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다. 물론 그동안 다른 작품들을 즐기면서 새롭게 이방인을 구상할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재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재미는 더욱 특이했다. 그래픽노블이라 하여 글자 텍스트만이 아닌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소설을 보는 이에게 더욱 더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 점이다. 기존에 그래픽노블보단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던 것을 읽다가 그래픽노블을 읽으니 그것과 다른 맛이 느꼈졌다.

 

프랑스 문학과 더불어 프랑스는 만화 역시 예술적이다. 만화로 보는 프랑스작품들은 아주 무거운 주제에 대해 만화라는 창으로 통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지나가고, 그 후에 아주 사나운 폭풍처럼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일러스트를 보면서 이방인 마지막에 죽음을 달콤한 매력으로 느끼는 뫼르소의 뒤 이야기를 상상했다. 예전에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 당통이 생각난다.

 

당통의 죽음에서 그는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면 그 목을 대중들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자신의 죽음을 모두에게 알리라고 했다. 마치 뫼르소의 자기의 죽음을 분노로 일그러진 대중들의 증오에서 비로소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죽음 앞에 두고 삶의 흔적을 알린다는 사실이란 정말 슬픈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지난 시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순이 넘어 병으로 돌아간 뫼르소의 어머니나, 사람을 죽여 기요틴 아래 목이 날라가는 뫼르소나 죽음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토록 외로우면서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한 이방인이 되었는가? 뫼르소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간이란 어느 특정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마련이었다. 뫼르소는 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얼굴조차 모른 아버지란 점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뫼르소는 학업을 중단한 적이 있다. 자신이 원한 꿈이나 이상은 모두 그 때 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에 의해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에 의해 포기했다.

 

왠지 그냥 보기엔 현실적 상황과 대치되는 인물, 뫼르소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처음 그렇게 보내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서 며칠 동안 울었다는 점에서 뫼르소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떠나보내며, 학업의 중단처럼 뫼르소는 인생의 의미를 버렸다. 수동적인 인간, 타성에 젖은 인간, 그저 무의식적 리비도를 마리에게 뿜은 뫼르소, 결혼과 사랑은 이미 머릿속에 별개의 세상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에 가서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혐오감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원하지도 않아도 억지로 호들갑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진심 마음이 괴로운 할 사람이 오히려 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는 이미 허무로 가득한 인간이고, 그 허무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그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알았던 것은 새벽이 동트는 감옥에서 기요틴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머니가 모든 순간에서 죽기 전에 왜 다리는 저는 남자노인과 애인처럼 지내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한 것이다. 마지막 꺼지는 그 시간이야 말로 모든 걸 불태운다는 느낌이었을까?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항상 권태로움에 젖어 살았다.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타는 듯이 불타는 햇빛이다. 모든 것을 신기루로 보이게 하는 그 태양에서 뫼르소는 충동을 느꼈다.

 

그에겐 죽음이란 감각은 없었던 것은 이미 죽음이란 관념적 사유조차도 포기한 게 아닐까? 사형선고 받은 후에 성직자가 오자 뫼르소는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 앞에 성직자 위로를 받을 것이나, 뫼르소는 성직자의 상투적인 말투에 겁이 났다. 죽음보다 더 두려움 권태로움과 사람들이 만들어버린 지겨운 현실이 뫼르소에게 제일 큰 공포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혼자 밤하늘을 보고 소금기가 날리는 이 알제리가 더 마음이 편한 것이 인상적이다. 물론 인간에게 죽음이란 괴로운 일이다. 기요틴에 잘린 머리 그것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에선 기요틴이 20세기 중후반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기요틴 아래에는 짚풀로 된 것들로 갈아놓는데, 그 이유는 기요틴의 칼날이 인간의 목을 지나가는 순간 피가 뿜어 밑으로 폭포처럼 쏟아 붓기 때문이다.

 

피로 광장을 물들이는 것만큼 대중들에게 환호와 즐거움은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악을 저기 보이는 기요틴의 성스러운 희생양이 있기 때문이다. 육중한 금속성의 소리가 ‘자르르’ 하면서 내려오다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그 소리는 유지된다. 단지 마지막 육중한 ‘퉁’ 하는 소리만이 들리고, 사형집행관들은 그 육중한 칼날을 위로 올린다. 올릴 순간에도 육중한 금속소리 역시 웅장하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사형수의 목이 바구니에 담기면서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방울에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사실 카니발이란 축제 역시 살육과 광기의 도가니에서 시작했다. 축제란 결국 살인과 향연의 만감이다. 그 축제의 장에서 모든 분노가 뫼르소의 목으로 인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도덕적 가치란 사실 그 시대적 상황의 권력이다. 인간에게 거슬릴 수 없는 사회적 강제이행 의무, 인간에겐 그저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축제란 결국 인간의 광기와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권태로운 사회에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만족하는 뫼르소는 권태를 파괴하기 위한 사람으로 마무리한다. 이 서적은 그런 권태로운 생활에 인식조차 못하는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흑백 일러스트 역시 그런 점을 살리기 위한 호세 무뇨스의 느낌이다. 얼굴에 땀으로 넘치고, 담배만 피고, 자신과 유리된 뫼르소에게 오늘 날의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척하는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 된 삶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운 존재이나 살아가면서 구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구속조차도 자유라고 생각되는 시기가 되니 우리 인간이 타성에 익숙하면 할수록 우리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간다. 아니면 사회의 굴레라는 적당주의 타성이야 말로 행복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가끔씩 스스로를 망치고 파괴하는지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해 존재감 확인이다. 타성이 짙은 세상에 자기의 존재란 그저 톱니바퀴에 불고하다. 이방인인 뫼르소가 이방인이 된 이유는 이미 이방인들로 가득한 세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건 권태로움이란 지겨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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