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저 슬프군요. 다 잘했다고 인정하지 않으나, 그것을 인정하기에 진정한 글쟁이로 오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레퀴엠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가 나온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그렇다. 자유 그놈의 자유가 문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법조인 출신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루소의 가르침을 담은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당통>을 보면, 로베스피에르의 아내에게 남동생이 있는데, 당통을 기요틴 아래 목을 자르고 나서 집에 가니 루소의 가르침을 아내의 남동생이 외워 로베스피에르에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당통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정치적 권력에서 승자지만, 민주주의에서 패자가 되었다. 아니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괴물이 된 이유, 그리고 그렇게 잘 못된 길을 톱니바퀴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과 혁명은 왠지 모르지만 공통성과 차이점이 있다. 2가지 모두 폭력을 시작으로 인간의 죽음이 발생되며, 그 피는 당사자에게 잔혹한 운명이나 그것을 피하고 지켜보는 이에겐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희생이다. 따라서 숭고 속에 이루어진 미학적 감각은 죽은 자로 하여금 애국자 내지 순국자란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죽음의 가치가 모두 다르다고 해도 죽으면 모두 같아진다. 죽는 순간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평판을 들을 일이 없다. 아무리 내가 존 롤즈라는 미국 정치철학자를 존경해보아도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롤즈가 열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열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의 죽음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든지 그들은 그 죽음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사자(死者)는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다가올 수 없으리라! 오직 사자가 올 수 있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햄릿 왕자의 아버지가 몽상 속에 나타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외치야 할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우리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고 하여 신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고, 데카르트 합리주의 이래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음이 결국 최악의 마녀사냥을 남기고, 고전주의가 활성화로 이어진 중세시대에는 십자군이란 광기의 메시아주의로 정의라는 이름을 실현한다. 물론 자신의 신념 아래 살아가고 죽는다는 것에서 전사들이 만족하면 나름 다행이겠다. 무사들의 전쟁에서 항상 이런 말이 나온다. “무사의 최고의 영광은 바로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유한성이란 목숨을 유한성을 넘어 영원불멸한 신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내가 생각하던 내용을 이리저리 모아 요점을 정리하면서도 탁월한 이성적인 관찰과 때로는 거침 감정의 파도는 나를 압도한 기분이었다. 진중권 교수의 아내는 미와 쿄고, 일본인이다. 나이도 진중권 교수보다 3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가장 담론을 시끄럽게 하는 분과 결혼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책 안에 가미카제 특공대의 박물관에 갔는데, 그곳에서 재미난 모습을 본다. 자살특공대가 하늘을 날아올라 미국 해군의 구축함을 정통으로 부딪치는 장면에서 모두 함성을 지르는 분들을 본다. 모두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시고, 손목에 손이 달린 대신 이상한 갈고리가 달린 늙은 노인이다. 그들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공영화라는 슬로건 아래 청춘을 광기의 군국주의에 헌신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장애뿐이나 그것을 대체할 것은 그때의 광기다. 그것이 아니면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란 없다. 인간에게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성으로 설명해도 불가능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거기에 반발할 경우 바로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요새는 우리나라에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없어졌지만, 대신 사회적인 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차라리 혼자 죽으면 그만이나, 가족들까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래도 이런 생활을 해도 아직도 파시스트의 추억은 달콤한 모양이다. 파시즘의 매력은 아주 달콤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군중 속에 가려져 내가 나오지도 않아도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만약 거기서 조금 활동적으로 행동하면 영웅이 된다. 고문기술자가 자신의 고문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고문기술자가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를 3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고, 6개월 안에 죽게 해줄 수 있어!”라는 말에서 고문이 하나의 기술(ART)로서 인정받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예술은 맞는 모양이다. 그 당시 많은 현장을 돌고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칭송을 받았으니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란 그 수준이다. 미학에 대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나, 나는 미학에 대해 말하면 그 미적으로 판단될 대상이 나올 때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란 점이다.

 

 

문화가 비단 가수와 드라마만 존재하겠는가? 경제, 사회, 정치, 군사, 외교, 환경 등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문화를 단순히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것이 하나의 미라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를 위해 자유라는 것을 없앤 것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은 결국 안티 휴머니즘으로 바뀌어가고, 인간에게 이성보단 오히려 광기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 과정에선 항상 희생자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극적인 plot을 일으킨다. plot이 있기에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뻔히 보이나 충격적이고도 눈에서 피하기 어려운 매력, 그 plot에서 죽음이란 테마는 매우 극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언제인가? 꼭 TV음악방송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장면 중에 하나가 죽음이다. 4분 내외의 뮤직비디오의 극적연출에서 죽음만큼 극적인 부분은 없다. 특히 곡이 발라드에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말이다. 우리는 그런 잔혹한 희생을 보고 깊은 몰입을 한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저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남의 고통이 진실이든 가상이든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글은 저런 진실이든 가상이든 모든 것을 뛰어넘은 글이 된 것이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이런 말을 했던가? 이라크전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레퀴엠>은 상당히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가 강한 도서다. 이라크전이 했지만, 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는 전쟁의 모습과 실제 일어나는 전쟁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당시 권력자인 후세인이 결코 좋은 인물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후세인이 나쁠 뿐이지 그 외의 일반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압정과 폭정으로 인해 고통 받을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이 나면 누가 가장 타격을 입는가?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다. 군대 가는 남자들은 모두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은 군인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는 군인이 제일 많이 죽었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일반 농민이나 부녀자들을 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그 희생자들의 대상이 군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라는 점이다. 여기에 아이와 여자, 노인 모두 열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최고의 피해자다. 남자들은 모두 총을 들고 게릴라 군으로 활동하면 여기저기 활보하나 연약한 신체를 가진 그런 사람에게 불리하다.

 

 

최근에 여자들도 발육과 신체적 조건이 전쟁에 참전하나, 그렇다고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단지 한국의 입영대상이 남자만이고, 여자는 부사관과 장교로 가기에 계급적인 요소에서 남자들의 비애가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나면 여자 남자 상관없다. 여군의 죽음을 보고 여자들의 입영을 만류하는 외국의 여론이 있었으나 정작 그 여군들이 전장에 가서 민간인 여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레퀴엠>을 보라. 엄청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머리가 반통이 나가 파리가 누워있는 남자아이에게 붙어있거나, 여자아이의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하체가 모두 나간 병사, 시체가 조각된 채로 들어와 그 붉은색 피와 이물질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들, 나는 군대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대가 있는 것은 만약의 대비이지, 만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랴? 생각해보면 진중권 교수는 <레퀴엠>에서 비판한 사람에 대해서도 레퀴엠을 올린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진중권 교수는 2009년 정치적인 압박으로 자살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애도한다. 글을 보면 너무 이성적이라 약간 식상한 맛이 없지 아니하나, 그 속에는 오랫동안 인류가 가지고 내려온 피의 숙청이 따라오는 정치적 보복을 고전을 토대로 언급했다. 단순히 통시적인 사건을 공시적인 사건으로 결부지은 것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했던가? <레퀴엠>에서 다루던 진중권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의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최소한의 피해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한 방침에 아마 당시 한국군은 1명만 사망한 것으로 생각난다. 그런데 전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왜냐하면 전쟁참전 자체가 자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것이 나는 왜 무섭냐면, 인간의 광기를 최고로 올리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되고, 무슨 짓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총을 잡은 병사는 그 개인 하나 하나가 그 나라의 영웅으로 생각한다. 영웅이라고 생각되는 그 개인은 다른 개인의 마음과 동일하지 않기에 각각마다 영웅이란 사고가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두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다. TV에서 연애이야기가 나오면 세상을 다 살은 인간처럼 절망한다. 이 세상은 나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왜만하면 다 있는 일이고, 나처럼 그다지 연애에 아마추어라도 그런 일들도 있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무척 괴로워해도 남은 모른다고 여기겠으나 다들 그런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공통적인 부분이 항상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런 전쟁도 잘 나오는 부분이다. 결국 총을 들고 있는 군인, 당신은 조국의 미래요 희망이다. 생각하면 정답이 아니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를 누비던 독립군의 희생을 우리는 비웃을 수 없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광복절에 요인을 줄 수 없을망정,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존경해야할 분들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독재국가라는 골치 아픈 숙제가 있다. 그곳의 대부분 국민들은 어려운 생활과 억압으로 매일 하루가 고비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통제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의 모습을 보았는가? 2+2가 4가 아니라 5라고 마지막에 말하던 그의 모습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간의 영혼은 망가진다. 망가지지 않으면 인간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조금씩 정신이 망가진 내가 그 폭력적 사회적 문화와 현상에서 정상인처럼 보인 이유는? 물론 남에게 정상인의 범주에서 멀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광기를 머금고 뱉기에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말 옳은 것에 대해 지금 말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미학에서 도덕적인 면을 부각한 것이 당시의 작품이라면,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역시 나치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일 것이다. 나치의 독일은 위대하고 모든 종족은 열등하다. 따라서 상징을 내세워 하나의 신성성을 부여하니 예술이 아니겠는가? 단지 그것은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예술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숭고함을 가진 예술이다.

 

 

몽타주의 화려한 연출은 인간에게 하나의 정의감을 부여한다. 언론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공정성이라고 하는데, 몽타주의 화려함은 없는 내용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감춘다. 이 세상은 이미 몽타주의 세계이다. 통신전자가 발달하여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것조차 몽타주처럼 만들어진다. 그것은 뉴스를 봐도 나오고, 아직 철없는 아이들의 인터넷 키보드 베틀과 도배에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정의의 사도들이란 점이다. <레퀴엠>에서 그런 자들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가장 따분한 구경꾼이고, 열광적일수록 지루한 인간임을 나타낸다.

 

 

자기의 주관이 결국 헤게모니 속에서 움직이니 말이다. 병사들은 아마 헤게모니의 강력한 지배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을 때나 혹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죽음이 있어도 죽음은 자신에게 아닌 적에게 있다고 생각해야할 것이나, 막상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그것은 불가능이다. 아무런 판단의지도 없이 나와 죽이고 죽어야 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도망칠 곳은 오직 죽음이다. 폭력이 미적인 가치가 되는 곳이 파시스트의 세계라면, 그 죽음의 미학적 부여는 인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을 보여준다. 인간이 평화를 원하는 것도 사실이고 인간이 상대방의 머리를 밟고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발밑에 인간들을 두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노예와 주인이 구분되어 노예가 평생 받들고 살아야 하는 세상, 그것이 헤게모니의 유지성이다. 전쟁은 그런 노예와 주인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고, 혁명은 그것을 뒤집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다. 노예보다 주인의 권력과 폭력적 수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기뻐해서도 안 된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최근 우리의 역사까지 보면 혁명은 일어나도 성공한 적은 없다. 특히 미국독립전쟁 이후 혁명정부의 수립에서 미국은 혁명을 했으되,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 약간은 좋아진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

 

 

이렇듯 인간은 자신들의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도 없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돌고 있는 자들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죽고 죽이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만다. 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의 비극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전쟁이란 참혹함을 알았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단순히 어느 국가를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나, 결국 어떤 것이든 폭력은 일어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성이라고 레비나스가 그랬던가? 내가 당하지 않으면 남에 대해 알 수 없다. 우리는 내가 당해도 나도 남도 알 수 없다. 계속 <레퀴엠>의 연주곡은 흐를 것이다. 이 굴레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 - 늘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꿈꿨던 17년 파리지앵의 삶의 풍경
이화열 지음 / 에디터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새 나보고 한국을 떠나면 어디에 살고 싶은가? 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프랑스!”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안에 있는 파리가 나의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겐 파리에 갈 불어실력도 비행기 표를 사서 당장 가서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왜 하필 나에게 프랑스 파리라고 묻는다면 나에겐 프랑스란 이미지는 게리 무어의 ‘Parisienne Walkways’이란 곡이다. 당시 나는 파리지앵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알고 보니 파리의 여자였다. 파리의 역자가 걷는 것이라?

 

당시 대학교 때 처음으로 들을 때 파리라는 곳은 매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곳이구나 하고 여겼다. 게다가 라이브 음악 중간을 넘어 가면 기타 현을 잡고 비브라토를 약 1분 이상 게리무어가 연주한다. 매우 강렬하고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운전하다 들으면 그대로 앞차를 들어 박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느낌이다. 잔잔한 블루스 음에 더해진 기타연주에 보컬링이란 파리의 느낌은 그렇게 잔잔한 호수위에 거친 폭풍인가 싶었다. 그런 다음에 rialto의 kieslowski란 곡을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한참 화제인 영화 ‘세 가지 색’의 감독이 키에로프스키였다.

 

약간 일렉트로니컬한 사운드에 목소리 대신 반주만이 흘러나온다. 파리의 영화, 그리고 감독, 파리라는 것은 이렇게 뭔가 몽환적인 부분과 무덤덤한 느낌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본 파리에선 세 명이 떠오른다. 장 자크 루소, 당통, 로베스피에르다. 다소 프랑스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이것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1968년 5월 혁명이다. 이른바 프랑스에서 아방가르드 문화가 대중들에게 불씨를 댕기게 된 그 열기를 말이다. 소르본노 대학에서 농성중인 대학생이 이렇게 벽에다 글을 적었다. “우리대학은 노동자를 24시간 환영한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란 자유가 넘치는 세상이다. 자유라는 영혼의 울림은 자신만의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과 같이 공유하고 느끼고 즐겨야 하는 것에서 비로소 자유가 성사된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이란 책을 만들었다. <사회계약론>은 1789년 7월 대혁명의 기반이 된 인류문명의 보배이며, <에밀>은 독일 관념철학과 형이상학에서 제일 중요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만들게 한 서적이다. 루소의 영향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유와 사상이 발전했는가! 그 루소가 파리에서 글을 적었으나 그에겐 오로지 파리의 시민들이 주는 야유만 있었다.

 

외롭고 비참하고 쓸쓸해도 자신 안의 정신에서는 영원한 자유인이었던 루소, 그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자유라는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도 곧 우리의 자유를 위해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개인적 성향이 롤즈의 만민법을 필두로 한 정치적 자유주의이기에 나에겐 자유란 원하기에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원한다. 만약 로베스피에르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는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기요틴과 뜨겁고도 차가운 키스를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만큼 프랑스의 자유란 그 자유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철학이 숨 쉬는 파리는 수많은 피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다고 아직까지 완성된 자유는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다보면 잔혹한 민주주의 의식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임산부가 통증으로 고생하는데, 비자가 없는 외국인이란 이유로 비행기로 강제 퇴출하는 글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파리에는 그런 자유가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제대로 문제의식을 펼칠 자유가 있었다. 인간에게 자유란 표현의 권리라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프랑스라는 곳이 늘 새로운 자아에 형성되었다. 아니면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까?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책들을 힘들게 읽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결과적 현상보단 그 결과에 대한 원인,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프랑스에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 있다. 말 이상하게 한다고 회사에서 다른 부서 상사와 말다툼을 해야 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늘 같은 것을 하기를 강조하고, 늘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며, 늘 같은 것만 지나가는 듯한 이 익숙하고도 낯설 경치 속에 프랑스는 나에게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100% 만족할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현실의 장벽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작가의 세상여행기를 읽었는데, 너무 위대한 것과 너무 이상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점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주변에서 소소한 것들을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그런 환경이 되려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다소 되지 않은 흐름이라 아쉬울 뿐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에서 저자인 이화열은 그런 한국에서 새로운 자유를 찾아 파리로 갔는가?

 

그녀의 눈에 보인 파리, 리옹, 그 밖의 많은 프랑스 크고 작은 도시, 내가 바라는 세상에 가까워 보인다. 열정만으로 충분히 일을 하고, 서로 격이 다르고 사는 세상이 달라도 사랑할 수 있고, 주변 가족들의 축복까지 받는 모습에서 우리와 너무 다름을 느낀다. 문화적 쇼크라고 할까나? 그 문화가 매력적인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다고 거기의 문화 100%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다양한 삶의 요소가 좋다. 인생의 가치에서 무엇이 되는가에서 우리는 부자라고 한다.

 

그러면 부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에선 좋은 집과 차 넓은 땅과 주식으로 볼 것이다. 높은 의자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내려 깔며 주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한국의 신화적 요소는 바로 그런 특권적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이다. 끝도 없는 탐욕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망가뜨린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고 감정을 숨기야 하는 그런 숨 막히는 세상, 프랑스의 부자는 자신의 달력에 얼마나 휴가가 존재하여 바캉스를 어디에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과 자신만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나 자신조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고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을 하는가? 일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다소 나도 1968년 5월 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에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 후반에 나온다. 예전에 조지 카피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에서 프랑스 5월 혁명과 미국의 1960년 말부터 1970년 초반의 반전운동에 대해 보았다. 그 책에 나온 것처럼 브라화형이 여전히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점에서 신기했다. 그만큼 파리의 자유란 오랜 기간을 숙성한 자유다.

 

미혼모가 아이 혼자 키울 수 있는 나라,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돈을 털릴 일이 없는 나라, 남자 중에서 마초가 드문 나라, 그만큼 상대방의 감정에 충실한 나라, 그게 프랑스 파리다. 도둑도 멍청해서 자동차 유리를 깨서 가져가고, 심지어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다. 예전에 알랑 가그놀, 장 루프 펠리시올리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파리의 고양이>를 보면서 다소 파리라는 곳은 저런 것인가? 싶었다. 도둑이 들어도 뭔가 모르게 금방 털리고, 도둑 잡기보단 오히려 연쇄살인범을 잡는 게 급한 파리의 경찰, 경찰보단 세금징수원이 무서운 프랑스를 보면 이런 것들이 제일 부러웠다.

 

책을 들어다보면 아무래도 작가 자체가 여성이라 그런지 상당히 감수성이 뛰어나나, 나는 그 감수성을 따라가기보단 왜 그런 감수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생각한다. 자유로운 파리, 예술과 철학의 도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만큼의 희생이 뒷받침 한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이다. 기요틴이 18세 후반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목을 베어버린 파리의 광기에서 이제는 모두의 아름다운 욕망이 나오는 도시가 되었다. 언제 나도 그런 세상에 살 수 있을까? 왠지 꿈처럼 보이는 이 절망에서 파리와 같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양미술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서양의 미술의 역사를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은 조각과 건축, 석고 등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화폭에 담은 회화일 것이다.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의 고전예술편에서 보인 대부분의 예술들이란 모두 회화 중심적이다. 반면 나중에 읽을 <서양미술사>의 모더니즘 편은 사진을 이용한 것도 많을 것이고, 게다가 아방가르드 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알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이전의 이야기도 다룰 필요가 있다.

 

예전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어서일까? 어째든 고전예술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이전의 이전인 전근대적인 영역을 읽어봐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적인에서 중세 르네상스와 바로크와 로코코, 낭만주의 다시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예술의 세계에서 인간은 예술에 대해 바라봄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가능성을 열어준다. 일단 나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것은 인간이 즐겨야 할 하나의 대상이라고 여기나 솔직히 예술이란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일반사람들과 분리된 영역으로 자리 잡는 것 같았다.

 

프랑스 사회학자이면서 양심적 지식인 중에 하나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서 예술이란 취향과 취미로서 인간의 계급과 신분이 갈림길이 나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누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를 읽고 누가 따분하게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으며 알 수 없는 그림으로 가득한 화랑에 가려고 한다는 말인가? 물론 가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나 그것이 전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문화적 수준이나 여건이 잘 구비된 서울경기 수도권이면 모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본력의 차이로서 직접적 구별 짓는 것도 가능하나 그것을 직접 현찰로서 보여주기란 어렵다. 단지 자본의 매개로 한 상표나 기호들이 알 수 있게 해주고, 혹은 취미와 취향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에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에 대한 취미 호감도에서 승마와 클레이 사격, 요트타기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생활이나 자본력을 생각하면 전혀 단순하지 못한 취미다. 그것은 자본력의 지표를 알게 해주는 알레고리적인 자본주의 구조의 구별 짓기이다.

 

그런다고 이것은 지적인 미를 가지지 못한 취미일 뿐이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자본에 의한 부분도 있으나 자본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미학(美學)이란 것을 처음 접할 때 내 자신은 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 미학을 정립한 인물이 임마누엘 칸트로서 그의 저서인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미란 개인적 취향이나 철학보다 보편적이라고 했다. 솔직히 고전예술을 다룬 <서양미술사>에서 어느 한 미술비평가인 빙켈만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72점 만점에 절반 수준을 준 것을 본다면 과연 그렇다.

 

단지 그는 자신만의 입장에서 미를 관찰하려고 했다. 단지 그는 남들과 다른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그리스의 미는 남성중심문화이다. 특히 스파르트왕을 소재로 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를 지키는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을 보면, 빙켈만이 원하는 작품일 것이다. 동성연애자란 사실에서 그는 이미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 현대에서 게이라는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적 영역에서 그나마 관대한 편이다. 근대시대에는 그것은 용서받기 힘든 입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빙켈만의 시점이 헤겔의 미학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 그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 현대에도 미치는 것만으로 대단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고전예술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닐 터이다. 빙켈만이 추구하는 것은 아마 동성애라고 해도 그리스시대의 동성애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다르게 그리스에서 말한 에로틱이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어른 남자와 소년의 관계이다. 어른남자가 가진 지혜를 어린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을 보면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로 날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3대 스승과 제자는 소년애자였다고 한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잘 생기지 않음에도 많은 소년들이 그에게 구원을 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읽어보면 빙켈만이 추구하는 이상적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전쟁을 하면 참여하는 군인이기도 했다. 평소 폴리스 정치에 입문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은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장수이고 병사였다. 영화 <300>의 주인공이라 볼만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강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 하지만 여성에게 열려있지 않은 영역은 남근중심사회의 그리스에서 남성 자체가 미의 대상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미학을 보면 조각상들이 남성의 육체미를 한참 뽐을 낸다. 원반을 던지는 남자의 경우 석상이란 단단한 원재료에서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포즈를 취한다. 그리스의 아름다움이란 남성의 육체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움 기준을 지금 시각에서 다룬다는 것은 웃긴 일인 것은 미학에서 미란 그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건으로 모두 이루어진 하나의 산물이란 점이다.

 

미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당연한 속성을 부여한 산물이다. 때에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그런 부분은 지금까지 내려온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이나 교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시대의 건축기술과 내부의 채화와 유리창에 비추는 큐비즘 같은 빛의 조화에서 큰 감동을 느끼며 예술이라고 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충실한 신도 내지 신부님은 예술이 아니라고 볼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영광이고 은총이나 또는 은혜이고 복음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한 취향비판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말이다. 반드시 칸트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서는 미술비평가들의 등장을 아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미술비평가들은 미술품에 대한 담론으로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현대 미학강의>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편을 참고하면 오히려 비평가들이 넘치고, 감정사나 전문가의 증가는 작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 한다.

 

당시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 대해 생각하면 같은 소재로 만들어도 그 자체가 원본이라면 이제 영상복제가 가능해지기에 원본 대신 사본이 넘치면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나리자가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것이 원본이 아니더라도 원본보다 더 가까운 원본으로서의 사본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이 숭고의 대상, 즉 예술이기보단 하나의 의식적인 상징이라면 상징성의 해체는 시뮬라크르라는 이중적인 잣대에 의해 해체된다. 그런다고 해도 그리스도나 석가모니의 사진이나 그림들이 예술적 가치보단 신앙적 가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사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한국문화재를 보면 대부분 불교미술인 것들이 많다. 미술적 가치에서 저것은 예술보단 불교신자에겐 하나의 신앙심을 자극하게 되는 숭고한 존재다. 미술의 자체를 보면 예술로서 영역보단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강하다. 혹은 아니라면 그리스의 기술적인 요소도 그렇다. 절대 황금비율은 지금도 내려와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교통카드도 적용된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 취미에 대한 판단은 역시 개인적 영역이다. 그런다고 기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딱히 정해진 기준만 따라 가는 것이 아니.

 

칸트는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려기 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당대 평가는 그 시대의 조류에 의해 결정되는 통시적인 부분이 강하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리스 고대석상이나 다비드의 그림이나 후대에 나온 피카소나 마그리트의 그림이라도 당대 평가가 엇갈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준에서 후대로 나오면 이 작품들은 공시적으로 인정받는다. 예술작품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들이 후대로 가면 가치를 정하기란 어렵다. 당시의 기준이 있다면 후대의 기준이 있고, 후대의 기준으로 그 작품들을 만들어보는 시도는 그리 쉽지 않다.

 

단지 따라 그리는 정도로 생각하는 모방 수준인가? 상상력의 세계에 있는 재현이라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에 대한 가시화에서 우리의 상상력과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다를 것이다. 러시아 화가가 그린 성벽그림이 타원이 되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저것은 직각이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하나, 러시아 당시 기준에는 직각인 것이다. 보는 시점과 각도와 그리고 원근감을 다양성을 추구했기 그렇다. 그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미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드시 그것이 오늘 날 우리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풀어주는 것에 해결되지 않는다. 예전에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미학이란 어느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좋은 옷을 사주거나 혹은 월급액수를 늘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로 통한 미적 감각을 살리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어차피 영원성이 부여된 존재가 아니라 유한성의 존재다. 그림으로 보는 존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한성 즉 영원성이다.

인간 개인은 유한적이나 그 유한적이기에 욕망으로 드러나는 영속성은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 인간이 유한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유한에서 무한적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기여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자본의 중요성은 인정하나, 자본으로 해결되지 않은 영혼과 정신의 목마름은 예술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몇 만 원짜리 전시회에 가서 모르고 내가 거기 다녀온 것만 이야기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다. 최근에 피카소의 그림이 수백억에 이른 금액에 팔린다고 한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어긋난 세상에 대한 패러디다. 그 패러디들을 계속 유지하는 자들이 피카소의 패러디 같은 그림을 산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계나 디자인 쪽으로 부르는 단어 중에 조감도라는 것이 있다. 조감도(鳥瞰圖)란 시선이 인간이 아니라 새가 보는 시선이란 점이다. 사람은 지면 위에 두 다리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정면과 측면이 위주이고, 사물의 높이가 높으면 우러러 보는 것이고, 낮으면 아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도시의 사물들을 보자. 길가에 많은 사람들, 지나가는 차들, 그리고 sky scraper, 즉 마천루의 빌딩이다. 우리 인간은 현재 나무와 꽃으로 이루어진 들판과 숲이 아니라 차갑고 무거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오히려 인간보다 높은 곳을 점지한 사물들, 특히 건축물들을 보면 우리 고개를 더 이상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먼 곳에 있다면 원근법으로 시야에 들어올 줄 모르나, 적어도 바로 눈앞의 빌딩이라면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목도 저려 올 것이고, 한 낮의 태양은 눈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물의 배치를 직접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게 바로 조감도다. 새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에서 보는 지면의 모습이다. 어느 대상 건물보다 높은 건물에 올라가지 않거나 혹은 헬기를 타고 하늘 위를 날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보통 상황에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63빌딩이나 남산타워를 생각하면 좋은 예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작품은 조감도로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교수대위에 까치를 올려놓음으로서 조감도라기 보단 언덕에서 보는 전경을 마치 까치가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조감도적인 영역보다는 그저 까치가 교수대 위에서 보고 있다는 것에서 까치가 왜 교수대 아래를 보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까치가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목을 매달아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 까치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교수대에서 목에 행어를 맨 사람이 죽은 뒤에다. 그 사람이 죽었다면 비로소 까치는 그 자가 시체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교수대 위의 까치는 까치라는 제목처럼 까치가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까치가 보고자 하던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들은 당시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피터르 브뤼힐이라고 한다. 당시 그가 살던 네덜란드는 이런 그림이 나올만한 상황이라고 한다. 본문을 보면 가톨릭의 횡포에 반대하는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봉기를 일으킨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다보면 마녀사냥은 16세기부터 유럽을 강타하고 17세기에 극에 처한다. 곧 그것은 교황과 왕권의 결탁에 따른 부정한 재산축제나 무능한 정치적 행위에 따른 사회적인 불만이 고조된 점이다. 그런 것들이 민중들을 억압하기 위해 광기의 역사 중에 역사인 마녀사냥을 일으킨 것이다.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자가 정상이고, 정상인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에서 칼뱅주의 반란자들은 곧 제압의 대상이 되었다. 책에서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보복이 1567년에 시작되었고, 악명 높은 공안평의회라는 기구로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저승의 신인 하데스가 키우는 개인 케르베로스에게 먹이로 주었을 것이다.

 

죽음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세상은 정상일 가능성이 없다. 인간의 고통에서 최고의 고통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혹은 죽음조차 행복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고문이 더 잔혹한 고통일줄 모른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더 잔혹하고 철저한 고문을 받아 고통스러워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이 행복했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라면 행운일지 모른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과정이 화형이라고 한다. 나무장작에 올린 사람이 그대로 뼈가 보일정도로 불에 타는 과정을 광장에서 펼쳤다. 이때 사람들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언젠가는 자신이 될지 모를 상황이나 사람들은 희생자를 마녀 내지 악마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 어느 개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개인이었고, 그 개인을 만든 것은 사회적 구조다.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서 그 대체적 희생물은 언제나 약자인 군중이었다. 군중은 거기에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본다. 사실 무관한 것은 바르나 그것부터 틀린 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비단 정치적 자유주의를 원했던 사람이었나? 그냥 아무 것도 아닌데도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삼청교육대에는 평소 원한이 있던 자를 무고하여 보냈으니 교수대위의 까치는 여전히 날라 다니고 있다.

 

그런 교수대위나 혹은 장작더미 위나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끔 어느 사형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하는 사람이 대중들이다.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에서 대중들은 잊고 있다. 자신이 던지는 돌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부조리하게 살아가는 대중들, 그리고 그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권력과 그 권력에 입맛을 다시는 지식인들, 이 모두가 부조리였다. 피터르 브뤼힐의 그림에서는 이런 부조리를 비웃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까치가 당시 세상을 보는 시점이라니? 새가 판단할 수 없는데, 새가 판단하라는 것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문구가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사형은 최고의 구경거리고, 한편으로 사형은 군중의 알 수 없는 심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놀이였다. 책에서도 교수대 아래에서 춤을 추거나 혹은 똥을 누는 모습은 사형이란 하나의 제의적 성격이 다르게 보인다.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 루이를 살해하려한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죽음은 앙시앵레짐의 폭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다미엥의 죽음처럼 특정 인물을 살해한 인물은 모르나, 강도나 범죄자의 죽음은 특이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나, 그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도둑질하지 않으면 죽을 운명, 거기에 군중들은 감화되어 교수대 위의 죄수를 풀어주고, 심지어 사형집행인을 살해한다. 부조리한 것에 대해 부조리로 응하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헤겔의 미학처럼 찬, 반, 합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차라리 아도르노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다.

 

인간의 부조리에서 진중권 교수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미학이 반드시 아름다운 서양미술사 위주로 가는 것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다소 더럽고 광기에 빠지며, 불완전한 것을 다루기도 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Non-Finito이란 미완성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한다. 때로는 미완성이기에 더욱 완성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완벽한 대상을 창조하면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에서 예술적 영역인 산업디자인의 발달로 인해 조금 의미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산업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일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빨간 자동차에서 호스를 들고 있는 소방관이 있고, 그 주변에 119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면 분명 화재신고는 119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가 <미학 오디세이>에서 자주 사용하는 그림인 르네 마그리트나 에셔의 작품을 보자?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두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물론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일치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철학보다 취미판단이 더 보편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알아보기가 힘든 것에 대한 의미, 낯설기 만들기에 대한 의미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는 매우 재미있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다소 서양예술사-고전예술편을 보고 난 뒤에 봐도 이해력을 올리기는 좋을지 몰라도 전혀 무관하게 책 내용이 진행된다.

 

아름다움을 논하기보단 차라리 진중권 교수가 살아오면서 조금 특이한 감상력인 지적 호기심을 전달해 준 점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호한 것들을 다룬다. 모호함에서 아이와 어른의 이야기다. 지금의 사회에서 어른과 아이는 전혀 다른 신분으로 다룬다. 아이라는 대상은 곧 학생이다. 학생은 어른이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가 전혀 없다. 학교라는 제도가 결국 아이라는 사람을 구분 짓게 하는 하나의 제재가 되었다. 옛날에 학교라는 제도가 없고, 설사 있더라도 일부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열려 있는 특수적 조건이라면 말이 다르다.

 

태어난 아이들은 치아가 조금씩 나기 시작할 때부터 집안일을 돕는다. 사소한 가사부터 시작하여 농장일과 목동일도 한다. 우리는 천사적인 인간을 묘사할 때 주로 양을 치는 목동을 사용하고, 그 목동은 어린 소년이다. 아주 어린 소년이 가장 아름다운 천사와 부합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러면 그 목동은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노동이란 마르크스의 말처럼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이 아니라 작은 어른이란 의미가 새롭다.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다른 관념이 존재하기에 아이들의 모습은 어린 아이의 모습보단 어른의 축약판에 가까웠다. 보통 성인들의 신체등신이 7등신 내지 8등신이 기본이나 어린 아이들은 거기에 비해 5등신 내외이고 초등학교(요새는 성장발육이 빠르나)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6등신 체형이 많다. 그들에게 성인들의 등신을 부여한다는 점은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노동력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발휘하는 점이나, 군대 안에서도 10대 중반의 청소년이 근무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잔 다르크라는 소녀 역시 10대인데도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어른들의 축소판이란 점에서 조금 재미있던 내용이었다. 독창적인 그림읽기라고 하나, 그것은 독창적인 시각보단 당시 독창적 그림들을 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독창적인 것을 찾아내어 다시 꺼낼 수 있는 그 방법이다. 우리는 항상 상상력을 억압하고 독창성을 냉대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 결코 낯익은 요소가 아니라 한 번 우리가 생각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인간이 매일 밥만 먹고 살 수 없고,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무한 반복하여 보는 레디메이드 콘텐츠에 길들여져 가는 것도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