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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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계나 디자인 쪽으로 부르는 단어 중에 조감도라는 것이 있다. 조감도(鳥瞰圖)란 시선이 인간이 아니라 새가 보는 시선이란 점이다. 사람은 지면 위에 두 다리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정면과 측면이 위주이고, 사물의 높이가 높으면 우러러 보는 것이고, 낮으면 아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도시의 사물들을 보자. 길가에 많은 사람들, 지나가는 차들, 그리고 sky scraper, 즉 마천루의 빌딩이다. 우리 인간은 현재 나무와 꽃으로 이루어진 들판과 숲이 아니라 차갑고 무거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오히려 인간보다 높은 곳을 점지한 사물들, 특히 건축물들을 보면 우리 고개를 더 이상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먼 곳에 있다면 원근법으로 시야에 들어올 줄 모르나, 적어도 바로 눈앞의 빌딩이라면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목도 저려 올 것이고, 한 낮의 태양은 눈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물의 배치를 직접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게 바로 조감도다. 새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에서 보는 지면의 모습이다. 어느 대상 건물보다 높은 건물에 올라가지 않거나 혹은 헬기를 타고 하늘 위를 날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보통 상황에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63빌딩이나 남산타워를 생각하면 좋은 예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작품은 조감도로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교수대위에 까치를 올려놓음으로서 조감도라기 보단 언덕에서 보는 전경을 마치 까치가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조감도적인 영역보다는 그저 까치가 교수대 위에서 보고 있다는 것에서 까치가 왜 교수대 아래를 보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까치가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목을 매달아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 까치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교수대에서 목에 행어를 맨 사람이 죽은 뒤에다. 그 사람이 죽었다면 비로소 까치는 그 자가 시체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교수대 위의 까치는 까치라는 제목처럼 까치가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까치가 보고자 하던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들은 당시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피터르 브뤼힐이라고 한다. 당시 그가 살던 네덜란드는 이런 그림이 나올만한 상황이라고 한다. 본문을 보면 가톨릭의 횡포에 반대하는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봉기를 일으킨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다보면 마녀사냥은 16세기부터 유럽을 강타하고 17세기에 극에 처한다. 곧 그것은 교황과 왕권의 결탁에 따른 부정한 재산축제나 무능한 정치적 행위에 따른 사회적인 불만이 고조된 점이다. 그런 것들이 민중들을 억압하기 위해 광기의 역사 중에 역사인 마녀사냥을 일으킨 것이다.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자가 정상이고, 정상인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에서 칼뱅주의 반란자들은 곧 제압의 대상이 되었다. 책에서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보복이 1567년에 시작되었고, 악명 높은 공안평의회라는 기구로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저승의 신인 하데스가 키우는 개인 케르베로스에게 먹이로 주었을 것이다.

 

죽음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세상은 정상일 가능성이 없다. 인간의 고통에서 최고의 고통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혹은 죽음조차 행복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고문이 더 잔혹한 고통일줄 모른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더 잔혹하고 철저한 고문을 받아 고통스러워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이 행복했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라면 행운일지 모른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과정이 화형이라고 한다. 나무장작에 올린 사람이 그대로 뼈가 보일정도로 불에 타는 과정을 광장에서 펼쳤다. 이때 사람들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언젠가는 자신이 될지 모를 상황이나 사람들은 희생자를 마녀 내지 악마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 어느 개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개인이었고, 그 개인을 만든 것은 사회적 구조다.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서 그 대체적 희생물은 언제나 약자인 군중이었다. 군중은 거기에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본다. 사실 무관한 것은 바르나 그것부터 틀린 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비단 정치적 자유주의를 원했던 사람이었나? 그냥 아무 것도 아닌데도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삼청교육대에는 평소 원한이 있던 자를 무고하여 보냈으니 교수대위의 까치는 여전히 날라 다니고 있다.

 

그런 교수대위나 혹은 장작더미 위나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끔 어느 사형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하는 사람이 대중들이다.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에서 대중들은 잊고 있다. 자신이 던지는 돌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부조리하게 살아가는 대중들, 그리고 그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권력과 그 권력에 입맛을 다시는 지식인들, 이 모두가 부조리였다. 피터르 브뤼힐의 그림에서는 이런 부조리를 비웃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까치가 당시 세상을 보는 시점이라니? 새가 판단할 수 없는데, 새가 판단하라는 것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문구가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사형은 최고의 구경거리고, 한편으로 사형은 군중의 알 수 없는 심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놀이였다. 책에서도 교수대 아래에서 춤을 추거나 혹은 똥을 누는 모습은 사형이란 하나의 제의적 성격이 다르게 보인다.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 루이를 살해하려한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죽음은 앙시앵레짐의 폭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다미엥의 죽음처럼 특정 인물을 살해한 인물은 모르나, 강도나 범죄자의 죽음은 특이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나, 그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도둑질하지 않으면 죽을 운명, 거기에 군중들은 감화되어 교수대 위의 죄수를 풀어주고, 심지어 사형집행인을 살해한다. 부조리한 것에 대해 부조리로 응하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헤겔의 미학처럼 찬, 반, 합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차라리 아도르노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다.

 

인간의 부조리에서 진중권 교수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미학이 반드시 아름다운 서양미술사 위주로 가는 것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다소 더럽고 광기에 빠지며, 불완전한 것을 다루기도 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Non-Finito이란 미완성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한다. 때로는 미완성이기에 더욱 완성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완벽한 대상을 창조하면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에서 예술적 영역인 산업디자인의 발달로 인해 조금 의미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산업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일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빨간 자동차에서 호스를 들고 있는 소방관이 있고, 그 주변에 119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면 분명 화재신고는 119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가 <미학 오디세이>에서 자주 사용하는 그림인 르네 마그리트나 에셔의 작품을 보자?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두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물론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일치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철학보다 취미판단이 더 보편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알아보기가 힘든 것에 대한 의미, 낯설기 만들기에 대한 의미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는 매우 재미있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다소 서양예술사-고전예술편을 보고 난 뒤에 봐도 이해력을 올리기는 좋을지 몰라도 전혀 무관하게 책 내용이 진행된다.

 

아름다움을 논하기보단 차라리 진중권 교수가 살아오면서 조금 특이한 감상력인 지적 호기심을 전달해 준 점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호한 것들을 다룬다. 모호함에서 아이와 어른의 이야기다. 지금의 사회에서 어른과 아이는 전혀 다른 신분으로 다룬다. 아이라는 대상은 곧 학생이다. 학생은 어른이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가 전혀 없다. 학교라는 제도가 결국 아이라는 사람을 구분 짓게 하는 하나의 제재가 되었다. 옛날에 학교라는 제도가 없고, 설사 있더라도 일부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열려 있는 특수적 조건이라면 말이 다르다.

 

태어난 아이들은 치아가 조금씩 나기 시작할 때부터 집안일을 돕는다. 사소한 가사부터 시작하여 농장일과 목동일도 한다. 우리는 천사적인 인간을 묘사할 때 주로 양을 치는 목동을 사용하고, 그 목동은 어린 소년이다. 아주 어린 소년이 가장 아름다운 천사와 부합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러면 그 목동은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노동이란 마르크스의 말처럼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이 아니라 작은 어른이란 의미가 새롭다.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다른 관념이 존재하기에 아이들의 모습은 어린 아이의 모습보단 어른의 축약판에 가까웠다. 보통 성인들의 신체등신이 7등신 내지 8등신이 기본이나 어린 아이들은 거기에 비해 5등신 내외이고 초등학교(요새는 성장발육이 빠르나)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6등신 체형이 많다. 그들에게 성인들의 등신을 부여한다는 점은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노동력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발휘하는 점이나, 군대 안에서도 10대 중반의 청소년이 근무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잔 다르크라는 소녀 역시 10대인데도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어른들의 축소판이란 점에서 조금 재미있던 내용이었다. 독창적인 그림읽기라고 하나, 그것은 독창적인 시각보단 당시 독창적 그림들을 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독창적인 것을 찾아내어 다시 꺼낼 수 있는 그 방법이다. 우리는 항상 상상력을 억압하고 독창성을 냉대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 결코 낯익은 요소가 아니라 한 번 우리가 생각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인간이 매일 밥만 먹고 살 수 없고,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무한 반복하여 보는 레디메이드 콘텐츠에 길들여져 가는 것도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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