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한민국이든 어느 나라이든, 기본적으로 법은 준법하는 민주주의국가이다. 물론 그 법은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이렇게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국가적 시책에 대해 시행하기 위해서는 법률을 국회에서 제정하고 뒤에 시행령은 대통령이 결정하고, 시행규칙은 장관이 결정한다. 지금 왜 이런 법적인 구비조건을 예를 들고 있을까? 그것은 이번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지난 5년이 지났으며, 또한 그 5년의 5년 전에 대한 단상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법적인 상황들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소수여당 다수야당의 길에서 그는 언제나 여론과 언론에 매일같이 두드려 맞았다. 왜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해보면 누구나 어느 요직에 앉으면 잘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서 왜 이리 계속 어긋나 보이는가? 결국은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반영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모든 법의 시행은 법률에 대한 제정이다.

 

법률은 국회에서 정해지는 것이고, 그 당시나 혹은 그 이전이나 지금에 와서도 날치기에 대한 말이 많다. 날치기통과란 국회에서 인원이 많은 한 쪽 세력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제정하는 법이다. 대선 관련 방송에서 그가 대학등록금이 엄청나게 올랐는데, 이것에 대한 문제를 삼은 것이 있었다. 과연 나도 참여정부시절에 대학을 다녔으니, 등록금에 대한 부분은 잘 기억한다. 그나마 내가 다닌 학교는 사립 대학교 치고는 매우 등록금이 저렴했다. 같은 지역 대학에 비해 보통 50만 원정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등록금에서 국공립대학교는 분명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해주므로 등록금에 대한 부분을 어느 정도 해결가능하나, 문제는 사립 대학교였다. 사학 대학교는 국가가 정하는 것보다 재단이나 학교운영에 크게 좌우한다. 그래서 사립으로 만든 학교에 대한 재정과 비리에 대한 법률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산되었다. 법률을 제정하려면 국회에서 처리되어야 하고, 그 후에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법치주의국가에서 이렇게 국회에서 보여주는 파벌 다툼에 의해 서민경제 안정화 대책이 긍정 내지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카드빚을 진 사람이나 다른 제도적인 부분을 해결하려 했지만, 역시 무산되었다. 그래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과연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근본적 접근을 했는가? 아무튼 그의 행적은 한국의 고질적인 지역패권주의와 이권으로 뭉친 카르텔과의 전쟁이었다. 그런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에서 그의 개인적 행보를 보는 것은 어느 개인의 죽음으로 이어져간 한국사회의 풍경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은 민주주의 과잉상태라고 한다. 대의 민주주의 혹은 군중 민주주의, 예전에 이런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 적은 민주주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이라면 프랑스혁명 이후 단두대 앞에서 사라질 롤랑 부인이 마지막으로 외치던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프랑스혁명의 구체제의 해체 후에도 개혁 없는 혁명은 결국 루이왕정이나 다름없는 현실적 암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급격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 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을 물어보거나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소통, 이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나, 자신들의 적에게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신들에게 자유가 있음을 외치는 것이 민주주의로 된 것 같다. 노무현의 인생은 바로 그런 자유가 타인이 아닌 자신들에게 존재한다는 거대한 파도와 싸운 인간이었다. 좋게 말하면 용감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 없는 무모한 사람이다. 그 무모함에서 그는 온갖 시련과 고통, 그리고 성공과 좌절을 겪는다.

 

산업재해 관련 전문변호사인 그가 국회에서 외친 말이 너무 깊이 와 닿는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를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이 발언은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사지가 마비된 어느 소녀의 아버지, 서울 양평동 수은공장에서 2달간 일하며 수은중독으로 엄마를 외치면서 죽은 문송면군, 문송면 군은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공장에서 산업안전보건 미비로 인해 그 목숨을 잃었다. 공장에는 소음과 진동이 심해 청각기능이 손상될 가능성이 높은데, 산업재해로 귀가 멀어버린 노동자가 재판이나 혹은 상담에서 소리를 듣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역시 기계와 엔진의 소음과 진동으로 고막이 손상되었고, 집에 오면 TV 소리를 엄청나게 크게 올려서 시청한다. 평소 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 내 목소리에 잘 안 들린다고 성화를 부린 적도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인권은 소중한데, 그런다고 하여 자신들의 노력에서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그 당시나 지금도 여전하다. 노무현은 자신의 가장 큰 후회는 복지와 노동문제였다. 시작은 노동인권 변호사였으나, 실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그에게 남은 고뇌였다. 대부분 임금을 받는 근로자들이 적은 급료와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들의 지난날의 노력도 포함된다고 해도 그런 비인간적 대우를 출세로 통해서 분리한다는 자체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분노의 칼날을 올리면 논리나 이성의 세계는 이미 상실된 지 옛날이다. 과격하고 남들의 눈에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왜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서 항상 배제되어 왔다. 심지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객관적 근거까지 우리는 깊이 보지 않으려고 했다. 다소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가치관을 지닌 나에게 희망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그렇게 내 입에서 근사하거나 좋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보단 오히려 무의식 세계에 갇혀버린 나의 권태로움에 짜증만 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서 세상은 착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착하게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여긴다. 내가 착하게 되려면 누군가 악의 사자로 대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주의, 계층불화, 학벌주의 등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제나 거기에 대한 지배적인 주도권은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다. 약자가 사회적 구원대상이 아니라 약자가 사회적 악인으로 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게 내가 보는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부정의는 더 큰 부정의를 막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란 항상 옳고 바른 것을 선택하기보단 차라리 위험과 문제가 많은 것을 피하는 것이 현실 속의 모습이다.

 

같은 상황인데도 계층, 직급, 위치, 금전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강자의 잘못은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스쳐가는 것이라면, 약자의 잘못은 쓰러지는 나무처럼 궁지로 내몬다. 책속에서 이런 구절이 인상 깊다. “상계동 철거민들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최근 철거민이나 해고노동자에 대한 강압적인 제재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법치주의라면 헌법에서 명시된 것처럼 우리 약자들은 이 나라의 주인인가? 노무현의 싸움은 그런 세계에 있었다. 만약 이런 철거민이나 해고노동자들이 그런 생계와 직결된 문제에 놓여있는데 다른 누군가의 금전적 이익에 집착하면 우리는 인권에 자유를 부여하는가? 아니면 부와 권력에 자유를 부여하는가? 좀 더 매끄럽게 소음도 없이 잘 풀어갈 방법은 없을까?

 

언제까지 계층 간의 대립과 지역주의에 우리는 병을 앓아야 하는 것인가? 노무현은 거기에 얼마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으로 쌓여있는 것일까? “모난 돌이 맞는다.” 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냥 이런 일들을 주저앉고 있어야 하는가? 어느 계획이나 사업 자체를 하지 마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안이나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면 당론적 이익을 막론하고 같이 도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제안한 대연정이나 혹은 지역구 축소 및 비례대표 증가는 이런 사회적 대립관계를 청산하려 했으나 오히려 몰매를 맞았다.

 

대통령 중임제에 대해 언급하다 몰매 받다가 최근에 대통령의 권한 축소 및 중임제, 내각제에 대한 정치체계 변경에 대한 공략에서 왜 갑자기 우로보로스의 저주가 생각나는 것인가?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한 그, 사람들은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데,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올라가기 전에 그에 대한 멸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같은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고 하나 지방에 사는 상고출신이란 딱지로 학벌주의와 지역주의의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가 대통령 후보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내리게 하려고 했다.

 

대통령이 돼서도 문제다. 탄핵소추와 특히 수구언론의 몰매는 죽을 때까지 끊이지 않았고, 죽는 그 순간, 그 이후라도 계속 그를 두드려댄다. 그가 얼마나 수구언론과 깊은 골을 가졌는가? 그의 발언 중에서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왕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자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을 고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시대 기회주의와 편의주의에 절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려도 독재정치에 있었던 자들은 아직 남아있었다. 특히 언론들은 독재정치에 협조하면서 사익만 추가하다가 언론의 자유에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여론을 움직이게 했다. 노무현의 실패는 정치적 기반의 약함과 여론몰이였다. 오히려 언론이 자유롭기 때문에 마음대로 신문사에서는 마음껏 그에게 조롱과 비난을 퍼붓지 않았는가? 인터넷에 글 한 번 잘못 올린 것도 아닌 밉보인 죄로 개인 하나를 파탄 나게 하는 현실에서 왠지 허무한 기분만이 내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와 농부가 된 그는 결국 최후의 길 자살을 택한다. 인간이 자살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주변인물에 대한 감사는 몰라도 그가 치료받은 병원과 자주 먹으러 간 식당마저 일일이 국세청이나 검찰에서 이 잡듯 들이대는 행위는 권력을 가진 강자의 논리인가? 아니라면 힘이 논리인가? 사람들은 힘이 논리라고 하나, 막상 정치적인 발언에서 힘이 논리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발언은 분명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민주주의의 진실한 면들이 정착하기 어렵다. 아직까지 과도기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토피아란 소설처럼 그런 공간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이상적 가치관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주고 멀리 떠나간 그의 죽음은 <운명이다>라는 맺음말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운명이다>란 도서를 20105월에 구매했을 때 그가 떠나는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 대통령>이란 책을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역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비켜가지 않았다는 그의 인생처럼, 우리 역시 우리만의 역사가 우리를 비켜가지 않는 것도 운명이다. 그 운명 속에서 20021219일로부터 딱 10년이 지나 20121219일을 난 보내고 있다. 그의 운명 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의 운명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저 <운명이다>라고 떠넘겨 보기에는 뭔가 가슴에 아려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병호의 고전강독 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희망의 정치를 묻다 공병호의 고전강독 4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며 평소 서평을 하는 입장에서 저자와 출판사에 미안한 말이기는 하나 한 마디 해야겠다. 정말 이 책의 의미에서 가지는 정치적인 철학적 관념과 그것을 바라보는 윤리학적인 요소는 너무 상반되었다고 말이다. 저자인 공병호 소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필두로 현대정치에 대한 담론을 지어낸다. 아무리 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란 도서보단 개인적인 사견에 너무 충실하여 왠지 실망했다. 진실한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대해 은폐만 하고 잠시의 일방적인 의견만 내놓는 점에서 실망을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자유경제주의에 대해 시장경제 활성화는 인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칼 마르크스 역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그도 나름 스미스의 학문을 많이 연구하고 인용했다. 단지 <국부론>과 <자본론>에서 시간은 100년이 차이 남에 따라 경제공황이란 개념이 <국부론>은 없었다. 보이지 않은 손이라고 하여도 자유주의경제에서 간과한 점은 스미스는 자유경제에서 도덕감정론을 제기했다. 원칙과 관용의 정신을 중시했다. 회사에서 정치이야기에서 <국부론>의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서로 정치경제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애덤 스미스가 자유경제에서 무엇을 강조했는지 모르고 시장경제 옹호하는 다른 직원의 말에 공병호 소장이 말한대로 무지의 악의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더 심각한 악은 고의적인 누락과 왜곡, 은폐다. 참고로 나의 작은아버지가 그리스에 몇 년 동안 파견 근무했는데, 이번 그리스 제정파탄의 위기는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을 가진 자들이 계속 쥐고 있는 바람에 국가적 경제가 파탄 났다고 한다. 거리에 미취업자 및 실업자의 분노는 극에 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공병호 소장이 정말 정치적인 입장에서 공정한 여길 책이라고 그분에게 묻고 싶다. 왜 이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과 당시 그리스의 역사는 좋게 말하면서 현실의 이야기는 거의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의 경우 그 나라 최초로 민주주의 합의로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다.

 

피노체트라는 독재자에게 암살되고, 그 독재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학대했다. 기본적으로 국민들을 학대한 사람에게 정치가라는 것은 최악의 악몽이다. 여기만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몰락에서 공병호 소장은 보편적 복지에 대해 특정정당에 대한 요소로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된 원인은 자국의 기업에 대한 이익을 위해 수입을 일체 막았다는 것과 복지혜택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관료에게만 갔다. 결국 시장경제주의를 무시한 것이 나라패망의 원인이고 국민이 아닌 관료에게 혜택만 가던 관료주의 폐단이었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는 러시아혁명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따른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의 원인조차 밝히지 않는다. 레온 트로츠키가 혁명은 가난에 의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레닌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혁명은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셰비키혁명 이후 정권을 잡았다고 하나 2월 혁명에서 의회민주주의에게 양도했다. 이것을 속이고 1918년 1월에 레닌이 다 잡았다는 말에서 공병호 소장의 단편적 정보를 왜곡하는 행위는 지식인으로 부끄럽게 여길 부분이다.

 

게다가 차르체제의 문제와 케렌스키정권의 문제, 차르정권에서 호의호식하던 군장교의 내전에 대한 부분은 일체 다루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레닌이 죽고, 인용한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살해된 점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괴뢰정부 북한을 세운데 큰 역할을 한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차이도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정치학 도서를 만든 것이 너무 하지 않은가?

 

정치적 철학신념이나 당시 그리스의 상황은 좋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 오만하고 거짓된 시선만 주었다. 만약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칸트,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과 같은 사상가들의 책이나 내용을 일체 알지 못했다면 일반 국민들을 우롱하는 셈이다. 책 내용에서 민중선동가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선동가는 민중만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는 존재에서 나온다. 민중선동가는 선동하려는 자에서 나온 게 아니라 민중에서 나온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동의하는 것이고, 가난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면 그게 나라의 손해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 왜 그들이 이런 극단적 행위를 보일 수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단지 현시적으로 나쁘다거나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한 것이다. 민주주의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병과 가난과 굶주림에 죽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비극이 터지는 현재 상태에서 이 책은 현실의 세계에서 고생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좋은 말만 골라 쓰고, 뒤로는 그 책임에 대한 원인규명도 없이 그것을 비판하는 것조차도 흐린 안개로 가려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문에 “선진국을 비롯해서 경제위기에 처한 나라들의 공통된 문제점은 조달한 재원을 낭비함으로써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빌린 돈을 대규모 경기장 건설이나 각종 전시성 국제행사, 그리고 고정비 지출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에 투입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나라들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차라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나친 화폐의 욕망이 문제된다고 했고, 거기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에 러시아의 어느 기업가가 국가조직과 담합하여 상당한 이익을 벌었는데, 거기에 대한 비판은 올바르나, 그것이 마치 남의 나라인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왠지 아니다 라는 생각만 들었다.

 

예전에 중국 문화혁명에 모택동을 도왔다는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를 다시 읽어보는 기분은 무엇인가? 모든 비판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과 나라에서 시작된다. 물론 타자에 대한 타산지석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고 남의 잘못만 파헤치는 행위는 결국 자신들이 해놓은 과오를 부정하고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다. 우리 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밖에 근현대 철학자의 책이 놓여있지만, 이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떤 왜곡된 편견이 생길까 우려가 된다. 차라리 현대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루소가 더 좋지 아니한가?

 

저자도 군중심리를 잘 알고 말을 한다. “집단이 특수한 형태인 군중의 경우에 국한해 보면, 이들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때보다는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때가 더 많다. ⌈군중행동⌋의 저자인 에버릿 마틴은 ‘군중은 다른 군중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며 남 탓을 자주 하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원칙들을 보편적 요구 사항들처럼 이용해 버린다’라고 비판했다.” 이런 문제는 당통이 죽기 전에 느꼈던 프랑스혁명 전후의 사정이고, 토크빌이 저술한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언급된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그렇다면 누가 이들에게 피를 보게 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대로 선동가, 대중, 시민 3가지 사람들 중에 선동가가 나온 이유는 후진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 것이고, 시민의 경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 프랑스에서 루이가 미국독립전쟁 참전에 에 따른 재정파탄과 귀족들의 세금거부문제 등에 대해 제대로 조율했다면 프랑스국민들이 화가 났을까? 차르왕조가 부정부패에 무능하고 1차 세계대전에 국민들을 수백만 명을 죽게 한 것에서 용서할 수 있을까? 선동가가 왜 나타나는지를 생각해보면 정치적 문제를 보면 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그동안 이루어온 폭력은 얼마나 심했는가? 그해 1월 박종철이란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20대 청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우리나라 당시 의료보건체계는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닌가? 정치에는 무릇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철학 제1번째는 윤리학이다. 레비나스가 지적한 대로 타자의 윤리학에서 보이야 할 윤리에서 그것이 제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현했는가라는 질문에 이 책의 가치는 이미 구태적인 사고만으로 가득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그리스시대, 그는 분명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그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안에서 신을 모욕한 이유로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고향에 온 이유는 2번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서 그의 니코마코스윤리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이란 도서를 봐도 노예와 여자에 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폴리스국가의 특성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겠지만, 그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여 감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폴리스국가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자신이 건넨 투표에 자신의 목숨도 같이 거는 것이었다.

 

당시의 민주주의 체계와 지금의 민주주의 체계를 논하는 점에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귀족들의 정치다. 현대 민주주의 체계는 귀족주의는 아니나, 결국 국회의원에 의해 결정되는 간접적 민주주의이고, 그들은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귀족이 되어있어 아직까지 한국은 귀족적 민주주의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귀족에게는 noblesse oblige 라는 정신은 상실했다. 부정부패, 비리, 선거기간에 보인 추악한 행동에서 반성조차 하지 않은 점은 솔직히 실망이고, 그들이 그렇게 평소에 우려먹는 메카시즘에서 이분법적인 논리로 사회갈등을 조장하는데,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여 해결하기보단 그것에 따르는 이 서적에 한국의 미래를 놓을 수가 없다.

 

예전에 북한에서 위성을 발사한 이야기에서 위성에 탑재한 정밀장치는 곧 미사일에 탑재하면 정밀유도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령 독일의 벤츠공장이 전시에 바로 탱크공장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무기와 평화의 문제에서 아직까지 구시대적 발상은 한심하다. 남북이 대치하여 서로 있어봤자, 북한은 계속 무기를 만들고 도발할 뿐이다. 평화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는 외교라는 것이 정치철학적 자세다. 현대전쟁 양상은 군인이 군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이 20세기 이후 계속 자행되어 왔다.

 

아니 세계 1차와 2차 대전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사라예보, 보스니아, 레바논 등의 전쟁을 봐도 계속 민간인들만 학살되는 시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공화주의이란 결국 국민이 전쟁이나 어떤 상황에서 목숨과 재산에 큰 위험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화주의는 말 그대로 모두 평화롭게 지낸다는 점인데, 과거 일본에 국가를 빼앗긴 것처럼 국가에는 무력이 필요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가의 의무에서 국민에게 나라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려면 거기에 대한 정치철학적 의무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고민하지 않고 단편적 정보와 의견으로 미래를 열겠다는 생각은 너무 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한국처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는 별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성의 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어둡게 만들어버리나, 막상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음탕한 세계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남자라면 태어나서 눈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고, 게다가 아주 도발적이고 매력을 뿜는 옷을 입고 가는 것을 본다고 하자. 가끔 시내 길가에 지나가는 도발적인 패션을 하는 여성을 보는 순간 모든 시선이 거기로 꽂힌다. 그래서 성에 대한 얽매이는 자신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오히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은 도서도 그러하나 나 역시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한다. “성(成)은 성(性)스러운 것이노라!”, 성이란 매개는 인간이 살아오는 그 순간부터 문제였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추운 날씨, 무서운 짐승, 거기다가 병에 걸리면 영락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알약 1개 집어먹으면 금방 회복되는 병이 당시에는 죽음의 징조였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이야 80세가 넘어간다고 하나, 내가 아주 어린 시절만 해도 60세 환갑잔치를 하는 곳에는 장수했다고 한다. 시골에 가서 친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동네에 60세 넘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 40~50대에서 죽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출산과 결혼에서 현재 남녀들이 보통 30세 이상이면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불과 20년 전에는 20대 중후반이었는데 말이다. 거기서 여자는 남성보다 2~3살 정도 어린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군에 가야 하니 대학졸업과 취업, 그리고 결혼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대학이란 제도가 정식 교육절차가 아닌 정식 교육절차로 되면서 연령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20세 이전에 결혼하여 이미 아이가 탄생하고, 40대에 이르면 손자를 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다.

 

성이란 존재는 결국 남녀의 성적인 유희와 쾌락도 중요하나, 한편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위대한 업적이다. 따라서 성(性)은 성(聖)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성(聖)스러운 존재와 가치는 아주 많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가진 가치관에서 인권이 중요하고, 그 인권은 인간이 가진 생명의 대한 권리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삶의 욕망,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왜 에로스가 중요하고, 그 에로스가 슈퍼에고와 이드의 중간에 놓인 에고에서 계속 갈등을 누리고 있으나, 만약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은 왜 존재하느냐? 라는 의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인간에게 과학의 발달은 한편으로 물질적 혜택과 더불어 오류의 편견을 깨어주는 도구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향한다. 최근 동식물 관련 연구와 의학에 대한 연구에서 복제생물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놓여있다. 복제한 동물들이 탄생하고, 언젠가는 인간도 태어나서 버젓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인공수정으로 한 시험관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의 생명은 누구의 의지로 태어났는가? 남녀 간의 쾌락과 고통 그리고 강간 등에서 오만가지 감정에 의해 태어난 것이 인간의 존재적 위치다.

 

성에 대해 어떻게 이래저래 말할 수 있겠냐마는 생명의 모든 시초는 성이다. 왜 신화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서양의 가이아 여신과 한국에서 단군왕검 신화에서 나오는 웅녀는 결국 하늘과 땅의 교합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성(性)에 의해 가장 신성한 성(聖)도 나올 수 있다. 신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위대한 서사시로 나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매우 음탕하거나 또는 납득할 수 없는 묘한 이야기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전설에서 어느 양반집의 배경을 말해주는데, 그 양반가문에서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낳지 못해, 산에 가서 칠성님께 기도하여 얼마 후에 태기가 있었다는 시놉시스가 많다.

 

하지만 신화학을 연구한 대학교 교양교수의 해석으로 남성의 생식능력이 없음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여성이 외도를 한 것에 대한 미화가 바로 전설에서 많이 보이는 이야기란 점이다. 음란한 것에 대한 신성화와 찬미는 결국 새로이 태어날 자에 대한 운명적 길을 알린다. 그가 보통 인간이 될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성의 미학>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모두 서양의 중심이다. 그런 부분이 정말 아쉽다는 점과 국내에 대한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나, 이런 도서 역시 국내에서 흔한 도서가 아니란 점이다.

 

내가 학창시절 멋모르고 보았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미술교과서에 실렸을 때, 왠지 모르게 성적인 호기심보다는 낯설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것의 진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얼굴은 안보이나 상당히 허리와 허벅지가 굵고, 가슴 역시 거대한 느낌이 든다. 비너스의 의미는 우리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서 많이 따온다. 가끔 TV선전에서 아주 몸매 좋고 볼륨이 넘치는 섹시한 의상을 입은 여성이 광고하는 속옷선전에서 업체의 로고송이 부드럽게 내 귀를 속사여 준다. “사랑의 비너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비너스는 지금의 미학에서 결코 미인이 아니다. 단 아주 하얀 피부와 생기가 넘치는 머리카락만은 매우 매혹적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꾸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인 모양이다. <성의 미학>은 이렇듯이 신화와 종교경전, 문학과 현실의 소재에서 끊임없이 에로스와 에로스의 반대인 타나토스에 대한 부분을 보여준다. 대부분 성이란 것은 에로스의 영역으로 볼 수 있으나, 적어도 나는 성의 미학은 에로스이더라도 그 성의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은 타나토스라고 본다.

 

타나토스는 죽음의 욕망이다. 성의 행위로서 새로운 생명과 삶의 희망을 찾는 것에서 왜 타나토스가 태어나는 것인가? 성의 주체자에서 결국 남자와 여자가 기본이고, 최근에는 소도미스트인 레즈비언과 게이, 그리고 양성애자도 존재한다. 적어도 양성애자에겐 앞으로 태어날 후손은 존재하나 안타깝게도 레즈비언과 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이 고맙게도 가족이 없는 고아를 데리고 와서 가정을 꾸려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아가페적인 즉 이상을 가진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아이를 데리고 오는 과정 역시 남녀 간의 결합은 전제가 되는 점에서 역시 사회적인 불리함을 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성의 미학>이란 도서표지를 보다시피 백합이란 꽃에 노란 돌기가 올라와 있다. 백합은 순수를 말하기도 하나, 왠지 꽃잎이 주름지어 구멍처럼 보이는 것이 여성의 음부를 나타내는 것 같다. 거기에 올라온 노란 돌기는 꽃가루를 만들어 날리는 것으로 결국 생명의 원천을 알리는 곳이다. 성이란 결국 표지에서 알리다시피 생명의 미학과 연결되는 점이다. 그러나 암술과 수술이 교배하는 순간 꽃이 지거나 혹은 열매를 맺을 후에 죽는 식물이 있다. 에로스를 위한 과정에서 이들은 타나토스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죽음에 새로운 삶이 온다.

 

어떻게 보면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사지로 찢어진 디오니소스가 다시 생명을 찾아오는 것처럼 죽음에서 삶이 다시 오는 것이다. <성의 미학> 표지에서 백합에서 보이는 노란돌기는 마치 여성의 음부에 있는 클리토리스를 상징하는지 모른다. 죽음과 삶을 모두 가진 여성의 음부, 하지만 여성이 남근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여 클리토리스가 있다는 것으로 여자에게 남자에게만 있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어째든 왜 여성의 음부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인가? 일단 이 책에서도 사티로스와 님프가 성교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가슴에 매우 매혹적인 감정을 가진다. 그것은 어린 시절 구강기에 의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남성이 다시 그 가슴을 보면 만지거나 빨고 싶을 욕망이 들 것이다. 과거의 기억, 무의식 속에 가려진 회귀하려는 본능이 타나토스와 에로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 성적행위에서 생명은 탄생하나, 그 생명을 주는 자는 이미 생명을 가졌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원래의 모습이다. 성적 행위에서 남성의 페니스가 여성의 음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남근이 여성음부로 들어가고, 그것이 결국 여성 안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나고, 그 후에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 후에 테베의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그 후에 딸 2명, 아들 2명을 낳으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테베는 저주에 걸린다. 이런 오이디푸스왕의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열망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이란 점이다. 최근 어느 생물학 연구에서 남녀에서 성적인 나이를 비교하는데, 남성은 10대, 여성은 40대라고 한다. 10대의 남성은 막 성적호기심에 눈을 뜨고, 여성은 오르가즘이 최고로 느낄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인륜의 기반이 되는 윤리의 금기를 깨기에 용납할 수 없는 죄다. 물론 그렇기에 터부라는 것은 상당히 매력이 넘치는 유혹이다. 망해버린 자신들의 성을 피해 도망친 롯과 그 2명의 딸이, 종족번식 문제로 아버지에게 술은 먹힌 후 성교하려는 시도에서 근친상간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쾌락과 불행인 것이다. 어째든 죽음에 대한 부분에서 남성이 여성 안으로 간다는 것은 타나토스이기도 하면 희귀본능이다. 하지만 무의식적 본능의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삽입과 분리과정에서 타나토스는 자기 안의 정액으로 대체된다.

 

우리 인간은 그나마 수정이 성공하면 생존이 가능하나, 야생에서 수컷들은 사정을 한 이후 바로 죽는 경우가 많다. 2세의 탄생은 아버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암컷의 경우 알을 낳고 죽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류나 곤충들은 그런 점이 강하고, 그 중 곤충은 자신이 낳은 알에서 새끼가 태어나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새끼들의 영양분으로 삼게 한다. 성이란 바로 에로스를 유지하기 위해 타나토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 메마르고 차갑고 죽음만 가득한 땅에서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생명의 노래가 대지를 울려 퍼진다.

 

삶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성의 미학>이란 도서는 타나토스에 대한 점은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고, 사랑의 에로스만 중시된다. 그런다고 모든 성이 에로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에로틱이 좋은 것 같다. 그림에 보이는 여성의 관찰시점은 관음적인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남자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주시하도록 하거나 말이다. 이런 에로스의 세계가 미술에서 많이 드러난다. 성에 대한 소비를 과거에는 대놓고 들어댈 수 없었다, 은밀하게 은어로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숨을 쉬어온 것이다.

 

지금처럼 TV에서 섹시한 여자가수들이 허벅지를 다 내어놓거나 가슴상반신을 드러날 듯 옷을 입고, 춤을 보면 마치 쇼걸이 봉을 타고 춤을 추듯이 혹은 성교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는 부분은 많은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것은 성적인 욕망에서 에로스보단 리비도에 대한 강력한 집념을 부여한다. 그런 상황에서 반짝이는 조명 뒤에 동굴과 같이 보이는 배경도 보인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여성가수들의 성적인 자극은 당연할지 모른다. 직접 눈이 아닌 이미지로 제공되어 거기에 같이 매료되는 많은 남성과 그 여성가수의 모습을 따라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보이는 요소이나, 욕망에서 전자는 단순히 성적 그 자체에 빠졌다면, 후자는 아마 욕망에 대해 욕망하는 주체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이란 점에서 남자의 시선이 지배적인 구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지나친 꼰대주의자를 비판하는 의미가 숨어있다. “팜므 프탈”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여자들, 대부분 그림들은 남근중심사회에 나온 그림이기에 여기에 당연히 사회적 가치관이 반영된다. 당시 그림이 지금에 와서 그린다고 그렇게 큰 감명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시대적 흐름이란 말이다. 성에서 육체적인 미에 대해 지금과 다른 이유도 그렇다. 적어도 남성의 거세공포는 매우 공감한 부분이다.

 

문제는 그 거세의 공포가 이제 남성들의 성적억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성들도 여전히 자신의 클리토리스에 대한 관점에서 무조건 남근지배를 해체함이 남녀의 평등에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글쎄다.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와 <아내의 역사>로 보는 여성과 아내의 이야기에서 분명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20세기 초에 분명히 여성이란 존재는 소외된 위치였다. 하지만 200년 전 한국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군포를 내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자른 남성이나 그 피가 흥건한 남근을 들고 관아에 통곡의 비명을 지른 아낙네를 생각하면 남근이란 것은 사회적인 지배력도 가진 만큼 그만한 부담감도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아이를 가지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성적 행위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애정행위로 가능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것에 얽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사람이 먼저 탄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의 억압에서 우리나라는 매우 심각하다. 성의 약자가 곧 사회의 약자다. 그런다고 나는 여성이 성의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곧 성의 약자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하도 억울한 일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나그네 방에서 시 구절이나 읊었다는 애절양의 일화에서 그것을 반증할 수 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운전하다가 신호대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도로가 옆의 인도에 어느 여성이 자기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시내에서 운전하면서 신호대기 중에 내 밑에 용달트럭 하나가 서 있었다. 거기에 운전하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는 아이를 안으며 서로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3가족은 가난하고 조촐한 식구이나 매우 행복해보였다.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욕망을 노래하는 에로스는 결국 생명인데, 그것은 모두 <성의 미학>에서 시작됨이라. 그런다고 하여 모든 성의 미학이 그렇게 에로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의 미학>에서 보여주는 그림처럼 에로틱만 강조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삶의 욕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권리다. 그러나 최근 그런 순수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에서 안타깝다. 나라고 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서문에서 이 책의 공통저술자가 “포르노그래피가 배를 채우기 위한 패스트푸드라면, 에로틱 예술은 잘 차려진 정찬이란 말이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종류의 포르노그래피를 접할 수 있다. 그 표현의 노골성이 ‘아직도 에로틱 예술이 필요 한가’하는 물음에 갖게 한다. 하지만 패스트푸드가 범람하는 시대야말로 어쩌면 에로틱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과제를 포르노그래피가 맡았으니, 예술에 암시된 ‘에로틱’을 찾는 데에 급급한 수준을 넘어 에로틱을 암시하는 ‘예술’을 볼 여유가 생긴 게 아닐까?”

 

많은 그림들이 나올 때에는 예술적 목적보단 사회적 문화적인 생산성에 가깝다. 그리고 현재의 대중문화는 복제기술이 있기에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에 입에 맞추어진 우리들의 모습에서 스펙타클의 합리성을 찾으려 한다.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 그림을 보면서 남자인 내가 성적욕망이 그다지 올라오지 않았다. 지금의 미와 당시의 미의 기준이 다르기에 당시 미를 미학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석상이 예술로서 만들기보단 하나의 정치적 제의적 의식을 위해 만든 점에서 조금 그렇게 볼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나는 우연한 기회로 통해 <안철수의 생각>이란 도서를 읽어보았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 했던 부분이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분명히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어느 책을 읽든지 그 도서에는 분명히 좋은 내용이 담겨질 있음은 분명하다. 예전부터 판단했지만, 안철수 교수는 자신의 의지보단 시대에서 요구받은 시대정신에서 정치의 길을 시작한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왜 시대에 대한 정신을 했는지에 대한 개인적 사건으로부터 사회구조적인 시점은 우리가 안철수 교수의 생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의 생각>을 읽은 후에 집에 가서 다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시(詩) 1편을 찾아 아래에 적고 싶었다. 제목은 “굶주린 백성들의 노래”이다.

 

 

인생이 풀이냐 나무냐, 물이랑 흙으로만 살아갈거나.

힘껏 일해도 초목만 먹고살라니, 콩과 조 그걸 먹어야 하는데.

콩과 조 귀하기 보배 같으니, 혈액과 생기가 어떻게 기름질쏘냐.

야윈 목은 구부러져 따오기 모습, 병든 살결 주름져 닭살이라네.

우물 있어도 새벽 물 긷지 않고, 땔감 이어도 저녁밥 짓지 않네.

부모자식 사이도 보전하지 못하는데, 길가는 남을 어떻게 동정하리요.

어려운 삶에 착한 본성 잃어버려, 굶주리고 병든 사람 웃으며 보네.

이리저리 앞뒷집에 돌아다니니, 마을 풍속 본디가 이러했으랴.

부러워라 저 들판 참새 떼들은, 잎 떨어진 가지에 앉아 벌레를 쪼네.

고관 집엔 술과 고기 많기도 하여, 이름난 기생 맞아 풍악 올린다.

 

 

물론 이 말고 “애절양”을 읽으면 더욱 분노와 슬픔이 자아낸다. 무력한 현실 앞에 절망한 지식인의 허무한 가슴은 쉽사리 뇌리에 잊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안철수 교수도 그렇게 보였다. 의과대학 시절 자신은 종교도 없으면서 성당에서 주관하는 자원봉사활동하면서 어느 소녀의 가정사를 알게 된 것이 안철수 교수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도망치고, 결국 류머티즘을 앓던 할머니와 초등학교 손녀만 남았다. 손녀는 신문배달 등으로 일하려 했으나 결국 참지 못해 중학교 시절 가출하여 할머니는 굶주림과 병으로 결국 운명을 달리 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 자원봉사하면서 겪은 그의 현실적 좌절은 이미 정치적인 입장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의사이기에 그는 사람의 건강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 누가 아프면 그 치료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고, 그것도 모자라 빚을 지게 된다. 병원에서 환자가 불치병에 걸려도 죽지 않으면 퇴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빚이 늘어나고, 결국 그 집안은 파산하고 만다. 누군가의 병이 결국 온 가족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병이란 특히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그러면서 안철수 교수 역시 유러피언 드림을 꿈꾸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생각해보니 의료보건문제는 복지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우리 아버지가 올해 봄, 나에게 아버지가 과거에 있었던 불행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한이 가슴 깊이 묻혔는지 말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서러움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막 근대화라는 이름이 붙은 시기에 한국이란 나라에 배고픔과 가난으로 인해 결핵을 앓는 배역들을 자주 본다. 그러면서 저런 것이 있었나?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집안에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좋은 직장에 결혼까지 하여 잘 살고 있는 내 친형이나, 내 친형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당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안 거주환경이 좋지 못한 까닭에 결핵에 걸렸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나 히로인들이 결핵에 걸려 비극으로 치닫는 그 병을 말이다. 당시 집이 너무 가난하여 치료를 다 해도 퇴원할 수 없었다. 병원비를 지불하지 않으면 퇴원을 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병마로 사지에 있던, 가난으로 서러웠던 나의 부모, 아버지의 말로는 어머니는 얼굴에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에서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당시 우리 집에 같이 살던 내 작은아버지는 바가지에 찬물을 담고 거기에 생라면을 넣어 밥을 먹었다고 한다. 겨울 빚을 내어 퇴원했다고 하나, 그 당시의 트라우마는 그럴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지내도 남아있었다. 그 후로도 연탄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 가스에 종종 중독되어 고비를 맞이했다고 한다.

 

안철수 교수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와 파산의 공포까지 떠맡아야 한다. 안철수 교수가 겪은 일들, 그리고 내 가족에게 직접 찾아온 지난 시절의 아픔들은 그야 말로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 교수는 유러피언 드림과 동시에 그 모델국가를 스웨덴이란 복지국가로 선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그러면서 자기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 안철수 교수 역시 앞으로 선진국이 되는 길은 사람에게 투자하고 그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였다. 최근 경제민주화란 말처럼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안철수 교수는 복지국가 스웨덴처럼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가치관을 종용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를 중시했다. 책을 읽는 내내 기본적인 마인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존 롤즈의 <정의론>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드러나는 사상적인 요소가 확연히 보였다. 저런 비참한 굶주린 백성들의 노래가 울리는 이유는 사회적 분배와 정의에 큰 문제가 있었다. 롤즈의 <정의론>에서도 교육의 기회에 대한 균등적 평등과 최소 수혜자에 대한 보장은 안철수 교수가 바라는 정치적 입장이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인권으로부터 시작이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은 바로 미국독립전쟁과 헌법의 기반이었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의 정신이고, 근대와 현대를 지나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헌법의 기초가 되는 모든 국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명제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이 쉽지 않다. 안철수 교수의 그런 비참한 가족의 몰락과 고단한 안철수 부부의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에서 인권의 열악함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은 병으로 보았다.

 

안철수 교수의 진심은 이미 언론에서 보았으나 책에서도 강조했다. 힘이 없는 약자와 특히 노동자들의 문제, 지난 쌍용자동차 해고와 관련하여 22명의 사람들이 충격에 의해 목숨을 버려야 했다. 어떤 사람은 타워크레인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돈과 배운 것이 없기에 그저 당해야 하는 이들에 대해 안철수 교수는 반드시 이들을 안정된 삶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4대강 공사에도 20명 넘는 노동자들이 강압적인 공사 진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왜 이들의 목숨은 잃어야 하는지? 이들의 죽음은 왜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는지? 이들의 죽음은 왜 감추고 사라져야 할 기억인지? 이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사회적 분란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란 있는 것인가?

 

대기업의 성장은 중요하다. 국가성장과 거대한 사업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에 종사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적이고, 거기에 근무하는 정직원의 수 역시 더 제한적이다. 남은 인원은 결국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자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우리 국가적 문제와 국민의식의 문제에서 나는 현실에 대한 판단보다 허망한 꿈에 대한 집착이다. 대기업에 가기 위해 스펙만 요구하고, 학생들의 인격이나 개성을 무시하며, 공장에서 레니메이드처럼 찍어내는 물건처럼 대하는 비윤리적 행동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 그들을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를 바란다. 양극화의 절대적 차이로 사회는 병이 든다.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안철수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책에 빠졌다. 나도 얼마 전에 읽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으나, 그는 <페스트>란 소설을 읽으면서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인문정신이 사라진 한국에서 자유로운 발상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열리지 않은 세계이다.

 

윤리적 입장에 대한 공감보단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경쟁구도는 결국 낙오자를 만들게 하여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회적 악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지난 소득양극화와 가계부채의 증가는 서민들의 입에서 비명과 고통의 메아리를 뱉어내게 했다. 메아리는 다시 돌아오므로 아주 높고 높은 관아에는 벽에 소리가 가로 막혀 그저 사라질 뿐이다. 이들의 비명소리를 안철수 교수는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아픔을 같이 해결하려한 의지가 돋보인 서적이다. 그러나 이 책에도 한계점은 있었다.

 

안철수 교수의 의견을 1사람이 1권으로 끝낸 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와 대화를 나누며 사고와 의견을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은 국내 서민경제나 노동문제, 교육문제일지 모르나, 국제적 정세나 외교문제에 대한 부분은 많이 미흡했다. 물론 미국경제의 위기에 따른 점과 FTA협상 과정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런 점인 미국과 중국의 외교에 국한된 점이고, 통일문제와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은 이미 참여정부 시절에 다 정리한 부분이란 점이다. 국민적으로 바이러스백신의 의사로도 중요하나 이 서적에 가진 의미는 재야의 지식인으로서 안철수 교수가 정치라는 것에 얼마나 큰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안철수 교수와 다르나 노무현 前 대통령과 기본적 사상이 유사한 것을 알았다. 예전에 <마지막 인터뷰>, <성공과 좌절>, <진보의 미래>, <노무현의 서재> 등을 읽으면서 안철수가 가진 생각들이 위 책들에서 많은 일치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노무현 前 대통령은 자신의 시대에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와 좌절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좌절과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 안철수 교수 역시 만약 실수가 있거든 그 실수의 원인을 찾아 근본을 수정하고, 추후 다시 제대로 기틀을 다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할 수 없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 그리고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 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현실이다. 그것에서 좌절하지 않은 사람, 모두가 따뜻하게 살아가는 세상,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안철수의 생각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수전 손택이란 이름은 예전에 한 번 들어본 경험이 있다. 문화평론이나 또는 문학비평이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본 수전 손택의 글은 마치 살아있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하나인 노암 촘스키 교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단지 노암 촘스키와 다른 점이라면 폭력과 죽음이 남성들에게 나오는 원인에 주목하는 점은 약간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나 같은 경우 마빈 해리스 교수와 같이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 교수 역시 인류의 폭력, 억압, 착취에 대한 시스템과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복했다. 단지 관점만 다를 뿐이지 보고자 하는 것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같아 보였다.

 

그래도 일단 여성학적으로 글을 적은 것이 아니지만 여성학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폭력을 우리는 한 번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읽어본 책들이 내 머리 안에서 계속 흘러간 느낌이 들었다. 우선 보드리야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읽으면서 정말 재밌는 부분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나 TV에서 방영되는 베트남전쟁영화로 통해 더욱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미국에서 수입한 폭력적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흑백TV를 경험했고, 칼라TV를 보면서도 여전히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 항상 미군이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제일 기억나는 영화나 드라마가 월남전에 대한 것이었다. “햄버거 힐”이란 것으로 미군이 1969년 아주 피를 흘린 대가로 얻은 성과이나, 1968년 테드 공세 이후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미디어의 영향이 커지고 있었다. 이미 미국 국방부에서 인정한 통킹만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공표되고 있는 시점에서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 자유주의 도전이란 착각은 여전히 엉뚱한 파괴적 이상주의만 양성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드리야르의 베트남전쟁이야기는 그야말로 정확한 답이다.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 모든 사고를 좌지우지 당하는 열렬한 구경꾼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큰 기여를 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스펙타클, 흔히 사람들이 뭔가 장황하고 거대한 것들을 보면 “참으로 스펙타클해!”라고 하나 사실 스펙타클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스펙타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체가 스펙타클의 하나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성이란 기관은 아주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이 충만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모든 불행과 저주 운명의 굴레가 시작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정의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체되어야 할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여긴다. “세상의 악(惡)은 정말 사악한 존재였기 때문에 악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악으로 되기를 사람들은 원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옆에서 내 글을 보는 순간 나에게 “당신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이며 또한 너무 부정적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꼭 비딱하게 보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니 그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지나온 과거에서 보여준 상처들이다. 지난 우리 과거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지로 죄에 몰리거나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시대적인 저항이 가득한 말을 남긴 사건도 있었다. 인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재생산되었다는 점과 그 재생산에서 그 자체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들을 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순간 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전기고문에 의해 파킨스씨 병에 걸리거나 혹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느 대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누가 책상에 손바닥으로 탁! 하고 쳤는데 억! 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불과 전자는 1년 전, 후자는 25년 전의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고통에 대해 고통을 받은 이들이 아주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사회 역시 스펙타클로 가득한 사회였다. 아니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할까? 진실은 언제나 사실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 기억해야할 사실이다. 개인의 한 명은 그저 감시와 처벌로 육체와 영혼이 소멸되어가나 사회에서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불안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부 심리에 자리 잡은 불안 심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불안 심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방법보다 일시적인 방법이 효율적이다.

 

그것은 폭력의 미학으로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서 타인들은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고다. 아니면 감옥이란 제도가 정말 감옥이 평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사람을 격리하기 위한 도구인지 아니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감옥인데도, 그것이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런 아이러니는 계속 진행된다.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책을 보았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주의인데, 인간이 인간중심이 되기 위해 이성이란 합리적 사고로 통해 살아야 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행태로 꼬여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말처럼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라는 말은 틀린 것은 없다. 잘못된 세계에 대해 뭔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폭력의 수단만이 남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9·11 테러에 대한 조치로 반테러리즘을 위한 선언을 했지만, 문제는 그것 역시 테러에 대한 테러였다. 파시즘에 대한 안티 파시즘의 테제가 결국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계속 반복된다.

 

이런 역사적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하나의 구경거리라는 스펙타클이다. 수전 손택이 지적한 내용이 너무 인상 깊은 부분은 사진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사진의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략(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번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이 구문을 보는 순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것은 결국 무대 위에 행해지는 비극으로 통해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진이란 것은 비극처럼 실제가 아닌 가상도 아니고, 실제를 촬영한 것이 가상의 이미지로 온다. 정말 사진에서 사지가 절단된 아이들, 무차별로 폭격당하는 마을부락,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당하는 여성을 본다고 하더라도 남의 일이 되어버린다. 우리도 이런 비극을 불과 60년 전에 겪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고통이고, 그것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면 단지 하나의 눈요기로 끝날 부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박물관이나 퓰리처상에 올라가 있어서 한 번 궁금증으로 가득한 호기심이 그를 부를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박물관에 찾아간 많은 사람들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인가?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기 위해서인가?” 이런 의문은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의 기존 예술과 미학에 대한 반예술과 반미학적인 저항으로 이동된다. 하지만 역설적인 현실에서 그런 반예술과 반미학 역시 예술과 미학으로 바뀌어 버린다.

 

가령 기 드보르라는 상황주의자들은 잠자는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에펠탑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와 자신의 책이 옆에 있는 책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책 표지를 사포로 만들어버린다. 사포로 된 책표지가 옆에 책과 마찰하는 순간 그 책들은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포로 된 책표지들이 다시 서점에 올라가는 순간 이들은 중지한다. 그들은 스펙타클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파괴, 분열과 훼방을 하지만 현실은 그것마저 스펙타클화한다. 그런 문제는 스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스승이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대중적 현상이 여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영미소설을 보면, 어린 시절 스카웃은 자신의 아버지가 변호사로서 흑인을 위해 변호하나 아버지는 마을주민들에게 온갖 횡패와 모욕을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오빠는 죽을 고비를 맞이하고 팔 하나가 불편하게 된다. 당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전역에 깔린 심각한 문제였다. 신의 가르침과 정의의 수호자라 여기던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강자가 되기 위해 정의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계속 악인을 생산하고, 그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흑인이었다.

 

그것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얼굴을 찾아내지 못한다. 마치 남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 내지 정의감을 고취시키는 점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루이15세에 대한 암살을 실패한 다미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문과 사형집행에서 육체가 소멸한다. 그런데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그것을 상징하는 사진이 나왔다. 몽골의 왕자를 죽인 범인이 200갈래로 찢어져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직 살아있는지 동공의 검은자가 아직도 하늘을 보면서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살점이 도려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그의 몸은 낭자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신체적 처형이 아니라 신분에 합당한 상징적 죽음이 되었다. 그나마 그의 사진이 남은 까닭은 그가 상징적인 죽음을 남에게 가한 점과 받은 점이다. 단지 우리의 어두운 과거의 죽음은 그 상징적인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 다르다. 이런 폭력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 사진을 보면 왠지 사진관찰자는 이들에 대해 야만인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그 사진을 보는 자신 역시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극단적인 문화우월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에 맛을 들인 인간들은 자신이 그런 사고를 했다는 자체를 거부하려 한다. 자신의 정의감을 스스로 배반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들은 야만의 문명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유태인들을 그렇게도 몰살한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장의 일화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평범한 중년 신사였고, 아내와 딸에게 매우 다정한 가장이었으며, 게다가 저녁을 먹기 전에 피아노의자에 앉아 아주 분위기가 좋은 음악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수전 손택 역시 자신이 느낀 포로가 된 나치군은 무슨 괴물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였을 터이나 오히려 그들은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고,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악마처럼 되었나?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든 문화고, 그 문화는 현대사회에 오면서 스펙타클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 미디어로 통해 이미지의 과다수용으로 이미지가 매체로 된 사회로 살아가고 있다. TV공화국이란 말도 있듯이 이제는 스마트폰의 시대다. 인간의 실존성을 넘어 이제는 가상의 인간과 유대를 맺으며 자신들만의 영역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가 마치 현실의 자신을 만드는 것처럼 되어 있다. TV를 보면 항상 우리는 정의로운 편이 우리 쪽이란 사실, 낭만적인(하지만 일반 소시민과 먼 부자들과 엘리트들의 이야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내가 바란 사람 등을 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로 거기와 상반된 존재는 강제로 부정한다. 현실의 직시에서 외면의 환상에 눈을 돌리면서 타인에 대한 입장은 점점 낯선 존재가 된다. 그것은 2012년 총선이나 대선 과정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하나, 막상 그런 사람들이 출마해도 아무도 편을 들어주거나 혹은 편을 들어주지 못할망정 소통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나 실제적인 행동을 전혀 상반된 점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 후보들만 아니라 그 후보들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스스로 공평한 시점을 가진 사람인양 행동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 보려한다. 그것이 결국 fact,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이미지에서 fact는 사진사의 사진기 각도나, 줌의 영역, 햇빛과 그림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 어느 포로를 머리가 아래로 하여 경사지게 눕게 하여 거기에 주전자를 입에 갖다 댄다. 하지만 카메라의 각을 정방향이 아니라 90도로 회전하면 편하게 포로를 눕게 한 상태에서 갈증을 해소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고 보면 물에는 고춧가루나 소금이 가득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로 누군가에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만든다. <타인의 상처>를 읽으면서 어디서 왠지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그것은 에릭 홉스봄의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나온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의 참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인해 혁명이 와해되자 포병장교로 있던 그가 무력으로서 프랑스 황제가 된다. 이때 그는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그 나라에는 스페인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모습을 연상하면, 그는 큰 말에 앉아 있고, 손가락으로 돌격하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침범한 나라에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고야가 실제 목격한 시체를 그린 그림을 보면 기가 막힌다.

 

벌거벗은 남자들이 나무에 매달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남성의 성기가 잘린 채, 한 사람은 목이 나무 가지에 올려져있고, 두 손은 가지 아래 묶여져 있으며 성기 역시 절단되어 있다. 단순히 참수형 내지 교수형으로 죽이면 될 부분을 그들을 알몸에 부분적 절단은 폭력으로 통한 광기의 표출이다. 그 이전에 자크 칼로의 그림은 더욱 기가 막힌다. 어느 죄수가 무슨 처형인지 고문을 당하는지 몰라도, 그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에 어느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죄를 용서하는지 혹은 묻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신이라면 정말 이들을 용서할까?

 

진짜 느껴야 할 가치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아닌가? 그나마 이 고통도 상징적인 아픔일지 모른다.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이미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어린이, 여자, 늙은이만 사는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고 무자비하게 총을 갈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의를 수행한다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있다. 그들은 아폴론이 되어 피리시합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를 강제로 피부를 베끼어 죽음과 고통, 그리고 잔악함의 미를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 역시 아폴론의 존재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론, 그리고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의 종이다.

 

우리의 본연적인 존재 디오니소스의 생명을 아폴론적인 자신들만의 형이상학적 미에 의해 찢기고 발리고 산산조각을 낸다. 타인의 고통은 그들만의 이성, 즉 광기의 합리화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면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사람이 죽었는데도 마치 기뻐하고 기념 촬영하는 이들은 통시적으로 우리가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도 숨 쉬는 공시적인 존재다. 타인의 고통이 가중되어 파괴되어갈 때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단체의 명분을 보장되어 간다. 타인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