 주술도구나 조각, 회화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고대그리스의 예술과 르네상스 예술 역시 그리스신화를 본을 땄다.
그리스신화조차도 자연의 흐름에 비합리적인 설명을 합리적으로 보여줌으로 신화라는 서사가 탄생했다. 특히나 디오니소스라는 포도주의 신이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이란 우리에게 끊임없는 상상력과 생명력을 준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이 있고, 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만든 “이웃집 토로로”라는 작품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은 매우 아름답다. 특이하게도 이 토토로의 숲은 일본 도쿄 사이타마현 시야마 구릉의 숲이라고 한다.
나무의 정령 토토로에서 일본의 전형적인 애니미즘 사상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 역시 고목이나 바위에 정령이 있다고 여겼다. 물론 한국의 경우 애니미즘보단 샤머니즘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 무속종교의 영역에서 자연이란 세계는 분명히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는 상상력과 생명력, 역사까지 주어진 것이다. 자연이란 세계는 그렇다. 우리 인간에 항상 미적 아름다움과 생명의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순간적 이익을 위해 모두 파괴하고, 소유화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소유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거나 불투명하게 했다. 오히려 존재로 통한 영원한 소유로도 가능한데 말이다.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면 누구나 잘 보호되도록 가꾸며, 그것을 서로 즐기고 누릴 수 있다. 자연의 공간을 사유화가 아니라 인간을 너머 자연까지 공유하면, 그 누구의 것이 아닌데도 결국 그 누구의 것이 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