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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ㅣ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사회학이란 기본적인 명제 아래 경제학비판과 동시에 이루어져 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입장과 그 대중들 사이에서 학력과 경제력, 가정환경에 따른 변화무쌍한 사회적 관계는 단순히 이 책으로 읽었다고 하여 판단하는 여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부터 마르크스의 자본, 다른 인류학 내지 미학 및 철학 도서까지 읽어야 했다.
본래 이 책은 사회과학 도서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찰력이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라는 엄청난 교육기관의 사회학 교수를 지낸 사람으로 과거 1968년 5월 혁명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68혁명과 이 책과의 관계는 무관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구별 짓기에서 많은 차이를 주는 요인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사항은 교육이란 점이다.
물론 이 책에선 교육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왜 교육일까? 최근 영미철학 도서를 보면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교육적 결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하기를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란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보다는 자신이 사회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은 그리스폴리스국가는 소수의 남자만이 직접적 민주주의가 가능한 귀족주의 시절이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귀족만이 통치하는 과두제가 아니나, 10% 정도라면 조선시대의 사대부통치시절과 맞먹는 범주다. 그들에게 정치권과 사회결정권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부분마저도 <구별 짓기>에서 중요한 사회적 계급차이를 보여준다. 그만큼 명문가문이나 오래된 자영업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가정 내력과 자력을 소유하였기에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물론 앙시엥 레짐이던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로 보자면 왕족, 귀족, 성직자, 기사, 자유상인, 농민, 노동자, 노예 등등으로 구분되었기에 그들의 신분적 한계로 문화적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독재정권 그리고 프랑스 왕권 몰락 후의 의회 성립 그 후의 1차 및 2차 세계대전, 여분으로 집어넣자면 알제리와 전투와 드골의 강압정책은 프랑스 사회에서 계급의 차이를 만들어 내던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가 물러간 뒤에 프랑스에서도 영국의 산업혁명처럼 자본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구체계라면 분명 천부적인 탄생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면, 자본주의는 다른 요소로 보았다.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완벽한 부르주아에 의해 자본력만이 상위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자본 중에서 경제적 자본은 있어도 그 외의 자본은 없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본이다. 문화자본은 학력, 지역, 취미, 식생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문화를 생산하는 것에서 문화가 인간을 생산을 하고 재분류를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인간이 문명사회에서 기호를 생산하고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기호에서 인간이 뒤따라간다. 그런 점에서 삐에르 부르디외가 살던 68혁명은 괜히 나온 시대적 배경이 아니다. 기 드보르가 이른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하여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만드는 환상의 세계가 열린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런 문화적 영향을 받는 모든 계급에 상관없다는 점이다.
문화적인 생활에서 계급을 나누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의 우월감과 동시에 사회적 안정망을 추구한다. 가령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상류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운동의 종류에서 항상 타자와 분류하려 했다. 특히 골프, 테니스, 승마, 요트 등은 그것이 정말 수준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을 즐기려 하는 것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지출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장 보드리야르가 논한 것처럼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즉 자신의 상품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소비를 한다.
<구별 짓기>에서도 테니스를 하는데 분명히 필요한 라코스테 메이커와 테니스를 하는데 필요한 아디다스와 같은 명품 스포츠상품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비싼 운동에는 다시 비싼 의상과 그 의상이 나타내어주는 상표까지 취급한다. 경제력을 모든 것으로 구별 짓는 귀족문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오랜 귀족문화를 가진 자들은 이들과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오히려 겉으로 억지로 나타내 주기보단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겼다.
엘리트적인 음악취향에서 상급계층보단 오히려 그보다 낮은 쁘디-부르주아 편에 더 많은 수치를 보인다. 그것은 그들에게 상류로 올라간다는 욕망과 더불어 하층계급과 다르다는 하나의 의식이 보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도 우습게 만드는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영화, 미술, 건축, 무용, 문학 등에서 20세기에 활발하게 등장하다 쇠퇴와 몰락을 맞은 운동으로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위와 같이 뭐든지 의식적으로 보이려는 행위에 대하여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여주며, 심지어 counter-culture의 등장은 귀족주의 내지 상류문화에 대한 겉치레를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신들로 하여금 실천을 옮긴다. 가령 제일 재미난 구절이 바로 축구이다. 축구는 축구인데, 축구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나 스니커즈를 신으며 여성들도 참여 가능하여 하이힐까지 신고 뛰어 들어간다. 경기장은 잘 정돈된 잔디구장이 아니라 진흙탕으로 엉망이 될 수도 있고, 경기하는 사람 수도 딱히 정해진 게 아니라 20~30명이 여기저기 몰려다닌다.
더 재미난 사실은 성인들만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 심지어 11~12의 어린아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구별 짓기하여 고상한 어른보다 오히려 소통과 대화로서 승부욕을 대신해 주는 모습은 새롭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다고 하여 상류로 가려하는 그들의 노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마르셀 뒤샹이 미술전시관에 소변기라는 레니메이드에 자신의 서명을 한 후 “샘”이란 작품이라 명명했다. 다다이즘 작품으로서 현대의 예술(지금의 근대이나)은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디라도 있다는 풍자로서 당시로는 엉뚱한 행동이나 지금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문화 도서에서 반드시 봐야할 통과의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밀접한 것이라고 본다. 자본의 구조와 그리고 자본의 구조만이 아닌 고상함과 신성성이 서로 겹쳐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회의 존경받는 그룹에선 반드시 돈으로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관료적, 혹은 학문적 영역도 존재한다. 그 중 교수를 보자. 교수들은 비싼 음식과 운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문학, 철학, 인문계통 교수들은 산책이나 등산을 좋아하고, 거기서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좋아한다. 상류계층이라면 상류계층이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영역이고, 문화생활을 중시한다.
문화생활이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문화생활일 수 있다. 작은 월급으로 음식재료에 많은 지출을 하는 농민이나 공업노동자들의 생활 역시 음식문화, 소비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가족들과 즐기는 것 역시 문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문화라고 인식하기보다는 문화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생존의 필요성이다. 유명한 옛 단어처럼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사는가? 식도락과 생존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화적일까? 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소양이라면 당연히 일상적인 영역보단 비일상적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공연장 가기, 박물관 가기, 음반 듣기, 독서생활 하기 등등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문화적 차별을 이루어진다. 아니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고 글을 적는 것마저도 문화적 차별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모든 행위 자체에서 문화적 행위는 분류가 되어 그것이 서로 재생산되고 되어 같은 부류와 만나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다른 그룹과 차이점을 둔다. 독서와 서평이란 취미와 취향에서 사회적인 영역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도 구별 지을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느 전시회에 유명한 그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많은 금액도 필요하며, 전시회 대부분 박물관 및 화랑이기에 대부분 조용한 점과 그곳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 좋은 의상에 깔끔한 외모를 하고 전시회에 들어온다. 오늘 그 그림을 보니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아비뇽의 여인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 피카소군. 참으로 좋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 자본력이 월등하다.
그러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피카소의 분노이고, 아비뇽의 여인들은 스페인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들을 그렸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그의 명성을 찬양하는 인간들의 의식구조에서 피카소는 자본주의에 희생된 여성과 그리고 강대국에 의해 희생된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을 추도했지만, 그런 것도 모른 채 앞에서 웃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보는 하는 것일까? 아마 아비뇽의 여인들이 최고의 화가 피카소가 창녀를 보고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구역질이 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창녀에게 어떤 미학적 존재가 있기에 그들을 예술로서 승화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말이다. 아니라면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인가? 그림이 걸린 벽을 보는 것일까? 라는 조소도 같이 보낸다. 결국 자본은 이런 그림조차 이해하기 위한 지식적 문화자본도 존재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자본력과 혹은 가족의 내력으로 결정한 자본력, 또는 학력과 지식으로 결정되는 자본력,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을 서로 구분 짓고 또 구분 짓는다.
문제는 그것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나, 못 가진 자에게 상당히 치명적이다. 프랑스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기에 중등교육 이상을 수료한 자들이 부족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고, 이들에게 초반에 어울리는 직장이 찾을 수 있다가, 어느새 바깔로레아(대학입학증서)도 적정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시골 포도농장에서 일한다는 문구에서 학력의 과잉 화를 볼 수 있다. 5월 혁명 시기에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저항한 이유는 바로 이들의 직업적 문제가 있을 것이다.
트리클 다운이란 경제적 효과는 이미 무효화된 경제정책이나 아마도 그런 체계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경제적 부분에서 학력의 상승과 동시에 일자리의 부족과 임금문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본력이 중시된다. 이 책에서 아버지가 자영업, 공업노동자, 농민, 교수, 관료이면 그 후손들도 높은 확률로 이어졌다. 결국 문화자본, 경제자본, 학력자본 등은 인간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기 보다는 계급 재생산이라는 의미심장한 현상들을 만든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이 그대로 비정규직으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처사이고, 일부 소수자만 상위로 올라간다. 특히 spec 관리는 구별 짓기를 효과적으로 몰아붙인다. 경제적 자본이 학력자본과 문화자본까지 말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본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그것에 비례하는 다른 영역에서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취미와 취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급예술이나 운동을 배우거나 높은 교육조건을 갖추는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끔 아방가르드 표현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로서 그들을 조롱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 역시 남발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다. 그렇게 조롱하는 사람들 역시 고상한 취미와 취향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