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운명이다 (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한민국이든 어느 나라이든, 기본적으로 법은 준법하는 민주주의국가이다. 물론 그 법은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이렇게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국가적 시책에 대해 시행하기 위해서는 법률을 국회에서 제정하고 뒤에 시행령은 대통령이 결정하고, 시행규칙은 장관이 결정한다. 지금 왜 이런 법적인 구비조건을 예를 들고 있을까? 그것은 이번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지난 5년이 지났으며, 또한 그 5년의 5년 전에 대한 단상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법적인 상황들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소수여당 다수야당의 길에서 그는 언제나 여론과 언론에 매일같이 두드려 맞았다. 왜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해보면 누구나 어느 요직에 앉으면 잘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서 왜 이리 계속 어긋나 보이는가? 결국은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반영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모든 법의 시행은 법률에 대한 제정이다.
법률은 국회에서 정해지는 것이고, 그 당시나 혹은 그 이전이나 지금에 와서도 날치기에 대한 말이 많다. 날치기통과란 국회에서 인원이 많은 한 쪽 세력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제정하는 법이다. 대선 관련 방송에서 그가 대학등록금이 엄청나게 올랐는데, 이것에 대한 문제를 삼은 것이 있었다. 과연 나도 참여정부시절에 대학을 다녔으니, 등록금에 대한 부분은 잘 기억한다. 그나마 내가 다닌 학교는 사립 대학교 치고는 매우 등록금이 저렴했다. 같은 지역 대학에 비해 보통 50만 원정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등록금에서 국공립대학교는 분명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해주므로 등록금에 대한 부분을 어느 정도 해결가능하나, 문제는 사립 대학교였다. 사학 대학교는 국가가 정하는 것보다 재단이나 학교운영에 크게 좌우한다. 그래서 사립으로 만든 학교에 대한 재정과 비리에 대한 법률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산되었다. 법률을 제정하려면 국회에서 처리되어야 하고, 그 후에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법치주의국가에서 이렇게 국회에서 보여주는 파벌 다툼에 의해 서민경제 안정화 대책이 긍정 내지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카드빚을 진 사람이나 다른 제도적인 부분을 해결하려 했지만, 역시 무산되었다. 그래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과연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근본적 접근을 했는가? 아무튼 그의 행적은 한국의 고질적인 지역패권주의와 이권으로 뭉친 카르텔과의 전쟁이었다. 그런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에서 그의 개인적 행보를 보는 것은 어느 개인의 죽음으로 이어져간 한국사회의 풍경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은 민주주의 과잉상태라고 한다. 대의 민주주의 혹은 군중 민주주의, 예전에 이런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 적은 민주주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이라면 프랑스혁명 이후 단두대 앞에서 사라질 롤랑 부인이 마지막으로 외치던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프랑스혁명의 구체제의 해체 후에도 개혁 없는 혁명은 결국 루이왕정이나 다름없는 현실적 암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급격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 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을 물어보거나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소통, 이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나, 자신들의 적에게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신들에게 자유가 있음을 외치는 것이 민주주의로 된 것 같다. 노무현의 인생은 바로 그런 자유가 타인이 아닌 자신들에게 존재한다는 거대한 파도와 싸운 인간이었다. 좋게 말하면 용감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 없는 무모한 사람이다. 그 무모함에서 그는 온갖 시련과 고통, 그리고 성공과 좌절을 겪는다.
산업재해 관련 전문변호사인 그가 국회에서 외친 말이 너무 깊이 와 닿는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를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이 발언은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사지가 마비된 어느 소녀의 아버지, 서울 양평동 수은공장에서 2달간 일하며 수은중독으로 엄마를 외치면서 죽은 문송면군, 문송면 군은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공장에서 산업안전보건 미비로 인해 그 목숨을 잃었다. 공장에는 소음과 진동이 심해 청각기능이 손상될 가능성이 높은데, 산업재해로 귀가 멀어버린 노동자가 재판이나 혹은 상담에서 소리를 듣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역시 기계와 엔진의 소음과 진동으로 고막이 손상되었고, 집에 오면 TV 소리를 엄청나게 크게 올려서 시청한다. 평소 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 내 목소리에 잘 안 들린다고 성화를 부린 적도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인권은 소중한데, 그런다고 하여 자신들의 노력에서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그 당시나 지금도 여전하다. 노무현은 자신의 가장 큰 후회는 복지와 노동문제였다. 시작은 노동인권 변호사였으나, 실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그에게 남은 고뇌였다. 대부분 임금을 받는 근로자들이 적은 급료와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들의 지난날의 노력도 포함된다고 해도 그런 비인간적 대우를 출세로 통해서 분리한다는 자체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분노의 칼날을 올리면 논리나 이성의 세계는 이미 상실된 지 옛날이다. 과격하고 남들의 눈에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왜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서 항상 배제되어 왔다. 심지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객관적 근거까지 우리는 깊이 보지 않으려고 했다. 다소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가치관을 지닌 나에게 희망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그렇게 내 입에서 근사하거나 좋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보단 오히려 무의식 세계에 갇혀버린 나의 권태로움에 짜증만 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서 “세상은 착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착하게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여긴다. 내가 착하게 되려면 누군가 악의 사자로 대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주의, 계층불화, 학벌주의 등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제나 거기에 대한 지배적인 주도권은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다. 약자가 사회적 구원대상이 아니라 약자가 사회적 악인으로 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게 내가 보는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부정의는 더 큰 부정의를 막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란 항상 옳고 바른 것을 선택하기보단 차라리 위험과 문제가 많은 것을 피하는 것이 현실 속의 모습이다.
같은 상황인데도 계층, 직급, 위치, 금전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강자의 잘못은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스쳐가는 것이라면, 약자의 잘못은 쓰러지는 나무처럼 궁지로 내몬다. 책속에서 이런 구절이 인상 깊다. “상계동 철거민들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최근 철거민이나 해고노동자에 대한 강압적인 제재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법치주의라면 헌법에서 명시된 것처럼 우리 약자들은 이 나라의 주인인가? 노무현의 싸움은 그런 세계에 있었다. 만약 이런 철거민이나 해고노동자들이 그런 생계와 직결된 문제에 놓여있는데 다른 누군가의 금전적 이익에 집착하면 우리는 인권에 자유를 부여하는가? 아니면 부와 권력에 자유를 부여하는가? 좀 더 매끄럽게 소음도 없이 잘 풀어갈 방법은 없을까?
언제까지 계층 간의 대립과 지역주의에 우리는 병을 앓아야 하는 것인가? 노무현은 거기에 얼마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으로 쌓여있는 것일까? “모난 돌이 맞는다.” 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냥 이런 일들을 주저앉고 있어야 하는가? 어느 계획이나 사업 자체를 하지 마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안이나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면 당론적 이익을 막론하고 같이 도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제안한 대연정이나 혹은 지역구 축소 및 비례대표 증가는 이런 사회적 대립관계를 청산하려 했으나 오히려 몰매를 맞았다.
대통령 중임제에 대해 언급하다 몰매 받다가 최근에 대통령의 권한 축소 및 중임제, 내각제에 대한 정치체계 변경에 대한 공략에서 왜 갑자기 우로보로스의 저주가 생각나는 것인가?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한 그, 사람들은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데,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올라가기 전에 그에 대한 멸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같은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고 하나 지방에 사는 상고출신이란 딱지로 학벌주의와 지역주의의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가 대통령 후보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내리게 하려고 했다.
대통령이 돼서도 문제다. 탄핵소추와 특히 수구언론의 몰매는 죽을 때까지 끊이지 않았고, 죽는 그 순간, 그 이후라도 계속 그를 두드려댄다. 그가 얼마나 수구언론과 깊은 골을 가졌는가? 그의 발언 중에서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왕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자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을 고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시대 기회주의와 편의주의에 절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려도 독재정치에 있었던 자들은 아직 남아있었다. 특히 언론들은 독재정치에 협조하면서 사익만 추가하다가 언론의 자유에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여론을 움직이게 했다. 노무현의 실패는 정치적 기반의 약함과 여론몰이였다. 오히려 언론이 자유롭기 때문에 마음대로 신문사에서는 마음껏 그에게 조롱과 비난을 퍼붓지 않았는가? 인터넷에 글 한 번 잘못 올린 것도 아닌 밉보인 죄로 개인 하나를 파탄 나게 하는 현실에서 왠지 허무한 기분만이 내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와 농부가 된 그는 결국 최후의 길 자살을 택한다. 인간이 자살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주변인물에 대한 감사는 몰라도 그가 치료받은 병원과 자주 먹으러 간 식당마저 일일이 국세청이나 검찰에서 이 잡듯 들이대는 행위는 권력을 가진 강자의 논리인가? 아니라면 힘이 논리인가? 사람들은 힘이 논리라고 하나, 막상 정치적인 발언에서 힘이 논리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발언은 분명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민주주의의 진실한 면들이 정착하기 어렵다. 아직까지 과도기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토피아란 소설처럼 그런 공간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이상적 가치관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주고 멀리 떠나간 그의 죽음은 <운명이다>라는 맺음말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나갔다.
<운명이다>란 도서를 2010년 5월에 구매했을 때 그가 떠나는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 대통령>이란 책을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역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비켜가지 않았다는 그의 인생처럼, 우리 역시 우리만의 역사가 우리를 비켜가지 않는 것도 운명이다. 그 운명 속에서 2002년 12월 19일로부터 딱 10년이 지나 2012년 12월 19일을 난 보내고 있다. 그의 운명 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의 운명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저 <운명이다>라고 떠넘겨 보기에는 뭔가 가슴에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