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다른 쪽에서 알게 된 이름이다. 전에 우연히 본 애니메이션 <공중그네>에서 약간 정신이 사나운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으로 하여 각종 환자들이 정신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병적인 증세는 진짜 특이한 정신병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정신적 질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워낙 완벽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던 플라톤이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모든 시작이 되는 철학자이나, 중요한 부분은 그들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남자의 동성애는 이 남자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인가? 어디를 보면 옆 나라에서는 아버지가 딸이랑 동침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윤리적으로 틀린 일은 분명하나 그 나라와 민족에선 하나의 문화이고, 도덕적 가치에 부합되는 점이다. 어느 부족은 친구가 놀러오면 자신의 아내를 친구와 동침하게 한다. 나중에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가? 하는 의문에서 후사처리는 알 수 없으나, 정신병적인 증세에서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짓이 하나의 당위성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이상한 것 자체를 인정하기에 오히려 인간의 정신병적인 증세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넘길 수 있다.

 

지금에 와서 성인남성이 어린남자아이를 데리고 이상한 동침을 하면 바로 쇠고랑을 찬다. 어떻게든 변태적인 정신 상태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은 경악할 일이나, 다르게 생각하면 탈출구를 열어놓은 것이다. 인간에게 super-ego와 id의 경계에서의 ego가 어느 쪽으로 가기가 쉬운가? 인간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super-ego로 간다고 하나 실제는 id가 super-ego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에서 메시아니즘이나 마녀사냥은 늘 존재한다. 아직 타진요의 상처는 한 개인과 우리사회의 비극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인간에게 늘 이성을 요구하는 그 이성의 사회적 억압은 곧 언어라는 매체로 통해 인간의 내부 심리를 압박한다. 그러니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선 그 누구라도 정신병적인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하다. 주인공 의사는 인형 탈을 쓰고, 어린 아이처럼 때로는 젊은 사람처럼 모습을 보여준다. 옆에 있는 간호사는 짧은 치마에 담배를 피며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환자들을 쳐다본다. 짧은 치마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페티시즘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킹과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상의에서 대부분 남성 환자들은 libido란 성적무의식욕망이 올라오고, 솔직히 그것을 보는 나도 느낀다.

 

영상이미지가 다른 사람은 애니메이션영상인데, 그 간호사의 이미지는 실사를 원본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이 리얼리즘의 이미지를 넣은 점은 독특하다. 어째든 오쿠다 히데오란 인물은 그렇게 알았다. 그런 와중에 아는 동생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단지 <공중그네>에서는 인간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을 보여주었기에 <스무 살 도쿄>와 다른 작가처럼 느꼈다. 그러나 <스무 살 도쿄>를 다 읽으면서 같은 작가라고 느꼈다.

 

오쿠다 히데오란 작가는 쓸데없이 얽매이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점과 화끈해보자는 점과 특히 인간에게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그 자체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내뱉는 점이다. 그래서 <스무 살 도쿄>는 결국 오쿠다 히데오의 자신의 이야기란 것을 알았다. 소설은 다무라 히사오란 나고야 출신 도쿄 남자를 다룬 것이나, 그가 카피라이터를 하면서 자기 기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점에서 역시 그렇구나 하고 여겼다. <스무 살 도쿄>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설이다. 그저 슬쩍 보아도 금방 읽을 수 있고, 또한 내용 자체도 일상적이다. 문제는 너무 일상적이라 약간의 지루함도 있었지만, 상황의 꼬임에서 다무라의 고뇌는 청춘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고민이었다.

 

대학시절 자기를 좋아하는 여학생 동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미녀선배, 그리고 그 동기와 첫 키스의 우여곡절부터 도쿄로 온 배경과 낯선 곳에 방황하는 어린 자신, 이 소설제목처럼 스물이 되고 나서 그에게 온 것은 아버지의 부도와 자퇴신청서 제출이었다. 20살부터의 다무라는 도쿄란 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꿈과 환상은 다른 것임을 알아간다. 자퇴 후의 카피라이터 회사에서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이 하며, 심지어 밥조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다. 집에도 못가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1981년 서울올림픽과 나고야올림픽이 결정되는 순간에도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일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인다. 청춘의 열기를 즐거움보단 생계에 던졌기에 그의 청춘은 어찌 말하면 불행이라 볼 수 있다. 스키를 타고 놀러간다는 대학을 다니는 옛 동창과 자신은 일에 치이는 장면은 매우 변증법적인 청춘의 모습이다. 여기서 다무라는 그저 일에만 쫓기는 기계만 되었다. 그런 시간만 보내다 25살의 다무라는 제법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회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혈기가 왕성했는지 아니면 그저 속박이 싫은지 어머니가 억지로 만든 맞선에서 다무라는 상대방에게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듯이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상대여성도 그것에 동의한다. 다무라의 키는 174, 여성은 170 정도, 상대방은 굽이 너무 높은 구두를 신어 다무라보다 크게 보인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런 설정은 매우 인상 깊다. 왜냐하면 예전에 오쿠다 히데오는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이란 작품을 심하게 비판했다. 아마 그런 이유가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기가 후퇴하고 남성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 물론 특권계열은 유지하나 - 일반적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외되어가는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서적들을 참고하면 하위문화가 기존의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는 점차 여성에게 열려가고 있었고, 21세기에는 제법 많은 여성들도 하위문화에 취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나 보이지 않은 욕망을 표출하기 좋은 곳은 하위문화다. 하위문화로서 풀어가는 사회과학적 영역에서 여성의 구두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구두의 굽은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 정면 내지 위를 쳐다 보는 것보다 아래를 보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행동이다. 따라서 <케이온>에서 나오는 여고생들이 사회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청춘은 다소 마초이즘에 젖은 남자들에겐 혐오의 대상이다.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화 그리고 행동들에서 거칠고 몰아치는 폭풍처럼 자신을 토하는 오쿠다 히데오 스타일로서는 감당되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쿠다 히데오는 문화평론가보단 그저 카피라이터 또는 소설가에 어울린다.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문화평론가로서 보기엔 아직까지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검은색으로 도배하여 단발머리 여자에게 처음에 감정이 좋지 못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의 톡톡 쏘는 말투에 다무라는 매력을 느끼고, 다시 그 행동에 짜증이 난다. 마지막엔 부두가에 가서 도쿄의 밤을 구경하나 대학교 때 자기를 좋아해주던 고야마 에리와 같은 풋풋함 따위는 없다. 스무 살 때의 여대생과 스무 다섯 살 때의 직장여성은 너무 달랐다.

 

그런 그가 서른이란 나이에 닥친다. 그는 프리랜서고, 돈도 제법 들어온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찾아간 듯 아닌 듯 오묘하다. 자기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 파티를 하는데, 항상 다무라는 엉망진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여전히 친구 결혼식 전에 나타난 고다 사장의 주책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다무라의 행동과 고다 사장의 태도다. 고다 사장은 안하무인으로 주변인들 다루는 부자다. 그런 그에게 모두들 공손하게 굴지만, 순식간의 기분으로 다무라가 대든다.

 

그리고 고다는 그런 다무라에게 술을 마시고, 그의 심정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제법 들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나온다. 돈, 중요하다. 일본이나 다무라의 고향 나고야를 슬픔으로 울게 만든 서울올림픽이 열린 한국 역시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돈이야 말로 종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것이 역설적이 되었다. 고다 사장은 젊은 시절 용돈이 4만 엔이었으나, 알고 보니 5만 엔이 들어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만 엔을 더 얹어주었다. 가난해도 그 어머니의 마음에 오히려 삶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도 친구는 떠나가고 주변 사람들은 없다. 옛날에 제왕은 외롭다는 말이 있다. 고다의 모습에서 행복은 무엇인가? 고다의 미래가 마치 다무라의 미래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쿠다 히데오가 무엇하러 자신과 같이 마초이즘과 같은 성향을 지닌 다무라로서 이 소설을 만들까? 그것은 청춘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준다. 돈도 없어 자퇴하고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스무 한 살 때 일할 때 옆에서 일하던 공주의 모습이 생각난다.

 

될지도 모르나 자신은 만화를 그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만화가는 일본이나 혹은 한국에서나 괴로운 선택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경우 거의 절망적이다. 이것은 만화애니메이션 계열에서 발군을 보이는 분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니 보장한다. 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도쿄라는 곳은 일본에서 수도이고, 모든 문화, 행정, 사회의 중심지다. 그곳에서 꿈을 동경하여 찾아온 다무라에게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적응하여 마치 하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 채 흘러간다. 어떻게 보면 젊음의 실패는 매우 두려우나, 우리는 그 실패마저 두려워 계속 실패 아닌 실패를 하는지 모른다. 다소 거칠어도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하는 것은 소중하다. <스무 살 도쿄>에서 스무 살은 매우 간략하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스무 살이다. 나의 스무 살은 지나갔으나, 지나간 것을 알기에 오히려 스무 살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단지 그것은 내 안의 이율배반적인 현실과의 괴리감만 느낀 채 하루를 떠나보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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