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 루소
J.루소 지음 / 집문당 / 1991년 1월
평점 :
품절


루소의 자서전인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은 후에 왜 루소가 이런 성격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두 서적에서 루소의 옛날의 이야기가 나오나 그렇게 심층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단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에선 프랑스 파리에서 지독한 꼴을 당하는 루소가 프랑스인들이 자신에 대한 오해와 왜곡, 편견과 오만, 조롱과 비난으로부터 그런 불행에 대한 근원에 대해 자기 자신을 타자로 내세워 변증법적인 대화를 오고간다. 그것도 나 자신을 혼자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심판하는 자신과 그 심판당하는 자신, 그 심판을 하게 만든 가상의 프랑스 신사로 말이다.

 

그리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는 열띤 토론과 자신에 대한 변증법적인 대화보단 조금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있는 두려움보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도 모르고, 그런 일들을 프랑스사람들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두려움이 루소를 괴롭게 했다. 루소에게 닥친 불운한 일들은 그 자체로서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 언제까지 자신이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현실적 고뇌를 승화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어질 정도로 루소의 생애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생각해볼 점은 왜 그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 그의 총명함은 어디서 나왔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루소는 당시 귀족이나 명사처럼 학교라는 정규적으로 지식을 알려준 곳에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학과 자신만의 사유로 사상을 발전시켰다. 독일 관념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마저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루소의 심오하고 깊고 자유로운 사유에서 탄생했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모든 세속인들이 루소의 몸을 가두고 감시할 수 있을지언정 그의 머릿속에 넘치는 사유의 세계는 아무도 접근도 방해하지 못했다. 루소에게 언제나 자연이란 세계에서 몽상을 채운다. 그런 루소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칸트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가벼운 산책을 일정한 시간에 나간다고 한다. 인간에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과의 만남과 사유의 발달일 것이다. 그런다고 루소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된 게 아니다. <참회록>은 자신의 성숙한 인격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자신이 열정적이고 못나고 때로는 어리석은 바보처럼 때로는 격렬한 용사처럼 적어 내려간다.

 

<참회록>은 루소에 대한 자서전보다는 오히려 반성문에 가깝다고 본다. 자신이 늙은 나이에 가장 치욕적인 일과 자신이 가장 부끄러운 일과 자신이 가장 마음이 아픈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그는 그것에 빠져서 고난을 겪었다고 고백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그런 고통에 빠져 현명하게 대처했기보단 오히려 하지 못함에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자서전에는 언제나 인간들은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기 바쁘다. 심지어 위기에 빠져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재미로서 풀어간다. 원래 인간이 크게 보이기 위해서는 거대한 위기에서 훌륭하게 넘어가는 묘미가 있다.

 

왜 그렇지 아니한가? 영화, 연극,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모든 이야기가 있는 곳에 위기가 없다면 이야기의 진행이 어렵고, 그 위기를 건너지 못하면 영웅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인간은 어떤 것들도 억지로 붙어버린다.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고 전설은 그렇게 알프스 산에 내린 눈송이가 거대한 눈덩어리로 변해 굴러간다. 루소의 <참회록>은 그 알프스 눈송이가 눈덩이가 아니라 그 눈송이 자체가 내린 만큼 눈송이로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눈송이가 사라질 것만 같은 격정적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눈송이를 사라지게 만들 정도의 회오리가 말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시계수리공인 아버지만 있다는 점은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만약 어머니를 잃지 않았으며 이렇게 그의 인생에 큰 벽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머니 없다는 점은 결국 어머니 같은 여자가 필요했다. 루소의 집안은 기독교였으나, 우연히 천주교로 개종하고 이후 봐랑 부인을 만났다. 이 운명 같은 만남은 루소의 최고의 역전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아 자기 마을이나 혹은 다른 마을의 아가씨들에게 열정적 마음을 바친 루소에게 봐랑 부인은 자기가 머물러 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봐랑 부인은 아이가 없이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빠져나와 빅토르 아메데 왕이 자신의 집 근처에 올 때 그 왕에게 몸을 의지하여 결국 아느시에 정착한 것이다. 루소에게 이 귀부인은 세상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참회록>을 읽는 내내 다른 인물은 별로 생각나지 않고 봐랑 부인만 생각날 뿐이다. 읽는 독자가 그러한데 본인에 대해 참회하는 루소는 오죽하랴! 봐랑 부인은 혼자 살기에 주변에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교양이 넘치고 타인들에게 친절하다. 루소는 이 봐랑 부인이 너무 좋기에 나중에 “엄마”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모는 이미 자기를 낳고 세상을 떴지마는 봐랑 부인에게 자신의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다. 그녀도 그런 루소를 보고 마음에 격동이 일어났는지 루소를 “아들”로 봐주었다. 진짜 엄마와 아들은 관계는 몇 년간을 유지한다. 그러나 봐랑 부인이 하인인 아네가 죽은 뒤 루소가 그 뒤를 이은 후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른 사람이 루소의 자리를 차지하여 결국 루소는 사랑하는 엄마 봐랑 부인 곁을 떠나게 되었다. 게다가 봐랑 부인은 너무 소비욕구가 강했고, 덕분에 빚이 지게 된 점과 루소가 예전에 돈을 모아두면 그 돈을 인정사정없이 소모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이 봐랑 부인에게 너무 많은 사랑과 아픔을 느꼈다. 핏줄도 아닌데, 오히려 더 핏줄 같은 그녀에게 루소는 성적인 존재로 볼 수도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봐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루소는 성적 육욕이 있었는지 몰라도 전혀 없었다. 그녀의 경건함을 존중하고, 자신의 모든 영혼을 맡길 정도였다. 물론 루소는 다른 여자와 친구와 애인도 되었으나, 봐랑 부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소가 1737년 라르라즈 부인을 만나기 전에 그는 여자의 육체를 몰랐다.

 

루소가 살던 시절에 많은 귀부인들은 수많은 애인들을 거느렸다. 부인의 나이가 4~5살, 아니 10살 이상 차이가 나도 애인이 가능했다. 루소는 자신이 20살 시절 자신의 나이보다 4~5살 정도 많은 동네처녀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시절에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였고, 낭만과 달리 귀부인들은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에 성사되었다. 따라서 남편은 남편대로 애인과 여자 친구가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애인과 남자친구가 있었다. <참회록>에서 파리의 남성이 성공하려면 애인과 여자 친구의 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런지 루소는 많은 여성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여기서 루소의 상태를 보면 매우 착실한 점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루소는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에서 은밀함을 그렇게 착실하지 누리지 못했다. 루이왕정시대 절대군주의 영향은 남의 부인을 강탈할 정도로 문란했다. 어떻게 중세의 파리가 지금의 파리만큼 성적으로 더 문란하고 분방할 수 있냐는 생각에 놀란다. 아니 오히려 루소의 눈에는 성적인 욕망은 남성의 것보다는 부인의 것이었다. 성적호기심이 눈뜨는 청소년 시기에 루소는 낮에는 그토록 친절하고 조용한 부인이 밤에 왜 이리 시끄럽고 잠을 방해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렇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집은 방 하나에 가족들이 다 지내는 경우가 있기에 루소의 여린 점들이 루소의 순진성을 보여주었다.

 

아니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할까나? 그는 아마 어머니가 없다는 심적 우울함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적 우울은 테레즈라는 자신보다 어린 처녀를 만나 변했다. 글을 제대로 알려주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1~12월까지 철자를 알려주어도 외울 수 없는 그녀는 지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테레즈는 그 누구보다 루소에게 친절하게 아주 다정하게 해주었다. 루소는 테레즈에 대한 사랑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참회록>보다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나온다. 마지막 10장이 그가 작성 도중 서거하는 바람에 미완의 원고였으나, 루소는 서거하던 그날도 테레즈와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고 산책을 나누었다. 그리고 테레즈는 루소가 여기저기 도망치고 핍박을 받아도 그의 옆을 지켜주었다.

 

덕분에 루소는 테레즈만이 오직 자신의 어머니인 봐랑 부인의 그림자를 떠나보낼 여인이라 여겼다. 그런 루소에게 봐랑 부인의 그림자가 물러가는 동시에 새로운 불운이 닥쳤다. 루소는 초반에 여린 기질로 성공하지 못했으나, 점차 성격이 강직해지고 자신의 재능에 능숙하게 되자 그의 능력을 파리에 전할 수 있었다. 유명한 작가인 볼테르와 디드로를 만나 친분을 나누고, 자신이 발표한 <신 엘로이즈>는 당시 파리에 큰 화제였다. 모든 귀부인들이 루소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전에는 <학문예술론>,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학술적으로 그를 큰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나오고, 루소를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루소는 가시밭길로 접어들었다. 남을 미워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직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집필한 루소에게 운명의 소용돌이가 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루소는 자신의 운명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참회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에게 이런 상황이 될 수 없음에 대한 참회를 한다. 안타까우나 후에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루소의 참회를 비웃음으로 놀려댄다. 후에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잠시 돌아보면 알겠지만, <참회록>은 루소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신으로 집필하기보단 순간적이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쏟아내었다.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분출하는 마그마처럼 타올라 가는 것이다.

 

루소의 3대 <참회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로 본다면 그의 심리상태, 급박함, 위기, 슬픔을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에 가면 <참회록>에 저술한 자신의 경솔함을 루소는 다시 또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정직하게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그 누구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외톨이라도 루소는 계속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루소의 글을 보면 이런 한심한 작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과오를 보여주고 인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찾으려는 루소이기에 그의 사상이 이토록 길고 진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우연히 블로그 이웃 분에게 루소 탄생한지 30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1712년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1762년 인류의 보물이자 큰 가르침인 <사회계약론>이 250주년을 맞이했다. 지금도 프랑스에선 프랑스국가로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른다. 프랑스혁명 때 부르던 노래가 아직도 프랑스에서 울려 퍼진다. 비록 불완전한 혁명이었고, 공포와 폭력이 난무했지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과 동시에 미국독립혁명까지 이어지고, 근대와 현대에 와서도 시민민주주의에 대한 정초가 되었다. 그런 루소이기에 우리는 그가 매우 위대한 사상가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참회록>의 루소는 위대하지 못함을 계속 보여준다.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되기 위해 엄청난 시련과 고통, 눈물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인간 루소 그 자체를 만나기 위해 <참회록>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아직도 프랑스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국기가 흔들리고 있다. 그 깃발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는지 모르고, 지금도 프랑스 내부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위해 그리고 그것이 손상당하는 것에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도 루소의 숨결은 계속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인권이란 소중한 권리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