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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철학
팀 필립스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예전에 내가 조금 감명 깊게 서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도서였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으로서 독일지성인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서적은 다소 난해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이해가 쉽고 간단한 것은 내가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 인간은 꽃을 좋아한다. 꽃을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물어보면 각자의 취향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이들은 향기가 어느 이들은 외관이 어느 이들은 약용으로서 좋다고 할 것이다. 나 역시 꽃은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꽃은 억지로 피어있는 꽃보다 저기 산자락 바위틈이나 나무들이 그냥 우거져있는 숲에 피어있는 꽃이다. 그것만큼 자연의 미를 살리는 예술은 없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을 서적을 읽다보면 누군가 지나가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예쁜 꽃을 발견했다고 하자. 꽃이 너무 좋아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구경하기 위해 그 꽃을 꺾은 후에 집에 가져갔다. 그리고 며칠 이내 그 꽃은 시들어 죽어버리고, 다시는 그 꽃을 구경하지 못했다. 또 다른 선택이다. 그 남자는 우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서 화분을 가져가 그 꽃을 자신의 화분에 심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꽃은 볕이 잘 드는 창가 아래 책상에 나두고 그 전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도저히 꽃에 대한 매력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는 계속 고민했고, 또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내린 결과는 그 꽃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그 꽃의 미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바위틈이나 혹은 나무에 핀 꽃들은 그 자리에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힘껏 뽐낼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깊이 들어가면 어려우나, 이 정도 일화는 충분히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여긴 장소에 찾아하면 어느 순간 식당, 여관, 술집, 도박장 등이 생긴다. 그리고 그곳은 원래의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이상한 관광지로 되어버린다.
자연의 미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 미를 파괴한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행복철학에는 그런 미덕에 대한 행복을 강조한다. 아니 그 강조조차 강조라고 볼 수 없다. 거기에 자신이 눌리는 순간 또 자신에 대한 속박에 빠지는 딜레마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 그 딜레마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내 자신에게 목이 졸리는 사태는 피해야하지 않은가? 러셀의 행복철학은 그렇게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다고 하여 철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니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등으로 너무 이어지면 모두 머리가 아플 뿐이다. 다소 깊이를 추구하는 학도라면 좋은 길이나, 모두가 그럴 이유가 없기에 러셀의 행복철학은 대다수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철학도서다. 물론 어렵고 난해한 도서를 읽으면 연구하는 사람도 좋다. 그들은 깊이는 매우 깊을지 몰라도 그릇의 넓이는 넓지 못할 것이다. 깊이의 추구에서 인간의 넓이 역시 중요하다. 조금은 주변을 보고 머리를 식히며 무엇이 인간에게 행복인지 가치인지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만족이란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그런 부분은 나 역시 특히 그렇다. 다소 나라는 사람은 냉소적인 요소가 강하고 회의적인 인간상이 도출된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보단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한 회의감으로 말이다. 그런다고 인간 자체에 대해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 스스로를 너무 속박하고 옭아매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러셀은 그런 인간에게 너무 앞만 보고 가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기준은 자본과 권력, 명예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변에 있다고 한다. 가족, 친구, 이웃 등 우리는 이런 단어를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한다.
사실 그렇다. 인간에게 소중한 공기와 물은 항상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마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공기가 탁하면 괴롭고, 물상태가 좋지 못하면 구토를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옆에 있음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기에 슬픔이 온다. 정작 행복의 파랑새는 어디가 아니라 자신의 곁이라고 말이다. 물론 자신의 일상을 넘어 정처 없이 나그네 길을 다니는 사람 역시 행복은 있다. 그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자체로 말이다. 잘 나가는 차, 멋진 의상, 화려한 직위도 다 좋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물론 저런 외재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사람의 욕망이니깐. 그래도 여기에 모두를 걸면 인간은 자신에게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러셀은 그런 거대한 것보다 작고 일상적인 것에 즐김을 원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표를 모우거나 동전을 모우거나 인형을 모우거나 어디서는 쉽게 간단하게 누구나 부담 없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러셀의 가르침에는 “타인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모든 즐거움은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취향존중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생각하게 본다. 이 책이 다소 에세이 방식으로 지어진 철학교양 도서지만, 그렇다고 그 교양은 남에게 잘 보이고 겉치레를 위한 것보다 자신의 인생에 즐거움을 찾아보란 의미다.
우리는 늘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디에 속박하여 누군가를 앞지르려고 한다. 운전하는 나라도 느낀다. 사람들 90% 정도가 나는 운전을 남보다 잘 한다는 점이다. 그런 오만은 나도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몇 번의 작은 접촉사고도 났다. 다행히 나와 다른 사람이 트게 다치는 일들은 없었으나, 나에겐 다소의 금전적 손해와 시간적 손실이 따랐다. 내가 무엇에 집착하는가? 우리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은 없다. 차라리 벗어날 길이 없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 그러면 그런 강박관념이 오히려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지 않기에 그렇다.
물론 그런 행동들은 자신의 상황에 비례한다. 만약 어떤 인물이 눈앞에 폭격이 일어나거나 또는 전쟁터에서 총알세례가 떨어지거나 더 나아가 자동차가 인도로 덮치는 상황을 보자. 그 상황에는 강박관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이성은 마비될 것이다. 그런 극단적 상황이 없는 곳에 인간은 뭔가 강박관념에 쫓기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러셀의 행복철학 중요한 교훈으로 자신을 자극하는 것에 대해 모두 off switch를 눌러보라는 것이다. 컴퓨터도 끄고 전화기도 받지 않고 잠시 자신만의 명상 안에 머물러 보라는 것이다.
성격이 급하고 덤벙대는 내 같은 경우 여유라는 것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너무 자극에 휘둘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나친 집착과 불안은 오히려 더 큰 집착과 불안을 야기하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휘둘린 본 기억에서 왜 나는 그 사람에게 대한 분노와 짜증에 앞서서 왜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어야 하고, 왜 그렇게 당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다소의 싸움이나 오해는 불가결한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단지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적으로 다 해결될 수 없다. 참으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아 인간들끼리 부딪히지 않으면 어떨까 하나, 인간은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서 심신이 병들어 버린다.
이도 저도 안 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일상생활의 발견은 때로는 네잎 클로버를 찾는 일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에 빠지면 행복의 세잎 클로버는 자기 발밑에서 죽어 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런 인생의 행복을 당장 찾아 나서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통해 풀어간다. 행동은 각자의 의지와 자유에서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책의 모티브가 된 버트런드 러셀이란 학자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매력적이다.
나이를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몰라도 백발의 머리에 주름살이 얼굴을 장식한 그의 한쪽 손에는 파이프 담배가 하나 들려져 있었다. 파이프담배를 입에 넣으며 지긋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한 늙은 철학자의 모습에서 근엄하기보다 매우 친숙하다. 그는 본래 영국 귀족의 후생이나, 귀족이란 직위보다 귀족으로서 책임과 직무를 다했다. 평화주의자에 반핵운동 그리고 인권을 향하여 계속하여 외쳤다. 자신의 행복을 알기에 그는 다른 이의 행복을 추구하길 바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