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읽다 1980-2010 - 세계와 대륙을 뒤흔든 핵심 사건 170장면
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지금 중국이 공산주의국가 여부에서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No!"라고 답하고 싶다. 그들의 국가적 가치관은 이른바 쇼비니즘에 가깝다. 마치 러시아혁명이 1917년 2번이나 일어나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러시아 농민 쿨라크와 같은 존재가 중국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자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19세기 중후반 독일에서 활동하다 자국 내의 검열로 인해 영국으로 추방당한 마르크스에게 당시 유럽은 근대화 기반을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

 

 

즉, 이미 많은 도시에 시골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것이고, 많은 국민들이 노동자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들의 밀집된 공장이 있기에 유럽에서는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 연구가 활발하며, 마르크스주의로 생긴 구조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버밍엄문화연구소의 경우 상당한 인문학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방문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테리 이글턴 교수의 경우 세계적인 석학이면서도 지식인이니 정치적 성숙과 더불어 학문적 영역까지 뛰어나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 배우는 마르크스주의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중국에서는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오히려 노동조합의 단결력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에 공산주의국가라고 표방하는 중국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공산국가라고 하나 그것은 마르크스가 가르치던 공산주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산당만 남은 관료주의 국가일 뿐이다. 게다가 강력한 쇼비니스트들의 모임이다. 중국의 강력한 단결력은 관료주의 체계에서 사용하는 프로파간다의 위력이다.

 

 

중국이 원인제공자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그 원인에 따른 부차적인 사고를 카메라로 집중적으로 목격하여 대국민적인 단결력을 도모한다. 가령 티베트족의 독립 문제를 거부하는 것과 달라이라마의 망명,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행보를 트집 잡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르크스주의와 관계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중국이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다르다.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할 때 분명한 슬로건이 있었다.

 

 

제3국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국가 혁명으로 러시아혁명이 비록 스탈린에 의해 실패했더라도, 기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주의란 제3국의 노동자에 대해서도 보장해야할 가치였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역행했다. 티베트를 강제적인 군사행동과 대만과의 군사적 대립, 그 외 중국내에 거주하는 다민족들까지 억압했다. 한족이 중심인 중국에서는 그저 한족이 세계 중심이 되어야 하는 점과 평등이란 오로지 자신에게 존재한 평등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강력한 관료주의에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 가치관으로 말이다. 중국이 당초 생긴 공산당이란 일본과 대립하던 독립운동이었다면 이제는 마오쩌둥이 지배하기 위해 생긴 정치적 공작기관이다. 마오쩌둥은 일생을 투쟁만 삼은 인물이다. 그 투쟁력이 있기에 중국은 독립적인 나라가 되었고, 냉소 이데올로기에 살아남아 거대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과 같이 마오쩌둥의 강력한 모습은 정치란 단순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만 몰고 간 것이 한계였다.

 

마오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동기는 마르크스는 혁명주체를 노동자로 봤다면, 마오는 농민으로 보았다.

 

중국이 기본적으로 1차 산업인 농업중심이었고, 그들은 광대한 대륙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장점이자 단점이다. 러시아 농민처럼 그들은 심각한 쇼비니즘에 심취한 점이란 것이고, 교육의 한계성으로 계몽이 성사될 수 없었다. 자기 안의 계몽이 없으면 타인의 계몽은 그저 새로운 억압과 통제일 뿐이다. 마오쩌둥의 강한 의지로서 중국은 같은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베트남과 이질적인 외교성을 보인다.

 

 

그런 마오쩌둥이 죽은 후에 덩샤오핑이란 인물이 나타나면서 중국은 변화의 물결을 받는다. 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한계성이 보이는 것은 마오쩌둥 시절에 문화대혁명에 따른 홍위병이 중국내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면, 1989년 천안문사태는 중국 내에서 검색이 불가능한 단어로 설정했다. 중국은 인권문제에서 매우 열악한 국가이다. 사람이 너무 많기에 개인의 중요성에서 단체적 중요성이 먼저이다. 물론 사회적 행위에서 단체의 중요성은 인정되나 그 모든 것을 위해 개인의 영역은 모두 소멸된다.

 

 

그런 점에 따라 중국은 인권의 기본핵심인 건강문제나 위생문제 역시 엉망이다. 한 마을에 에이즈가 넘쳐도 당국은 비밀에 행동하며,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알린 의사를 평생 감시 속에 나둔다. 언론의 중요성이란 정확한 객관성만큼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중요한 국가적 실책이 나오는 그 부분에서 공정성은 없다. 에이즈 문제가 생긴 마을은 통제되고 격리되었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분을 생각하면 중국의 성장 뒤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빛이란 강력한 에너지 뒤에는 어둠의 세계가 더 짙게 드리우는 것처럼 중국의 성장에서는 계속되는 발전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점이다. 경제 성장만큼 발전하는 것이 컴퓨터와 인터넷과 통신시스템이다. 그러나 그만큼 발전해도 자유로운 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며 국가 전반적 문제는 여전히 비공개를 요구한다. 환경오염 부분에서도 벤젠이 유출된 문제는 심각하다. 각종 암과 백혈병을 유발하는 벤젠이 기준치 100배라는 점은 보통 인간이 흡입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분유에 멜라닌이나 최근 한국에서 시끄러운 사건인 납이 든 꽃게나 색소가 들어간 음식물은 중국이 그동안 자신들의 경제성장에 치중한 만큼의 국민성의 발전이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국가정보 통제였다. 선전업무를 맡은 공안정치에서 적은 항상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은 항상 정의로운 투사야 했다. 국가나 혹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항의는 재빨리 제압하던 그들은 외교문제나 소수민족의 테러에 대해서는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그 광장에서 마음대로 외치기 나두었다.

 

 

중국이 최고가 되려면 중국이 아닌 자는 그 이하로 격하시켜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존재한 것이다. 그 성과는 경제성장이 이미 일본을 제친 것과 2008년 올림픽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만큼 국민의식은 발전하지 않았다. 아니 정치적 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중국올림픽 참관에서 티베트와 원만한 해결을 원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을 부정했고, 이에 대해 티베트인이 프랑스에서 파리시장의 허락 아래 티베트 국기를 내건 점과 티베트인과 세계 인권단체에서 티베트 문제를 항의한 것이 그대로 여론에 나타났다.

 

 

프랑스는 국가 수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정치적 행보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었다. 같은 국가는 그 자체가 독재국가이고 전체주의국가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해할 없었다. 지방자치분권에서 자유로운 정치권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에서다. 프랑스의 경우 1789년 7월 대혁명부터 19세기 내내 혁명의 시기였고, 20세기에도 대혁명이 있던 국가이다. 그만큼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배경이 그 어떤 나라보다 깊은 나라이고, 표현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중시했기에 중국인들로서는 프랑스가 배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후진타오 수석이 정권을 잡을 시기인데, 후진타오 총리가 임명될 때의 일화는 너무 인상이 깊다. 중국은 부정과 비리가 너무 강한 국가였다. 공안정치가 강한만큼 관료주의 체계의 부실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가족이 없으며, 엄마처럼 키워 주신 고모까지도 인연을 끊은 후진타오의 정치적 행보는 참 인상이 깊다. 중국이란 나라가 아무리 국민성에서 다소 문제가 많아도 저런 지도자의 모습은 왠지 부럽다. 그렇지만 후진타오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티베트에서 저항운동에서 그가 펼친 강압적 조치는 유유하게 대응하면서도 한편으로 강력한 모습을 지닌 것이 배타적 요소이다.

 

 

그런 배타적인 자국민중심주의는 중국이란 국가를 선진국으로 발달시켰다. 넓은 인구에 광대한 영토에 외국기업이 투자유치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외화를 벌었다. 하지만 산업스파이나 기술유출이 강한 국가로 비추어진 만큼 중국은 강대국들이 가장 경계할 대상 국가이다. 그러나 중국은 가장 멀리하기보단 가장 경제적으로 협조해야할 국가이다. 국가의 규모와 인구수만큼 시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장성이 되는 인원이 소수라도 그 소수규모 자체도 다른 국가에서는 상당한 인원이다.

 

 

한국에서 보는 중국에 대한 시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나, 경제적 분야를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강한 나라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소모품이나 물건을 보면 대부분 made in china라는 마크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온 물건들이 우리 일상들을 지배한다. 심지어 우리 기업이 만든 상품도 국내 공장이 아니라 해외시장으로 이주하면서 중국은 큰 공장지역으로 되었다. 하지만 외국으로 공장이 가면서 국내 내수시장은 약해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2013년에도 중국은 마오쩌둥-덩샤오핑-짱저민-후진타오라는 거대한 4명의 남자의 입김에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연구자는 중국이 2030년 중반에 최고의 나라가 된다고 한다. 중국은 이제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보단 중국 한족의 세계적 위상을 노리고 있고, 그것을 위해 경제적인 성과에 치중한다. 이미 중국의 경제적 위력은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미래를 보며 살아가는 시점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적이 아닌 적이 될 것이고, 친구 아닌 친구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스쿨 DxD 6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죽은 이후에 다시 돌아온 인간이란 어떤 느낌일까? 그것은 다시 나에게 하이스쿨 DXD 1권에서 잇세이가 타락천사 레이나레에게 죽어갈 때 그 마지막 순간의 독백이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 색이랑 똑같아. 선혈로 물든 손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붉은 스트로베리 블론드보다 더욱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그래, 그 사람의 아름답고 붉은 머리카락은, 내 손을 물들인 피와 똑같은 색이다.>

 

리아스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의 세계를 받아들이려 한다. 죽음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그는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보단 끝까지 에로스라는 삶의 욕망을 추구했다. 애니메이션 1화를 보면 조금 성적인 노골성을 더하여 잇세이의 망상을 보여준다. 상반신이 나체인 리아스가 커다란 가슴을 드러내고, 거기에 새끼손가락 하나를 입에 문다. 성적 에로티즘을 더욱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엔 죽음이란 거대한 운명 앞에 촛불처럼 사라져갈 잇세이에게 리아스의 가슴은 자신이 죽어도 그냥 죽을 수 없는 마지막 에로스이다.

 

그런 잇세이에게 리아스는 폰이란 말 8개를 부여하여 전생시켜 그레모리가문의 악마로 만든다. 그런 잇세이의 과거이기에 하이스쿨 DXD 6권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가진 잇세이와 인간의 영역을 떠나 이제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변한 잇세이의 2가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인간의 모습을 버리게 된 동기는 비숍인 아시아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생과 사의 중간계인 아스트랄의 공간에서 운 좋게 살아난다. 죽음 직전 공간에서 백룡제 일행에게 목숨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괴물로 변한 잇세이는 아시아의 무사함을 보고 인간으로서 육체로 돌아올망정 인간으로서의 이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잇세이가 육체를 잃어도 정신을 잃어도 오직 그것을 원상복구가 가능한 것은 King인 리아스의 모습이다. 강하고 아름답고 불과 같은 머리카락에 커다랗고 탄탄한 가슴은 잇세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작품상에 기본 속성이 하렘모드가 있고,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다수의 여자와 살아가는데, 부모와 같이 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살기에 작품은 특이하게 흘러간다.

 

하이스쿨 DXD 6권의 특징은 원래 사라져야할 인물이 다시 나타난 점이다. 타락천사 편에서 악마사냥에 미쳐버린 프리드 신부가 나온 점과 그가 상급마족과 사전에 모의한 점이다. 물론 사전 모의하기 전에 그는 분명 타락천사 우두머리인 아자젤에게 영원히 구속처리 되었으나 다시 음모를 위해 나온 것이다. 이번 6권의 음모를 만든 디오드라 아스타로트는 사실 하이스쿨 DXD 스토리에서 복선을 예고한 인물이다.

 

아시아가 1권에서 자신이 천주교회에서 추방된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악마를 치유해준 것이고, 그 악마가 바로 디오드라 아스타로트였다. 그는 수녀나 신앙심이 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드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삶는다. 아시아사가 교회에서 추방된 것과 타락천사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어 악마로 전생된 이유는 바로 디오드라의 음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약간 이야기가 돌아와서 원위치로 온 것처럼 아시아의 죽음은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사전에 예고된 비극이었다.

 

대신 아시아는 잇세이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친구도 새로 만들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엇보다 가족이 생긴 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소녀에게 외로움이란 두려운 존재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에서 외로움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둘 곳 없어 방황하거나 혹은 억지로 참아야 하는 심정이란 매우 괴롭다. 아시아에게 잇세이라는 친구가 생기고, 키류와 바보 변태 친구도 친구가 되었다. 게다가 제노비아는 같이 신을 모시던 사람으로서 같은 공감대가 있었고, 잇세이 부모는 마치 아시아의 친부모처럼 대해주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더 나아가 연인이란 것을 보여준다. 그런 것처럼 잇세이는 그런 것을 위해 싸우고 다치고 바보처럼 앞을 나간다. 물론 드레이크라는 전설적 용이 깃들어 있지만, 그 힘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저거노트 드라이브라는 금단의 기술은 아마 인간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가학이다. 그 가학적 그로테스크에 마음에 새겨진 빈 공간은 오로지 인간의 정이 답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미리 잇세이가 마계에서 녹화하던 노래와 춤은 매우 인상적이다. 다소 음란하고 도발적이 가사나, 그것이 자아를 돌아오게 하니 말이다. 본래 신이나 신과 필적한 존재들은 춤과 노래로서 달랠 수 있다 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이 있고 그 신앙의 매개자는 무당이다. 무당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그리고 지치 쓰러지면 어느새 다른 인격이 나오는 경우를 본다. 한을 풀어가기 위해서 제의적 행위로서는 춤과 노래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춤과 노래가 인간들 무의식적 내면에 존재하는 심층적 공간을 표층으로 올릴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저주받은 드레곤의 힘에서 잇세이는 이미 인간이 아닌 극단적 상황이므로 신과 필적한 힘을 가졌다. 그래서 신을 달래는 주술적 행위는 춤과 노래다. 이미 녹화된 영상에서는 밸런스 브레이커의 모습을 한 잇세이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문제는 노래 제목과 가사가 특이했다. 제목은 “찌찌 드레곤의 노래”이고, 작사는 타락천사 총수인 아자젤, 작곡은 리아스의 오빠인 서젝스 루시퍼, 춤은 회장의 언니인 세라포르 레비아땅이 했다.

 

아자젤부터 장난기가 강한 능구렁이라는 점과 루시퍼는 겉으로 근엄하나 속은 장난꾸러기에 동생 리아스를 놀려먹기 좋아하는 오빠에, 세라포르는 이미 마법소녀 코스프레를 하면서 귀여운 말투를 늘어놓은 여마왕이다. 장난으로 뭉친 이들의 작품은 리아스의 가슴이라면 환장하는 잇세이의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리아스의 가슴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사인지 이성을 잃은 잇세이가 무의식적으로 “찌찌”라고 한다. 5권째에서 위기의 순간에 잇세이는 리아스의 가슴을 보고 유두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리아스의 입에서 약간의 신음소리가 나오고, 그것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아마 리아스의 가슴에 대해 무척이나 집착하는 잇세이에게 찌찌드레곤의 노래에서는 잇세이가 다시 올 수 있는 해법이 있었다. 과연 그렇듯이 부장이 이성잃은 잇세이에게 다가가서 교복단추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고 자신을 손을 잇세이의 손으로 가져가 자기 가슴에 잇세이의 손을 대게 한다. 그리고는 잇세이는 갑주의 저주에서 풀린다. 왜만한 마왕조차도 이기기 힘든 잇세이가 리아스의 가슴에 무너지니 주변에 있는 백황제 발리는 얼굴을 찌푸린다. 자신의 라이벌인 붉은 녀석이 하얀 녀석보다 다른 것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내면의 폭력성보다 성적인 무의식적 욕망이 승화하여 삶의 이유를 부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 하랴? 하렘 작품 공통에서 남자주인공이 상당히 둔탱이 아니면 바보속성에서 잇세이의 방황은 언제까지일까?

 

참고적으로 레이팅 게임에서 폰인 잇세이는 적진에 가면 퀸으로 승격하는 체스게임을 이용하는데, 이런 방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가상과 현실에서 게임이란 공간이 주체와 대상이 분리가 아니라 동일한 점에서 다소 pata-physics의 요소가 다분한 작품이다. pata-physics라고 하여 별로 어려운 것이 없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없어져서 그저 여기가 가상이고 현실일 뿐이다. 재미를 보려면 거기에 푹 빠지는 것도 거기서 잘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라는 존재는 흔히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이성에 대해 육체와 감정을 분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어느 학자가 말하길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에서 가장 무엇이 떠오르는 것일까? 흔히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한다고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표현과 느낌을 중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생각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성적, 감성적 영역이 연결된다. 현대사회처럼 표현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인간의 소통과 공감이 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물을 좋아하나, 키울 생각은 별로 없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애완동물은 그저 어떻게 해보아도 애완동물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의 치료가 되고 심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겠으나,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일방적인 요구사항이다. 진짜 애완동물을 사랑하면 아파트 건물에서 보이는 강아지들의 주인을 한 번 보아라. 소리 지른다고 강아지의 성대를 제거하거나 혹은 강아지의 성기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소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한데 하물며 우리 백성이랴 하시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절양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과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점에서 자신에게 입맛을 맞추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부분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모두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대중문화의 획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과 그 개성 안에서 나오는 영역이 하나의 새로운 상상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는 것이라는 게 과연 놀고 있는 것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이론적 함의를 보면 우리는 결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꾸준하게 노동을 하고 있고, 인간의 기계적인 요소에 계속 봉사하고 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대한뉘우스와 드라마를 봐라. 교묘한 드라마천국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분이 적으신 글도 봤으나, 또한 나 역시 그래 생각한 것이 있었다. 예전에 삼순이 신드롬이란 열광이 있었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성질도 더러운 노처녀가 잘생기고 돈 많고 핸섬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모토는 현대판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이어졌다.

 

주변에 가면 그런 일들은 전혀 없을 것이다. 드라마야 말로 오히려 리얼리티를 가장한 최고의 허구와 거짓말이다. 페르소나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현실의 인간에게 오히려 pata-physics로 만든다. pata-physics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아이콘이고 상상력이나 도리어 현실 자체가 pata-physics로 변한 것이다. 이런 것을 이미지가 매개로 된 사회로 볼 수 있고,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Guy Debord의 서적명인 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스펙타클이란 신화에서 계속 재생산과 전복과 대체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이미지로 매개로 하기에 그 이미지라는 것이 현실에서 존재하는가? 드라마나 뉴스를 봐도 그것이 진실한 사실인지 아닌지도 구분조차 하지 못하여 인간은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다. 언론의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보다는 공정성이라고 한다. 몽타주와 같은 편집기술은 언론의 제대로 된 기능보단 역기능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합의 아래 만들어진 스펙타클한 미디어 세계에서 인간의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스펙타클화 시킨다. 세상이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넘어가는 당신네들이 스펙타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파괴가 곧 아방가르드라는 말에서 예술의 파괴가 다른 예술로 대체하는 점에서 스펙타클이란 끝없는 인간의 주인이다. 헤겔의 말대로 주인 없는 노예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스펙타클이 우리의 주인이고, 그 스펙타클은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들어간 이미지다.

 

Simulacre의 세계에서 인간은 사실과 허상의 구분 점은 없다. 인간은 사실 거짓말로 가득한 리얼리티의 사실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는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오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상상력과 허구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나, 현대사회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런다고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작가는 그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했으나, 그것에 현실의 자신을 버린 자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

 

물론 인간은 모방에서 예술과 창조로 이어지나, 적어도 그것에서 한 발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가야 할 삶의 활력이다.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은 어떻게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교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조차도 정신적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학업이고, 성과수단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표다. 그래서 공부는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을 숫자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란 존엄성이 아니라 숫자의 등급에 분류된다. 예전에 이런 영화가 생각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금 이런 말을 하다가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를 정도로 삼엄한 세상이 되었다. 이래서는 상상력이란 멀고 먼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되어 버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정작 이상한 사람은 바로 그것을 읽으면 이상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 이런 문구가 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 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보라. ‘노동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노동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그 유명한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슬쩍 바꾸어서,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어지럽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정돈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에 관심이 있지만, 일상생활의 예술도 관심이 많다. 길거리에 지나가는데 벽에 낙서가 그려져 있거나 혹은 삭막한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벼락에 장난스러운 그림들도 좋아한다. 특히 봉하마을에 가면 동네주민들이 사는 그 장소에 해바라기를 비롯한 꽃과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이미지는 상상력을 동원한 놀이로서의 노동이다. 놀이적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게 그린 미대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프로젝트나 장난을 표출한 것이고, 동네주민들은 흉물스럽고 무표정한 동네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물론 모든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나, 생각하면 분명히 그리는 사람도, 그것을 허락하는 사람도, 심지어 그것을 지나가다 구경하는 사람조차도 즐겁다. 즐거움이란 모두가 나누고 상상력이란 그것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놀이로 통한 노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문명이 존재하기에 자연에서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이 필수적이다. 당장 지금이라도 들판에 갔는데, 화장실 가고 싶거나 혹은 목이 말라 음료수를 먹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그건 들판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 그곳에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주문하여 가지게 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직접 있는 곳까지 갈 것인가?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드는 것도 노동이요, 주문을 시켜 종업원이 오는 것도 노동이고, 자신이 직접 가는 것도 노동이다.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문명의 혜택을 받으려면 노동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면 여간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이란 매우 귀찮고도 짜증나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런 짜증난 활동을 재미난 놀이로 바꾼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예술은 나는 없어져야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딱 정해져있고, 예술장르가 너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다. 예술을 없어지기 위해서는 예술이 너무 일상적으로 즐기고 넘쳐야 한다. 예술이 특정계층이 만들고 향유하는 것에서 놀이라는 것으로 통해 모두가 즐기는 것으로 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다소 서로 간에 개성과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망상대리인>처럼 피해의식과 가해의식이 이상하게 교합된 게 아니라 망상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조차 찾을 수 없다면 조금 괴로울 것이다. 그것에 빠져 아무런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는 것까지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다. 물론 그동안 다른 작품들을 즐기면서 새롭게 이방인을 구상할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재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재미는 더욱 특이했다. 그래픽노블이라 하여 글자 텍스트만이 아닌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소설을 보는 이에게 더욱 더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 점이다. 기존에 그래픽노블보단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던 것을 읽다가 그래픽노블을 읽으니 그것과 다른 맛이 느꼈졌다.

 

프랑스 문학과 더불어 프랑스는 만화 역시 예술적이다. 만화로 보는 프랑스작품들은 아주 무거운 주제에 대해 만화라는 창으로 통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지나가고, 그 후에 아주 사나운 폭풍처럼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일러스트를 보면서 이방인 마지막에 죽음을 달콤한 매력으로 느끼는 뫼르소의 뒤 이야기를 상상했다. 예전에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 당통이 생각난다.

 

당통의 죽음에서 그는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면 그 목을 대중들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자신의 죽음을 모두에게 알리라고 했다. 마치 뫼르소의 자기의 죽음을 분노로 일그러진 대중들의 증오에서 비로소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죽음 앞에 두고 삶의 흔적을 알린다는 사실이란 정말 슬픈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지난 시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순이 넘어 병으로 돌아간 뫼르소의 어머니나, 사람을 죽여 기요틴 아래 목이 날라가는 뫼르소나 죽음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토록 외로우면서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한 이방인이 되었는가? 뫼르소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간이란 어느 특정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마련이었다. 뫼르소는 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얼굴조차 모른 아버지란 점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뫼르소는 학업을 중단한 적이 있다. 자신이 원한 꿈이나 이상은 모두 그 때 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에 의해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에 의해 포기했다.

 

왠지 그냥 보기엔 현실적 상황과 대치되는 인물, 뫼르소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처음 그렇게 보내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서 며칠 동안 울었다는 점에서 뫼르소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떠나보내며, 학업의 중단처럼 뫼르소는 인생의 의미를 버렸다. 수동적인 인간, 타성에 젖은 인간, 그저 무의식적 리비도를 마리에게 뿜은 뫼르소, 결혼과 사랑은 이미 머릿속에 별개의 세상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에 가서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혐오감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원하지도 않아도 억지로 호들갑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진심 마음이 괴로운 할 사람이 오히려 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는 이미 허무로 가득한 인간이고, 그 허무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그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알았던 것은 새벽이 동트는 감옥에서 기요틴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머니가 모든 순간에서 죽기 전에 왜 다리는 저는 남자노인과 애인처럼 지내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한 것이다. 마지막 꺼지는 그 시간이야 말로 모든 걸 불태운다는 느낌이었을까?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항상 권태로움에 젖어 살았다.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타는 듯이 불타는 햇빛이다. 모든 것을 신기루로 보이게 하는 그 태양에서 뫼르소는 충동을 느꼈다.

 

그에겐 죽음이란 감각은 없었던 것은 이미 죽음이란 관념적 사유조차도 포기한 게 아닐까? 사형선고 받은 후에 성직자가 오자 뫼르소는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 앞에 성직자 위로를 받을 것이나, 뫼르소는 성직자의 상투적인 말투에 겁이 났다. 죽음보다 더 두려움 권태로움과 사람들이 만들어버린 지겨운 현실이 뫼르소에게 제일 큰 공포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혼자 밤하늘을 보고 소금기가 날리는 이 알제리가 더 마음이 편한 것이 인상적이다. 물론 인간에게 죽음이란 괴로운 일이다. 기요틴에 잘린 머리 그것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에선 기요틴이 20세기 중후반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기요틴 아래에는 짚풀로 된 것들로 갈아놓는데, 그 이유는 기요틴의 칼날이 인간의 목을 지나가는 순간 피가 뿜어 밑으로 폭포처럼 쏟아 붓기 때문이다.

 

피로 광장을 물들이는 것만큼 대중들에게 환호와 즐거움은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악을 저기 보이는 기요틴의 성스러운 희생양이 있기 때문이다. 육중한 금속성의 소리가 ‘자르르’ 하면서 내려오다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그 소리는 유지된다. 단지 마지막 육중한 ‘퉁’ 하는 소리만이 들리고, 사형집행관들은 그 육중한 칼날을 위로 올린다. 올릴 순간에도 육중한 금속소리 역시 웅장하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사형수의 목이 바구니에 담기면서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방울에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사실 카니발이란 축제 역시 살육과 광기의 도가니에서 시작했다. 축제란 결국 살인과 향연의 만감이다. 그 축제의 장에서 모든 분노가 뫼르소의 목으로 인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도덕적 가치란 사실 그 시대적 상황의 권력이다. 인간에게 거슬릴 수 없는 사회적 강제이행 의무, 인간에겐 그저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축제란 결국 인간의 광기와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권태로운 사회에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만족하는 뫼르소는 권태를 파괴하기 위한 사람으로 마무리한다. 이 서적은 그런 권태로운 생활에 인식조차 못하는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흑백 일러스트 역시 그런 점을 살리기 위한 호세 무뇨스의 느낌이다. 얼굴에 땀으로 넘치고, 담배만 피고, 자신과 유리된 뫼르소에게 오늘 날의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척하는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 된 삶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운 존재이나 살아가면서 구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구속조차도 자유라고 생각되는 시기가 되니 우리 인간이 타성에 익숙하면 할수록 우리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간다. 아니면 사회의 굴레라는 적당주의 타성이야 말로 행복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가끔씩 스스로를 망치고 파괴하는지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해 존재감 확인이다. 타성이 짙은 세상에 자기의 존재란 그저 톱니바퀴에 불고하다. 이방인인 뫼르소가 이방인이 된 이유는 이미 이방인들로 가득한 세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건 권태로움이란 지겨운 이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 고장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임종석 옮김 / 제이앤씨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설국에 대해 읽어보는 바에서 그렇게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실존적 자아 분열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좋을지 모르고, 인간의 이중적 인격에서 완벽함과 추함을 보인다면 차라리 일본 애니메이션이 좋을지도 모른다. 설국에서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공간에 기차를 타고 온 시마무라에서 주인공은 시마무라에게 시작되다가 작품 후반에 가면 요코와 코마코가 된다.

 

코마코는 시마무라에게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코마라는 말의 글자처럼 시마무라에게 큰 그 무엇이 없어 보인다. 작품 초반에서 끝까지 시마무라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하다. 수동성으로 가득한 이 남성과 이 남성의 눈에 비추어진 요코아 코마코의 이야기는 설국이란 현실 안에도 환상이 있다고 여기게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것이 시마무라라는 존재에서 남자로서 남자다운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 모든 대화와 행동의 흐름이 코마코에 의해 돌아간다. 그저 그는 바라보고 기록하는 제3로서 독자에게 비추어진다. 무력한 그의 출신답게 예술을 탐닉하나, 그 예술의 지점에서 동양인이면서 서양의 세계를 추구한다. 동양적 문화를 알아가고 비로소 그 가치를 밝혀 두려고 할 때 오히려 서양적 세계로 가려고 한다.

 

시마무라는 결국 자신의 존재적 기반에 대해 부정하는 인간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런 그에게 코마코란 능동적 여자와 요코라는 헌신적 여성에서 농락 아닌 농락을 당한다. 요코가 코마코의 분신인 이유는 유키오라는 시계를 좋아하던 남자를 계속 가슴에 담았기 때문이다. 죽은 유키오를 위해 묘에 매일 참배하지만, 그 실체적 존재인 코마코는 가지 않는다. 자신의 해리적으로 바라봄으로 갔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가지 않았다고 하는지, 인간의 이율배반적 요소는 설국이란 그 고장으로 하여금 묘한 느낌이 준다.

 

처음에 기차를 매개가 중요한데, 영화나 소설에서 기차는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이다. 철로는 그 모양이 같기 때문에 어디든 같은 공간과 시간을 흘러가기에 철도에서 환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교각이 된다. 기차를 타고온 시마무라에게 설국의 풍경은 자신의 손에 감촉이 여전한 것부터 알 수 있다. 게이샤인 코마코에 대한 아름다운 입술에서 그는 환상을 품으로 왔다.

 

그러나 정작 환상의 세계에선 이방인적인 존재에 불과한 시마무라에게 주도권이란 없다. 단지 환상의 세계의 주인공은 환상 그 자체인가? 코마코가 만든 환상적 분신 요코의 행동에서 날카롭게 보이는 그녀의 행동을 주시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신의 숭고한 가치에서 모순이 나타난다. 코마코가 게이샤로 활동하는 이유는 유키오의 요양비 마련이었다. 그러나 유키오가 고향으로 오면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유키오 죽음에 매달리는 요코, 유키오 죽음에 외면하는 코마코, 지난 과거 그녀의 일기장에 유키오란 이름이 제일 앞에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정하는 요코에서는 그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는 그리고 유키고의 죽음과 동시에 시마무라에게 코마코에게 잘 해달라고 한다. 자신의 원체에게 육체적 교감보단 정신적 사랑을 요구하는 요코의 입장에선 자신의 인생에서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마무라는 수동적이다. 도쿄가 현실이고, 설국에서 환상의 세계이고, 환상이 가득한 자신 역시 사라질 환상적 존재인듯 하니깐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