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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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흔히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이성에 대해 육체와 감정을 분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어느 학자가 말하길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에서 가장 무엇이 떠오르는 것일까? 흔히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한다고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표현과 느낌을 중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생각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성적, 감성적 영역이 연결된다. 현대사회처럼 표현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인간의 소통과 공감이 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물을 좋아하나, 키울 생각은 별로 없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애완동물은 그저 어떻게 해보아도 애완동물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의 치료가 되고 심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겠으나,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일방적인 요구사항이다. 진짜 애완동물을 사랑하면 아파트 건물에서 보이는 강아지들의 주인을 한 번 보아라. 소리 지른다고 강아지의 성대를 제거하거나 혹은 강아지의 성기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소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한데 하물며 우리 백성이랴 하시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절양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과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점에서 자신에게 입맛을 맞추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부분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모두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대중문화의 획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과 그 개성 안에서 나오는 영역이 하나의 새로운 상상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는 것이라는 게 과연 놀고 있는 것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이론적 함의를 보면 우리는 결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 꾸준하게 노동을 하고 있고, 인간의 기계적인 요소에 계속 봉사하고 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대한뉘우스와 드라마를 봐라. 교묘한 드라마천국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분이 적으신 글도 봤으나, 또한 나 역시 그래 생각한 것이 있었다. 예전에 삼순이 신드롬이란 열광이 있었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성질도 더러운 노처녀가 잘생기고 돈 많고 핸섬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모토는 현대판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이어졌다.

 

주변에 가면 그런 일들은 전혀 없을 것이다. 드라마야 말로 오히려 리얼리티를 가장한 최고의 허구와 거짓말이다. 페르소나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현실의 인간에게 오히려 pata-physics로 만든다. pata-physics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아이콘이고 상상력이나 도리어 현실 자체가 pata-physics로 변한 것이다. 이런 것을 이미지가 매개로 된 사회로 볼 수 있고,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Guy Debord의 서적명인 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스펙타클이란 신화에서 계속 재생산과 전복과 대체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이미지로 매개로 하기에 그 이미지라는 것이 현실에서 존재하는가? 드라마나 뉴스를 봐도 그것이 진실한 사실인지 아닌지도 구분조차 하지 못하여 인간은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다. 언론의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보다는 공정성이라고 한다. 몽타주와 같은 편집기술은 언론의 제대로 된 기능보단 역기능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합의 아래 만들어진 스펙타클한 미디어 세계에서 인간의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스펙타클화 시킨다. 세상이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넘어가는 당신네들이 스펙타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파괴가 곧 아방가르드라는 말에서 예술의 파괴가 다른 예술로 대체하는 점에서 스펙타클이란 끝없는 인간의 주인이다. 헤겔의 말대로 주인 없는 노예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스펙타클이 우리의 주인이고, 그 스펙타클은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들어간 이미지다.

 

Simulacre의 세계에서 인간은 사실과 허상의 구분 점은 없다. 인간은 사실 거짓말로 가득한 리얼리티의 사실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는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오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 상상력과 허구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나, 현대사회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런다고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작가는 그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했으나, 그것에 현실의 자신을 버린 자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

 

물론 인간은 모방에서 예술과 창조로 이어지나, 적어도 그것에서 한 발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가야 할 삶의 활력이다.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은 어떻게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교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조차도 정신적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학업이고, 성과수단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표다. 그래서 공부는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을 숫자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란 존엄성이 아니라 숫자의 등급에 분류된다. 예전에 이런 영화가 생각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금 이런 말을 하다가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를 정도로 삼엄한 세상이 되었다. 이래서는 상상력이란 멀고 먼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되어 버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정작 이상한 사람은 바로 그것을 읽으면 이상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 이런 문구가 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을 재치 있게 놀이로 바꿔 놓은 톰 소여를 생각해보라. ‘노동놀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정돈하는 노동도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긴,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게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사회가 아니었던가. 그 사회로 가기 위해 꼭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이 유희가 되는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그 유명한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슬쩍 바꾸어서,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어지럽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정돈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에 관심이 있지만, 일상생활의 예술도 관심이 많다. 길거리에 지나가는데 벽에 낙서가 그려져 있거나 혹은 삭막한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벼락에 장난스러운 그림들도 좋아한다. 특히 봉하마을에 가면 동네주민들이 사는 그 장소에 해바라기를 비롯한 꽃과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이미지는 상상력을 동원한 놀이로서의 노동이다. 놀이적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게 그린 미대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프로젝트나 장난을 표출한 것이고, 동네주민들은 흉물스럽고 무표정한 동네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물론 모든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나, 생각하면 분명히 그리는 사람도, 그것을 허락하는 사람도, 심지어 그것을 지나가다 구경하는 사람조차도 즐겁다. 즐거움이란 모두가 나누고 상상력이란 그것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놀이로 통한 노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문명이 존재하기에 자연에서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이 필수적이다. 당장 지금이라도 들판에 갔는데, 화장실 가고 싶거나 혹은 목이 말라 음료수를 먹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그건 들판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 그곳에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주문하여 가지게 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직접 있는 곳까지 갈 것인가? 화장실과 편의점을 만드는 것도 노동이요, 주문을 시켜 종업원이 오는 것도 노동이고, 자신이 직접 가는 것도 노동이다.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문명의 혜택을 받으려면 노동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면 여간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이란 매우 귀찮고도 짜증나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런 짜증난 활동을 재미난 놀이로 바꾼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예술은 나는 없어져야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딱 정해져있고, 예술장르가 너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다. 예술을 없어지기 위해서는 예술이 너무 일상적으로 즐기고 넘쳐야 한다. 예술이 특정계층이 만들고 향유하는 것에서 놀이라는 것으로 통해 모두가 즐기는 것으로 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다소 서로 간에 개성과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망상대리인>처럼 피해의식과 가해의식이 이상하게 교합된 게 아니라 망상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 조차 찾을 수 없다면 조금 괴로울 것이다. 그것에 빠져 아무런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는 것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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