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양미술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서양의 미술의 역사를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은 조각과 건축, 석고 등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화폭에 담은 회화일 것이다.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의 고전예술편에서 보인 대부분의 예술들이란 모두 회화 중심적이다. 반면 나중에 읽을 <서양미술사>의 모더니즘 편은 사진을 이용한 것도 많을 것이고, 게다가 아방가르드 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알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이전의 이야기도 다룰 필요가 있다.

 

예전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어서일까? 어째든 고전예술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이전의 이전인 전근대적인 영역을 읽어봐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적인에서 중세 르네상스와 바로크와 로코코, 낭만주의 다시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예술의 세계에서 인간은 예술에 대해 바라봄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가능성을 열어준다. 일단 나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것은 인간이 즐겨야 할 하나의 대상이라고 여기나 솔직히 예술이란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일반사람들과 분리된 영역으로 자리 잡는 것 같았다.

 

프랑스 사회학자이면서 양심적 지식인 중에 하나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서 예술이란 취향과 취미로서 인간의 계급과 신분이 갈림길이 나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누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를 읽고 누가 따분하게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으며 알 수 없는 그림으로 가득한 화랑에 가려고 한다는 말인가? 물론 가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나 그것이 전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문화적 수준이나 여건이 잘 구비된 서울경기 수도권이면 모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본력의 차이로서 직접적 구별 짓는 것도 가능하나 그것을 직접 현찰로서 보여주기란 어렵다. 단지 자본의 매개로 한 상표나 기호들이 알 수 있게 해주고, 혹은 취미와 취향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에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에 대한 취미 호감도에서 승마와 클레이 사격, 요트타기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생활이나 자본력을 생각하면 전혀 단순하지 못한 취미다. 그것은 자본력의 지표를 알게 해주는 알레고리적인 자본주의 구조의 구별 짓기이다.

 

그런다고 이것은 지적인 미를 가지지 못한 취미일 뿐이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자본에 의한 부분도 있으나 자본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미학(美學)이란 것을 처음 접할 때 내 자신은 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 미학을 정립한 인물이 임마누엘 칸트로서 그의 저서인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미란 개인적 취향이나 철학보다 보편적이라고 했다. 솔직히 고전예술을 다룬 <서양미술사>에서 어느 한 미술비평가인 빙켈만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72점 만점에 절반 수준을 준 것을 본다면 과연 그렇다.

 

단지 그는 자신만의 입장에서 미를 관찰하려고 했다. 단지 그는 남들과 다른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그리스의 미는 남성중심문화이다. 특히 스파르트왕을 소재로 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를 지키는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을 보면, 빙켈만이 원하는 작품일 것이다. 동성연애자란 사실에서 그는 이미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 현대에서 게이라는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적 영역에서 그나마 관대한 편이다. 근대시대에는 그것은 용서받기 힘든 입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빙켈만의 시점이 헤겔의 미학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 그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 현대에도 미치는 것만으로 대단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고전예술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닐 터이다. 빙켈만이 추구하는 것은 아마 동성애라고 해도 그리스시대의 동성애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다르게 그리스에서 말한 에로틱이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어른 남자와 소년의 관계이다. 어른남자가 가진 지혜를 어린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을 보면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로 날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3대 스승과 제자는 소년애자였다고 한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잘 생기지 않음에도 많은 소년들이 그에게 구원을 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읽어보면 빙켈만이 추구하는 이상적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전쟁을 하면 참여하는 군인이기도 했다. 평소 폴리스 정치에 입문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은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장수이고 병사였다. 영화 <300>의 주인공이라 볼만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강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 하지만 여성에게 열려있지 않은 영역은 남근중심사회의 그리스에서 남성 자체가 미의 대상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미학을 보면 조각상들이 남성의 육체미를 한참 뽐을 낸다. 원반을 던지는 남자의 경우 석상이란 단단한 원재료에서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포즈를 취한다. 그리스의 아름다움이란 남성의 육체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움 기준을 지금 시각에서 다룬다는 것은 웃긴 일인 것은 미학에서 미란 그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건으로 모두 이루어진 하나의 산물이란 점이다.

 

미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당연한 속성을 부여한 산물이다. 때에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그런 부분은 지금까지 내려온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이나 교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시대의 건축기술과 내부의 채화와 유리창에 비추는 큐비즘 같은 빛의 조화에서 큰 감동을 느끼며 예술이라고 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충실한 신도 내지 신부님은 예술이 아니라고 볼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영광이고 은총이나 또는 은혜이고 복음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한 취향비판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말이다. 반드시 칸트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서는 미술비평가들의 등장을 아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미술비평가들은 미술품에 대한 담론으로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현대 미학강의>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편을 참고하면 오히려 비평가들이 넘치고, 감정사나 전문가의 증가는 작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 한다.

 

당시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 대해 생각하면 같은 소재로 만들어도 그 자체가 원본이라면 이제 영상복제가 가능해지기에 원본 대신 사본이 넘치면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나리자가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것이 원본이 아니더라도 원본보다 더 가까운 원본으로서의 사본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이 숭고의 대상, 즉 예술이기보단 하나의 의식적인 상징이라면 상징성의 해체는 시뮬라크르라는 이중적인 잣대에 의해 해체된다. 그런다고 해도 그리스도나 석가모니의 사진이나 그림들이 예술적 가치보단 신앙적 가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사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한국문화재를 보면 대부분 불교미술인 것들이 많다. 미술적 가치에서 저것은 예술보단 불교신자에겐 하나의 신앙심을 자극하게 되는 숭고한 존재다. 미술의 자체를 보면 예술로서 영역보단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강하다. 혹은 아니라면 그리스의 기술적인 요소도 그렇다. 절대 황금비율은 지금도 내려와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교통카드도 적용된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 취미에 대한 판단은 역시 개인적 영역이다. 그런다고 기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딱히 정해진 기준만 따라 가는 것이 아니.

 

칸트는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려기 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당대 평가는 그 시대의 조류에 의해 결정되는 통시적인 부분이 강하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리스 고대석상이나 다비드의 그림이나 후대에 나온 피카소나 마그리트의 그림이라도 당대 평가가 엇갈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준에서 후대로 나오면 이 작품들은 공시적으로 인정받는다. 예술작품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들이 후대로 가면 가치를 정하기란 어렵다. 당시의 기준이 있다면 후대의 기준이 있고, 후대의 기준으로 그 작품들을 만들어보는 시도는 그리 쉽지 않다.

 

단지 따라 그리는 정도로 생각하는 모방 수준인가? 상상력의 세계에 있는 재현이라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에 대한 가시화에서 우리의 상상력과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다를 것이다. 러시아 화가가 그린 성벽그림이 타원이 되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저것은 직각이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하나, 러시아 당시 기준에는 직각인 것이다. 보는 시점과 각도와 그리고 원근감을 다양성을 추구했기 그렇다. 그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미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드시 그것이 오늘 날 우리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풀어주는 것에 해결되지 않는다. 예전에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미학이란 어느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좋은 옷을 사주거나 혹은 월급액수를 늘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로 통한 미적 감각을 살리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어차피 영원성이 부여된 존재가 아니라 유한성의 존재다. 그림으로 보는 존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한성 즉 영원성이다.

인간 개인은 유한적이나 그 유한적이기에 욕망으로 드러나는 영속성은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 인간이 유한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유한에서 무한적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기여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자본의 중요성은 인정하나, 자본으로 해결되지 않은 영혼과 정신의 목마름은 예술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몇 만 원짜리 전시회에 가서 모르고 내가 거기 다녀온 것만 이야기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다. 최근에 피카소의 그림이 수백억에 이른 금액에 팔린다고 한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어긋난 세상에 대한 패러디다. 그 패러디들을 계속 유지하는 자들이 피카소의 패러디 같은 그림을 산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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