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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고전강독 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희망의 정치를 묻다 ㅣ 공병호의 고전강독 4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책을 읽으며 평소 서평을 하는 입장에서 저자와 출판사에 미안한 말이기는 하나 한 마디 해야겠다. 정말 이 책의 의미에서 가지는 정치적인 철학적 관념과 그것을 바라보는 윤리학적인 요소는 너무 상반되었다고 말이다. 저자인 공병호 소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필두로 현대정치에 대한 담론을 지어낸다. 아무리 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란 도서보단 개인적인 사견에 너무 충실하여 왠지 실망했다. 진실한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대해 은폐만 하고 잠시의 일방적인 의견만 내놓는 점에서 실망을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자유경제주의에 대해 시장경제 활성화는 인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칼 마르크스 역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그도 나름 스미스의 학문을 많이 연구하고 인용했다. 단지 <국부론>과 <자본론>에서 시간은 100년이 차이 남에 따라 경제공황이란 개념이 <국부론>은 없었다. 보이지 않은 손이라고 하여도 자유주의경제에서 간과한 점은 스미스는 자유경제에서 도덕감정론을 제기했다. 원칙과 관용의 정신을 중시했다. 회사에서 정치이야기에서 <국부론>의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서로 정치경제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애덤 스미스가 자유경제에서 무엇을 강조했는지 모르고 시장경제 옹호하는 다른 직원의 말에 공병호 소장이 말한대로 무지의 악의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더 심각한 악은 고의적인 누락과 왜곡, 은폐다. 참고로 나의 작은아버지가 그리스에 몇 년 동안 파견 근무했는데, 이번 그리스 제정파탄의 위기는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을 가진 자들이 계속 쥐고 있는 바람에 국가적 경제가 파탄 났다고 한다. 거리에 미취업자 및 실업자의 분노는 극에 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공병호 소장이 정말 정치적인 입장에서 공정한 여길 책이라고 그분에게 묻고 싶다. 왜 이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과 당시 그리스의 역사는 좋게 말하면서 현실의 이야기는 거의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의 경우 그 나라 최초로 민주주의 합의로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다.
피노체트라는 독재자에게 암살되고, 그 독재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학대했다. 기본적으로 국민들을 학대한 사람에게 정치가라는 것은 최악의 악몽이다. 여기만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몰락에서 공병호 소장은 보편적 복지에 대해 특정정당에 대한 요소로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된 원인은 자국의 기업에 대한 이익을 위해 수입을 일체 막았다는 것과 복지혜택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관료에게만 갔다. 결국 시장경제주의를 무시한 것이 나라패망의 원인이고 국민이 아닌 관료에게 혜택만 가던 관료주의 폐단이었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는 러시아혁명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따른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의 원인조차 밝히지 않는다. 레온 트로츠키가 혁명은 가난에 의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레닌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혁명은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셰비키혁명 이후 정권을 잡았다고 하나 2월 혁명에서 의회민주주의에게 양도했다. 이것을 속이고 1918년 1월에 레닌이 다 잡았다는 말에서 공병호 소장의 단편적 정보를 왜곡하는 행위는 지식인으로 부끄럽게 여길 부분이다.
게다가 차르체제의 문제와 케렌스키정권의 문제, 차르정권에서 호의호식하던 군장교의 내전에 대한 부분은 일체 다루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레닌이 죽고, 인용한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살해된 점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괴뢰정부 북한을 세운데 큰 역할을 한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차이도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정치학 도서를 만든 것이 너무 하지 않은가?
정치적 철학신념이나 당시 그리스의 상황은 좋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 오만하고 거짓된 시선만 주었다. 만약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칸트,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과 같은 사상가들의 책이나 내용을 일체 알지 못했다면 일반 국민들을 우롱하는 셈이다. 책 내용에서 민중선동가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선동가는 민중만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는 존재에서 나온다. 민중선동가는 선동하려는 자에서 나온 게 아니라 민중에서 나온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동의하는 것이고, 가난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면 그게 나라의 손해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 왜 그들이 이런 극단적 행위를 보일 수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단지 현시적으로 나쁘다거나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한 것이다. 민주주의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병과 가난과 굶주림에 죽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비극이 터지는 현재 상태에서 이 책은 현실의 세계에서 고생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좋은 말만 골라 쓰고, 뒤로는 그 책임에 대한 원인규명도 없이 그것을 비판하는 것조차도 흐린 안개로 가려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문에 “선진국을 비롯해서 경제위기에 처한 나라들의 공통된 문제점은 조달한 재원을 낭비함으로써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빌린 돈을 대규모 경기장 건설이나 각종 전시성 국제행사, 그리고 고정비 지출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에 투입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나라들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차라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나친 화폐의 욕망이 문제된다고 했고, 거기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에 러시아의 어느 기업가가 국가조직과 담합하여 상당한 이익을 벌었는데, 거기에 대한 비판은 올바르나, 그것이 마치 남의 나라인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왠지 아니다 라는 생각만 들었다.
예전에 중국 문화혁명에 모택동을 도왔다는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를 다시 읽어보는 기분은 무엇인가? 모든 비판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과 나라에서 시작된다. 물론 타자에 대한 타산지석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고 남의 잘못만 파헤치는 행위는 결국 자신들이 해놓은 과오를 부정하고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다. 우리 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밖에 근현대 철학자의 책이 놓여있지만, 이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떤 왜곡된 편견이 생길까 우려가 된다. 차라리 현대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루소가 더 좋지 아니한가?
저자도 군중심리를 잘 알고 말을 한다. “집단이 특수한 형태인 군중의 경우에 국한해 보면, 이들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때보다는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때가 더 많다. ⌈군중행동⌋의 저자인 에버릿 마틴은 ‘군중은 다른 군중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며 남 탓을 자주 하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원칙들을 보편적 요구 사항들처럼 이용해 버린다’라고 비판했다.” 이런 문제는 당통이 죽기 전에 느꼈던 프랑스혁명 전후의 사정이고, 토크빌이 저술한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언급된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그렇다면 누가 이들에게 피를 보게 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대로 선동가, 대중, 시민 3가지 사람들 중에 선동가가 나온 이유는 후진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 것이고, 시민의 경우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 프랑스에서 루이가 미국독립전쟁 참전에 에 따른 재정파탄과 귀족들의 세금거부문제 등에 대해 제대로 조율했다면 프랑스국민들이 화가 났을까? 차르왕조가 부정부패에 무능하고 1차 세계대전에 국민들을 수백만 명을 죽게 한 것에서 용서할 수 있을까? 선동가가 왜 나타나는지를 생각해보면 정치적 문제를 보면 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그동안 이루어온 폭력은 얼마나 심했는가? 그해 1월 박종철이란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20대 청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우리나라 당시 의료보건체계는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닌가? 정치에는 무릇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철학 제1번째는 윤리학이다. 레비나스가 지적한 대로 타자의 윤리학에서 보이야 할 윤리에서 그것이 제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현했는가라는 질문에 이 책의 가치는 이미 구태적인 사고만으로 가득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그리스시대, 그는 분명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그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안에서 신을 모욕한 이유로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고향에 온 이유는 2번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서 그의 니코마코스윤리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이란 도서를 봐도 노예와 여자에 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폴리스국가의 특성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겠지만, 그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여 감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폴리스국가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자신이 건넨 투표에 자신의 목숨도 같이 거는 것이었다.
당시의 민주주의 체계와 지금의 민주주의 체계를 논하는 점에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귀족들의 정치다. 현대 민주주의 체계는 귀족주의는 아니나, 결국 국회의원에 의해 결정되는 간접적 민주주의이고, 그들은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귀족이 되어있어 아직까지 한국은 귀족적 민주주의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귀족에게는 noblesse oblige 라는 정신은 상실했다. 부정부패, 비리, 선거기간에 보인 추악한 행동에서 반성조차 하지 않은 점은 솔직히 실망이고, 그들이 그렇게 평소에 우려먹는 메카시즘에서 이분법적인 논리로 사회갈등을 조장하는데,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여 해결하기보단 그것에 따르는 이 서적에 한국의 미래를 놓을 수가 없다.
예전에 북한에서 위성을 발사한 이야기에서 위성에 탑재한 정밀장치는 곧 미사일에 탑재하면 정밀유도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령 독일의 벤츠공장이 전시에 바로 탱크공장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무기와 평화의 문제에서 아직까지 구시대적 발상은 한심하다. 남북이 대치하여 서로 있어봤자, 북한은 계속 무기를 만들고 도발할 뿐이다. 평화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는 외교라는 것이 정치철학적 자세다. 현대전쟁 양상은 군인이 군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이 20세기 이후 계속 자행되어 왔다.
아니 세계 1차와 2차 대전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사라예보, 보스니아, 레바논 등의 전쟁을 봐도 계속 민간인들만 학살되는 시점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공화주의이란 결국 국민이 전쟁이나 어떤 상황에서 목숨과 재산에 큰 위험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화주의는 말 그대로 모두 평화롭게 지낸다는 점인데, 과거 일본에 국가를 빼앗긴 것처럼 국가에는 무력이 필요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가의 의무에서 국민에게 나라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려면 거기에 대한 정치철학적 의무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고민하지 않고 단편적 정보와 의견으로 미래를 열겠다는 생각은 너무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