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 현대 프랑스 철학총서 11
미셸 푸꼬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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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를 읽는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정말 광기라는 것이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그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설사 그 광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체로 광인으로 분류되어 하나의 감시와 처벌이란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니 사실은 본래 이 서적의 초반부터 파스칼의 재미있는 문구가 나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그 뒤에 불세출의 문학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에서 발췌한 문구인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 적힌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 인간은 광기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그 존재의 여부가 광기의 유무라는 외향적 요소가 반드시 광기의 유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적인 판단력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배제로 통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광기의 역사라는 이름만큼 분명 여기에 광기에 미친 자들이 나온다.

 

문제는 그 광기라는 기준이 참으로 모호하다. 19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열어놓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정신적 증세라는 자체가 모두 광기라는 점에서 뭔가 의문스런 기분이 아니 들 수 없었다. 특히나 파리 시민 중에 100명 중 1명은 광인으로서 수용소에 갇혀야 한다는 점과 10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용소에 나누어 수용된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점인가?

 

문득 예전에 피카소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피카소가 죄를 지어 - 물론 진실로서 그가 윤리적인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죄를 부여 받은 -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면회를 오면서 피카소의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피카소는 친구를 더욱 걱정했다. 왜냐하면 감옥은 감옥 그 자체로서의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하나, 피카소가 걱정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감옥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옥이란 물리적 도구가 존재하기에 세상이란 감옥을 갇혀 살아도 인간은 자신이 감옥에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 감옥이 하나의 신화로서 자신의 탈(脫)감옥 했다는 관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본다면 광기에 빠진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면 광기에 빠지지 않은 인간이 미쳤는가? 아니라면 모두인가? 광인의 존재를 생각하면 데카르트 합리주의 관념과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결합하지 않을 시에는 그들은 매우 특별했다. 물론 이 책은 프랑스 중심이기에 가끔 독일과 영국의 이야기만 나온다. 하지만 동양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라고 해서 광인의 존재가 격리된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은 샤머니즘이란 초월적 영역에 대한 존재성을 믿는 종교 관념이 있다. 그런 샤머니즘에 필수적인 존재가 바로 샤먼, 무당이다. 무당 중에서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기의 힘을 보여준다. 오이를 떨어뜨리면 바로 두 동강 나는 칼날 위에 그것도 맨발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에서 광기라는 것이 단순히 격리와 야유에서 해결될 문제를 지나 하나의 신성성과 공포심을 내리는 주술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광기를 지닌 광인은 아마 저런 무당처럼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 환상의 세계, 혹은 존재의 대상조차 형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공간과 시간을 마주보는 독특한 존재다. 그런다고 그런 광기의 신성함을 가진 그들이라고 하여 일상적 생활에서 남들과 다른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처럼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심지어 취미생활까지 즐긴다. 그러나 광기의 영역에서는 다른 모습이 된다. 광기란 인간의 합리적 세계에서 비합리의 세계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나, 다시 비합리 내에서 합리적인 답이 나올 때도 있다.

 

무척이나 신화적인 세계이다. 왜냐하면 신화의 세계는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등장인물들이 합리적 행위를 해야 하며, 그 대가에서 다시 비합리적 위기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 인물로는 간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녀의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와 계획하여 남편인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 살해동기 역시 비합리적인 상황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항해 도중 바다의 재앙에 발목이 잡힌다.

 

그 재앙에 대한 해결방안은 아가멤논의 딸을 희생하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조건에서 아가멤논이 합리적 방법은 결국 그의 딸을 죽이는 방법이다. 대신 그것에 대한 인과관계에서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아가메논이 죽게 되자, 그의 딸인 엘렉트라는 자신의 남동생인 오레스테스와 계획하여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간부를 살해하게 만든다.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어린 시절에 엘렉트라에게 지극정성으로 키워진 사람이다. 어머니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이나, 어머니 못지않게 누나인 엘렉트라에게 사랑을 받아온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와 누나의 사주로서 살해를 저지르나, 아무리 어머니의 죄가 깊더라도 그는 여신들의 화를 사게 되어 미쳐 날뛰게 된다. 광인이 아닌 자가 광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광기에 젖은 인간은 현실과 신화의 세계에서 접할 기회는 많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광기의 존재들은 신화로서 가치가 높으나, 탈(脫)신화가 되어버린 근현대에서는 신화의 세계는 미지와 미개의 존재로 남겨진다. 대신 계몽이란 새로운 억압이 신화로 되어 기존의 신화의 광인들을 모두 현실의 공간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특히 기독교적 이분법에서 이성의 존재가 아닌 자들은 모두 배척당해야 했다. 과거에는 광인들은 타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거나 또는 배를 태워 보내지게 되었으나, 이제는 추방이 아닌 수감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동적인 존재로서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수용이란 감옥소에서 정적인 존재로 되어야 했고, 죽음 내지 혹은 이성을 지니지 못한 아이로서 살아야 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닌 자들이고, 그 이유는 언어로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관리자들은 어른들이고 합리적 이성으로 언어를 내리므로 이른바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점이다.

 

분명 광인들은 진짜 미쳤더라도 그 정신병적인 기질이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꿈과 환상 너머로 우리가 볼 수 없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우리 일반인들이 보는 꿈과 환상은 그 자체로 가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광인들에겐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야였다. 그것이어야 말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가끔 사이비 종교지도자 내지 혹은 진짜 위대한 종교지도자의 차이는 그런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수준과 전달력,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일지도 모르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보자. 당시 그리스 신전에서 사람들이 신탁을 듣기 위해 가는데, 그들의 질문 중에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현명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소크라테스라고 답변을 들었다. 신탁 자체가 비합리적 세계이나 사람들은 그것을 합리적 응답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산파술로서 자신이 가장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소피스트들의 두려움이 되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만난 자들이 더욱 무지한 사실이 탄로 난 것이다.

 

그런 그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덕망이 생기고, 게다가 소피스트와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큰 방해가 되자,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욕하고 나쁜 소리를 하는 불순분자로 몰아 결국 그의 손에 독배를 주게 하여 스스로 자살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당시 살던 신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당시 권력자들은 그가 신을 모욕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지혜는 보통 사람 이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 역시 광인일지도 모른다. 지혜를 가진 광인, 그러나 존재하면 안 되기에 추방과 죽음으로 최후를 마친 광인으로 말이다.

 

그러나 점차 그런 광인들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고, 보이지 않아야 하기에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광기에 젖은 그들은 오히려 광기를 내뿜을 수 없기에 격렬한 반발과 동물적 본능으로 저항한다. 게다가 이제는 평범한 부류이나 걸인, 부랑자, 죄인들까지 이들의 영역에 합치게 한다. 광인이 과거에는 진리를 찾는 자나 구경거리로 되던 자에서 감시와 처벌에서 보조도구로 되어버린다. 사회적인 문제가 있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자들이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그들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매도하기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광인과 같이 갇힌 자들은 모두 공포와 불안 속에 괴로워한다. 광인들의 알 수 없는 행동과 언어, 게다가 초월적인 육체능력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광인들은 일반 사람들의 뇌와 다르다는 점은 이 책에서 밝히는데, 조증을 앓는 광인은 몸에 열기로 인해 추은 겨울에도 이불 하나 걸치지 않아도 되었으며, 추운 눈밭에서 몸을 뒹굴기도 한다. 또한 광인들 중에선 강력한 철쇄를 발과 손에 묶어두는데, 그들의 힘이 워낙 세기에 잘못 구속하면 거기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인들의 통제라는 명목까지는 좋으나, 이들에게 결코 이 방법들은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서 광인 중에서 정신병을 가진 것을 부정하게 되면, 오히려 그들은 그 부정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자기들의 주장을 강력히 내세운다. 이들의 증세와 비슷한 무리들을 서로 자신과 같은 자아로 보게 하자 모두 정신병에서 나와 일반생활로 갔다고 한다. 결국 광인과 그 광인이 가진 정신병을 생각해보면 근본적 해결이 있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점과 그들이 원래부터 광인일 수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연구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이 이성의 언어만이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의 영역을 지나 무의식적 발언에서 그것 역시 하나의 언어라는 구조적인 조건으로 많은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했다. 무의식의 언어를 의식의 언어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결국 외압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벗어나오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식화하기 전에 실시하던 치료방법은 너무 비과학적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정신병자와 광인의 치료가 중요했을까? 아니면 이들의 존재로 통해 사회적 통합과 질서체계를 유지하려 했을까?

 

이 책에서는 광기의 역사만큼 광기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나, 그동안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의 역사도 나온다. 광인들에 대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으나, 일반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권력의 횡포가 나온다. 부의 수거에서 새로운 부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배분관계에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충분히 가지 않자, 그들은 빈민 내지 부랑자가 되었고, 그들을 광인수용소에 보내고, 다시 거기서 노동을 하게 한다. 물론 그 대가비용은 매우 저렴하고, 그 이익배분도 매우 부당하다.

 

그런데 그 문제는 그 빈민들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착취와 임금저하로 통해 그들이 생산한 상품들의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시장경제는 무너지게 되어 다시 빈민재생산이란 하나의 모순적인 구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광기에 빠진 것은 과연 누구? 라는 의문처럼 파스칼의 문구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왜냐하면 분명 미친 사람은 존재하나 미치지 않은 사람까지 미치게 만드는 세상을 여전하다. 광기의 역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푸코는 19세기까지를 이 책에서 언급했지 20세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서 감옥을 다니면서 인권운동을 한 점에서 20세기에 마감한 푸코의 개인적 역사에서 여전히 계보학적인 그의 관점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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