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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시대정신
최상명 지음 / 푸른숲 / 2012년 11월
평점 :
<동물농장>이란 소설로 아주 유명한 문학 작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오웰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에 아주 알맞은 작가였다. 그는 본래 영국인이고, 스페인의 프랑크 독재에 맞서 총을 들고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총상을 입게 되어 남은 여생을 병과 싸워야 했다. 그런 그가 병든 몸으로 소설 한편을 적었는데, 1948년 암울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린 <1984>이였다. 디스토피아에 반대되던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그런 <1984>는 미래 세계는 도청과 감시가 늘 따라 붙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권리는 상관없이 파시즘으로 가득한 암울한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스미스는 오세아니아 국가의 관리요원이었고, 그는 빅 브라더에 대한 의문과 조직이 가지는 이념에 대해 큰 염증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감시와 도청에 의해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고, 그 후 엄청난 고문과 우울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말 2 +2 = 5, 빅 브라더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되새기는 부분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런 무서운 시절이 우리에게 없다고 보는가? 가끔 인간들은 합리적인 발언에 대해 매우 무섭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폭력과 억압을 가한다. 오히려 비합리가 합리적으로 되어버린 광기가 인간을 나락으로 이끌어 나간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그는 1984년에 정말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득할 것이라 보았다. 물론 절망만 존재한 게 아니지만, 그 정도 걱정한 만큼의 절망은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 마련이다. 우리 사회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1984년이 지나고 1985년이 돌아오고, 우리는 남영동에서 일어난 그 잔혹하고 끔찍한 일이 어느 개인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갔음을 알게 된다. 원래는 자전적 기록인 <남영동>이 이제는 영화 <남영동 1985>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남영동>의 자신의 기록과 <남영동 1985>의 주인공은 바로 작년 겨울에 하늘로 떠나간 故 김근태 의원이다. 그는 마지막 병상에서도 전기충격으로 인한 파킨스병과 날이 덥다가 다시 서늘해지는 계절이 오면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는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고문이라는 인간의 잔혹한 유희는 그 당하는 자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시키고, 고문하는 자는 자신의 양심과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저주의 행위다. 고문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의 무의식에 큰 각인을 새겨 공포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한다. 전기고문으로 사육당한 짐승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역시 정신파괴로 인해 모든 것을 혼동의 공간 그리고 시간으로 여긴다. 그의 관념은 이제 더 이상 존재자로서의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의지의 박탈은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사라지게 하는 극단적 악몽이다.
그런 고문에서 다시 태어난 김근태의 이야기는 실로 기적 같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평소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존 롤즈와 같은 사상가들을 존경하기에 약간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보수적인 가치를 가진 자유주의자 역시 칸트나 밀 그리고 롤즈의 사상을 존경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머리가 아픈 정치철학도서를 읽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도 주변에 다소 보수적인 면이 강한 지인도 김근태에 대하여 그릇의 크기를 인정했다. 너무 착해 빠져서일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상처주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전가시키지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이라크파병을 그토록 반대하면서도 나중에 파병 안건을 찬성하던 그의 모습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보던 일반의지의 진정한 실천자였다. 민주주의 열사로서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는 불굴하지 않고 현실의 벽에 도전했다. 자신이 대통령 후보에 되지 않음을 미리 알고는 오히려 다른 후보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인권에 대한 의지와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은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도 고문이 하면서도 혹은 고문이 끝나서도 그 고문에 의해 육신이 흩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미국 케네디대통령의 동생을 기려서 만든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2번이나 획득했다. 그가 살아서 1번 그가 죽어서 1번이란 점에서 그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에 대한 열망은 세계가 모두 주목했다. 민주주의의 정착은 그동안 피와 눈물이라고 할까? 항상 인권을 향한 많은 열정들이 총과 칼 그리고 고문과 폭력 속에서 희생되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원은 항상 어서 빨리하기를 추구하기보다 천천히 걸어가고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좋다고 한다. 신중한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함은 민주주의사회의 시민이 가져야할 가치관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도 어떤 의사결정사항에서 소수자가 처음에 반대하더라도 그 의사결정에서 합리적인 대안이라면 충분히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김근태 의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이 정말 사람들에게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 되었다면 다시 이의를 제기한다. 법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을 압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의 최대수혜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하는 서민들이었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시절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일은 무슨 방법이든 막으려 했다.
단지 가난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비극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자들도 인권이 필요했고, 김근태는 항상 그것을 외쳤다. 지금처럼 경제민주화, 교육민주화를 외치고 있으나 김근태는 처음부터 외쳤다. 2012년 내내 경제민주화 이야기가 처음 나온 화두로 나오나 사실 20년 이전에도 있던 이야기라고 했다. 그동안 계속 묻히고 묻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진실이었다. 무너지는 가계와 그리고 파탄을 맞이하는 가정들,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가난과 추위 속에 병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에서 김근태는 죽어도 그의 의지는 죽을 수가 없다.
책 제목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는 조금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된다는 점은 모두가 마음을 합친다는 것도 되고, 한편으로 전체주의적으로 빠져 파시즘으로 전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가 된다는 점은 나를 위해 아니라 우리만을 위해가 아니라 그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인간의 존재적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당시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난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인권에서 “권리를 위한 권리”를 강조했다. 지난 과거가 아우슈비츠수용소처럼 살인가스를 뿌리지 않았으나, 폭력으로 드리워진 공포는 분명히 큰 슬픔을 주었다.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 바로 인권이 천부인권이 아니라는 점들은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오류다. 아니라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자체가 오히려 전체주의로 흘러가려는 그 냉정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인권은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개인들의 집합소다. 그 사회의 집합소에 누가 과연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인가? 자유란 나에게만 주어지어 자유가 성사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를 선사함으로 진정한 자유가 오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그런 자유의 의지이기에 자유란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이 따른다. 그런 삶을 위해 살아온 영원한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 의원의 명복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