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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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다른 쪽에서 알게 된 이름이다. 전에 우연히 본 애니메이션 <공중그네>에서 약간 정신이 사나운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으로 하여 각종 환자들이 정신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병적인 증세는 진짜 특이한 정신병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정신적 질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워낙 완벽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던 플라톤이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모든 시작이 되는 철학자이나, 중요한 부분은 그들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남자의 동성애는 이 남자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인가? 어디를 보면 옆 나라에서는 아버지가 딸이랑 동침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윤리적으로 틀린 일은 분명하나 그 나라와 민족에선 하나의 문화이고, 도덕적 가치에 부합되는 점이다. 어느 부족은 친구가 놀러오면 자신의 아내를 친구와 동침하게 한다. 나중에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가? 하는 의문에서 후사처리는 알 수 없으나, 정신병적인 증세에서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짓이 하나의 당위성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이상한 것 자체를 인정하기에 오히려 인간의 정신병적인 증세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넘길 수 있다.

 

지금에 와서 성인남성이 어린남자아이를 데리고 이상한 동침을 하면 바로 쇠고랑을 찬다. 어떻게든 변태적인 정신 상태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은 경악할 일이나, 다르게 생각하면 탈출구를 열어놓은 것이다. 인간에게 super-ego와 id의 경계에서의 ego가 어느 쪽으로 가기가 쉬운가? 인간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super-ego로 간다고 하나 실제는 id가 super-ego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에서 메시아니즘이나 마녀사냥은 늘 존재한다. 아직 타진요의 상처는 한 개인과 우리사회의 비극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인간에게 늘 이성을 요구하는 그 이성의 사회적 억압은 곧 언어라는 매체로 통해 인간의 내부 심리를 압박한다. 그러니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선 그 누구라도 정신병적인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하다. 주인공 의사는 인형 탈을 쓰고, 어린 아이처럼 때로는 젊은 사람처럼 모습을 보여준다. 옆에 있는 간호사는 짧은 치마에 담배를 피며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환자들을 쳐다본다. 짧은 치마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페티시즘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킹과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상의에서 대부분 남성 환자들은 libido란 성적무의식욕망이 올라오고, 솔직히 그것을 보는 나도 느낀다.

 

영상이미지가 다른 사람은 애니메이션영상인데, 그 간호사의 이미지는 실사를 원본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이 리얼리즘의 이미지를 넣은 점은 독특하다. 어째든 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그렇게 알았다. 그런 와중에 아는 동생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단지 <공중그네>에서는 인간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을 보여주었기에 <스무 살 도쿄>와 다른 작가처럼 느꼈다. 그러나 <스무 살 도쿄>를 다 읽으면서 같은 작가라고 느꼈다.

 

오쿠다 히데오란 작가는 쓸데없이 얽매이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점과 화끈해보자는 점과 특히 인간에게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그 자체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내뱉는 점이다. 그래서 <스무 살 도쿄>는 결국 오쿠다 히데오의 자신의 이야기란 것을 알았다. 소설은 다무라 히사오란 나고야 출신 도쿄 남자를 다룬 것이나, 그가 카피라이터를 하면서 자기 기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점에서 역시 그렇구나 하고 여겼다. <스무 살 도쿄>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설이다. 그저 슬쩍 보아도 금방 읽을 수 있고, 또한 내용 자체도 일상적이다. 문제는 너무 일상적이라 약간의 지루함도 있었지만, 상황의 꼬임에서 다무라의 고뇌는 청춘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고민이었다.

 

대학시절 자기를 좋아하는 여학생 동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미녀선배, 그리고 그 동기와 첫 키스의 우여곡절부터 도쿄로 온 배경과 낯선 곳에 방황하는 어린 자신, 이 소설제목처럼 스물이 되고 나서 그에게 온 것은 아버지의 부도와 자퇴신청서 제출이었다. 20살부터의 다무라는 도쿄란 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꿈과 환상은 다른 것임을 알아간다. 자퇴 후의 카피라이터 회사에서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이 하며, 심지어 밥조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다. 집에도 못가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1981년 서울올림픽과 나고야올림픽이 결정되는 순간에도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일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인다. 청춘의 열기를 즐거움보단 생계에 던졌기에 그의 청춘은 어찌 말하면 불행이라 볼 수 있다. 스키를 타고 놀러간다는 대학을 다니는 옛 동창과 자신은 일에 치이는 장면은 매우 변증법적인 청춘의 모습이다. 여기서 다무라는 그저 일에만 쫓기는 기계만 되었다. 그런 시간만 보내다 25살의 다무라는 제법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회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혈기가 왕성했는지 아니면 그저 속박이 싫은지 어머니가 억지로 만든 맞선에서 다무라는 상대방에게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듯이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상대여성도 그것에 동의한다. 다무라의 키는 174, 여성은 170 정도, 상대방은 굽이 너무 높은 구두를 신어 다무라보다 크게 보인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런 설정은 매우 인상 깊다. 왜냐하면 예전에 오쿠다 히데오는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이란 작품을 심하게 비판했다. 아마 그런 이유가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기가 후퇴하고 남성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 물론 특권계열은 유지하나 - 일반적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외되어가는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서적들을 참고하면 하위문화가 기존의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는 점차 여성에게 열려가고 있었고, 21세기에는 제법 많은 여성들도 하위문화에 취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나 보이지 않은 욕망을 표출하기 좋은 곳은 하위문화다. 하위문화로서 풀어가는 사회과학적 영역에서 여성의 구두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구두의 굽은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 정면 내지 위를 쳐다 보는 것보다 아래를 보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행동이다. 따라서 <케이온>에서 나오는 여고생들이 사회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청춘은 다소 마초이즘에 젖은 남자들에겐 혐오의 대상이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화 그리고 행동들에서 거칠고 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신을 토하는 오쿠다 히데오 스타일로서는 감당되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쿠다 히데오는 문화평론가보단 그저 카피라이터 또는 소설가에 어울린다.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문화평론가로서 보기엔 아직까지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검은색으로 도배하여 단발머리 여자에게 처음에 감정이 좋지 못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의 톡톡 쏘는 말투에 다무라는 매력을 느끼고, 다시 그 행동에 짜증이 난다. 마지막엔 부두가에 가서 도쿄의 밤을 구경하나 대학교 때 자기를 좋아해주던 고야마 에리와 같은 풋풋함 따위는 없다. 스무 살 때의 여대생과 스무 다섯 살 때의 직장여성은 너무 달랐다.

 

그런 그가 서른이란 나이에 닥친다. 그는 프리랜서고, 돈도 제법 들어온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찾아간 듯 아닌 듯 오묘하다. 자기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 파티를 하는데, 항상 다무라는 엉망진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여전히 친구 결혼식 전에 나타난 고다 사장의 주책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다무라의 행동과 고다 사장의 태도다. 고다 사장은 안하무인으로 주변인들 다루는 부자다. 그런 그에게 모두들 공손하게 굴지만, 순식간의 기분으로 다무라가 대든다.

 

그리고 고다는 그런 다무라에게 술을 마시고, 그의 심정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제법 들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나온다. 돈, 중요하다. 일본이나 다무라의 고향 나고야를 슬픔으로 울게 만든 서울올림픽이 열린 한국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돈이야 말로 종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것이 역설적이 되었다. 고다 사장은 젊은 시절 용돈이 4만 엔이었으나, 알고 보니 5만 엔이 들어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만 엔을 더 얹어주었다. 가난해도 그 어머니의 마음에 오히려 삶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도 친구는 떠나가고 주변 사람들은 없다. 옛날에 제왕은 외롭다는 말이 있다. 고다의 모습에서 행복은 무엇인가? 고다의 미래가 마치 다무라의 미래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쿠다 히데오가 무엇하러 자신과 같이 마초이즘과 같은 성향을 지닌 다무라로서 이 소설을 만들까? 그것은 청춘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준다. 돈도 없어 자퇴하고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스무 한 살 때 일할 때 옆에서 일하던 공주의 모습이 생각난다.

 

될지도 모르나 자신은 만화를 그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만화가는 일본이나 혹은 한국에서나 괴로운 선택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경우 거의 절망적이다. 이것은 만화애니메이션 계열에서 발군을 보이는 분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니 보장한다. 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도쿄라는 곳은 일본에서 수도이고, 모든 문화, 행정, 사회의 중심지다. 그곳에서 꿈을 동경하여 찾아온 다무라에게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적응하여 마치 하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 채 흘러간다. 어떻게 보면 젊음의 실패는 매우 두려우나, 우리는 그 실패마저 두려워 계속 실패 아닌 실패를 하는지 모른다. 다소 거칠어도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하는 것은 소중하다. <스무 살 도쿄>에서 스무 살은 매우 간략하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스무 살이다. 나의 스무 살은 지나갔으나, 지나간 것을 알기에 오히려 스무 살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단지 그것은 내 안의 이율배반적인 현실과의 괴리감만 느낀 채 하루를 떠나보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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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시대정신
최상명 지음 / 푸른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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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이란 소설로 아주 유명한 문학 작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오웰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에 아주 알맞은 작가였다. 그는 본래 영국인이고, 스페인의 프랑크 독재에 맞서 총을 들고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총상을 입게 되어 남은 여생을 병과 싸워야 했다. 그런 그가 병든 몸으로 소설 한편을 적었는데, 1948년 암울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린 <1984>이였다. 디스토피아에 반대되던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그런 <1984>는 미래 세계는 도청과 감시가 늘 따라 붙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권리는 상관없이 파시즘으로 가득한 암울한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스미스는 오세아니아 국가의 관리요원이었고, 그는 빅 브라더에 대한 의문과 조직이 가지는 이념에 대해 큰 염증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감시와 도청에 의해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고, 그 후 엄청난 고문과 우울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말 2 +2 = 5, 빅 브라더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되새기는 부분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런 무서운 시절이 우리에게 없다고 보는가? 가끔 인간들은 합리적인 발언에 대해 매우 무섭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폭력과 억압을 가한다. 오히려 비합리가 합리적으로 되어버린 광기가 인간을 나락으로 이끌어 나간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그는 1984년에 정말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득할 것이라 보았다. 물론 절망만 존재한 게 아니지만, 그 정도 걱정한 만큼의 절망은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 마련이다. 우리 사회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1984년이 지나고 1985년이 돌아오고, 우리는 남영동에서 일어난 그 잔혹하고 끔찍한 일이 어느 개인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갔음을 알게 된다. 원래는 자전적 기록인 <남영동>이 이제는 영화 <남영동 1985>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남영동>의 자신의 기록과 <남영동 1985>의 주인공은 바로 작년 겨울에 하늘로 떠나간 故 김근태 의원이다. 그는 마지막 병상에서도 전기충격으로 인한 파킨스병과 날이 덥다가 다시 서늘해지는 계절이 오면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는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고문이라는 인간의 잔혹한 유희는 그 당하는 자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시키고, 고문하는 자는 자신의 양심과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저주의 행위다. 고문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의 무의식에 큰 각인을 새겨 공포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한다. 전기고문으로 사육당한 짐승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역시 정신파괴로 인해 모든 것을 혼동의 공간 그리고 시간으로 여긴다. 그의 관념은 이제 더 이상 존재자로서의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의지의 박탈은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사라지게 하는 극단적 악몽이다.

 

그런 고문에서 다시 태어난 김근태의 이야기는 실로 기적 같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평소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존 롤즈와 같은 사상가들을 존경하기에 약간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보수적인 가치를 가진 자유주의자 역시 칸트나 밀 그리고 롤즈의 사상을 존경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머리가 아픈 정치철학도서를 읽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도 주변에 다소 보수적인 면이 강한 지인도 김근태에 대하여 그릇의 크기를 인정했다. 너무 착해 빠져서일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상처주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전가시키지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이라크파병을 그토록 반대하면서도 나중에 파병 안건을 찬성하던 그의 모습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보던 일반의지의 진정한 실천자였다. 민주주의 열사로서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는 불굴하지 않고 현실의 벽에 도전했다. 자신이 대통령 후보에 되지 않음을 미리 알고는 오히려 다른 후보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인권에 대한 의지와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은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도 고문이 하면서도 혹은 고문이 끝나서도 그 고문에 의해 육신이 흩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미국 케네디대통령의 동생을 기려서 만든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2번이나 획득했다. 그가 살아서 1번 그가 죽어서 1번이란 점에서 그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에 대한 열망은 세계가 모두 주목했다. 민주주의의 정착은 그동안 피와 눈물이라고 할까? 항상 인권을 향한 많은 열정들이 총과 칼 그리고 고문과 폭력 속에서 희생되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원은 항상 어서 빨리하기를 추구하기보다 천천히 걸어가고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좋다고 한다. 신중한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함은 민주주의사회의 시민이 가져야할 가치관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도 어떤 의사결정사항에서 소수자가 처음에 반대하더라도 그 의사결정에서 합리적인 대안이라면 충분히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김근태 의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이 정말 사람들에게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 되었다면 다시 이의를 제기한다. 법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을 압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의 최대수혜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하는 서민들이었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시절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일은 무슨 방법이든 막으려 했다.

 

단지 가난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비극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자들도 인권이 필요했고, 김근태는 항상 그것을 외쳤다. 지금처럼 경제민주화, 교육민주화를 외치고 있으나 김근태는 처음부터 외쳤다. 2012년 내내 경제민주화 이야기가 처음 나온 화두로 나오나 사실 20년 이전에도 있던 이야기라고 했다. 그동안 계속 묻히고 묻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진실이었다. 무너지는 가계와 그리고 파탄을 맞이하는 가정들,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가난과 추위 속에 병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에서 김근태는 죽어도 그의 의지는 죽을 수가 없다.

 

책 제목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는 조금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된다는 점은 모두가 마음을 합친다는 것도 되고, 한편으로 전체주의적으로 빠져 파시즘으로 전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가 된다는 점은 나를 위해 아니라 우리만을 위해가 아니라 그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인간의 존재적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당시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난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인권에서 “권리를 위한 권리”를 강조했다. 지난 과거가 아우슈비츠수용소처럼 살인가스를 뿌리지 않았으나, 폭력으로 드리워진 공포는 분명히 큰 슬픔을 주었다.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 바로 인권이 천부인권이 아니라는 점들은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오류다. 아니라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자체가 오히려 전체주의로 흘러가려는 그 냉정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인권은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개인들의 집합소다. 그 사회의 집합소에 누가 과연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인가? 자유란 나에게만 주어지어 자유가 성사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를 선사함으로 진정한 자유가 오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그런 자유의 의지이기에 자유란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이 따른다. 그런 삶을 위해 살아온 영원한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 의원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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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철학
팀 필립스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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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조금 감명 깊게 서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도서였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으로서 독일지성인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서적은 다소 난해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이해가 쉽고 간단한 것은 내가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 인간은 꽃을 좋아한다. 꽃을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물어보면 각자의 취향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이들은 향기가 어느 이들은 외관이 어느 이들은 약용으로서 좋다고 할 것이다. 나 역시 꽃은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꽃은 억지로 피어있는 꽃보다 저기 산자락 바위틈이나 나무들이 그냥 우거져있는 숲에 피어있는 꽃이다. 그것만큼 자연의 미를 살리는 예술은 없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을 서적을 읽다보면 누군가 지나가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예쁜 꽃을 발견했다고 하자. 꽃이 너무 좋아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구경하기 위해 그 꽃을 꺾은 후에 집에 가져갔다. 그리고 며칠 이내 그 꽃은 시들어 죽어버리고, 다시는 그 꽃을 구경하지 못했다. 또 다른 선택이다. 그 남자는 우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서 화분을 가져가 그 꽃을 자신의 화분에 심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꽃은 볕이 잘 드는 창가 아래 책상에 나두고 그 전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도저히 꽃에 대한 매력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는 계속 고민했고, 또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내린 결과는 그 꽃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그 꽃의 미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바위틈이나 혹은 나무에 핀 꽃들은 그 자리에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힘껏 뽐낼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깊이 들어가면 어려우나, 이 정도 일화는 충분히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여긴 장소에 찾아하면 어느 순간 식당, 여관, 술집, 도박장 등이 생긴다. 그리고 그곳은 원래의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이상한 관광지로 되어버린다.

 

자연의 미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 미를 파괴한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행복철학에는 그런 미덕에 대한 행복을 강조한다. 아니 그 강조조차 강조라고 볼 수 없다. 거기에 자신이 눌리는 순간 또 자신에 대한 속박에 빠지는 딜레마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 그 딜레마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내 자신에게 목이 졸리는 사태는 피해야하지 않은가? 러셀의 행복철학은 그렇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다고 하여 철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니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등으로 너무 이어지면 모두 머리가 아플 뿐이다. 다소 깊이를 추구하는 학도라면 좋은 길이나, 모두가 그럴 이유가 없기에 러셀의 행복철학은 대다수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철학도서다. 물론 어렵고 난해한 도서를 읽으면 연구하는 사람도 좋다. 그들은 깊이는 매우 깊을지 몰라도 그릇의 넓이는 넓지 못할 것이다. 깊이의 추구에서 인간의 넓이 역시 중요하다. 조금은 주변을 보고 머리를 식히며 무엇이 인간에게 행복인지 가치인지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만족이란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그런 부분은 나 역시 특히 그렇다. 다소 나라는 사람은 냉소적인 요소가 강하고 회의적인 인간상이 도출된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보단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한 회의감으로 말이다. 그런다고 인간 자체에 대해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 스스로를 너무 속박하고 옭아매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러셀은 그런 인간에게 너무 앞만 보고 가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기준은 자본과 권력, 명예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변에 있다고 한다. 가족, 친구, 이웃 등 우리는 이런 단어를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한다.

사실 그렇다. 인간에게 소중한 공기와 물은 항상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마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공기가 탁하면 괴롭고, 물상태가 좋지 못하면 구토를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옆에 있음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기에 슬픔이 온다. 정작 행복의 파랑새는 어디가 아니라 자신의 곁이라고 말이다. 물론 자신의 일상을 넘어 정처 없이 나그네 길을 다니는 사람 역시 행복은 있다. 그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자체로 말이다. 잘 나가는 차, 멋진 의상, 화려한 직위도 다 좋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물론 저런 외재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사람의 욕망이니깐. 그래도 여기에 모두를 걸면 인간은 자신에게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러셀은 그런 거대한 것보다 작고 일상적인 것에 즐김을 원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표를 모우거나 동전을 모우거나 인형을 모우거나 어디서는 쉽게 간단하게 누구나 부담 없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러셀의 가르침에는 “타인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모든 즐거움은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취향존중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생각하게 본다. 이 책이 다소 에세이 방식으로 지어진 철학교양 도서지만, 그렇다고 그 교양은 남에게 잘 보이고 겉치레를 위한 것보다 자신의 인생에 즐거움을 찾아보란 의미다.

 

우리는 늘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디에 속박하여 누군가를 앞지르려고 한다. 운전하는 나라도 느낀다. 사람들 90% 정도가 나는 운전을 남보다 잘 한다는 점이다. 그런 오만은 나도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몇 번의 작은 접촉사고도 났다. 다행히 나와 다른 사람이 트게 다치는 일들은 없었으나, 나에겐 다소의 금전적 손해와 시간적 손실이 따랐다. 내가 무엇에 집착하는가? 우리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은 없다. 차라리 벗어날 길이 없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 그러면 그런 강박관념이 오히려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지 않기에 그렇다.

 

물론 그런 행동들은 자신의 상황에 비례한다. 만약 어떤 인물이 눈앞에 폭격이 일어나거나 또는 전쟁터에서 총알세례가 떨어지거나 더 나아가 자동차가 인도로 덮치는 상황을 보자. 그 상황에는 강박관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이성은 마비될 것이다. 그런 극단적 상황이 없는 곳에 인간은 뭔가 강박관념에 쫓기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러셀의 행복철학 중요한 교훈으로 자신을 자극하는 것에 대해 모두 off switch를 눌러보라는 것이다. 컴퓨터도 끄고 전화기도 받지 않고 잠시 자신만의 명상 안에 머물러 보라는 것이다.

 

성격이 급하고 덤벙대는 내 같은 경우 여유라는 것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너무 자극에 휘둘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나친 집착과 불안은 오히려 더 큰 집착과 불안을 야기하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휘둘린 본 기억에서 왜 나는 그 사람에게 대한 분노와 짜증에 앞서서 왜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어야 하고, 왜 그렇게 당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다소의 싸움이나 오해는 불가결한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단지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적으로 다 해결될 수 없다. 참으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아 인간들끼리 부딪히지 않으면 어떨까 하나, 인간은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서 심신이 병들어 버린다.

 

이도 저도 안 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일상생활의 발견은 때로는 네잎 클로버를 찾는 일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에 빠지면 행복의 세잎 클로버는 자기 발밑에서 죽어 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런 인생의 행복을 당장 찾아 나서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통해 풀어간다. 행동은 각자의 의지와 자유에서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책의 모티브가 된 버트런드 러셀이란 학자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매력적이다.

 

나이를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몰라도 백발의 머리에 주름살이 얼굴을 장식한 그의 한쪽 손에는 파이프 담배가 하나 들려져 있었다. 파이프담배를 입에 넣으며 지긋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한 늙은 철학자의 모습에서 근엄하기보다 매우 친숙하다. 그는 본래 영국 귀족의 후생이나, 귀족이란 직위보다 귀족으로서 책임과 직무를 다했다. 평화주의자에 반핵운동 그리고 인권을 향하여 계속하여 외쳤다. 자신의 행복을 알기에 그는 다른 이의 행복을 추구하길 바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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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 루소
J.루소 지음 / 집문당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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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소의 자서전인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은 후에 왜 루소가 이런 성격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두 서적에서 루소의 옛날의 이야기가 나오나 그렇게 심층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단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선 프랑스 파리에서 지독한 꼴을 당하는 루소가 프랑스인들이 자신에 대한 오해와 왜곡, 편견과 오만, 조롱과 비난으로부터 그런 불행에 대한 근원에 대해 자기 자신을 타자로 내세워 변증법적인 대화를 오고간다. 그것도 나 자신을 혼자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심판하는 자신과 그 심판당하는 자신, 그 심판을 하게 만든 가상의 프랑스 신사로 말이다.

 

그리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는 열띤 토론과 자신에 대한 변증법적인 대화보단 조금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있는 두려움보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도 모르고, 그런 일들을 프랑스사람들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두려움이 루소를 괴롭게 했다. 루소에게 닥친 불운한 일들은 그 자체로서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 언제까지 자신이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현실적 고뇌를 승화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어질 정도로 루소의 생애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생각해볼 점은 왜 그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 그의 총명함은 어디서 나왔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루소는 당시 귀족이나 명사처럼 학교라는 정규적으로 지식을 알려준 곳에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학과 자신만의 사유로 사상을 발전시켰다. 독일 관념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마저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루소의 심오하고 깊고 자유로운 사유에서 탄생했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모든 세속인들이 루소의 몸을 가두고 감시할 수 있을지언정 그의 머릿속에 넘치는 사유의 세계는 아무도 접근도 방해하지 못했다. 루소에게 언제나 자연이란 세계에서 몽상을 채운다. 그런 루소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칸트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가벼운 산책을 일정한 시간에 나간다고 한다. 인간에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과의 만남과 사유의 발달일 것이다. 그런다고 루소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된 게 아니다. <참회록>은 자신의 성숙한 인격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자신이 열정적이고 못나고 때로는 어리석은 바보처럼 때로는 격렬한 용사처럼 적어 내려간다.

 

<참회록>은 루소에 대한 자서전보다는 오히려 반성문에 가깝다고 본다. 자신이 늙은 나이에 가장 치욕적인 일과 자신이 가장 부끄러운 일과 자신이 가장 마음이 아픈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그는 그것에 빠져서 고난을 겪었다고 고백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그런 고통에 빠져 현명하게 대처했기보단 오히려 하지 못함에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자서전에는 언제나 인간들은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심지어 위기에 빠져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재미로서 풀어간다. 원래 인간이 크게 보이기 위해서는 거대한 위기에서 훌륭하게 넘어가는 묘미가 있다.

 

왜 그렇지 아니한가? 영화, 연극,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모든 이야기가 있는 곳에 위기가 없다면 이야기의 진행이 어렵고, 그 위기를 건너지 못하면 영웅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인간은 어떤 것들도 억지로 붙어버린다.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고 전설은 그렇게 알프스 산에 내린 눈송이가 거대한 눈덩어리로 변해 굴러간다. 루소의 <참회록>은 그 알프스 눈송이가 눈덩이가 아니라 그 눈송이 자체가 내린 만큼 눈송이로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눈송이가 사라질 것만 같은 격정적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눈송이를 사라지게 만들 정도의 회오리가 말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시계수리공인 아버지만 있다는 점은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만약 어머니를 잃지 않았으며 이렇게 그의 인생에 큰 벽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머니 없다는 점은 결국 어머니 같은 여자가 필요했다. 루소의 집안은 기독교였으나, 우연히 천주교로 개종하고 이후 봐랑 부인을 만났다. 이 운명 같은 만남은 루소의 최고의 역전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아 자기 마을이나 혹은 다른 마을의 아가씨들에게 열정적 마음을 바친 루소에게 봐랑 부인은 자기가 머물러 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봐랑 부인은 아이가 없이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빠져나와 빅토르 아메데 왕이 자신의 집 근처에 올 때 그 왕에게 몸을 의지하여 결국 아느시에 정착한 것이다. 루소에게 이 귀부인은 세상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참회록>을 읽는 내내 다른 인물은 별로 생각나지 않고 봐랑 부인만 생각날 뿐이다. 읽는 독자가 그러한데 본인에 대해 참회하는 루소는 오죽하랴! 봐랑 부인은 혼자 살기에 주변에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교양이 넘치고 타인들에게 친절하다. 루소는 이 봐랑 부인이 너무 좋기에 나중에 “엄마”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모는 이미 자기를 낳고 세상을 떴지마는 봐랑 부인에게 자신의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다. 그녀도 그런 루소를 보고 마음에 격동이 일어났는지 루소를 “아들”로 봐주었다. 진짜 엄마와 아들은 관계는 몇 년간을 유지한다. 그러나 봐랑 부인이 하인인 아네가 죽은 뒤 루소가 그 뒤를 이은 후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른 사람이 루소의 자리를 차지하여 결국 루소는 사랑하는 엄마 봐랑 부인 곁을 떠나게 되었다. 게다가 봐랑 부인은 너무 소비욕구가 강했고, 덕분에 빚이 지게 된 점과 루소가 예전에 돈을 모아두면 그 돈을 인정사정없이 소모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이 봐랑 부인에게 너무 많은 사랑과 아픔을 느꼈다. 핏줄도 아닌데, 오히려 더 핏줄 같은 그녀에게 루소는 성적인 존재로 볼 수도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봐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루소는 성적 육욕이 있었는지 몰라도 전혀 없었다. 그녀의 경건함을 존중하고, 자신의 모든 영혼을 맡길 정도였다. 물론 루소는 다른 여자와 친구와 애인도 되었으나, 봐랑 부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소가 1737년 라르라즈 부인을 만나기 전에 그는 여자의 육체를 몰랐다.

 

루소가 살던 시절에 많은 귀부인들은 수많은 애인들을 거느렸다. 부인의 나이가 4~5살, 아니 10살 이상 차이가 나도 애인이 가능했다. 루소는 자신이 20살 시절 자신의 나이보다 4~5살 정도 많은 동네처녀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시절에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였고, 낭만과 달리 귀부인들은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에 성사되었다. 따라서 남편은 남편대로 애인과 여자 친구가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애인과 남자친구가 있었다. <참회록>에서 파리의 남성이 성공하려면 애인과 여자 친구의 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런지 루소는 많은 여성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여기서 루소의 상태를 보면 매우 착실한 점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루소는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에서 은밀함을 그렇게 착실하지 누리지 못했다. 루이왕정시대 절대군주의 영향은 남의 부인을 강탈할 정도로 문란했다. 어떻게 중세의 파리가 지금의 파리만큼 성적으로 더 문란하고 분방할 수 있냐는 생각에 놀란다. 아니 오히려 루소의 눈에는 성적인 욕망은 남성의 것보다는 부인의 것이었다. 성적호기심이 눈뜨는 청소년 시기에 루소는 낮에는 그토록 친절하고 조용한 부인이 밤에 왜 이리 시끄럽고 잠을 방해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렇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집은 방 하나에 가족들이 다 지내는 경우가 있기에 루소의 여린 점들이 루소의 순진성을 보여주었다.

 

아니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할까나? 그는 아마 어머니가 없다는 심적 우울함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적 우울은 테레즈라는 자신보다 어린 처녀를 만나 변했다. 글을 제대로 알려주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1~12월까지 철자를 알려주어도 외울 수 없는 그녀는 지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테레즈는 그 누구보다 루소에게 친절하게 아주 다정하게 해주었다. 루소는 테레즈에 대한 사랑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참회록>보다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나온다. 마지막 10장이 그가 작성 도중 서거하는 바람에 미완의 원고였으나, 루소는 서거하던 그날도 테레즈와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고 산책을 나누었다. 그리고 테레즈는 루소가 여기저기 도망치고 핍박을 받아도 그의 옆을 지켜주었다.

 

덕분에 루소는 테레즈만이 오직 자신의 어머니인 봐랑 부인의 그림자를 떠나보낼 여인이라 여겼다. 그런 루소에게 봐랑 부인의 그림자가 물러가는 동시에 새로운 불운이 닥쳤다. 루소는 초반에 여린 기질로 성공하지 못했으나, 점차 성격이 강직해지고 자신의 재능에 능숙하게 되자 그의 능력을 파리에 전할 수 있었다. 유명한 작가인 볼테르와 디드로를 만나 친분을 나누고, 자신이 발표한 <신 엘로이즈>는 당시 파리에 큰 화제였다. 모든 귀부인들이 루소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전에는 <학문예술론>,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학술적으로 그를 큰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나오고, 루소를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루소는 가시밭길로 접어들었다. 남을 미워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직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집필한 루소에게 운명의 소용돌이가 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소는 자신의 운명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참회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에게 이런 상황이 될 수 없음에 대한 참회를 한다. 안타까우나 후에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루소의 참회를 비웃음으로 놀려댄다. 후에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잠시 돌아보면 알겠지만, <참회록>은 루소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신으로 집필하기보단 순간적이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쏟아내었다.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분출하는 마그마처럼 타올라 가는 것이다.

 

루소의 3대 <참회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로 본다면 그의 심리상태, 급박함, 위기, 슬픔을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에 가면 <참회록>에 저술한 자신의 경솔함을 루소는 다시 또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정직하게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그 누구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외톨이라도 루소는 계속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루소의 글을 보면 이런 한심한 작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과오를 보여주고 인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찾으려는 루소이기에 그의 사상이 이토록 길고 진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우연히 블로그 이웃 분에게 루소 탄생한지 30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1712년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1762년 인류의 보물이자 큰 가르침인 <사회계약론>이 250주년을 맞이했다. 지금도 프랑스에선 프랑스국가로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른다. 프랑스혁명 때 부르던 노래가 아직도 프랑스에서 울려 퍼진다. 비록 불완전한 혁명이었고, 공포와 폭력이 난무했지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과 동시에 미국독립혁명까지 이어지고, 근대와 현대에 와서도 시민민주주의에 대한 정초가 되었다. 그런 루소이기에 우리는 그가 매우 위대한 사상가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참회록>의 루소는 위대하지 못함을 계속 보여준다.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되기 위해 엄청난 시련과 고통, 눈물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인간 루소 그 자체를 만나기 위해 <참회록>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아직도 프랑스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국기가 흔들리고 있다. 그 깃발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는지 모르고, 지금도 프랑스 내부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위해 그리고 그것이 손상당하는 것에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도 루소의 숨결은 계속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인권이란 소중한 권리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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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쇠퇴했습니다 6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곽형준 옮김, 토베 스나호 그림 / 서울문화사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human monument 계획이 여전히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6권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3권에서 나온 부분은 전기에 대한 부분이다. 전기는 우리 인류가 반드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현대의 원동력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 중심 속에 전기가 있기에 가능한 점이다. 그러나 전기라는 것은 과학적인 산물이고 매우 합리적이고, 이론적이며, 수치화가 가능한 하나다. 문제는 요정은 과학적인 산물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비이론적이며, 수치화가 전혀 계측되지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그들의 비합리야 말로 진실로 합리로 이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합리적 상황에서 비합리적 행동이 오히려 합리적 결과로 이어진다. 다소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찬, 반, 합이라고 하여 부정의 부정은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요정이다. 그런 반면에 요정이 아닌 인간에 처해진 상황은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다. 왜냐 하고 물어보면 인류는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번 6권은 그런 변증법의 양 갈래의 모순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human monument 계획에 대해 6권에서는 인류가 항상 소원한 것 중에 하나인 하늘에 대한 동경이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의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악우들이 매우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로를 지나 언제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백발의 남성들은 이미 자신의 얼굴의 주름과 눈 같이 하얀 머리카락도 잊을 듯 모두 열기에 가득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과 그 날고 싶은 도구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막무가내로 재미삼아 도구를 만드는 요정보다 괴이해 보였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를 읽어보면 다소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상당히 장난꾸러기 기질을 가지고 있다. 5권에서 마을이 RPG게임 세상으로 되자 자신의 지하창고에 보관된 무기를 보여주는데, 그 도구들이 고대 로마부터 시작하여 중세유럽에서 사용한 무기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 도구를 다루지 못한 점이다. 영국에서 쓰던 거대한 검 클레이모어, 유럽 귀족기사들이 사용한 20㎏가 되는 갑옷 모조품, 매우 길고 무거운 창들은 전쟁이라는 인류문명을 가질 수도 없는 마을주민에게 하나의 불가침적인 영역이었다.

 

그것을 보고도 태연한 박사 할아버지, 생각해보면 조수를 만날 때에도 로마 전차대가 이끄는 마차를 타는 것도 모자라 투구까지 착용한 점에서 그의 취미는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극대화로 즐기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린 많은 총들은 총이 더 이상 무기고에 보관하여 살인기계가 아니라 장식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전쟁이 인류의 정치적 수단 중에서 가장 물리적인 행위이기에 국가조차 사라진 상황에서 전쟁은 그저 꿈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human monument 계획을 보면 문명의 부활까지는 힘들겠지만, 재현 내지 모방이란 미학적 가치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란 점이다. 인류가 문명이 왜 쇠퇴했겠는가? 에너지의 고갈과 거대한 동물들의 소멸은 생존의 조건을 끊임없이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문을 읽으면 잘 나온다. 귀여운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온 한 청년이 자신이 가지고 온 비행기를 싣고 오기 위해 오다가 길가에서 매우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다.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대부분 자동차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휘발유, 경유, 천연가스 등으로 결국 석유에너지다.

 

요새같이 전기자동차가 나온다고 하나, 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무엇인가? 결국 전기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고, 그 전환 전의 에너지가 오염물질을 가중하고 있다면 전기자동차의 효능은 그저 거짓에 불과한 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화물차의 에너지 원동력이 태양광이고, 태양광의 차집에 한계가 있어서 기상에 따라 차가 움직이고, 하다못해 고속주행도 불가능하다. 에너지가 없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원동력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인간은 날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깃털로 몸을 이루거나 동력을 인력으로 대체하거나 많은 방법이 있다. 이들의 항공기술수준을 봐서는 라이트형제가 항공기를 이제 만들던 20세기 당시와 그 후와 같다. 이와 달리 요정은 이상한 식물을 달아보니 공중을 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양력을 생산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물리적 법칙이나 에너지의 공급과 전달은 불명확하다.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특징이니 주인공에게는 항상 트러블과 함께 트러블해결사까지 된다.

 

요정과 만나는 것이 지독한 일을 당하지만, 죽지 않는 행운도 누린다고 하니 가역적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번 행사의 마스터를 보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주 신랄하게 보여주다. 왜 주인공은 요정들에 휘둘리기 거부하면서 휘두를 수밖에 없는 걸까? 변증법적인 상황을 부정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행동이다. 물론 그 부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나 그 말로는 끔찍하다. 마스터가 주인공을 보면서 행사의 모든 안전과 관련 문서행정을 담당하라고 한다.

 

좋은 말과 편안 일들은 위에서 다 하고 말이다. 그래도 주인공은 일이란 자신의 소임을 다 완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경악이었다. 바다 절벽에서 항공기를 날려도 아래 바다가 있기에 충격을 완충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는 암초지대였다. 암초에 사람이 떨어진다면 거의 사망루트 확정이다. 게다가 상어들의 등에 장착된 뾰족한 그 무엇이 보인다. 배도 구멍이 나있고, 의료품도 다 쓸모없다. 주인공에게 합리적인 업무와 함께 비합리적 상황이 놓여있다. 결국 부정(과도한 업무)의 부정(상황의 위기)으로서 긍정을 찾는 것은 요정의 비합리성이다.

 

요정들의 도구는 기가 막힌다. 바위를 곤약으로 만드는데, 그 딱딱한 게 물컹물컹하게 변하여 물리적, 화학적 반응이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상어에게 빔을 쏘니 모두 도망친다. 그런다고 모두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여자주인공에게 조금 매력을 느낀다. 존댓말을 말하면서 기품 있는 행동도 그러하나 매우 냉소적인 태도와 속이 다소 구렁이기질이 있다는 자체에 큰 매력을 느낀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고양이처럼 낯이 심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매우 부담을 느낀다. 빗자루 머리까지 달고 있으니 그녀의 외관과 내관의 모습은 상당히 개성적이란 사실이다.

 

냉소적이기에 현실에 온갖 상황에서 요정들과 함께 하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묘미를 제대로 내뿜기 때문이다. 안전담당이라고 하여 바다안전만이 아니라 항공기체 상태도 의심된다. 요정들에게 부탁하여 항공기 안전을 점검하는데, 괴도 루팡과 같은 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가면, 그리고 망토,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신발, 마취총 등등은 코믹한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한다. 특히나 프랑스 기사인 슈발리에가 들고 있을법한 사브르를 들고 그 기체의 안전에 위험요소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 후에 손가락을 자신의 얼굴 옆에 대고 피스하면서 해결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주인공 개인적으로 그런 포즈는 자신의 의지하고 상관없다고 여기나, 요정이 만든 도구보단 주인공 내면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쾌감이라 여긴다. 왜냐고 물어보면 대회가 끝난 후에 모든 서류로 며칠을 고생하면 다 해결하면서 주인공은 변장하지 않을 채 얼굴 옆에 손가락을 피스로서 포즈를 취한 후 해결이라 한다. 이래저래 항공기마다 안전장치를 한 후에 대회에 막상 보니 자신이 한 행동에 항공기체 능력을 향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죽음의 위기를 제거한 것이었다. 대신 마지막에 요정의 식물을 잘못 설치한 쌍둥이의 형은 하늘높이 올라가자, 주인공은 여기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든 인력으로 움직이는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다.

 

이때 요정이 준 아이템을 획득 후 올라가서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 상황과 방법으로 구출하는데, 그 과정이 당황스럽다. 요정들이 스스로 항공기 부품이 되어 거대한 괴물비행기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물리적 에너지는 주인공이 계속 발로 페달을 밟는 점이다. 요정은 물리적인 법칙은 어긋나게 해도 물리 그 에너지 자체를 만들 수 없다. 과자를 좋아하면서 과자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정확한 무게를 계측할 수 없고, 시간도 정확히 계측하지 못한다. 오로지 순간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래서 결국 비합리가 합리로 교체되는 점이다. 물론 합리적 사고로 도전하려한 인간들은 자신의 합리성이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부정이 긍정으로 변하여 대회는 무사히 마쳤으나,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생고생한 점에서 전체적인 상황은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멸망하는 길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에너지의 공급이고, 지식의 전달이다. 과거의 기술들이 소멸하고, 그 전수까지 사라지는 마당에 human monument 계획을 하는 것은 무모함의 도전임이다.

 

그런 도전도 마치고 주인공이 평온한 일상을 머무는데, 다시 다른 사건이 터졌다. Y라는 학사 악우가 다시 온 것이다. 그녀는 3년이나 되는 수당을 모두 자동차에 투자한다. 주인공은 그런 Y를 보면서 바보가 있다고 한다. 과연 바보의 행동인지 이번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요정들의 서브컬쳐는 Y와 Y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가속화되는 광기였다. 기본적으로 Y는 BL물의 열렬한 포로였다. 학사 내의 도서관에서 BL소설을 모두 점령하고, 헤르만 헤세와 같은 대문호의 <지와 사랑>까지 접수한 그녀에게 BL의 공포는 다시 쿠스노기 마을을 점령한다.

 

그녀는 마을 내 사람이 살지 않은 저택에서 시디데이터를 복원하여 BL문화를 전파하여 마을 처녀들을 모두 섭렵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에 있는 소녀들과 처녀들의 잠과 마음까지 빼앗아버렸다. 일을 할 수 없고, 잠도 오지 않아 그 간절함에 편지에 담아 찾아온 Y에게 온갖 욕망과 알 수 없는 광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문화는 전파되면 끊임없이 변질되고 재생산되어 결국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한다. 모든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하듯이 Y의 행위에 전 세계적 소녀들의 BL축제가 열리게 된다. 왜 여성들이 BL에 집착하는가? 아니라면 조수와 친한 주인공에게 이성애자라고 말하며 토라진 Y와 같은 여성의 모순인가?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다시 거대한 욕망을 분출한다.

 

Y의 계획이 성공한 점에서 문화는 끊임없이 재생산이 가능해야 한다. 먼저 만드는 사람, 그것을 보고 전파하고 전달하는 사람, 그 문화가 전파되기 위한 도로교통과 같은 이동수단, 그리고 그것을 보고 다시 창작을 하는 사람에서 재생산의 반복은 쿠스노기 마을에 거대한 BL행사장 즉 동류행사를 만들어버렸다. 만 명이 훌쩍 넘은 곳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제일 중요한 수단이 돈으로 책을 구입하지 않고, 무료배부에서 문화라는 공간은 자본력의 차이에서 수용력을 한계성을 부여하나, 그곳에선 오로지 책의 권수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사에서 요정들도 궁금해 한 것이다. 어느 날 수상한 책이 책상에 있고, 주인공은 그것을 펼치는 순간 빛이 나오며 책에 갇혔다. 그곳에는 조수와 Y가 있었고, 이 책은 자신들이 만화책이 갇혀진 공간임을 알았다. 만화책에서 주인공들이 되어 배역을 돌아가면 맡는데, 순위에서 다른 동류지와 비교되어 순위가 변동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발견한 요정들이 꼴찌가 되어 연재중지가 되면 심한 꼴을 당한다고 한다.

 

결국 그 꼴을 당하고, 마지막에 요정들이 벌칙으로 가업의 일을 잇는다고 한다. 만화가는 어떻게 보면 꿈을 그리고 환상을 만들려는 존재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부담은 가업을 잇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니 상관없으나, 어찌 보면 메르헨 세계에서 보이는 현실적 감각은 매우 탁월하다. 꿈을 가지고 도전한 인간들이 실패하면 가업을 잇는 것만큼 현실적 처신이 없을 수가 없다. 물론 그 가업 역시 어느 정도 기반이 있어야 하나, 주인공이 사는 세계는 직업과 직무가 세분화된 곳이 아니다. 대부분 농촌에서 밭을 일구고 축산물을 키우며, 강가에서 어업을 하는 1차 산업구조다. 기껏 특이한 직업이야 마을에서 의사나 주인공이나 그녀의 할아버지 정도다.

 

메르헨 속에 펼쳐지는 라이트노벨이라고 해도 상당히 문명사회에 대한 아찔한 부분과 상류와 하류계급에 보이는 모습을 코믹하게 담는다. 게다가 문화라는 매체에서 계속 재생산되는 점과 꿈을 노리는 직업에 실패하면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벌칙은 매우 현실적이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상황이 매우 비현실적인 입장에 비합리적 방법으로 해결하기에 합리적으로 만사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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