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 - 늘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꿈꿨던 17년 파리지앵의 삶의 풍경
이화열 지음 / 에디터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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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보고 한국을 떠나면 어디에 살고 싶은가? 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프랑스!”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안에 있는 파리가 나의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겐 파리에 갈 불어실력도 비행기 표를 사서 당장 가서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왜 하필 나에게 프랑스 파리라고 묻는다면 나에겐 프랑스란 이미지는 게리 무어의 ‘Parisienne Walkways’이란 곡이다. 당시 나는 파리지앵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알고 보니 파리의 여자였다. 파리의 역자가 걷는 것이라?

 

당시 대학교 때 처음으로 들을 때 파리라는 곳은 매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곳이구나 하고 여겼다. 게다가 라이브 음악 중간을 넘어 가면 기타 현을 잡고 비브라토를 약 1분 이상 게리무어가 연주한다. 매우 강렬하고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운전하다 들으면 그대로 앞차를 들어 박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느낌이다. 잔잔한 블루스 음에 더해진 기타연주에 보컬링이란 파리의 느낌은 그렇게 잔잔한 호수위에 거친 폭풍인가 싶었다. 그런 다음에 rialto의 kieslowski란 곡을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한참 화제인 영화 ‘세 가지 색’의 감독이 키에로프스키였다.

 

약간 일렉트로니컬한 사운드에 목소리 대신 반주만이 흘러나온다. 파리의 영화, 그리고 감독, 파리라는 것은 이렇게 뭔가 몽환적인 부분과 무덤덤한 느낌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본 파리에선 세 명이 떠오른다. 장 자크 루소, 당통, 로베스피에르다. 다소 프랑스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이것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1968년 5월 혁명이다. 이른바 프랑스에서 아방가르드 문화가 대중들에게 불씨를 댕기게 된 그 열기를 말이다. 소르본노 대학에서 농성중인 대학생이 이렇게 벽에다 글을 적었다. “우리대학은 노동자를 24시간 환영한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란 자유가 넘치는 세상이다. 자유라는 영혼의 울림은 자신만의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과 같이 공유하고 느끼고 즐겨야 하는 것에서 비로소 자유가 성사된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이란 책을 만들었다. <사회계약론>은 1789년 7월 대혁명의 기반이 된 인류문명의 보배이며, <에밀>은 독일 관념철학과 형이상학에서 제일 중요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만들게 한 서적이다. 루소의 영향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유와 사상이 발전했는가! 그 루소가 파리에서 글을 적었으나 그에겐 오로지 파리의 시민들이 주는 야유만 있었다.

 

외롭고 비참하고 쓸쓸해도 자신 안의 정신에서는 영원한 자유인이었던 루소, 그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자유라는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도 곧 우리의 자유를 위해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개인적 성향이 롤즈의 만민법을 필두로 한 정치적 자유주의이기에 나에겐 자유란 원하기에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원한다. 만약 로베스피에르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는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기요틴과 뜨겁고도 차가운 키스를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만큼 프랑스의 자유란 그 자유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철학이 숨 쉬는 파리는 수많은 피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다고 아직까지 완성된 자유는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다보면 잔혹한 민주주의 의식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임산부가 통증으로 고생하는데, 비자가 없는 외국인이란 이유로 비행기로 강제 퇴출하는 글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파리에는 그런 자유가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제대로 문제의식을 펼칠 자유가 있었다. 인간에게 자유란 표현의 권리라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프랑스라는 곳이 늘 새로운 자아에 형성되었다. 아니면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일까?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책들을 힘들게 읽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결과적 현상보단 그 결과에 대한 원인,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프랑스에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 있다. 말 이상하게 한다고 회사에서 다른 부서 상사와 말다툼을 해야 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늘 같은 것을 하기를 강조하고, 늘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며, 늘 같은 것만 지나가는 듯한 이 익숙하고도 낯설 경치 속에 프랑스는 나에게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100% 만족할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현실의 장벽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작가의 세상여행기를 읽었는데, 너무 위대한 것과 너무 이상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점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주변에서 소소한 것들을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그런 환경이 되려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다소 되지 않은 흐름이라 아쉬울 뿐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파리>에서 저자인 이화열은 그런 한국에서 새로운 자유를 찾아 파리로 갔는가?

 

그녀의 눈에 보인 파리, 리옹, 그 밖의 많은 프랑스 크고 작은 도시, 내가 바라는 세상에 가까워 보인다. 열정만으로 충분히 일을 하고, 서로 격이 다르고 사는 세상이 달라도 사랑할 수 있고, 주변 가족들의 축복까지 받는 모습에서 우리와 너무 다름을 느낀다. 문화적 쇼크라고 할까나? 그 문화가 매력적인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다고 거기의 문화 100%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다양한 삶의 요소가 좋다. 인생의 가치에서 무엇이 되는가에서 우리는 부자라고 한다.

 

그러면 부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에선 좋은 집과 차 넓은 땅과 주식으로 볼 것이다. 높은 의자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내려 깔며 주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한국의 신화적 요소는 바로 그런 특권적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이다. 끝도 없는 탐욕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망가뜨린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고 감정을 숨기야 하는 그런 숨 막히는 세상, 프랑스의 부자는 자신의 달력에 얼마나 휴가가 존재하여 바캉스를 어디에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과 자신만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나 자신조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고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을 하는가? 일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다소 나도 1968년 5월 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기에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 후반에 나온다. 예전에 조지 카피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에서 프랑스 5월 혁명과 미국의 1960년 말부터 1970년 초반의 반전운동에 대해 보았다. 그 책에 나온 것처럼 브라화형이 여전히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점에서 신기했다. 그만큼 파리의 자유란 오랜 기간을 숙성한 자유다.

 

미혼모가 아이 혼자 키울 수 있는 나라,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돈을 털릴 일이 없는 나라, 남자 중에서 마초가 드문 나라, 그만큼 상대방의 감정에 충실한 나라, 그게 프랑스 파리다. 도둑도 멍청해서 자동차 유리를 깨서 가져가고, 심지어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다. 예전에 알랑 가그놀, 장 루프 펠리시올리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파리의 고양이>를 보면서 다소 파리라는 곳은 저런 것인가? 싶었다. 도둑이 들어도 뭔가 모르게 금방 털리고, 도둑 잡기보단 오히려 연쇄살인범을 잡는 게 급한 파리의 경찰, 경찰보단 세금징수원이 무서운 프랑스를 보면 이런 것들이 제일 부러웠다.

 

책을 들어다보면 아무래도 작가 자체가 여성이라 그런지 상당히 감수성이 뛰어나나, 나는 그 감수성을 따라가기보단 왜 그런 감수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생각한다. 자유로운 파리, 예술과 철학의 도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만큼의 희생이 뒷받침 한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이다. 기요틴이 18세 후반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목을 베어버린 파리의 광기에서 이제는 모두의 아름다운 욕망이 나오는 도시가 되었다. 언제 나도 그런 세상에 살 수 있을까? 왠지 꿈처럼 보이는 이 절망에서 파리와 같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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